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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란? / 지유스님
불법(佛法)은 자기(自己)의 모습을 말함이요.
자기의 모습을 보도록 가르친 것이 불교(佛敎)이다.
왜 자기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
자기의 모습을 봄으로서
모든 문제(問題)의 근본(根本)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자기(自己)의 모습이란, 곧 마음을 말한다.
마음은 어떠하기에 마음을 봄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마음은 모든 것의 근원(根源)이요,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고 마음으로 돌아간다.
과거, 현재, 미래의 무한(無限)한 시간(時間)과
동서남북, 상하(上下)의 무한한 공간(空間)과
유무(有無), 장단(長短), 대소(大小), 피차(彼此)의
무한한 차별상(差別相)과 희비고락(喜悲苦樂)등
무한한 감정(感情)의 생멸(生滅),
이 모든 것이 한 마음 속의 기멸(起滅)이니
마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超越)하여
모든 것의 근원(根源)이 된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모든 것을 초월(超越)한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
즉 우리의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있어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觸感)을 알고, 좋고 나쁜 것을 알며,
온갖 생각을 할 줄 아는 자(者),
말하자면 의식작용(意識作用)의 본체(本體)를
이름 하여 마음이라 한 것이다
의식작용의 본체(本體)인 마음은
형체(形體)가 없고 물체(物體)가 아니니,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의식작용(意識作用)의 일체(一切) 생각이 끊어진 곳이니,
생각으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양도 없고 생각도 아닌 곳에
영지(靈知)가 소소영영(昭昭靈靈:뚜렷)하니,
이 영지(靈知)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한
영원(永遠)한 자기의 참된 모습이다.
수도(修道)란?
마음을 닦는다는 말이니, 마음을 도(道)라고도 한다.
마음을 닦으려면 우선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마음의 정체(正體)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릇을 닦는데 그릇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아무 돌멩이나 잡고 닦고 있으면
그릇을 닦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정체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그릇된 생각으로
마음인 줄 알고 닦고 있으면,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
알고자 하는 자체(自體)가 바로 마음인 것이다.
알고자 하는 생각을 내었을 때,
그 생각을 쫓아가면 끝이 없다.
아무리 알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고, 생각을 많이 해도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괴롭고, 수고로울 뿐이다.
그러니 생각을 쫓지 말고
생각하는 자체(自體)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생각하는 자체를 돌이켜 보면
곧 일체(一切) 생각을 찾을 수가 없다.
생각을 찾을 수 없는 그 곳에 생각 아닌 영지(靈知)가
소소영영(昭昭靈靈:뚜렷)하지 않은가 !
이 영지가 모든 의식작용의 본체(本體)인 마음이다.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아닌 영지(靈知)를 보니,
이 영지는 이제 비로소 얻은 것이 아니고,
본래(本來) 있던 것이다.
다만 마음속에 생각을 집착(執着)해 있는 바람에,
생각 아닌 마음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 생각을 집착하고 있는 것은 환상(幻想)이라 하겠다.
환상이 장애물이 되어 생각 아닌 마음을 못 본 것이니,
마음속의 환상을 놓아 버리면
환상 아닌 진심(眞心)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환상은 생멸(生滅)이요, 허망하나,
진심은 생멸이 아니요,
영원불멸(永遠不滅)이며 진실(眞實)이다.
이 진심이 바로 자기의 참된 모습이요, 부처라고도 한다.
마음속에 집착(執着)하고 있던 환상(幻想)을
놓아 버리고 진심(眞心)을 보니,
이 마음은 한 번도 난 일도, 죽은 일도 없었다.
났다, 죽었다 하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이 나(生)고 멸(滅)한 것뿐이다.
생각은 천만번 나고 멸하더라도,
마음은 그에 따라 나거나 멸하는 일이 없으니
생사(生死)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아닌 마음을 보면
마음에는 일체(一切) 망념(妄念)의 흔적(痕跡)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으니 공적(空寂)이요,
그 가운데에 싱그럽게 영지(靈知)가 있으니
진공묘유(眞空妙有) 또는 공적영지(空寂靈知)
라고도 한다
공적영지의 마음은 극히 고요하고도 신령스럽다.
