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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漢詩 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蒙泉
제4회운곡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수정전)
[출처] 제4회운곡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수정전)|작성자 운곡
학회 제4회 학술대회
2004. 11. 5.(금) 운곡회관
발표논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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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논문 순서
1. 북원문화와 운곡 원천석 선생. 신경철 교수
2. 운곡 원천석의 증승시 연구 이정화 박사
3. 운곡 원천석의 불교인식 심재관 박사
4. 운곡 원천석의 처사적 삶과 의리정신 최광범 박사
5. 려말선초 사상계의동향 정호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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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原文化와 운곡 元天錫 선생
신 경 철 박사
(상지영서대학 교수)
1. 原州와 北原文化
原州는 산과 강이 적절히 어울려진 곳이어서 水陸 物産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왔고, 역사적으로도 원주는 고구려의 平原郡, 통일신라의 北原京을 거쳐 조선왕조 500년의 강원도 수부로서 중부지역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에도 교통이 가장 좋은 도시가 되어 강원도․경기도․충청북도의 3개도를 관할하는 중부 내륙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관계로, 원주는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여 많은 문화재와 유물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佛敎文化는 아주 번성하여 신라 10대 사찰의 하나인 비마라사가 원주에 있었다.1) 통일신라 때의 사찰만도 10여개가 전해오고, 법천사․거돈사․흥법사 등 여러 사찰지에는 국보와 보물,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2)
고유의 民俗信仰도 매우 흥성하여 치악산을 비롯하여 산자락마다 신앙의 터전이 되었다.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치악산신제를 비롯하여 산신제와 동제와 당신제를 지내는 마을이 지금도 많다. 골짜기와 산등성이, 큰바위와 거목들은 國泰民安과 國利民福의 축원과 統一을 비롯한 각종 기도의 터전이 되었다.3)
基督敎도 강원도에서 가장 일찍 들어와 풍수원 성당과 원주 성당과 용소막 성당이 연이어 건립되어, 원주지역은 기독교의 성지로 중심지로 크게 자리하고 있다. 고려말에 창건된 鄕校도, 조선이 건국되면서 서울 성균관 대성전보다 4년 뒤이고, 원주감영보다 82년이나 앞선 태종 2년(1402)에 재건되었다. 과거 급제자가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도 원주지역의 유학이 얼마나 흥했던가를 알 수 있다.4)
이처럼, 원주는 오래 동안 중부지역의 行政의 中心地요 軍事的 要塞地여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수륙 교통의 거점으로 産業․經濟의 集散地로 物産이 풍부하며, 學問과 宗敎․信仰이 크게 일어나 文化가 興盛하였다. 그러한 것들이 일상 사용하는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오래 동안 사용되어서, 횡성․평창․정선․영월 지역을 포괄하는 원주지역의 언어는 남다른 하나의 原州方言圈을 형성하고 있다.5)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들에서, 원주를 중심으로 한 강원 서남부 지역을 하나의 문화권, 北原文化圈(또는 원주문화권)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지역성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원주 지역이 생활과 학문의 중심지요, 종교와 문화가 흥성하고 주변에 파급하는 基地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강원도는 춘천․원주․강릉 세 도시가 삼발이 역할을 하며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선조로 春川은 의병장 毅菴 柳麟錫 선생을, 原州는 節士 耘谷 元天錫 선생을, 江陵은 대학자 栗谷 李珥 선생을 각기 내세워, 그들의 삶과 정신을 본받고 訓育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각기 세 거점 도시의 훌륭한 선조로 대표되면서, 또한 정신적으로도 忠義와 節義와 思想을 表象하고 있다. 강원도의 정신을 忠․節․學에서 찾고자 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6)
원주는 장래의 강원도를 이끄는 三角據點의 하나이다. 따라서 원주지역은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하나의 문화중심지로 계속 성장하여야 할 것이다. 문화를 소중히 하고 문화재를 보존 애호하며, 새로운 문화의 창조와 육성에 적극 힘써야 한다. 말로만 내세우거나, 과거의 문화를 자랑하는 것만으로는 발전하지 않으며, 이미 이룬 문화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기존 문화의 보호와 교육 보급, 새로운 문화의 창조와 육성, 문화의 생활화와 문화도시의 구축, 이것은 北原文化圈, 원주문화권이 확실하게 인정을 받고 또 자랑스럽게 되기 위한 확실한 지름길이다.
