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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4:12-17(p.4) 갈릴리에서 부터 빛이 비치었도다
1972년 1월 17일 에 출생하여, 33세 되던 2006년 1월 7일에 세상을 떠난 젊은 의사가 있습니다. 그의 닉네임은 ‘스티그마’..., 즉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닉네임이 말해주듯, 그는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예수님만 위해 살다가 갔습니다.
그는 고려대 의과대학에서 의사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내과전문의였습니다. 그는 수필가요 칼럼니스트였습니다. 고려대학교 의료원 내과 전문의로 있었습니다.
그가 유행성출혈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국민일보에서는 ‘예수 닮은 33년 아름다운 인술(仁術)을 남기고 떠난, 군의관 안수현 대위 소천’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죽음의 소식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가 바로 바보의사 안수현입니다.
그는 33년을 살다가 갔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안수현이라는 의사는 그냥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몸도 고쳤지만 사람의 마음을 고칠 수 있는 의사였습니다.
그는 작고 보잘것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절대 업신여기지 않고 늘 예의를 지켰습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을 향한 일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환자들과 동료들은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33살의 청년을 존경한다는 말이 이상스럽지만 정말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존경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도 먹고살기 바빠서, 공부하기에 바빠서와 같은 많은 이유와 핑계를 가지고 자신의 이웃, 약한 자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를 위해 살아가기 바쁨니다. 그러나 바보 의사 안수현은 소외된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항상 다가갔습니다. 바보 의사 안수현은 일과가 끝나고도 병실을 찾아 환자들을 위로해 주며 용기를 주며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의사였습니다.
청년의사 안수현은 내과 전문의로 군의관 복무하면서 국방부 장관 주치의를 맡았습니다. 그는 단정하게 깍은 짧은 머리에 흰색 폴로셔츠, 푸른색 바지를 즐겨입던 173cm 키의 듬직했던 그는 환자들에게는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으며, 자신에게는 의사로서 엄격했습니다. 그는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의사였고 의사의 경력은 짧았지만, 그의 정성이 환자들의 병든 몸과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여 예수님 앞으로 인도 해냈습니다.
의약 분업사태로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을 할때, 그는 병원에 남아 환자 곁 을 지키고 하루 한 두 시간 겨우 눈을 붙이고, 한끼를 먹어가면서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바보 의사 안수현은 자신이 서른세살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가 갈것으로 알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삼십삼년을 너무나 아름답게 너무나 알차게 살다가 갔습니다. 바보 의사 안수현은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은 그대로 짧지만 아름답게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삶은 33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는 단 3년이었습니다. 그 3년의 공생애를 본문에서는 시작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상에서의 시간이 별로 없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이루시고 가셔야 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이루시기 위해 한결 같이 열정적으로 행하셨습니다.
▣ 12절 말씀을 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으시다가 요한이 옥에 갇히는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에 한 분기점을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입니다. 인류 역사는 죄 문제의 해결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큰 분수령(分水嶺:어떤 일이 결정되는 중요한 고비나 발전의 전환점)이 되셨습니다.
구약은 앞으로 누군가가 와서 인류의 죄를 해결할 것이라는 예고(豫告)의 시대요, 기다림의 시대였습니다. 장차 죄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예표로 구약에서는 성전이 있고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제사 제도는 임시적이며 응급조치에 불과했습니다. 근본적인 치료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루실 것을 구약에서는 여러방면으로 예고되어 왔습니다.
아무튼 구약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기다림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분수령의 중요한 인물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있던 시대는 구약과 신약이 함께 공존하던 시대였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옥에 갇히는 시점을 구약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는 종료시점으로 보신 것으로 봅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은 하였으나, 그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선지자로서 예수님의 첩경을 예비하고 예수의 등장을 외친자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고 짧지만 함께 공존할 수 있었으므로 구약의 그 어떤 선지자보다 큰 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예수님의 완성된 구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기에 천국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이럴 정도로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세례 요한 이전과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시대는 분명하게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활동이 완전히 종료될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예수님 이전과 예수님 이후를 나누고 있음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인줄 믿습니다.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로서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AD’는 ‘Anno Domini’의 약자로서 '주님의 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아시고 계시지요? 기원(起元)이란 햇수를 세는 기준이 되는 해를 뜻하며 기원전(起元前)이란햇수를 세는 기준이 되는 이전을 뜻합니다.