어지러운 것이 아니니 공적(空寂)이라 하고,
감각(感覺) 지각(知覺) 할 수 없는 목석(木石)과
다르기에 영지(靈知)라 한 것이다.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마음속에 한 생각이 일어나
그 생각을 쫓고 집착(執着)하는 바람에,
원래(元來)의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생각은 다음 생각으로 계속 쫓고, 쫓아, 많아지니
마음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운 생각이 마음속을 가리니 점점 어두워진 것이다.
어지러우니 불안하고, 어두우니 어리석은 것이다.
그 불안(不安)에서 벗어나겠다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발버둥친(取捨分別)것이
더욱 마음을 어지럽게 했으니,
점점 더 어두워져 공적영지(空寂靈知)했던 마음이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변한 것이다.
혼침과 산란 속에 짓고 있는 생각이
생사(生死)가 되어 원인에서 결과로 되풀이되니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時間)이 되고,
자타(自他)의 차별(差別)로
동서남북, 상하(上下)의 공간(空間)이 되어,
한(限)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없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게 된 것이다.
한(限)없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고 있는 동안에,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도 있고,
좋을 때는 복(福)이라 하여 기쁘고 즐거워하며,
나쁠 때는 재화(災禍)라 하여 슬프고,
괴로워하기도 하며.
희비고락(喜悲苦樂)등 모든 감정(感情)과
길흉화복(吉凶禍福) 등의 온갖 일들이 있었다.
이 좋고 나쁜 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면,
이미 지나간 과거에 자기가 지은
행(行)이 원인(原因)으로
현재의 자기에게 결과(結果)로 나타난 것이며,
또 현재의 자기가 짓고 있는 행이 또 원인이 되어
미래의 자기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나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도 한다.
밭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듯이
자기(自己)가 지은 것을 자기(自己)가 받는 것이니,
아무리 좋지 않은 나쁜 환경(環境)을 만났다 할지라도
자기 이외에 아무도 원망(怨望)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지금의 자기(自己)는 과거(過去)의 결과(結果)이며,
동시(同時)에 미래(未來)의 원인(原因)이니,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기(時期)라 하겠다.
아무리 악(惡)의 환경(環境)이라 할지라도
지금에 노력하여 선(善)에 힘쓴다면
미래의 선은 약속된 것이며,
또 아무리 최선(最善)의 환경이
과거의 선인(善因)에 의(依)해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도 한(限)이 있는 것이요.
인연(因緣)이 다하면 없어지고 마니
생각하면 허무(虛無)한 것이다.
악(惡)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관찰(觀察)해 본다면
최선(最善)의 환경(環境)에 혜택(惠澤)받았다고
기쁨에 들뜰 것도 없고,
최악(最惡)의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해서
슬프고, 괴로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얻고 잃은(得失) 것은 인연(因緣)에 맡기고,
마음이 동(動)함이 없으면 그 마음이 바로
도(道)에 합한다고 한다.
마음속에 생각을 집착(執着)하여 쫓고,
쫓은 것이 생사(生死)가 되어,
짓는 행(行)의 여하(如何)에 따라
선(善)도 되고, 악(惡)도 되어,
그의 과보(果報)를 받고
원인에서 결과로 계속 되풀이되니,
한(限)없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한 것이다.
생사에 윤회하다 보니
좋고 나쁜 일(善惡事)의 허망(虛妄)과
생사의 무상(無常)을 느끼게 되어
생사가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을 구해 보겠다고
갖은 애를 쓰고, 몸부림쳐 보나, 수고만 할 뿐,
생사를 벗는 데는 아무런 효과(效果)도 없는 것이다.
한(限)없이 노력(努力)하고 애를 썼는데도 왜 그런가?