2. 耘谷 선생과 北原文化
文化는 精神에서 생성된다. 훌륭한 정신에서 훌륭한 문화가 나오고, 훌륭한 문화재와 우수한 예술품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原州는 忠과 節의 고장이다. 忠烈祠7)에 제향된 元冲甲․金悌甲․元豪 3분은 忠을 대표하고, 七峯書院에 제향된 元天錫․元昊․鄭宗榮․韓百謙 4분은 節을 대표하는 원주의 선조들이다. 강원도 三角表象에서 忠은 춘천의 것과 합치되며, 節은 원주를 대표하는 精神의 표상이다. 忠과 節은 둘 다 강원도 정신을 형성하는 핵심으로 우리의 민족정신과 직결된다.
특히, 耘谷 선생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인사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그것은 선생이 최고의 德目인 節義를 평생 동안 가장 확고하게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곡 선생의 삶과 정신은 곧 원주의 정신이요 강원도의 얼이며, 北原文化의 중요한 한 表象이다. 이에, 많이 거론되는 운곡 선생의 生活과 業績을 통하여 선생의 삶과 정신을 살피고자 한다.
(1) 운곡의 學問과 不出仕
선생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 7월 8일에 출생하였다.8) 6대조는 원주의 戶長이고, 고조와 증조는 倉正이고, 조부는 精勇別將으로 다 원주의 지방관리였다. 부친 允迪이 宗簿寺令(정3품)으로 중앙관서에 진출하여, 선생은 개성에서 태어나고 개성에서 자랐다.9) 儒學에 정진하여 젊은 나이에 해박한 學識과 훌륭한 文章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당시 실세의 한 사람인 이성계의 아들인 李芳遠[太宗]을 가르치게 되었다.10)
당시 유학자로 政界에 나간 사람들은 포은 鄭夢周와 같이 義理를 근본으로 삼는 파와 삼봉 鄭道傳과 같이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고 改革의 뜻을 가진 파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義理와 綱常을 존중하였고, 후자는 天命과 權變을 중시하였다.11) 강상은 規範的이고 普遍性이 바탕이니 어느 시대에나 두루 통하는 원리적 성격을 가지지만, 천명은 사회적 변동이고 권변은 시대적 요구 곧 時義로 변화와 흐름에 순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운곡 선생은 덕망 있는 젊은 학자이면서도 과거시험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圃隱이나 三峰처럼 자신의 理想을 실현하고자 현실에 뛰어들지를 않았다. 새로 등장한 신진 사류의 유능한 학자로 개혁파의 실권자인 李成桂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으면서도 선생은 출사하지 않았다. 權變에 따라 時義에 맞추어 자신의 뜻을 펼쳐 行勢하는 것보다 仁義와 綱常을 지키며 조용히 大義의 삶을 실천하고자 뜻한 것이다.
선생이 학문에 정진하고서도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에 응시한 것도12), 또 27세(1356)에 國子監試에 합격하여 進士가 되고서도 평생 出仕를 하지 않은 것은 학문을 하면서 형성된 선생의 思想과 精神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求官詩가 몇 편 발견되지만13),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을 한 사람이 자신의 뜻을 펴고 싶은 마음의 일단을 펴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는 學問은 곧 出仕로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의 節義의 삶은 儒學을 깊이 공부한 데서 비롯되고, 20대에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운곡 선생은 三隱보다 오히려 훌륭한 점이 있다고 하였다.14)
선생이 出仕하지 않고 평생을 節士로 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당시의 국내외의 시대적 狀況과 정치 사회적인 風土가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高麗는 이미 1276년(충렬왕 2년)부터 元 나라의 지시로 王으로 격하되었고, 王位도 임명하고, 元나라 공주와 결혼시키고, 수시로 왕과 세자․공주들을 원나라에 머물게 하였다. 수천의 군사와 공녀들, 수만 섬의 쌀과 말 등을 징발하였고, 戰艦을 만들어 일본을 합동으로 침공하였다. 고려의 國政은 엉망이 되었다.15)
外侵도 잦아서, 선생이 26세 때인 1355년 12월에 홍건적이 西京을 함락시키고, 1361년에는 홍건적 10여만이 내침하여 京城에 이어 原州가 함락되어 왕이 피신했다가 다음해에 귀경하였다. 倭寇도 21세 때인 1350년(충정왕 2)에 固城․巨濟에 침입한 뒤, 해마다 남해안과 전라도에 들어와 약탈과 만행을 저질러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16)
국내적으로도 21세인 1350년 이후 1363년 사이에 5차례의 반란이 일어나, 왕을 위협하고 관리가 피살되기도 하였다. 이에 王師 普愚는 漢陽 천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17)
중앙 권력층의 대립상도 격화되었다. 世臣居室들은 불교를 신봉하며 莊園을 소유하고 원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왕권을 지키려 하였고, 주자학을 공부한 新進勢力들은 人倫을 강조하고 신흥국가인 명나라와 가까이 하면서 私田 혁파를 비롯하여 개혁을 내세웠다.18) 世臣 세력은 崔瑩을 중심으로 이미 衰滅해가는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려 하였고, 신흥 세력은 李成桂를 중심으로 易姓革命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고 있었다.