결국 기원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뜻하며 기원전은 그 이전을 기원후 또는 서기는 그 이후를 뜻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인류역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싫든 좋든 역사를 이야기 하려면 어쩔수 없이 주전(主前)과 주후(主後)를 나누어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시대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바로 이 나라를 소유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바로 이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완전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은 좀 더 기다리셨습니다.
▣ 13절 말씀을 봅니다.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세례 요한이 옥에 갇치시고 그 즉시 예수님이 세상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은 아니시고 갈릴리로 가시어 거기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릴리라는 이곳은 흑암(黑暗)중에 사는 것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아주 가난한 난민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단 하루도 싸움이나 도둑질 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는 형편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은 이곳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유대나라의 지도를 놓고 보면 유대나라를 세 지역으로 구분이 됩니다. 맨 아래 지방이 유다 지방입니다. 이 유다 지방은 돈도 있고 교육도 받은 정통 유대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리고 유다 지방과 갈릴리 지방의 중간 지역에는 사마리아 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스라엘 후손과 이방인의 혼혈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할 때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의 다 잡아가고 아주 가난한 사람 얼마를 남겨놓았는데, 그들과 강제로 이주된 이방인 간의 혼혈족 후손이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피가 조금 섞여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미움과 증오의 대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하나님께 대하여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곳 사마리아에서 북쪽 지역이 갈릴리 지방인데 이들은 이주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유대인인데도 너무 가난해서 도저히 유대에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북쪽으로 이주된 자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따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지방의 유대인들을 절대로 유대인이라 부르지 않고 ‘갈릴리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가난했으며 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질이 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전파를 시작하신 것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가장 잘 받아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자존심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인 유대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유대주의를 깨뜨려야 했습니다. 이런 유대주의 사상을 깨뜨리기가 얼마나 여러운지 모릅니다.
집을 건축할 때 빈 터에 집을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기존의 건물을 허물어내고 빈터로 만들어 그 터에 집을 건축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헌 건물을 뜯어내는 비용이 새 건물을 짓는 것 보다 더들수도 있습니다. 유대주의 라는 이 사상을 허물고 거기에 복음의 집을 짓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복음전파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부터 복음 전파를 시작하지 않으신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나 많고 하나님께도 상처가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가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므로 유대인들 만큼이나 복음전파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이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 마음 문을 절대로 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야 말로 의롭고 나름대로 인생을 잘 살아 왔으며 지금도 건강한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처가 많은 사람들도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또 다른 이것을 통해서 상처를 받을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 교인들에게서 또는 교회를 통해 무시를 당했거나 싸움을 했거나 속은 적이 있거나 할 때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이 아주 강합니다.
또는 우울증이이나 열등감이 심할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가난하고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이었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실패로 인하여 또는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자신들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고 또한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려고 예수님은 갈릴리로부터 복음전파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 14절 말씀에서 16절 말씀까지를 봅니다.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갈릴리 지방은 가난한 곳이었으며 문명의 혜택도 별로 받지 못한 가장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소외되고 어두운 땅, 사망의 땅에 가장 귀한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로 하여금 전 세계를 변화시키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았어서 가장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난하고 이 세상에서 무식하다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도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얼울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에 얼마든지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버리고 변활 수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은 그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게 될 자는 변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늘 부족한 줄 알고 늘 변하려고 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시편1편 1절과 2절 말씀을 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은 자기 꾀를 촤고로 알고 살아갑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이 걷는 길만이 넓어서 복된 길인줄 알고 그 갈만을 고집합니다. 오만한 자는 자기 자리에서 내려 앉을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복있는 자는 낮과밤 가릴 것 없이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합니다. 이런 심령에 생명의 빛은 항상 비추게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로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하시면서 갈릴리 같은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