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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해서 전사한 외국인들!
2020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박형준 도쿄 특파원은 “ 日 민간인 60명 6.25 때 미군과
함께 싸웠다” 라는 기사를 올렸는데.... ‘2020년 6월 22일 마이니치신문, 美 문서입수 ’,
‘ 민간인 전투참여 최초로 확인돼’, ‘ 미군이 사적 대동, 상당수 통역’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일본의 민간인 남성 최소 60명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왔고, 이 중에 18명
은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마이니치 신문은 22일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NARA) 에
소장된 ‘한국에서 일본인 무허가 수송과 사용’ 이라는 제목의 미군 극비 문서를 입수해 이같이 보도했다.”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일본 민간인 60명은 1950년 7월께 한반도로 건너왔고 1951년 1, 2월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60명 중에서 27명이 무기를 지급 받았고 18명은 전투에서 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전선에서 사망한 일본인은 최소 2명으로 히라쓰카 시게지는 전사가 확인
됐고 미네후미 요시와라는 행방불명됐으며 상당수는 한반도에서 ‘통역’ 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843쪽에 달하는 보고서에 따르면 10대가 18명에 20대가 28명이고, 48명은 주일미군기지 직원
이었으며 신상, 지문, 사진 등이 첨부됐으니 최연장자는 51세이고 9세 아이도 있었다는데....
부모가 없는 소년은 “시마네현에서 미군 부대에 의해 끌려갔다” 고 말한 것으로 문서에 기록
돼 있는데... 도항 이유에 대해 “미군기지 상관이 권유했다” 는 답변이 많았으니 마이니치는
“미군이 개인적 관계를 이용해 허가를 받지 않고 대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 전했습니다.
18명이 전투에 참가했는데 12세 소년을 포함한 최소 4명이 북한 인민군을 사살했다고 증언
했다고 하며 4~5명을 죽인 것으로 당시를 회상하는 도쿄도 출신의 한 12세 소년도 있었고
오사카 출신 한 남성은 ‘7개월 간 전선에 있으면서 15~20명을 사살했다’ 고 증언했는데,
우에노 다모쓰는 대전전투 때 미 24사단의 지휘관인 윌리엄 딘 소장이 북한군에 포위
돼 논에 몸을 숨겼다면서 자신이 "몇명의 북한 병사를 죽였는지 모른다" 고 진술했습니다.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이들은 현지에서 통역을 하거나 취사를 담당했는데 미군은 필리핀
이나 인도에서 통용된 영어 처럼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일본어가 많이 쓰일 것이라
착각해 다수가 통역 업무에 배정된 것이며.... 또 연합국 최고사령부(GHQ) 의 지시로
"일본 정부의 공무원" 들은 한반도에서 "항만 업무나 기뢰 제거 업무" 도 담당 했습니다.
마이니치가 입수한 극비 문서에 대해 일본 방위성은 “사실 관계를 알고있지 않으며 대답
할 입장이 아니다” 라고 밝혔는데... 오누마 히사오 교아이가쿠엔 마에바시국제대학
교수는 “6·25 당시 소련이나 북한이 유엔에 ‘일본인들이 유엔군에 참전했다’ 라고
비난했지만 전투에 참여한 일본인들의 공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라고 말합니다.
6·25전쟁때 미 해군의 요청으로 일본 정부가 극비리에 편성한 해상보안청의 특별소해대가 한국의
항구에서 기뢰제거 작업과 항만 업무과정에서 일본인 57명이 사망한 사실이 SBS 뉴스에서
보도된 적이 있고, 동아일보 논설위원 정권현 씨도 1950년 실시한 "인천 상륙작전에 일본인
"2천명이 참가해 57명이 전사" 했다고 일본 NHK 에서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고 말합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주역은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 7사단 인데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인천으로 항해해야 하니, 특히 서해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게다가 인천은 수로가
좁고 암초를 피해 구불구불 운행해야 하니... "식민지 시기에 조선을 통치했던 일본인
으로 한국 서해안의 물길을 잘 아는 일본인 선원들의 도움이 필수적"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945년 해방 이전에 한국에서 중요한 부서 및 업무나 전문적이고 기술적
인 그런 업무는 한국인들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담당했으며....
