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그림 전시회에서였다. 화가의 취향이 들꽃과 자연을 좋아해 단지에 꽂혀진 들국화나 갈대밭에 슬쩍 비켜 앉아 잠시 쉬는 듯한 배의 그림들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나를 세워두는 그림이 있었다. 먼 산이 보이는 비탈진 과수원에서 암회색의 둥치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며 서있는 듯한 한그루 사과나무였다. 미술시간에 나무를 그릴 때면 꼭 짙은 고동색으로 칠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기억속의 사과나무는 언제나 약간 우울한 회색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옷이나 생활용품을 고를 때 회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회색이라는 대답을 하게 된다. 그 그림 속의 사과나무에는 햇살 속에서 잘 익은 사과들 사이로 이파리 뒤에 한 알이 살짝 가려져 있었다. 순간 부끄럼 많고 목소리가 나직한 여인이 손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는 듯 했다. 그러자 그림 속에서 자연 풍경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던 그 나무가 말을 건네며 길고 긴 시간의 몸짓으로 내 유년시절을 만나게 해주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내 작은 키로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과수원을 했었다. 봄은 그 긴 과수원의 울타리에 하얀 탱자 꽃으로 만발하다가 향내를 풍기는 사과 꽃으로 옮겨가 앉아 가슴에 하얀 불을 댕겨다 주곤 했다. 그러다가 뻐꾸기가 울고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즈음이면 벌써 빨갛게 익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가 있었다. 빛깔도 유달리 곱고 홍옥이나 국광에 비해 당도가 높아 맛이 비교가 되었지만 품종이 귀해서였던지 한 두 그루 밖에 없었던 보리능금나무였다. 직접 경험하진 못했지만 힘들고 어려운 눈물고개였다는 보릿고개 자락에서 맛볼 수 있었던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우리들은 바람에 떨어졌거나 벌레 먹은 것들이 더 달고 맛있었기 때문에 나무에 달린 것에는 잘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상품의 값어치가 있는 것은 팔아야 된다는 의식이 잠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난 순서대로 밭으로 달려가 빈속에 새콤한 과일을 사각사각 씹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 때 마다 꼭 돼지우리 앞을 지나야만 했는데 자고 있다가 뛰쳐나올 일도 없었겠지만 사람 기척을 들으면 꿀꿀대는 그 돼지가 무서워 항상 그 앞에서는 긴 막대기로
땅을 탁탁 두드리며 빨리 뛰어가곤 했다.
할머니까지 계시는 대가족이다 보니 집에 손님이 끊길 날이 없었다. 우린 친척들이나 또래의 사촌들이 자주 들락거리니 좋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수발에 참 힘이 드셨을 것 같다. 그러다가 혹시 자고 가는 날이 있게 되면 손님 대접 한다고 주워온 빨간 사과를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옷에다 문질러 툇마루에 얹어 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저녁때가 되면 잠자리 시집보내러 가자는 제안을 언니들이 하게 된다. 땅거미가 내리면 잠자리들이 잠을 자거나 쉴 곳을 찾아 사과나무 가지에 앉게 된다. 자는 놈을 몰래 다가가서 날개를 잡고는 꽁지를 떼어 멀리 날려 보내곤 했다. 날지 못하면 일부러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고 잔인한 짓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많은 잠자리가 어디서 그렇게 날아오는지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 숫자가 줄어들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면 제풀에 지쳐 그 짓을 스르르 그만두어 버렸다.
사과나무는 알이 굵게 달리라고 일년에 한번쯤 꼭 전지를 해준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무들 보다는 키가 낮아 튼실한 가지를 골라 새끼줄을 매어 그네를 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 놀이가 지겨워지면 가지에 올라 앉아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책을 읽고 또 읽었었다. 그때의 내 수준에 맞지도 않았겠지만 너무 오래 되어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마 폼페이란 도시가 지진으로 폐허가 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두 남녀 주인공은 살아남는다는 해피 엔딩이 오래도록 나를 붙잡은 것 같다.
지금은 그 일들이 낭만적으로 생각이 되지만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땅바닥에 사과가 수없이 떨어져 뒹굴었다. 일손이 모자라 식구들이 거의 동원이 되었는데 부모님의 한숨소리와 함께 허리 구부려 흙 묻은 사과를 망태기에 주워 담아야 하는 그 일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바로 밑에 있는 포도밭의 토란줄기 밑에 숨어 들어가 포도송이에 박힌 잘 익은 것만 골라서 따먹으며 꾀를 부리기도 했다. 한참 일하다가 내가 없어진걸 알게 되면 꼭 둘째 언니가 자갈을 한웅큼 쥐고는 포도밭을 향해 던지거나 바가지로 도랑물을 막 퍼 대는 바람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포도송이 망친 것과 꾀부린 것 때문에 꾸중을 실컷 듣기도 했다.
그렇게 뜨거운 빨간 홍옥의 계절이 지나고 나면 국광의 계절인 가을이 오게 된다. 요즘 은 품종 개량이 되어 부사같이 맛있는 사과들의 종류가 많아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리 맞아 잘 익은 국광을 나무에서 금방 따 한입 성큼 베어 물었던 옛날의 그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따라갈 수가 없다.
더 추워져 얼기 전에 한해 농사지은 사과를 꼭대기에 까치밥만 뎅그러니 남겨 두고 다 거두어 궤짝에 넣어 차곡차곡 큰 지하실에 보관을 했다. 아버지께서 손전등을 들고 나무사다리를 타고 지하실로 내려가시는 날은 대구 장에 사과를 실어내시는 날이다. 조금 벌레가 먹었거나 팔기에 부족하다 싶은 것도 한 소쿠리쯤 들고 나오시기 때문에 그런 날은 모처럼 이가 시리도록 먹어 보기도 한다. 가끔씩 형제들이 만나면 어릴 적부터 산이 많은 사과를 너무 많이 먹어 다들 잇몸이나 이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한다.
그렇게 할일을 다한 사과나무는 다시 꽃피울 꿈을 꾸고 있는지 먼데 하늘을 보며 흰눈 속에서도 조용하고 꿋꿋하게 과수원을 지키고 서 있다. 어찌 보면 삭막하고 외로운 겨울의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희망의 봄을 기다리는 우리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살면서 사과를 싫어하거나 사과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많이 먹고 자란 탓도 있겠지만 신혼 시절부터 월급을 타게 되면 사과상자를 들이는 일에는 인색하지가 않았다. 사과를 너무 사랑해 그냥은 선뜻 칼을 대기가 민망해 칼등으로 툭 혼절을 시키고 항상 깎게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림 앞에서 사과와 고향의 향수에 오래오래 젖어 보았다.
첫댓글과수원집 따님이셨군요 어려서 사과를 많이 드셔서 그렇게 아름다우십니다. 어릴적 많이 먹던 홍옥 국광 오랫만에 귀한이름 들어봅니다. 작년 가을 홍옥이 비싸게 팔리고 있더이다. 반가워서 저도 샀습니다 빨간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한입 베어물면 새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전해지지요
첫댓글 과수원집 따님이셨군요 어려서 사과를 많이 드셔서 그렇게 아름다우십니다. 어릴적 많이 먹던 홍옥 국광 오랫만에 귀한이름 들어봅니다. 작년 가을 홍옥이 비싸게 팔리고 있더이다. 반가워서 저도 샀습니다 빨간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한입 베어물면 새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전해지지요
아, 저번에 같이 그림전시를 보았던, 선물로 받았다는 바로 그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뽑아내셨군요. .^^*
빨갛다 못해 검은빛이 도는 '홍옥' 정말 군침이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