그것은 무엇이 생사(生死)며,
생사의 요인(要因)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도
이 생사문제(生死問題) 때문에 출가(出家)하여,
생사의 탈출구(脫出口)를 구하러 사방에
찾으러 다니다가, 그것이 헛된 짓이며
생사의 요인(要因)이 마음에 있는 것을 알고
마음을 깨달아 해결(解決)한 것이다.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많은 생각 속에
생각 아닌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
생각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끊임없이 기멸(起滅)하고 있으나,
생각 아닌 마음은 한 번도 난(生) 일도,
없어진(滅) 일도, 달라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생사(生死)란 무엇인가 ?
마음속의 생각이다.
난 줄로 알고, 죽은 줄로 알고,
온 줄로 알고, 간 줄로 알고 있는 생각이다.
생각은 환상(幻想)이니
생사거래(生死去來)란
실체(實體)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 하나를 미(迷)하여
무변(無邊)의 번뇌(煩惱)를 일으킨 사람을
중생(衆生)이라 하고,
마음 하나를 깨달아
무변의 묘용(妙用)을 일으킨 사람을
제불(諸佛)이라 한다.
미(迷)하면 번뇌가 되고,
깨달으면 묘용이 된다는 말이다.
미하면 생사윤회(生死輪廻)요,
깨달으면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미(迷)했다는 것은,
마음속에 생각(相)이 가려서
생각 아닌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을 놓아
생각 아닌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마음을 보지 못한 원인(原因)은
마음속에 생각(相)이 가려서이니,
생각을 놓아 버리면
바로 생각 아닌 마음이 된다.
생각 아닌 곳에
능히 감각(感覺)할 줄 아는 영지(靈知)가 뚜렷하다.
이 영지(靈知)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자기요,
생사(生死)와 상관없는
영원(永遠)의 안식처(安息處)인 것이다.
염원(念願)하고 있던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마음을
사람마다 갖추어 있고,
내지(乃至) 미물곤충(微物昆蟲)에 이르기까지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갖추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생(衆生)은
마음속에 망상집착(妄想緝着)이란
구름이 가려서, 이 좋은 보배를 보지 못하고
환(幻)과 같은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여
신음(呻吟)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속에 가리고 있는 구름을 덜어 주기 위해
법(法)을 설(說)하여,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
마음에 돌아가게 한 것이 중생제도(衆生濟度)이다.
중생제도(衆生濟度)를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부처님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한다고 하면
과거에 부처님이 한량(限量)없었다는데
왜 우리를 제도(濟度)하지 않았는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속의 지혜(智慧)를 열어
미운(迷雲)을 타파(打破)하여,
자기(自己)가 자기를 제도(濟度)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병(病)을 잘 아는 의사(醫師)와 같아서
병이 낫도록 환자(患者)에게 약(藥)을 주었는데도
환자 자신이 약을 안 먹고 병을 낫지 못하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원래(元來) 갖추어져 있는 본심은
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 아무런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천진(天眞)이다.
이 본심(本心)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자리다.
이런 자리를 말로서 알려 하고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생각을 가지고 알려고 하면,
마치 둥근 구멍에
네모진 기둥을 맞추려는 것과 같아서 맞지 않는다.
둥근 구멍에는 둥근 기둥이라야 맞는 것이다.
일체 사량(思量:생각)이 끊어진
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를
사량분별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 무리(無理)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놓아야
비로소 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에
계합(契合)될 것이다.
비사량(非思量)이라 하니
아무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목석(木石)같이 생각하여
멍하게 있어서도 안된다.
사량(思量)이 아닌 곳에 뚜렷이 영지(靈知)가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니기에
공적(空寂)이라 하고
목석과 다르기에 영지(靈知)라 했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었기에
마음이 고요(空寂)하고 동시에
영지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원만(圓滿)하다.
그러나 미(迷)한 사람은
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지 못했기에
마음이 어지럽고(散亂) 동시에 혼매(昏昧)하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공적과 영지가 둘 다 결(缺)한 것이다.