그 일본인들이 귀국해서 일본에 거주하는지라 이들을 찾아 동원해야 했던 것입니다.
미군이야 한국 바다와 해안에 대해 모르는지라 일본인 선원들이 미군함정에 동승해서는
인천 까지 뱃길 안내는 물론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때문에 상륙에 주어진
시간이 두세시간" 정도에 불과한 제한된 악조건 에서.... "미군이 탄 상륙정 LST 를 직접
조종" 했다는데... 저 "일본인들의 활약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할수 있었다고 봅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미 합참과 미 해군은 모두 반대했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수치는 9m, 최소수치도 7m 라서 대한민국에서 2위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며, 밀물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때까지 좌초하므로 북한군의 반격시 탈출하기도 힘듭니다.
다음으로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한지라.... 이 두가지 때문에 선발대는 상륙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으며, 상륙지 주변에 모래
사장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상륙 부대가 배를 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옛날 요동성이나 안시성을 공격하듯 “사다리” 를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항구를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며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등 난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더욱 인천은 좁은 단일 수로이니 만조시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수로는 “비어수로” 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통로
에 밀집해야 하니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고정표적” 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어수로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모두 보유한 바람에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Chales
Turner Joy 제독은 "성공률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 라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 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으니... 이 난제
를 해결해준 사람들이 바로 인천항에 근무했거나 선원으로 일했던 일본인 2천명 이었던 것입니다.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된 것은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인데, 군산시는 상륙
하기는 양호하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절단하지도 적 병력을 포위하지도 못하는 지점이라 이런
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지 오래였습니다.
평양의 남포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적의 수도 턱밑이므로 방어가 튼튼한데다가 원산-서울
- 낙동강 보급선을 막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됐으며, 포승면(평택시)은 해군 제2함
대사령부가 있는 평택항 근처로..... 대한민국 1위의 조수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아산만
유역으로 인천과는 달리 수도 서울과 거리도 멀고 조수 간만의 차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또 평택에 상륙을 시도하면 북한군이 인천항을 폭파해서 못 쓰게 만들 시간을 준다는 문제가 발생
하는데, 북진할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하는데다 인천이 유리한 점은 북한군이
1,000명 정도만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김포 등 내륙으로 진입하기에 거리가 짧아
서울을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철로와 도로를 끊어 북한군 병참로를 차단할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 작전은 승인을 받게 되는데
Clay Blair 의 『The Forgotten War』에, 1950년 6월 19일 미 국방부가 SL-17 계획을 승인 배포
했는데, 북한군 남침시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안정화한후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이니 1950년 6월 26일 맥아더사령부는 저 복사본 50개를 요구했습니다.
참가부대는 제7 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해군중장 산하에 제10군단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 해병대 제1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해병대 소장, 육군 제7보병사단 데이비드
바 육군 소장과 한국군 해군 손원일 소장, 해병대 제1연대 신현준 대령, 육군 제17연대
백인엽 대령, 영연방군(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앤드류스 해군소장과 네덜란드군 입니다.
손원일 해군사령관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으니 해군에 군함이 단 한척도 없는지라 1949년 6월 1일
'함정건조 갹출위원회' 를 만들어 모금운동을 벌여 장교는 월급의 10%, 하사관과 수병은 5%씩
모았고 손 제독의 부인 홍은혜씨등 '해군부인회' 가 바자회를 운영하고 국민들에게도 호소하는등
4개월만에 1만5천달러를 마련하니 정부가 4만5천달러를 보태 6만달러로 미국에 군함을 사러갑니다.
