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李麟榮)
▲의병장 이인영 초상화
▲이인영 의병장 생가 모습
[생년] 1868년 9월 23일, 경기 여주(驪州)
[졸년] 1909년 9월 20일
[생가]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여주시 향토유적 제17호]
[활동] 정미의병 / 1896년 원주. 제천 의병활동. 1907년 관동창의장 활동.
1907~1908년 13도 창의대장 활동
[본관] 경주(慶州)
[훈격]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면(北面) 교항동(橋項洞, 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서 이현상(李顯商)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 이명은 인영(寅榮), 시영(時榮)이다. 집안은 대대로 여주군 북면에 거주하며 관직과 문필을 계승한 양반가문이다.
어려서 서울 선비 정동현(鄭東鉉)에게 유학을 배워 어릴 적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부친상 중에 국내의 시사문제를 다룬 『도기기언(道基記言)』이란 책을 집필하는가 하면 무신이었던 고조부. 증조부의 영향을 받아 군사분야에도 지식이 있었다. 한편 관상. 천문. 방위(方位)와 같은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고 성품은 호탕하면서도 엄격하고 효성이 깊었다. 직책으로는 무임직인 대성전(大成殿) 재임(齋任)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2월 초에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영월에서 의병장에 오른 제천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각지에 보낸 창의격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주에는 심상희(沈相禧)가 창의하여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주를 떠나 원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전신선을 절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했으나, 때마침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를 계기로 의병 활동을 재기, 일부 해산당한 군인과 손을 잡았다. 뒤이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 본명은 求采)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00명의 의병을 모집한 뒤 이인영을 찾아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망설였으나, 사사로써 공사를 미룰 수 있겠느냐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원주로 출진,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 수가 수천 명에 이르자 식량과 자금을 조달하는 게 큰 문제였는데, 반역배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9월에는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해 적극 도와줄 것을 바란다는 관동창의대장 이름의 격문을 전달하였다. 원주는 교통이 불편해 큰일을 도모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판단, 횡성·지평·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으는 데 노력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에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로 모일 것을 촉구했는데, 11월에 격문에 호응한 각 도의 의병장들이 속속 양주로 모여들었다.
경기도의 허위(許蔿), 황해도의 권중희(權重熙, 일명 義熙), 충청도의 이강년, 강원도의 민긍호(閔肯鎬),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 전라도의 문태수(文泰洙, 일명 泰鉉), 평안도의 방인관(方仁寬), 함경도의 정봉준(鄭鳳俊) 등이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격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방인관이 평안도에서 80여 명, 정봉준이 함경도에서 70여 명을 거느리고 자진하여 참여하였다.
이 때 양주에 모인 의병 수는 약 1만여 명(또는 8,000명)으로, 그 중에 근대식 무기를 가진 진위대 출신 병사와 기타 훈련받은 군인이 약 3,000명이었다. 13도 의병장들의 연합전략회의 결과 원수부13도총대장에 추대되어, 전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의병부대는 서로 기일을 정하고 서울 동대문 밖에 모여서 대오를 정비한 뒤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문경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쳤다. 그 뒤 여러 차례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의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본인을 소탕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숨어 살다가 다시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으로 옮겼는데,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의병과 독립군』(윤병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한국독립운동사』1(국사편찬위원회, 1965)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 유신사, 1920)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의격문( 倡義檄文)
이인영 어록 _ 독립기념관
[비문내용]
군사행동을 하는 요결은 뿔뿔이 흩어짐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다.
전국 각도의 군사를 통일하여 홍수가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서울지역에 박혀있는 왜적을 쓸어버린다면 전세계를 차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얽혀있는 문제는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용병지요(用兵之要) 피기고독(避基孤獨) 이재어일치단결(而在於一致團結) 즉통일각도지병(則統一各道之兵) 승궤제지세(乘潰堤之勢) 범입근기(犯入近畿) 거천하불능위아가물(擧天下不能爲我家物) 가견유리어한국지해결의(可見有利於韓國之解決矣)
1907년(一九0七年) 7월(七月) 격문(檄文)에서
전국13도창의대진소(全國十三道倡義大陳所)
총대장(緫大將) 중남(中南) 이인영(李麟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