운곡 선생은 신흥 세력의 처지였지만 개혁을 내세우며 無理와 不義도 감행하는 개혁파에 가담할 수 없었다. 不正과 腐敗가 심한 수구파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어느 편에 참여해도 義로운 삶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不義와 타협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出仕의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두 세력의 대결은 威化島 회군으로 신진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따라 義理와 綱常을 존중하고 고려왕조에 충성하고자 하는 崔瑩․鄭夢周 같은 부류는 신왕조를 창건하려는 李芳遠․鄭道傳 등에 의해 제거되고,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종결이 되었다.
이렇게 선생이 27세에 원주에 은거하기 전후의 高麗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內憂外患으로 국토는 황폐되고, 왕권은 신망을 잃고, 관리들은 부패하고, 국민은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 선생이 不仕를 굳히고 隱居하게 된 것은 이러한 혼란한 국가적 상황과, 부조리하고 무능한 官界, 참담한 사회적 현실에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선생은 儒學에 정진하여 明德․愛民․至善의 유교적 이상을 마음에 새겼고,19) 자신의 삶은 大義의 구현이라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政官界는 無道의 亂脈相에 역성혁명으로 내닫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허덕여도 貪官汚吏들이 설쳐대기만 하는 現實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현실을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한 뒤, 도연명의 전원생활과 董仲舒에 心醉하기도 했던 선생은, 현직에 나아가 의롭게 살려 했던 三隱(정몽주․이색․길재)의 삶을 보면서, 일찍이 품어왔던 理想 實現을 관료 정국에서가 아니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이루리라 결심하고 일찌감치 젊은 나이에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였던 것이다.
(2) 太宗 不面對와 尋訪
운곡 선생은 1356년(공민왕 4년) 1월에 27세로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를 시작하였다. 선생의 30대는 집안이 불행하였다. 32세에 딸이 죽고, 36세에 아들을 잃고, 39세에는 아내까지 사별하였다.20) 선생은 창창한 나이인데도 자녀들을 생각해서 재혼하지 않고 獨身으로 살았다. 이에 대해서 李墍는 “君子의 바람직한 태도”라 하였고, 李瀷은 “操履 있는 선비상의 구현”이라고 평가하였다.21) 43세(1372)에는 母親喪을 당하고, 46세에는 친형 원천상마저 세상을 떠났다. 한창 안정된 가정을 이룰 30대와 40대 중반까지 선생은 연이어 가족을 잃는 불행을 겪었다.
선생은 1374년 3월에 45세의 나이로 치악산 정상 부근의 弁巖에 거처를 정했다. 1387년 58세에는 치악산 서쪽 언덕에 松亭을 세웠는데, 병으로 다음해 2월에 無盡寺에서 요양을 하였다. 59세인 이 해 가을에 弁巖 남쪽 봉우리에 陋拙齋를 지어 살았으니 선생은 말년을 치악산 산속에서 홀로 산 것이다.
선생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행히 1100여 편의 詩가 전해와 시를 통해서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운곡시사의 기록에도 65세 때까지만 나와서 그 이후 행적은 찾을 수가 없다.