롱아일랜드 킹스 해양대학에서 학생 실습용으로 쓰다가 고철로 폐기하려던 군함 화이트헤드호를 구입해
수리한후 백두산호라 붙이고는 1950년 1월 24일 하와이에 도착해 3월에 3인치 포를 장착하고 포탄
100발을 구입해 4월 10일 진해에 입항후 최용남 해군 중령과 승조원들은 백두산함 운용법과 3인치
포 사용법을 배우는데... 포탄이 100발 뿐이니 실제 사격은 엄두도 못내고 조준 및 장전 연습만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백두산함은 동해에 침투한 북한군을 차단하러 올라가다 남하하는 배를 발견하고 추격해,
밤 9시경 부산 앞바다에 침투하려는 600여명의 북한 해군의 육전대를 태운 무장 수송선을 포격하여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니 대한해협 해전이라고 하는데, 실탄사격을 단 한번도 해보지 못했으니
아무리 쏘아도 명중되지 않자 피해를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적함 400미터까지 배를 갖다 붙였다고 합니다.
북한 수송선은 백두산함에 도선하려 상륙정에 육전대를 태워 띄워보내자 승조원들이 총을 들고 갑판까지
나와 응전해야 했는데, 소해정인 구월산정과 고성정이 달려와 37mm 대전차포를 쏘고 적함 마스트가
꺾여지는 가운데 백두산함의 3인치 포의 고무 스프링이 녹아 고장났는데.... 포가 과열이 된 것이니 예비
부품으로 교체하면 되는데도 포탄이 너무 부족해 실탄 사격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고장원인을 몰랐다는?
이를 알아챈 적함이 역공을 가해 백두산함 조타실을 뚫고 자이로 컴퍼스를 때려 2명이 죽고 또
한발이 백두산함 주포 옆을 때려 손상이 갔지만 접근한 보람이 있었는지 오전 1시 38분 결국
적함을 격침시켰는데.... 만약 북한군 함선을 막지 못했더라면 부산에 침투하여 기뢰를 부설
하고 항구를 점령해 파괴했으면 이후 미군등 유엔군이 부산을 통한 상륙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상륙 준비를 위해 8월 20일 캐나다 해군 구축함 Athabaskan 의 상륙반이 인천 앞 팔미도에 상륙
하여 등대 내부의 통신시설을 파괴했고, 미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에 배속된 임병래 중위
를 비롯한 해군 공작조는 X-ray 작전을 수행해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의 장비배치도, 배치
병력, 고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월미도에서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합니다.
그러나 9월 14일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해군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
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북한군과 교전
했으니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군에게 생포되면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민군과 중공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이 필요했으니 남한 지역은 삼척시, 군산시,
영덕군 장사리이고 북한 지역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마량도, 남포시 등이 었으니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군산, 삼척, 영덕, 마량도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졌으니 교란
및 기만작전이었는데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파괴합니다.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월미도를 비롯해서 인천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는데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하여 포격했고 남포에는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콜세어를 동원하여 폭격
했으며 9월 13일에는 강원도 삼척시로 미주리함을 출동시켜 삼척 일대에 함포 사격을 가합니다.
또한 같은날 총사령관인 미 제8군 사령관 육군중장 해리스 월튼 워커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라고 발언함으로써 기자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이
10월에나 총반격을 한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도록 유도하였으니 이 소식을 접한 북한군 수뇌부
에서는 후방에 남아있는 예비 부대를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기로 결정합니다.
상륙작전 사흘 전, 9월 12일에는 미 육군 루이스 엘리 대령이 지휘하는 미-영 혼성기습부대가 전라
북도 군산에 기습상륙을 시도하여 가벼운 교전후 철수하였고 상륙 바로 전날 9월 14일에는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에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의 북한군 점령지에
학도병을 상륙시키는 장사 상륙작전을 시행해 북한군이 상황을 오판하도록 기만작전을 벌입니다.
