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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홍의 자사차호 개관
1. 의흥(宜興)의 지명 유래
중국의 차호 밑바닥에 대부분 제작회사나 제작자의 인장(印章)이 각인(刻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인관(印款)”이라고 하며, 인관을 찍어놓은 것을 “낙관”이라고 한다. 의흥에서 생산된 차호(茶壺) 밑바닥에는 어김없이 “의흥(宜興)”이라고 각인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간혹 “의흥(義興)”이라고 각인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전에 필자는 ‘옳을 “의(義)”자가 새겨진 것은 분명히 가짜다.’라고 확고히 단정을 지어버렸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필자의 이러한 경솔한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여러 서점들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의흥(宜興)의 지명 유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책을 한 권 접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필자는 비로소 “의흥(宜興)”이란 지명의 유래를 바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사호 밑바닥에 “의흥(宜興)”이나 “의흥(義興)” 등의 낙관이 찍힌 것이 모두 진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수중에 쉽사리 들어오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이 모조품일 것이다. 물론 게중에는 진품(眞品)도 있겠지만, 필자가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의흥에서 생산된 다기(茶器)의 진위를 가리기 보다는 “의흥(義興)”이란 글자의 진위(眞僞)를 제대로 밝히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더 정확한 많은 자료를 찾아 보고 확인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사호(紫砂壺)의 생산지로 유명하여 “도도(陶都)”라고까지 불리우는 “의흥(宜興)”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무석시(無錫市) 서남부에 위치하며, 태호(太湖)를 사이에 두고 소주(蘇州)는 태호의 동쪽에, 의흥(宜興)은 태호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듯하다.
의흥은 무려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진(秦) 이전에는 형계(荊溪), 진(秦)나라 통일 이후에는 양이(陽羡)현으로 개칭되었다가,삼국시대에 오(吳)나라에 속하여 오흥군(吳興郡)에 속했었다. 진(晋)나라 초기에는 오(吳)나라의 구제(舊制)를 그대로 따르다가 영가(永嘉:307년-312년) 년간에 잠시 군(郡)으로 승격하여 의흥군(義興郡)이 되었다.
수(隋)나라 때, 다시 군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어 의흥현(義興縣)이 되었다. 당(唐)나라 초에는 아주(鵝州)·남흥주(南興州)로 불리다가 6년 후에 다시 구명칭(舊名稱)인 의흥(義興)으로 환원되었고,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원년때 태종 조광의(趙光義)의 휘(諱:황제의 이름)를 피하여 “옳을 의(義)”를 “마땅할 의(宜)”로 고치어 “의흥(宜興)”이라고 불렀던 것이 줄곧 지금까지 의흥(宜興)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2. 자사호(紫砂壺)와 창시자(創始者)
자사호(紫砂壺)란 자사(紫砂)로 만든 차호(茶壺)―우리나라에서는 다관(茶罐)이라고 칭한다.―를 가리키는 말이며, “자사(紫砂)”란 이름에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자주색 모래흙”이라는 뜻이다. 차호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자사(紫砂)는 대체로 진흙처럼 찰기가 있고, 모래의 입자는 윤택이 있으며 소조(塑造)에 용이하여야 한다.
자사호(紫砂壺)의 창제(創製)는 중국 다기 발달의 과정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또한 중국 전체 도자기사(陶瓷器史)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의흥 자사호의 예술적 창조는 바로 중국 명나라 정덕(正德) 년간(年間:1505~1521년)에 비롯되었다. 강소성 의흥현 동남쪽 40리 밖에 위치한 금사사(金沙寺)란 절에 어느 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자사(紫砂) 진흙을 이용하여 차호(茶壺)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는 차호(茶壺)를 완성 후 낙관(落款)이나 인장(印章)을 남기지 않았음은 물론 서명(署名)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안타깝게도 후인들은 그의 작품을 식별해낼 길이 없었다.
