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애 류성룡의 묘(墓)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 자리하고 있다. 류성룡의 자(字)는 이현(李見)이요, 호는 서애(西厓)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중영(仲楹)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 광수(光粹)의 딸로서, 서애 류성룡은 3형제(文龍 .. 일찍 죽음. 雲龍, 成龍)의 막내 아들이다.
류성룡의 정처(正妻)는 전주 이씨 형(炯)의 딸(광평대군의 후손)로서, 위(褘), 여(濾), 단(亶), 진(袗)의 4형제와 딸 한 명(찰방 이문영에게 출가)를 두었으며, 측실(側室)에서 두 아들(初. 漲)과 딸 한 명을 두었다.
서애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 10월1일,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 외가에서 태어났다. 서애 류성룡의 어머니는 서애를 임신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 부인은 마땅히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안동부(安東府) 풍산현으로 그의 6대조인 종혜(從惠 .. 당시 工曺典書) 대에 이곳으로 입향(入鄕)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태어나면서부터 걸출하여 맑은 구슬이 물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4살 때 독서를 시작하여 6살 때 대학(大學), 8살 때 맹자(孟子)를 배웠으며, 13살 때에 동학(東學)에 들어가 중용(中庸)을 배웠는데, 이미 강사(講士)가 대유(大儒)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류성룡은 18살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21살에 도산(陶山)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찾아가 몇 달 동안 머물면서 근사록(近思錄)을 비롯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1564년(명종 19)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초시(初試)에, 다음 해인 1565년에 회시(會試)에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생원 1등, 진사 3등), 그리고 1566년 10월 문과에 등제하여 11월에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었다. 그후 류성룡의 관직은 승승장구하여 요직만을 골라 승진하였다. 1570년(선조 3)에 성균관 전적(典籍), 공조좌랑(工曺佐郞)이 되었으며, 10월에는 성절사(聖節使) 이후백(李後白)의 서장관(書壯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주자학(朱子學)을 선양하고 돌아와 퇴계 이황의 칭찬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신을 인도하는 서반(序班)에 5품짜리 승려와 도인(道人)을 앞장 세우기에 유학자가 승려의 뒤를 따라 가서야 되겠는냐고 따져 그들을 사신의 뒤에 따라오게 하고, 또 이 나라의 명유(名儒)는 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진백사(陳白沙)와 왕양명(王陽明)이 있다고 하기에 진(陳)은 도학이 정치하지 못하고 왕(王)은 선학(禪學)에 치우쳐 있으니 설문청(薛文淸)을 내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신안인(新安人) 오경(吳京)이 좋아하면서 앞으로 나와 ' 근래 학술이 모두 틀려 선비의 추향을 잃었는데, 공(公)이 능히 정론을 발하여 배척하니 오도(吾道)의 다행이다 '고 하면서 심히 경탄하였다고 한다.
1570년(선조 3)에 홍문관 부수찬, 수찬을 역임하였으며, 경연에 들어가면 강관(講官) 중에 제일이었다고 한다. 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혜를 받았으며, 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좌랑(吏曺佐郞)을 지냈다. 1571년 류성룡이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예안(禮安)에 회장(會葬)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같은 퇴계의 제자이면서 고향 친구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과 절친하였다. 그래서 학봉은 서애가 자기의 사표(師表)라고 하였고 (西厓我之師表), 서애는 내가 학봉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 鶴峯吾所不及 )
뛰어난 행정능력
서애 류성룡은 21세이던 1562년에 안동 도산(陶山)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우며 학문을 닦았다. 학봉 김성일 (鶴峯 金誠一)과는 동문이다. 퇴계는 당시 서애 류성룡에 대해 '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내려 낳은 사람이다. 훗날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울 것이다 ..此人天所生也 他日所樹立必大 '라고 하였다.
156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서애(西涯)는 승정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다. 1569년 사헌부 감찰이 된 서애는 서장관(書壯官)으로 명나라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가서 연경의 학자들과 당시 학계의 추세에 대하여 문답(問答)하면서 ' 진사백(陳沙白)은 도(道)를 깨달은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왕양명(王陽明)은 선학(禪學)으로 얼굴만 바꾸었으니, 설문청(薛文淸) 학문의 순정(純正)함만 못하다 '고 설파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세 사람은 모두 명나라의 대표적 유학자들이었다.