태종이 운곡 선생을 찾아온 것은 1401년이다. 조선 3대 임금으로 즉위한 태종은 학덕이 높은 스승이요 節義로 알려진 선생을 모시고자 했지만 선생은 응하지 않았다. 태종은 몸소 선생을 찾아 치악산에 행차하였다. 이 해는 선생의 춘추가 72세이다. 그러나, 선생은 피하여 태종을 만나주지 않았다. 태종이 선생을 “백이․숙제와 같은 류(夷齊之流)”라 하고, 귀경하여 2남 泂을 基川(豊基)監務에 제수하고,22) 覺林寺의 田園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태종을 만나지 않고 피한 것에 대해서 흔히 고려 왕조에 대한 義理와 조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師弟의 만남이지만, 현실적으로는 君臣의 邂逅인 점도 함께 자리를 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태종으로서도 重用을 뜻하기보다는 존경받는 연로한 옛 스승에 대한 예의적 차원에서의 尋訪이었을 것이다. 의롭게 사는 선생의 입장에서는 國政에 대한 조언이나 人間的인 만남에 앞서 面對 자체가 난감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義理에도 문제될 것이 없는 避身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不事二君23)보다는 “그의 스승이 되었던 사람은 신하로 삼지 않는다”24)는 大義를 따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1419년 태종이 上王이 된 뒤 특명으로 초빙하여 선생이 흰옷을 입고 入闕하여 태종을 拜謁하였다고 한다.25) 태종은 손자들을 불러들여 내 자손들이 어떠한가 물었다. 선생은 首陽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祖父(태종)를 몹시 닮았으니 모름지기 형제들끼리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26)
그런데, 1419년이면 선생의 춘추가 83세이니 上王 謁見은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때는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났으니 군신간이 아닌, 前王과의 사제간으로 만날 수 있는 일이다. 白衣를 입은 것은 고려의 遺民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避身에 대한 미안한 情誼와, 義理를 존중하는 선생의 삶과 정신을 나타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택당 李植이 “이 분이 綱常을 심어 그 말씀이 日月과 함께 영원하다.(斯人樹綱常 有言垂日月)” 하였고, 權近이 "고려 5백년 동안 敎化를 배양하여 선비들의 풍조를 격려한 보람이 모두 선생의 한 몸에 있었고, 조선 억만년의 綱常을 부식하여 臣節의 근본을 밝힌 것도 선생의 한 몸에 기초하였으니, 名敎에 있어서 그 공이 아주 크다"27)고 한 말이 綱常과 大義로 산 선생을 잘 평했다고 하겠다.
(3) 野史 記錄과 保存 당부
운곡 선생은 <野史> 6권(혹 藏書 7권)을 저술한 것으로 전해온다. 선생은 이것을 궤 속에 넣어 자물쇠로 세 번 봉하고, 임종 때 유언하기를 “家廟에 감추어 두되 조심해서 지켜라”고 당부하였다. 상자에다는 “내 자손 중에 나와 같은 자가 나오기 전에는 이 책을 펼쳐보지 마라”고 써 붙였다. 그런데, 曾孫이 열어보고 “이것은 우리 종족을 멸망시킬 물건”이라 하여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이 저술은 명칭이 ‘野史’였으니 역사적 사실의 기록일 것이다. 그리고 ‘家廟에 감추어 지키라’고 당부한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은 당시에 공개되어서는 매우 곤란한 것이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우왕과 창왕을 王孫이 아니라고 폐위하고 결국에는 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기까지의 여러 가지 사실들이 숨김없이 기록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후손들이 우리 家門을 멸망시킬 물건이라고 불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나와 같은 자가 나오기 전에는 이 책을 펴보지 마라”고 한 것으로 보아, 事實에 대한 선생의 批判과 主張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왕․창왕을 辛旽의 자손으로 몰아 내쫓은 것과,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 등 당시의 중요 사실에 대한 선생의 비판과 부당성 지적이 담겼을 것이며, 조선의 정통성까지도 是非하였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생의 논리와 주장이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읽었을 때 正史로 알려진 것과의 차이에서 오는 판단의 混亂이나 誤謬를 걱정하여, 자신과 같이 많은 학문을 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판별할 만한 사람이 나와서 史實을 바로잡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같은 자‘만이 읽으라고 제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 야사가 없어져버려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일들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오늘날에 