학도병등 772명은 여분 실탄이나 중화기도 없는 무장으로 장사리에 상륙해 양동 기만작전을 펼쳤으니
“장사상륙작전”으로, 엿새에 걸쳐 악전고투 끝에 전사자 139명과 부상자 92명이라는 희생을 치루며
굶주림에 시달렀는데 훈련받지 않아 전력이 약한 병력들이니 성공하면 좋고 설사 실패해 희생되더
라도 유엔군 전체 전력에 손실이 적은지라 손해볼게 없다는게 맥아더의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연상시키는데 2차대전때 아이젠하워는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그리스
에 상륙할걸로 위장하니 망명한 그리스인 한명을 잠수함에 태워 아테네 근교에 내려주어 레지스탕스
들과 접선하게 하고 이 사실을 이중 첩자를 통해 독일군에게 알려 현장을 덮친 독일군이 체포하는데
고문 중간쯤에는 불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애국심이 너무 투철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문다는???
북한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UN군
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니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경고
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UN군 상륙작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수긍
했으니..... 중국 측에서는 서해안의 남포, 인천, 군산과 동해안의 원산을 후보지로 예상했습니다.
미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곳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보았으니 한 군데를 찍어 집중적인 방어를 펼치기가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는데, 물론 린뱌오
(임표) 는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유력하다고 정확한 예상을 했으니 저우언라이는 김일성
에게 "인천을 조심하라" 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했습니다.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전쟁
몇달만에 거의 와해된 조선인민군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등 나름의 준비를 했습니다.
소련 대위 김일성은 사단급도 지휘한 적이 없으니....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사장 김일성과 최현이 지휘하는 150명이 두만강을 넘어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일본
주재소를 공격했다 후퇴하면서 일본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에 동북항일연군측 전사자
수십명에 달한 소규모 “보천보 전투” 가 고작이니 대규모 전쟁을 지휘할 능력은 없었다고 봅니다.
뭐, 그래도 일제 36년간 한반도 땅에서 싸운건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한 것 등 단 2차례 뿐인지라 저것도 독립전쟁이기는 합니다만...
저 전투를 왜 민족주의자가 아닌 공산독립군이 수행했느냐 하면,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 서전에 승리한 김좌진과 홍밤도의 독립군은 일본군 증원부대가 도착해 포위를
하려고 하자 전멸을 면하기 위해 만주벌판을 지나 3,500명이 멀리 소련 땅으로 도주 합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자 공산주의자인 홍범도는 소련군의 무장해제에 순순히 응해서
소련군에 적극 협력했으나, 민족주의 독립군들은 거부하다 공격을 받아 죽고 나머지
대부분은 소련군의 포로가 되니 이후 십수년간 만주에서 독립군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장작림과 장학량등 중국군과 중국 민간인들은 가급적 일본군과 충돌을 피해왔었는데, 1931년 만주사변
이 일어나자 비로소 저항을 시작하니.... 독립군은 12년만에 중국인과 연합해 일본과 전투를 벌이는데
1932년 3월 1개대대 양세봉 조선혁명군은 중국인과 함께 영릉가전투와 1933년 흥경성 전투를 벌입니다.
1932년 9월 지청천의 독립군 3천명과 중국군 2만 5천명으로 된 한중연합군은 쌍성보(雙城堡)
전투를 벌였고..... 1933년 4월 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 5월 동경성(東京城) 전투
그리고 7월에는 독립군 2,500명과 중국군 6,000명이 연합해 대전자(大甸子) 전투를 벌입니다.
1933년 9월 1일 한국독립당은 동녕현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전리품 분배에 감정이 상한 중국군이 지원하지
않으니 한중연합은 깨어지고 일본군에 전멸당해 흩어져 소멸해 버렸으며, 1936년 모택동의 홍군 8로군은
조선인을 받아들여 “동북항일연군” 을 창설했으니 김일성, 최현, 김책, 최용건, 강건, 김일, 리홍광등 40%
가 조선인들 이었는데 이제 만주에는 "공산독립군" 만 남은 것이니 보천보 전투도 저들이 주도할 수밖에....
김일성은 대규모 전쟁을 수행해 본 경험이 없으니 낙동강 전선에 집착해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소진해버리는데...... 덕분에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
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과 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옵니다.
게다가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경기도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병력이 상륙했을 때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뿐이었으며
인민군 18사단도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낙동강으로 가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내려가 버렸습니다.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
를 부설하기 시작했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개 부설하지도 못했
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다 발견돼서 조기 제거되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은 3단계이니 먼저 월미도 제압(그린 비치) : 해안포와 동굴진지
가 갖추어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제압해서 상륙작전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천항과 시가지 등에서 날아오는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듭니다.