1591년 좌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겸하게 된 서애는 그해 2월 조정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왜국(倭國)의 침공 조짐을 명나라에 통고하도록 하고, 7월에는 왜란(倭亂)에 대비하여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 있던 이순신(李舜臣)을 전라도좌수사로, 형조정랑이던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임명하도록 했다. 이 파격적인인사에 대해 반대가 엄청났으나 그는 끝까지 밀고나가 성사시켰다.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특히 이순신(李舜臣)에 대해서는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이고, 선조(宣祖)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냈음에도, 언제나 간곡하게 그렇지 않다는 점을 설명해 구국(救國)의 재목이 되도록 했다. 다른 조정의 관료나 정승과는 달리 서애는 행정능력도 탁월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서애 류성룡에 대하여 ' 경연(經筵)에 출입한 지 25년만에 상신(相臣 ..재상)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과의 자문과 게첩(揭帖 ..문서)이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道)의 보고서들이 이곳저곳으로부터 몰려들었는데도 류성룡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못난 宣祖의 질문
선조 2년(1569년) 10월에 선조(宣祖)가 군신들에게 내가 옛날의 어떤 군주((君主)와 같으냐고 물었다. 이에 정이주(鄭以周)는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라고 대답하였고, 김성일(金誠一)은 요순(堯舜)이라고 할만하기도 하고, 걸주(桀紂)라 할만하기도 한 임금이라고 말하였다. ' 걸주(桀紂) '는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가리키는 말로, 포악무도(暴惡無道)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선조의 얼굴색이 변하자 좌중이 모두 겁을 내었다. 이때 서애 류성룡이 나서서 , 정이주가 요순(堯舜)과 같다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여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이요, 김성일이 걸주(桀紂)에 비유한 것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여 한 말이라고 하였다. 선조도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술을 내려 함께 마시고 파했다고 한다. 얼마나 용기 있고 슬기로운 임기응변인가.
서애 류성룡이 좌의정으로 있던 1591년(선조 24),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1587년 6월에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조(宗義調)에게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구하게 하였다. 그후 '종의조'가 죽자 그 후계자인 종의지(宗義智)가 1588년 봄에 부산포에 들어와 통신사를 보내지 않으면 변란이 일어나지도 모른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일본에 야나 조선의 반민(叛民)을 송환하면 통신사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종의지는 그의 가신(家臣) 야나가와(柳川調信)를 보내어 조선 반민 10여 명을 잡아오고, 서애 류성룡과 이덕형 등이 강력히 주장하여 1590년에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전적(典籍)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종의지'를 따라 일본에 가게 하였다.
일행은 7월에 일본 경도(京都)에 도착하였으나, 풍신수길이 관동지방을 토벌하러 갔기 때문에 11월에야 그를 접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답서에는 ' 명나라를 칠 터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 주고 앞장을 서라 '는 것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1년(선조 24) 3월에 서울에 돌아 왔다. 그러나 서인 (西人)인 황윤길은 '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필경 병화(兵禍)가 일어나리라 '고 하였고, 동인(東人)인 김성일은 ' 쳐들어 올 정형(情形)을 보지 못했다 '고 하였다. 당파에 따라 지지하는 사람도 달랐다. 김성일은 민심이 동요될까 두려워하여 그렇게 말했다고는 하나, 당시에는 東人이 우세하였고, 사대부 중에는 오랜 승평(承平)의 세월을 지내다 보니 무사안일의 분위기도 있어서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은, 일본이 명을 공격한다고 하는 사실을 즉시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공연히 보고했다가 오히려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테니 숨기고 보고하지 말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애 류성룡은 이 사실이 다른 경로로 알려지고 말 것이니 보고하자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복건인(福建人) 허의후(許儀後)가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 했고, 유구(琉球)도 사신을 보내 오곤 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하다가 조선의 사신이 도착하자 의혹이 풀렸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드디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정랑(正郞) 권율(權慄)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도좌수사(全羅道左水使)에 추천하여 병란을 대비하였다. 선조는 류성룡을 체찰사(體察使) 겸 병조판서에, 김응남(金應南)을 부체찰사에 임영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군무를 총괄하게 된 류성룡은 이순신,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어 류성룡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義州)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火器)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軍備)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 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경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誣告)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北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후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隱居)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징비록(懲毖錄)에 담긴 서애의 절절한 애국심