공적과 영지라 하지만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자체(自體)가 공적하면서 영지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본심(本心)을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활(生活)에
공기(空氣)는 일분(一分), 일초(一秒)도 여의고는
살 수 없는 소중(所重)한 것이나,
너무 흔하고, 너무나 가까이 있는 바람에
공기의 존재(存在)를 모르고 있듯이,
우리의 본심도 어느 장소(一切處)나,
어느 시간 일체시(一切時)에도,
또 망상분별(妄想分別)로 작용(作用)을 했든,
아니했든 우리의 생활(生活)에 있어서 일분,
일초도 여읜 일 없이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으나
이 본심(本心)을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분주(散亂)하여
그 생각을 쫓고, 쫓기느라고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는 본심(本心)을
미처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본심(本心)을 보려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어지러운 생각부터 쉬어야 한다.
어떤 물건을 관찰(觀察)할 때,
만일 마음속에 생각이 복잡(複雜)하거나
들떠 있으면 세밀(細密)히 관찰되지 않는다.
세밀히 관찰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고, 조용한 것이다.
또 기둥시계(時計)의 일초, 일초, 초(秒)를
새기는 추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크기가 같지만,
낮에는 잘 안 들리고, 밤에는 잘 들리는 것은
낮에는 환경(環境)의 소음(騷音)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
밤에는 낮보다도 소음이 적고 조용하기 때문에
잘 들리는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소리에는 차이(差異)가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쉬면
본심(本心)을 본다고 했는데, 생각을 쉰다는 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執着) 생각을 놓는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것이 마음속을 가로막아
마음이 막힌 것이니,
마음을 막았던 생각을 놓으면
막힌 것이 없어지니
마음은 저절로 열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속에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무 탈 없는 가슴속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고
스스로 답답하고 불안(不安)해 하는 것과 같다.
불안의 원인이 돌멩이 때문이니
돌멩이만 덜어내면 원래(元來) 탈 없던 가슴이라,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저절로 없어지고 만다.
마음속에 집착(執着)하고 있던 생각을 놓은 자리에
드러난 본심(本心)은
모든 망념(妄念)을 여의었기 때문에
지극(至極)히 고요(空寂)하고,
망념의 구름이 덜어졌으니
지극히 신령(靈知)하다.
그렇다면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본심(本心)이
망념(妄念)이 없을 때만 있고,
망념이 있을 때는 없는 건가 하면 그렇지 않다.
망념이야 있든, 없든, 관계(關係)없이 조금도
변(變)함이 없고 항구불멸(恒久不滅) 하지만
다만 망념이 있을 땐, 망념에 가려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중천(中天)에 떠 있는 해가 구름이 가리든,
가리지 안 든, 변(變)함이 없으나
구름이 가리면 해를 볼 수 없고,
병(甁) 속에 있는 등(燈)불도
불빛에는 변함이 없으나
병 속에 갇혀 있으면 불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망념(妄念), 망념(妄念)하지만
망념이란 자세(仔細)히 관찰(觀察)해 보면
실제(實際) 있는 실물(實物)이 아니다.
그것이 실(實)로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은
착각(錯覺) 때문이다.
착각은 관찰부족(觀察不足)에서 온 것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가 실제 있는 것은 아닌데,
만일 실물(實物)로 본다면 착각이요,
잘 살펴보지 못한 데서 착각했다고 하겠다.
망념도 마찬가지다.
모양도 없는 마음속에
망념의 그림자(映像)가 비치고 있는 것뿐이니,
이 망념의 정체(正體)를 포착(捕捉)하려고
가만히 망념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목전(目前)에
산(山)이 있으면 산(山)인 줄 알고,
물이 있으면 물인 줄 아는
영지(靈知)가 뚜렷하지 않는가?
이 영지(靈知)가 바로 자기(自己)의 본심(本心)이다.
이 본심(本心)은 공적(空寂)하여
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고,
영지(靈知)하여 혼매(昏昧)하지 않다.
본심(本心)은 일체(一切) 모든 생각의 근원(根源)이요,
일체선악(一切善惡) 만법(萬法)을 갖추어 있고
생사(生死)의 시발점(始發點)이며 종점(終點)인 것이다.