최초로 차호 밑바닥에 서명(署名)을 한 사람은 명나라 가정(嘉靖) 년간(年間:1521~1566년)에 살았던 의흥명호가(宜興名壺家) “공춘(供春 혹은 龔春)―또는 공공춘(龔供春)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래서 후인들은 그를 가리켜 의흥(宜興) 자사호(紫砂壺)의 창제자라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공춘(供春)이 금사사(金沙寺)의 노승(老僧)에게서 자사호를 만드는 기예를 익혔다고 전하고 있다. 공춘(供春)은 명대(明代) 사천성(四川省) 참정(參政)이었던 오이산(吳頤山)의 노비였다. 주인인 오이산이 금사사(金沙寺)에 공부하러 갈 때 몸종으로 따라갔던 것이다. 그는 본래 손재주가 비범하여 금사사의 노승(老僧)이 차호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금방 흉내내어 차호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노승에게 차호 만드는 법을 열심히 배웠고,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풍의 차호(茶壺)를 예술의 극치로까지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3.자사호(紫砂壺)의 명장(名匠) 계보
자사호(紫砂壺)의 발전시기는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시대적 구분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명·청(明淸)의 두 시대를 일단 함께 묶어서 자사호의 발전시기로 보는 데는 학자들 간에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 마다 자사(紫砂)의 발전시기를 세분화 하는 데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세 시기로 구분한다거나, 혹은 네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그러하다. 필자는 여기에서 초창기를 포함하여 총 다섯 시기로 구분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즉, 명나라를 초창기 및 제1기와 제2기로, 청나라를 제3기와 제4기로 구분하여 명인들의 계보와 그들의 자사호 제작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초창기(草創期)에서 제일 먼저 나열할 명장(名匠)은 역시 앞에서 거론한 바 있는 금사사(金沙寺)의 노승(이하 “金沙僧”으로 간칭)과 공춘(供春)이다. 그외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사가(四家)”를 꼽을 수 있다. 금사승(金沙僧)은 사람들을 위해 차호(茶壺) 만들기를 즐겨했는데, 그의 특징은 차호(茶壺) 표면에 많은 지문(指紋)을 남길 뿐, 낙관(落款)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문만이 금사승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공춘은 금사승의 기법 위에다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창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금사승의 “지문을 남기는 방법”을 취하였는데, 차호 표면에 지문이 안보일 듯 나타나는 것이 금사승의 그 것과는 사뭇 틀렸다. 색채는 짙은 밤색이라 마치 고철(古鐵)의 빛깔을 보는 듯 하다. 여기에 차를 우려 마시면 차(茶) 원래의 맛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은 물론 고사(高士)·묵객(墨客)들까지 모두 다투어 “공춘호(供春壺)”를 찾지 않는 이가 없었다.(참조:자료실의 공춘호 그림 ) 그의 작품은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워낙 극소수라 만금(萬金)을 주어도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공춘의 뒤를 이어서 역시 많은 명가들이 배출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한(董翰)·조량(趙梁)·원창(元暢)·시붕(時朋)”같은 이들은 후인들에 의해 “사대천왕(四大天王)” 혹은 “사가(四家)”로 존칭된다. 이 중에서 동한(董翰)의 작품이 비교적 공춘의 기법을 전승하여 중후하면서도 섬세하고 신기(新奇)하다. 그외 3가(家)는 대체로 고아(古雅)하며 졸박(拙撲)하다. 이외에도 “이무림(李茂林)” 같은 이도 있었는데, 그는 원형의 소형(小型) 차호를 잘 만들었다.
제1기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치는 의흥도기 발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시기이다. 개산종조(開山宗祖)격인 공춘(供春)의 의발(衣鉢)을 제대로 계승한 이가 있다면, 바로 시대빈(時大彬)을 꼽을 수가 있다. 시대빈은 이중방(李仲芳), 서우천(徐友泉)과 더불어 “3대국수(三大國手)” 혹은 3“대(三大)”로 병칭된다.