전해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遺言하고 써 붙인 두 번에 걸친 선생의 깊은 配慮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새 왕조가 정착된 겨우 100년도 안 되는 시기에 열어본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大義를 최고의 德目으로 평생을 산 선생이기에 비록 出仕하지 않고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고 잘못 전해질까 하여 꾸준히 충실히 기록하고 비판까지 담아 6~7권 분량이나 저술해냈다는 것은 그대로 선생의 節義의 삶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4) 耘谷詩史와 그 內容
운곡 선생은 많은 시를 남겼다. <耘谷詩史>28)에는 1351년 22세 때부터 1394년 65세 때까지의 시들이 담겨 있다. 모두 737題에 1144首인데,29) 56세부터 65세 때의 것이 절반이 된다. 이 시사는 선생의 13대손인 元孝達이 종중의 사람들과 의논하여 찬동을 받아 출간하였다.30)
운곡의 시들은 선생의 삶과 사상과 情感을 읊은 것과, 국민과 국가에 대한 비평의식과, 愛國愛民의 마음을 노래한 것들이 담겨 있다. 운곡의 시는 “修道的인 것, 節義的인 것, 隱逸的인 것과 현실비평성, 愛民意識, 圓融會通的 사상, 민족자주의식 등이 특징”31)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선생의 詩의 내용은 節義의 인사나 훌륭한 관리, 가까이 지냈던 승려에 대한 것도 있고, 당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판적인 것도 다수 발견된다. 패륜과 불의는 용납하지 않았고, 현세를 떠나 은거하면서도 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고민과 갈등을 하며 시로 담아낸 것이다.32) 운곡시사의 서문에는 “나무꾼과 어부의 노래 가락과 섞여 있지만, 때로 宗廟와 國家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스며 있고, 마음속 회포를 담아 묘사하였다”33)고 적혀 있다.
퇴계 이황은 운곡시사를 읽고서, “이것은 歷史이다. 역사가 詩에 담겨 있으니 시가 전하여진 것만으로도 역사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찌 <野史>가 소실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상촌 신흠도 시가 비록 꾸밈이 없이 순수하고 사실에 있어 直筆로써 숨긴 것이 없으니, 정인지의 高麗史에 비하면 日星과 무지개만큼이나 현격한 차이가 있다며, “정도전․정인지 등의 曲筆로 된 史書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평하였다.34) 朴東亮도 강원관찰사 때 시사를 읽고서, 禑昌非辛說에 동감하고, 閉門한 운곡은 포은․야은과 함께 청백한 기풍과 숭고한 절개를 지닌 대표적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운곡행록시사 序)
이들은 대부분 선생의 요동 정벌에 대한 기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가짜 왕손이라며 퇴위시킨 것에 대해 걱정하며 정당한 왕위 계승을 강조한 것, 崔瑩의 처형에 그의 청렴강직과 나라 위하는 굳은 信念과 충성심을 찬양하고 이성계의 낯두꺼움과 장난질을 지적하며 애도한 것 등 선생이 역성혁명을 비판하고 신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시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선생의 정세 흐름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한 애국심과 의리 존중의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퇴계는 “국가 만세 후에 나는 운곡의 義理를 쫓겠다”고 하였고, 寒岡 鄭逑는 선생의 절의를 千古淸風으로 찬미하였다.(강원관찰사로 운곡 묘소 제사의 제문) 미수 許穆은 선생의 墓碣에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은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고 선생의 삶을 집약하였다.
운곡시사의 작품세계 역시 선생의 높은 大義 존중과 節義의 삶을 잘 담고 있다고 하겠다.
(5) 華海師全과 耘谷
운곡 선생은 <華海師全>이란 책을 남긴 것으로 알려겼다. 이 책은 고려말의 대학자인 申賢의 학문과 언행을 모아서 엮은 것으로, 儒學의 系統과 당시의 性理學을 理解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35)
화해사전(목판본)의 跋尾에 들어있는, 만들어지고 전해진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申賢의 본국(고려)과 元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여러 제자들이 수집하여 12권으로 편집하여 門徒들에게 전파하였는데, 普雨와 遍照(辛旽)가 찾아내어 모두 소각하였다.
申賢의 아우와 장손이 올린 상소가 문제가 되어 반감을 가진 權近․鄭道傳 등이 보복하며 책을 태우자, 鄭夢周․朴尙衷․金澍․李穡 등이 신현의 사적들을 다시 수집, 8권으로 묶어 <화해사전>이라 하고 정몽주가 考訂하였다. 뒤에 2권을 더 보태어 成思齋에게 편집하게 하였다. 밤을 타 치악산의 운곡에게 보내어 秘藏하게 하였다.