징비록(懲毖錄)의 '징비(懲毖) '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 여기징이비후환 (予其懲而毖後患) ' 즉, 자신의 잘못을 거울 삼아 후환을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서애 류성룡은 이러한 집필 목적에 따라 임진왜란의 전황은 물론 자신의 잘못과 조정 내의 분란, 백성들의 원망 등을 가감없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고, 서애는 좌의정으로서 특명에 따라 병조판서를 겸하게 된다. 그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어 군무(軍務)도 총괄하게 된다. 5월에는 국왕을 모시고 개성(開城)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선조(宣祖)가 동파역(東坡驛 ..지금의 파주)에서 국난타개책을 신하들에게 묻자 ' 의주(義州)로 피난했다가 사태가 위급할 경우에는 즉시 압록강을 건너 요동(遙東)으로 가서 명나라에 내부(內府)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적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은 이에 대해 ' 임금의 수레가 우리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 大駕離東土一步也, 朝鮮非我有矣 ). 지금 동북의 여러 도(道)는 그 전과 변함이 없고, 호나지역의 충신의사(忠臣義四)들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온데, 어찌 경솔하게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간다는 일을 의논해야 하곘습니까 ' 하면서 강력하게 제지하면서 국난타개책을 세웠다.
한편 서애는 개성에서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일부의 모함으로 그날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서애는 얼마 후 1593년 10월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고,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무하면서 군무, 외교, 민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전란(戰亂)의 국가를 이끌어갔다. 그는 1598년 10월까지 5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모든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탁월한 역량을 발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애는 정유재란(丁酉再亂) 이듬해인 1598년 10월 북인(북인)들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12월에는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599년 2월 고향 안동의 하회(河回)로 돌아간 그는 조용히 제자를 가르치며, 하문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징비록(懲毖錄) 저술은 1604년 7월에 완료되었다.
징비록(懲비錄)의 '징비 (懲毖) '는 시경에 나오는 ' 여기징이비후환 (予其懲而毖後患) ' 즉, 자신의 잘못을 거울삼아 후환을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서애 류성룡은 이러한 집필 목적에 따라 임진왜란의 전황은 물론 자신의 잘못과 조정 내의 분란, 백성들의 원망 등을 가감없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軍糧)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盜賊)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서울 수복(4월 20일) 후의 일이다. 나도 중국의 병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성 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굶주리고 별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 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 안이 죽은 사람과 말이 썪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건물은 관청과 개인 집을 막론하고 모두 없어져 버렸고, 왜적(倭賊)들이 거처하던 숭례문에서 남산 밑에 이르는 지역만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먼저 종묘(宗廟)를 찾아 엎드려 통곡하였다.
당시 적(敵)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아닥쳐 불과 10일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쳤으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손을 써볼 겨를이 없었으며, 용감한 장수라도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민심 또한 흩어져 수습에 어려움을 겼었다. 이 방법이 서울을 함락시키는 데 뛰어난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왜적(倭敵)은 항상 이긴다고만 생각하여 뒤를 볼아보지 않았다. ㄱ러다 보니 여러 갈래로 흩어져 마음대로 날뛰었다. 그러나 군사는 나누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오ㅒ적의 계략이 잘못된 것은 우리에게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이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첫 만남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이 저술한 ' 청성만필(靑城漫筆) '에는 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첫 만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이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로 있을 때 귀성(歸省)하기 위하여 한강을 건너는데,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은 많아 서로 앞 다투어 배에 오르느라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때 무인(武人)으로 보이는 길손이 평복 차림으로 홀로 말을 이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 올라서는 그가 자기보다 먼저 배에 오른것에 화를 내며 거침없이 욕을 해댔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 모두 분개하여 심지어 그를 대신해 싸우려고까지 하는데도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 하였다. 서애 류성룡도 속으로 그를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배가 이윽고 나룻터에 닿자 길손이 말을 몰고 먼저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는데, 술 취한 자가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알고 보니 대갓집 하인(下人)이었다. 길손이 왼손으로는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았는데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 듯 민첩하였다.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고는 밫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서애 류성룡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 '라고 감탄하였다.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 군문(군문)에서 살펴보니 바로 훗날의 충무고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서애 류성룡이 이순신을 알아 본 것은 이 일에서 비롯된 것이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천거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