이들은 초창기의 “사가(四家)”를 이어서 나온 명장(名匠)들로 시대빈은 바로 시붕(時朋)의 아들이고, 이중방은 곧 이무림(李茂林)의 아들이다. 시대빈은 당시에 유행하던 대호(大壺:큰 찻 주전자)와 고신호(高身壺:키가 높은 길쭉한 차호)를 작은 차호(茶壺)로 개량하여 만드는데 일인자(一人者)였다. 이 시기의 차호의 특징은 '근문형(筋紋型)'이다. 이 때 제작된 대부분의 차호는 호박의 표면처럼 근육이 불룩불룩 나온 형태로 만들어 진 것이다.
이들 “3대명장(三大名匠)”들 외에도 매우 많은 명장(名匠)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이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혜맹신(惠孟臣)이다. 그가 바로 중국 “4대 명호(名壺)”의 반열에 들어있는 그 유명한 “맹신호(孟臣壺)”의 제작자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대체로 대호(大壺)는 소박하고, 소호(小壺)는 아주 정교하여 “시대빈” 이후로는 단연히 으뜸으로 꼽힌다. 후세에 전해지는 혜맹신의 작품 중에는 소호(小壺)가 비교적 많다. 고로 그는 소호(小壺)의 대가로 유명하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의 작품 중에는 이 시대의 특징인 근문형(筋紋型)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소호(小壺)의 종류는 둥근 것·길쭉한 것·납작한 것 또는 밑이 평평한 것 등 아주 다양하다. 이 것은 훗날 후세의 도공들의 소호제작의 표준이 됨은 물론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제2기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에 걸치는 시기로 대략 청나라 강희(康熙) 년간에서부터 가경(嘉慶) 년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도예가는 “진명원(陳鳴遠)”으로써 그는 제1기의 명장(名匠)인 진자휴(陳子畦)의 아들이기도 하다. 진자휴(陳子畦)가 만든 남과호(南瓜壺:호박형의 차호)는 근문(筋紋)과 자연(自然)의 멋을 겸비한 것이 특색이다.
대략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진명원(陳鳴遠)은 시대빈(時大彬)의 뒤를 계승한 “최고 위대한 의흥도인(宜興陶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자연형 차호는 그야말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을 정도이다. 고로, 제2기의 주류(主流)는 대체로 자연형(自然型)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된다.
제2기 시대는 진명원의 자연형 차호가 유행의 최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특색 외에도,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차호(특히 幾何型)도 함께 유행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다인(茶人)들의 차호에 대한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겠다. 즉, 그들은 차호의 표면의 문식(紋飾)에 대해 대단히 주중(注重)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시기에서 또 한명의 주목할 만한 인물은 제2기 말기에 나타나 제1기 때와 같이 “사대명호(四大名壺)” 중의 하나인 “일공호(逸公壺)”를 제작한 혜일공(惠逸公)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8세기에 주로 활약한 명장(名匠)으로 차호제작의 기법 면에 있어 혜맹신(惠孟臣)과 거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들 두 사람을 가리켜 “이혜(二惠)”라 칭송하고 있다.
제3기는 19세기 초에서 19세기 중엽 혹은 말엽에까지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두 가지 특점이 있는데, 하나는 문인과 도공들의 결합이고, 또 하나는 기하형(幾何型)의 차호가 유행의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문인들과 결합한 도공들은 차호의 표면에 시화(詩畵)를 새기고, 갖가지 형태의 장식을 위한 차호의 몸체를 특별히 설계하기도 하였다.
비록 근문형이나 자연형의 제작이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의 유행의 주류를 이룬 것은 역시 기하형의 차호였다. 기하형(幾何型)의 유행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간 대표적 명장(名匠)은 “진만생(陳曼生)”이다. 그의 본명은 진홍수(陳鴻壽)이고 “만생(曼生)”은 그의 호이다.