운곡은 伏厓 范世東과 함께 포은이 보내온 자료와 추가로 수집한 것을 편집하여 華海師全을 만들어 각기 한 질씩 소장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선생이 화해사전을 보완하여 전해준 것도 節義와 관련된다. 고려말의 대학자요, 많은 저명한 학자들의 스승인 申賢의 사적이 불살라지는 속에서 일부라도 건져내어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한 義理이고, 그것을 보완하고 잘 보존한 것은 맡겨진 信義와 함께 책의 중요성과 가치를 존중하는 節義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結 語
忠과 義는 올바른 삶의 기본 德目이다. 忠은 국가와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고, 義는 삶을 인간답게 해주는 최고의 가치 기준이다. 그러므로, 忠의 인사는 愛國者로 추앙하고, 義의 인물은 훌륭하게 산 先祖로 존경한다.
그런데, 義人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은 삶의 방식만 달랐을 뿐 大義에 충실한 면에서는 다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義人 : ① 義士 : 大義를 위해 不義에 抗拒하다가 투옥되고 죽임을 당한 분
신라 朴堤上, 死六臣, 三學士, 安重根 등
② 烈士 : 大義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써 大義를 나타낸 분
閔忠正公, 黃玹, 崔益鉉, 李儁 등
③ 節士 : 大義를 평생 삶으로 실천한 분
三隱, 耘谷, 杜門洞 72현, 生六臣 등
운곡 선생은 義人이다. 평생을 義를 굳게 지키며, 오로지 의롭게 산 義人이다. 특히 선생은 義人 가운데에서도 죽음으로써 항거한 義士나 自決로 義를 表出한 烈士가 아닌, 隱居하며 義에 충실하며 몸소 삶으로 실천한 대표적인 節士이다.
그런데, 節士는 은거를 한다. 벼슬을 하다가 은거를 하기도 하지만, 운곡 선생처럼 출사하지 않고 처음부터 은거 생활을 하기도 한다. 隱居는 亂世에 지식인들이 시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할 수 없을 때 취하는 삶의 한 방식이다. 義士와 烈士가 죽음으로써 義를 떨쳐 보인다면, 節士는 隱居하며 삶을 통하여 실천함으로써 義를 실현한다.
그러므로, 隱居는 단순한 退去나 隱逸의 삶이 아니라, 節義를 실천하는 義人의 삶으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은거는 반드시 사회적 결속과 관계와의 결별이나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36) 오히려 끊임없이 국가 사회의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비판하며 義를 내세우며 실천을 한다. “君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37)는 義人으로서의 삶을 산다. 다만, 그들은 不義나 問題의 핵심에 몸소 뛰어들거나 직접 참여하지를 않을 뿐이다.
옛 聖人도 道를 믿음이 독실하고 스스로 아는 것이 밝기 때문에 세상에 숨어살아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답답함이 없다고 하였다. 사람은 富貴榮華나 高官大爵 같은 것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義를 믿고 얼마나 굳게 지켰으며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義士나 烈士나 節士 같은 분들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운곡 선생은 學識과 德望을 갖춘 선비인데도 不仕하고 은거하여 평생을 義人으로 살았다. ① 43세에 喪配를 당하고서도 자녀들을 배려하여 긴 餘生을 독신으로 살았다. ② 역사의 眞實을 밝혀놓겠다는 史家的인 정신으로 <野史> 6~7권을 기록해냈다. ③ 不義의 세태를 鑑戒하는 著作과 한시 1100여수를 남겼다. ④ 제자인 太宗의 尋訪을 피신하고 上王 때 알현함으로써 君民의 忠節과 師弟의 義理를 의롭게 지켰다. 이와 같이 평생 동안 大義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산 사실에서 우리는 선생을 萬古의 義人으로 節義의 선비로 존경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義의 개념이 혼동되고, 義보다 힘의 논리가 앞서며, 이익과 목표 쟁취를 위해서는 不義도 저지르는 혼란된 사회에서는, 평생을 忠義와 大節로 일관한 운곡 선생과 같은 분을 다시 살피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가
굽은 節이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歲寒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松栢이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는 말이 있다. 선생이 지은 시조 한 수에서도 선생의 높은 節義가 넘쳐흐른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선생의 節義는 더욱 빛날 것이다.