두번째 인천항 상륙(레드 비치): 인천항에 직접 상륙해서 항구를 조기에 확보하는 가장 어려운 임무니
미해병대 중 가장 베테랑인 부대를 동원하며 국군 해병대 제1연대가 UN군과 함께 상륙하는데
이때 높은 방파제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에서 나무사다리 수천개” 를 긴급 제작해서 공수했다 합니다.
3번째 인천 남동부 상륙(블루 비치): 인천항에서 북한 방어군이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을때 후방으로 우회
해서 경인가도를 장악해 인천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서울방면에서 오는 북한군의 증원군을 차단하는데
북한군은 평양으로 전보를 치니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농후함. 휘하 전 부대에 전투 준비를 명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 및 격멸할 것임.
요코하마미 육군 7사단과 고베미 해병 제1사단은 사세보에서 출항한 마운트 맥킨리호와
로체스터호 및 부산에 출항한 함대와 합류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니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 입니다.
9월 15일 00시 05분 유진 클라크 미해군 대위와 KLO 부대, 한국 육군및 해군 연합작전팀이 팔미도의 등대
를 무혈점령하고 등대를 수리해 불을 켜서 상륙부대들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으며 05시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사격을 감행하였고,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콜세어 10대가 출격해 폭격을
감행했으며 미해병대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대원들은 06:00시까지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탑니다.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하는데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06시 33분이었으며 미 해군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습니다.
전투기들이 45미터 전방을 기총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
했으며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2개 중대인데 북한군은 산발적인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고 G중대는 남쪽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는데 북한군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으며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됩니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 방파제를 차단하였으며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 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지만 미 해병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했으며 동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해병들이 대동한 M4A3
셔먼 불도저 2대에 생매장 당했고 08시 00분 미 해병대는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합니다.
10시 00분,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하니 인민군 1개 소대
는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 소월미도 점령이 완료
되니 사상자는 미군은 부상자 17명이 전부인 반면, 북한군은 사망자 108명에 부상자가 137명
이었는데 월미도 동굴째로 생매장 당한 100 ~150여명을 더하면 격차는 더 벌어질 것입니다.
9월 15일 14시 30분 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인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하니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는데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으니 미군은 인천항의 도크를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
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소탕해 나갑니다.
블루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으며
인민군이 모두 소탕된 후에야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니
미군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믿지 못한 것인데....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습니다.
이때 유엔군이 동쪽으로 진격했더라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도주를 차단해 전쟁을 종결지을수도
있었는데 옛날에 부하였던 아이젠하워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진 맥아더가 다시 한번 더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하니, 서을까지 진격한 부대를 인천으로 빼돌려 배에 싣고 원산으로 가니
육로로 간 한국군은 이미 원산에 진입했는데 원산 앞 바다는 기뢰천지라 부득이 “일본 해상
보안청 공무원들이 일본 소해정” 을 끌고 와서도 한달 이상을 제거하느라 상륙시기를 놓칩니다.
맥아더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공화당에 입당해 1952년 11월 미국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었으니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장기집권에 신물나서 공화당후보로 누가 나오더라도
대통령당선이 확정적이었으니 야망과 쇼맨쉽, 조급함 등이 현지 지휘관이나 참모들 심지어는 트루먼
대통령의 말도 무시하고 무리하게 원산상륙작전을 실행하다가 모든걸 망쳤고 본인도 불명예 제대 합니다.
원산상륙을 위해서 10군단을 인천으로 회군시킨 것은 결정적인 실수니 원산상륙이 없었다면 대동강
선으로 휴전선이 그어졌을 확률이 높은데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교통 때문에 더 이상
가지를 못했을 것이니 한반도를 횡으로 진격한 것은 전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북한군
은 잔존 빨치산의 안내를 받아 태백산맥을 따라서 장비를 버리고 총만 들고는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물자 지원에 있어서도 일본은 패전해 한국을 도울 여력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후방 군수공장 역할을 했으니.... 가장 중요한 유/무상 물자지원국
으로 다른나라들이 형식적인 지원 정도였다면, 일본은 6.25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활약한 미군의 후방 군수공장 역할을 담당해 미군이 필요한 물자를 신속하게 조달합니다.