그는 일찍이 의흥(宜興)에서 관리로 있은 적이 있었다. 그는 어느 한가로운 때 양팽년(楊彭年)과 소이천(邵二泉)을 위해 18개의 호식(壺式)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양팽년과 소이천은 당시 가장 유명한 도공(陶工)들이었다. 문인과 도공의 합작 결정체로써는 “만생호(曼生壺)”가 탄생하다. 만생호는 양팽년이 제작하고 진홍수가 제자(題字)를 낙관(落款)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가르켜 “만생호(曼生壺)”라고 한다.
제3기의 시기 중에서 진만생 이후 또하나의 중요한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자는 바로 “구응소(瞿應紹)”이다. 도광(道光) 년간의 인물로 자(字)를 “자치(子治)”라고 하며 호(號)를 “월호(月壺)”라고 한다. 그의 작품엔 매죽(梅竹)이 차호 표면에 새겨진 것이 자주 보인다. 제호(題壺)로는 행서(行書)가 주로 많이 보이고, 간혹 해서(楷書)도 보인다. 낙관으로는 “자치(子治)”와 전장(篆章)으로는 “월호(月壺)”와 “길안(吉安)”을 함께 사용한다.
이 시기에도 기하형(幾何型)의 차호 외, 소호(小壺)계통의 차호도 끊임없이 여전히 만들어졌다. 더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소호(小壺)계통의 걸작품이 하나 출현하였다. 그것은 바로 “4대명호(四大名壺)” 중의 하나로 육사정(陸思亭)이 제작한 “사정호(思亭壺)”이다.
제4기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까지 걸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의흥차호(宜興茶壺)의 생산이 점점 상업화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대량생산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인해 예전과 같이 전심전력으로 만들어 내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차호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의흥의 자사호가 세계 여러 국가에서 개최한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여 입상을 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도공들은 자연형·근문형·기하형 등의 문식(紋飾)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서로 앞을 다퉈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도공들 사이에는 다시 복고풍(復古風)이 일기 시작한다. 즉, 그들은 지극히 중국적인 것만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명장(名匠)으로는 왕인춘(王寅春)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가 있고, 그 외의 명장(名匠)들로는 범장농(范莊農)·정수진(程壽珍)·기도(跂陶) 등이 있다.
4. 자사호(紫砂壺)의 흥성원인과 그 시대적 배경
어쨌든 자사호(紫砂壺)는 명대(明代)에 이르러 흥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원인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다법(茶法)을 개혁하면서 비롯되었다. 주원장은 당(唐)·송(宋)·원(元)을 거쳐 당시 전해져 내려오던 차제조법(용단봉병:긴압차의 일종)이 서민생계에 유해할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사치를 조장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태조는 즉시 칙명(勅命)을 내려 다법(茶法)을 제정하고 상인들의 밀거래와 밀수출을 금지하는 한편 긴압차(緊壓茶) 및 말차(抹茶)의 제조를 금지하고, 산차(散茶:엽차) 제다법으로 개혁하였다. 이러한 다법(茶法)의 개혁은 다기(茶器)의 운명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말차나 병차(餠茶)에 주로 사용되던 차완(茶碗)의 사용은 점차 적어지고, 엽차(葉茶)를 마시는데 용이(容易)한 소호(小壺)의 사용이 점차 흥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의흥의 자사호는 명대에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그 재질은 주로 의흥 특산의 “자니(紫泥)”·“홍니(紅泥)”·“단산니(團山泥)”를 사용하여 구워 내는데 이들 삼자(三者)를 합칭하여 통상 “자사(紫砂)”라고 한다.
청대에 이르자 자사호(紫砂壺)의 화려한 문양(紋樣)과 문식(紋飾)은 더욱 더 극(極)에 달한다. 이미 단순한 다기(茶器)의 실용적인 범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도 다채(多彩)로운 형태의 고급 예술품으로까지 승화되어 간다. 평생 차를 즐겨 마셨다던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도 의흥(宜興) 자사(紫砂)로 만든 차호(茶壺)를 가리켜 “세상 다기(茶器) 중에서 최고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불암산 자락에서 촌안(村顔) 합장
<위 논고는 『다담(茶談)』2001년 가을호에 게재 됐음.>
출처 : 茶守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