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든 걸어서든 길을 가다보면 산수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들이 있다. 통영 산양 해안일주도로에서 보는 쪽빛 바다와 점점으로 떠 있는 섬들은 참 아름답다. 남해 상주에서 창선을 돌아 삼천포로 나오는 길도 절경이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북쪽으로 올라가는 7번국도 넘실거리는 바닷가도 이방인들에겐 눈길을 뗄 수 없다. 이처럼 바다와 접한 길은 우리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 정화시켜준다.
강변도 마찬가지다. 자주 가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만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아파트는 부촌 명당이라 들었다. 호반도시 춘천이나 충주 댐 주변도 풍광 좋은 곳 별장이 들어서고 모텔이나 음식점을 지어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낙동강도 화명에서 구포 지나 다대포까지 강변에 서걱거리는 갈대와 물새를 보면 여유가 생긴다. 하동 송림에서 화개장터에 이르는 섬진강의 빼어난 강변길도 빠지지 않는다.
내 고향 의령에는 남강이 흐른다. 남해고속도로 남강휴게소 건너편 장박부터 화정까지 이어진 십 리 넘는 강변길도 참 아름답다. 바위 절벽 돌고 나면 그림 같은 대숲마을이 나온다. 들판 비닐하우스 안은 겨울에도 호박이나 오이를 따 내고 있다. 이런 강변길을 걷고 싶어 무자년 마지막 날 녹색 마을버스 타고 창원 본포로 나갔다. 주남저수지 지날 무렵 청둥오리 떼는 하늘에서 빙글 군무를 추었다.
아침햇살을 받고 있던 본포나루 찻집 ‘알 수 없는 세상’은 고요 속에 괴기스러웠다. 나는 본포에서 낙동강 다리를 건너 학포로 갔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목도리를 둘러도 찬바람에 귀가 시려왔다. 낙동강엔 구포, 호포, 본포, 학포, 개포 등 여러 물가 마을이 있다. 삼랑진, 임해진, 송진 박진, 정암진 등 여러 나루도 있다. 땅이름으로 포(浦)나 진(津)이 붙은 마을은 모두 나루터가 있던 내륙수운의 요지였다.
나는 학포에서 낙동강 강변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건너편 마금산 온천이 바라보이는 곳 강 한복판에 모래섬이 생겨 있었다. 학포 노리에서 청암 임해진까지 오 리 길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근년에 향토사단 야전공병대의 지원과 새마을사업으로 두 마을을 연결한 도로가 개설되었다. 벼랑 끝에 세워둔 ‘청학로 개설 기념비’에 보니 오래 전 짝을 찾아 벼랑타고 다니던 견공들이 오솔길을 먼저 냈다고 했다.
강가로 내려가니 갯버들이 숲을 이룬 사이에 야생으로 자라는 청청한 갓이 수북했다. 임해진 지나 길곡 앞에서 다시 강가로 내려섰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살은 햇빛에 반사되어 은물결을 이루었다. 드넓은 모래밭엔 아무도 지난 흔적이 없었다. 나는 숫눈을 밟는 기분으로 사뿐사뿐 걸었다. 지나온 발걸음이나 나아갈 발검음도 그림 같은 강변이었다. 대운하를 파든지 물길을 손질하든지는 다음 문제였다.
아침나절부터 강변 따라 걸어 올랐다. 창원 북단 강마을이 건너다보이는 양수장 곁 볕바른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1022번 지방도와 만나니 대곡지구 수해방지 제방 보강공사를 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으면서 초점을 가까이도 두고 멀리도 두면서 강물과 모래밭을 바라보았다. 발품 팔아 나서면 보게 되는 아름다운 강산임을 실감했다. 내가 이 길을 마음 놓고 걷기엔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서다.
강을 거슬러 계속 북상하여 부곡면에서 길곡면을 지나 도천면에 닿았다. 멀지 않은 곳에 남지읍 아파트가 보였다. 강 건너 함안 칠원 언덕엔 감나무와 포도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강리 배수장 근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선 둔덕에 올라가 보았다.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친 홍의장군을 기린 망우정이었다. 조선 영조 때 창녕지역 유림들이 세운 ‘충익공망우당곽재우유허비’였다.
무자년 마지막 해는 대산 들녘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낮 신발에 바짝 붙어 짧게 따라오던 내 그림자는 해질녘이 되자 전봇대 길이만큼 길쭉하게 늘어졌다. 하루 동안 걷기엔 너무 먼 길을 걸었는지 무릎 관절이 시려왔다. 올라왔던 강줄기를 되돌아보았다. 산모롱이 돌고 돌아 물길은 휘감아 흘렀다. 아직 발길 닿지 않은 상류도 마찬가지였다. 한 해 동안 그림자가 주인 따라다닌다고 고생 많았네 그려. 08.12.31
첫댓글 제 집 신발장에서 오래 꿈쩍 못하는 신발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누비며 신발의 의무를 다 하는 선생님의 신발이야말로 제일 주인을 잘 만난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걸음 하셨습니다. 겨울, 강가, 혼자만의 자유, 30리는 좋이 될 그 길을 종일 걸으셨다니. 여정의 말마따나 신발이 정말정말 주인 잘 만났습니다. 아무 신이 갈 수 없는 데를 주인이 구경시켜 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