미국과 UN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결정으로 서해와 동해의 주요
항구에서 소해와 초계 작전을 위한 1,200여명의 소해 병력과 소해정이 해상보안청
에서 파견됐고, 공산군이 점령한 적지에서의 정보 수집을 위한 요원들이 일본 정부
산하 정보 기관의 일본인들이 파견되어 한반도 내 공산군 점령 지역으로 투입됐습니다.
인천 상륙작전 당시 인천을 포함해 한반도 곳곳에 위치한 항구들로 UN군을 위해
물자와 인력을 수송한 것도 일본 해운업체들의 선박과 선원들이었으며 수천명
내외의 일본 측 인력이 6.25 전쟁 당시 UN 군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해 작전 도중에 다수의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한미일 삼국 모두 해당
사안에 대해 쉬쉬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주인공 우미(메르)의 아버지가 기뢰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
일본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유사시 한국과 대만,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기지 역할을 맡으며 경제
개발을 위한 산업 지원과 자본 투자, 미국의 정책지원을 확보할수 있었으니 한국이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미국의 산업 및 정책원조를 받고 경제 개발을 위한 기초자본을 확보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니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돈을 벌었다면 한국은 월남전에서 돈을 번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참전 규모와 활약상에 대해 일본, 미국, 한국 세 나라 다 공식적으로 시인도 부인
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일본은 1947년 5월 3일 통과되어 1951년부터 시행된 평화헌법
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었고, 미국은 일본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실이
발각되면 북한과 소련에 중국을 자극하여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불과 몇년전까지 한반도를 식민지배한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내외적 정통성
확립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었으니....... 세 나라 모두 극비 사항으로 분류하고 관련 내용을
부인해 왔었지만 정황상 공산권에서도 일본인들이 참전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북한 측에서 일본인 포로를 남송하면서 일본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거세게 항의를 했다
거나 해당 사실을 내부용 선전선동에 일부 활용했다는 기록들이 존재하는데... 다만 확전
을 막기 위해 “소련군의 직접 참전” 사실이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양측 모두에 의해
숨겨졌던 것 처럼, “일본의 참전” 사실 또한 양측 모두에 의해 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대만의 중화민국은 물자 지원 외에 전쟁 초기에 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하였으나 누가 봐도
본토 탈환을 목적로 한 의사가 강한데다가, 파병한 군대를 재정비하느니 한국군을 재정비
하는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와 무산되었으니...... 트루먼 대통령은 정 참전하고 싶으면
하이난섬을 탈환해서 제2 전선을 만들라라고 주문했는데 이는 사실상 완곡한 거절 이었습니다.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쿄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조인하였으며
9월 9일 오후 4시에는 서울의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도 또다른 조인식이 있었습니다.
미24군 사령관 존 하지, 미7함대 토머스 킨케이드, 미70사단장 아취볼드 아놀드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가 참석했으니... 항복문서 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식민 통치권을 미국
이 넘겨받는 통치권 이양식이었으니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습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중 한반도 분할선을 구상한 미군 작전국장 존 헐은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
는 미국이 소련과 함께 조선을 분할하기를 원했으니 번스는 미국이 조선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부산과 인천을 우리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38도선을 따라 선을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고 말했습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은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을 독립시키자 제의하니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
가 작성한 초안에는 한국의 독립을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라고 적었지만, 처칠이 이의를 제기하고
루즈벨트도 같은 생각이라 “ 적절한 절차를 거쳐 in due course” 로 최종 수정됐으니 루즈벨트는 25년간
신탁통치를 생각했는데 스탈린이 반대해 5년으로 확정되지만 한국인들은 뒷부분 “독립” 만 주목했습니다.