여기 붉은 사과가 있다고 하자,
이 사과를 보는데 눈에 눈병(病)이 없고,
그 밖에 장애물(障碍物)이 없는 한(限),
만(萬) 사람이 보면 만 사람이 똑같이 붉은
사과일 것이다.
또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
귀천승속(貴賤僧俗)의 차별(差別)이 없다.
붉은 사과를 붉다 하고,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는 데는
만인(萬人)이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當然)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異常)하다 하겠다.
당연(當然)한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본 것이 본심(本心)이다.
당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데는
아무런 재주나 기교(技巧)가 필요(必要)치 않다.
재주나 기교를 부리게 되면
도리어 사실을 비뚤게 보게 된다.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본 본심(本心)은
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
일체(一切) 티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고,
천진(天眞) 그대로 원래(元來)의 모습이다.
그런 자리에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이 붙어 있겠는가 ?
그래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思量分別)을
놓아 버리면, 본심(本心)은 보기 싫어도 보아지는 것이다
이 본심(本心)은 끝없는 과거(過去)와 끝없는
미래(未來)에 걸쳐 무한(無限)한 시간 속에
단 한 번도 생멸한 일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존재(存在)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時間)과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의 공간(空間)과
그 속의 모든 생멸(生滅)은
한 마음 속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본심(本心)에는
생사(生死)니, 번뇌망상(煩惱妄想)이니 하는 것이
붙어 있을 수가 없으나, 마음이 산란(散亂)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에,
어느 쪽 하나라도 결(缺)하면 온전하다 할 수 없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본심(本心)은
영지(靈知)이면 그대로 공적(空寂)이요,
공적이면 그대로 영지이니,
공적과 영지가 둘이 아니다.
공적과 영지를 둘로 보는 것은
영지가 되면 산란(散亂)하여 공적이 결(缺)하고,
공적이 되면 혼침(昏沈)하여 영지가 결하여
온전하다 할 수 없다.
수레의 양(兩)바퀴에 하나가 빠진 것 같아서
바로 나가지 못한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하나라야
참된(眞) 영지요, 참된 공적이라 하겠다.
참된 영지(靈知)는 지식분별(知識分別)이 아니니
공적이요,
참된 공적은 무기혼침(無記昏沈)이 아니니
영지인 것이다.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 아닌 공적과 영지가
원만(圓滿)한 마음이라야
심중(心中)의 혼침과 산란을 녹이고,
양륜(兩輪)을 갖춘 수레와 같이
똑바로 전진(前進)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열반(涅槃)의 언덕에 도달(到達)할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의 동(動)과 정(靜)에 있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하는 것은 뜻에 맡기고,
공적과 영지를 온전히 하면서
혼침과 산란을 녹여 가는 것이 수도(修道)일 것이다.
초심자(初心者)는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쉬우니,
동(動)과 정(靜)에 잘 조절(調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향(一向)에 동(動)해도 안되고,
일향(一向)에 정(靜)해도 안될 것이다.
수도(修道)가 숙련(熟練)되고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일체(一切)무애(無碍)가 될 것이다.
공중(空中)의 새가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날더라도
공중에 흔적(痕跡)이 남지 않듯이 !
- 지은이 지유(知有)스님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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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이란,
意識(생각)의 바탕을 意味한다.
意識없이 마음은 存在할 수 없다.
修道란
마음을 닦는 일이라 말했으면
먀음닦는 도구를 내놓으면 된다.
그러나,
수행도구는 없다.
현 불교계의 일체 수행도구는
일체가 意識的(생각)으로 되어있어 마음닦는 도구로써 맞지않다.
싯다르타께서도 본시 언어적 수행법을 전한바가 없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답하는 이심전심의 정법안장이 바로 傳法과정이다.
불입문자 언어도단의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참고하기 바란다.
筆者의 견해에 異意 있는분은
언제라도 답글을 환영한다.
함께 풀어야할
심각한 우리 중생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