루즈벨트는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능력도 없다고 본 것이니 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했으며 임시정부
나 광복군이 무장해제를 하고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귀국을 허용한 것에서도 알수 있는데.... 이때 “독립
자격” 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발생한 4년간 태평양 전쟁에서 “한국인들이 미국편
에 서서 일본군과 싸워 죽은 덕분에 미군의 생명” 을 구한걸 말하는데 이런 실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했는데 일본을 패망시킨 전공을 따지자면 미국이 80% 이고 중국
은 10% 그리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프랑스, 네델란드, 필리핀및 소련이 10% 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 반대로 일본편에 참전한 한국인들은 적이었으니, 그들이 세운 전공이라고는 광복군 9명이
버마전선에서 영국군의 통역과 감청을 맡은게 전부니.... 전공은 없다는게 루즈벨트의 생각인가 봅니다?
한국인들이 1941년 12월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하는데 선봉이
되어 총알받이로 미군 대신에 죽어갔더라면 독립 자격을 얻을수 있었다는 것인데....
광복군은 겨우 400명 정도로 숫자도 적을뿐더러 미군과 함께 싸운적이 없고, 재정이
열악하니 단독으로라도 일본군과 단 한차례도 전투를 하지 못했으니 “실적이 전무” 합니다.
두번째는 전쟁은 보급으로 하는 것이니 한국인들이 일본에 쌀과 콩이며 면화 공출을 거절하고 징용을
거부하며 총궐기 했으면 일본군 50만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을 3년간만 한반도에 붙잡아
두었으면... 한국인 십수만명이 죽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하며 수백만 이재민이 발생해 한반도는
초토화 되었겠지만 태평양전선의 일본군을 약화시켜 미군 1만명의 생명을 구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자의는 아니더라도 쌀을 공출하고 탄광에서 석탄을 캐며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만들어 일본군
에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조선인이 건설한 활주로에서 이륙한 일본 전투기가 미군 함대를 폭격했으며,
자의나 타의로 "10만명의 한국인들이 일본군" 에 입대해서 미군 및 동맹국인 중국군과 싸웠으니...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적” 이라, 38선 분할을 거부할 실적(미군 목숨을 구한) 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임팔 작전실패후 버마 전선의 전면적 붕괴를 막기 위해 44년 6월 증파된 일본군 49사단은 조선 경성
에서 44년 1월 신편된 사단으로 정원 1만 7천명 중 20% 인 3,400명은 조선인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49사단은 버마 전역에서 소모되어 친드윈강에서 전멸하는데 츠지 마사노부의 회고록에
저 49사단의 조선인 병사에 대한 언급으로 외모나 전투시 동작등 평소에는 전혀 구분이 안되지만....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서 고통으로 "아이고!" 라고 신음만은 조선말로 하는지라 비로소 조선인인걸
알게된다고 적었는데... 일본군에 입대한 10만명 넘는 한국인 중에 몇명이라도 모여 부대내에서 반란
을 일으키거나, 그게 안되면 단독으로라도 일본군 대대장을 사살하고 탄약고나 유류고를 폭파하거나
미군이나 중국군과 전투가 붙었을때, 동료 일본군에게 총을 난사한 경우가 전무했다는게 아쉽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망했으니 오랫동안 고생한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도 즉시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서고금 5천년 역사에서 보자면 속국(식민지)이 저절로
독립한 사례는 없으며, 1945년 일본을 망하게 한건 미국이니 조선은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가 되는게 당연하니 대통령 "루즈벨트는 25년간 신탁통치" 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나고 공산당이 중국을 차지하며 인도차이나도 공산화에 노출된 냉전시대
가 되니 소련-중공-북한 공산세력의 팽창에 대해 미국-일본-한국이 연합전선으로 맞서야 하는데, 진주만
과 미드웨이 피습에서 보듯 미국의 안전을 위해 태평양을 내해로 만들어야 하니.... 새로운 동맹인 일본을
지키기 위한 교두보로 공산군을 저지할 전쟁터로서 한국이 필요한지라 미래를 위해 독립을 선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