文化에는 思想과 精神이 있고, 문화를 만들고 興盛하게 한 데에는 반드시 훌륭한 人物들이 있다. 耘谷 선생의 삶과 정신은 그대로 原州의 정신이요, 江原道의 얼이며, 대한민국 國民精神의 核이 된다. 原州의 문화, 北原文化의 정신도 바로 운곡 선생의 정신이 바탕이 되며, 선생의 삶이 그대로 北原文化, 原州文化의 모습이 된다. 북원문화를 再照明하며 운곡 선생을 살피는 뜻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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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耘谷 元天錫의 贈僧詩 硏究
李貞和 박사 (삼척대)
- 차례 -
Ⅰ. 들어가는 말
Ⅱ. 耘谷의 佛敎觀
Ⅲ. 贈僧詩의 시세계
1. 先覺에의 欽崇
2. 山林處士의 日省
3. 詩友와의 交感
Ⅳ. 맺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운곡 원천석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어가는 지점, 즉 우리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때의 역사적 증인으로 잘 알려진 분이다. 따라서, 그의 시집에서는 대체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와 같은 節義的 내용의 時調들이 널리 회자되어 왔다.
운곡시에 대한 연구사는 임종욱1)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또,『耘谷詩史』에 대한 완역작업까지 이루어진 상태여서2), 이제는 일반인들도 운곡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운곡시의 연구경향으로는, 치악산지역의 史蹟이나『耘谷詩史』의 題名에 근거를 두고, 그의 시세계 역시 麗末鮮初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직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3)
文, 史, 哲을 하나로 생각하였던 선인들의 정신세계에서 미루어 볼 때, 운곡의 시대에 대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문학 의식과 철학 사상이 모두 운곡을 이해하는 테마가 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그의 시들은 일상생활의 잔잔한 詩情을 읊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하여 양근열, 김호길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순수문학의 결정체들로 보기도 하였다.4) 본고는 운곡시의 문학성을 탐색하는 것을 연구의 핵심과제로 삼고, 그 당시에 운곡 스스로가 도성을 떠나 산속에서 승려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詩를 제작하였던 점에 착안하여, 이에 贈僧詩에서 나타나는 그의 문학 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耘谷의 佛敎觀
운곡은 종교를 믿고 그것을 포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儒, 佛, 仙에 두루 관심을 놓지 않은 유가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 그는 經世治民에의 이상적인 삶을 지향하고 靑雲에의 포부도 지녔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가 된 태종(太宗)의 스승이 바로 운곡이었다는 점에서도 이를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사회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역사를 응시하면서 점차 세상을 피하여 隱士로 살아가게 된다. 그의 유가적 삶은 대체로 固窮을 지키며 顔回를 回憶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5)
운곡은 그 당시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표가 崇儒排佛로 강하게 표방되었던 점과는 달리, 유, 불, 도의 정수는 모두 마음의 깨달음에 있다고 보았으므로, 각 문도들이 서로 배격하기 보다는 도의 이치를 구현하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 함을 주장하였다.
儒 유교
格物修身窮理玄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고 몸소 수양하며 깊은 이치를 찾아내니
盡心知性又知天 마음을 다하여 본연의 성을 알고 또한 하늘을 아네.
從玆可贊乾坤化 이로부터 천지가 化育하도록 도울 수 있는데
霽月光風共洒然6) 비개인 뒤의 달과 바람이 모두 상쾌하네.
道 도교
衆妙之門玄又玄 만물의 근원은 현묘하고도 현묘하니
眞機神化應乎天 진리의 기틀과 신비한 변화가 하늘에 응하네.
精修直到希夷地 그 정기를 닦아야 곧바로 希夷의 경지에 이르는데
水色山光共寂然7) 山水가 모두 적막하네.
佛 불교
一性圓融具十玄 하나의 원융한 성품이 十玄門을 갖추니
法周沙界氣衝天 불법이 사바세계를 둘러싸서 기세가 충천하네.
只這眞體如何說 저 진리의 본체를 말로 어찌 하리오
碧海氷輪共湛然8) 푸르른 바다와 투명한 달이 모두 맑구나.
會三歸一 세 분야의 이치들을 모으면 한 가지로 귀결되어
三敎宗風本不差 세 분야의 가르침엔 風化가 원래 다르지 않은데도
較非爭是亂如蛙 是非를 다툴 때는 개구리들이 우는 것처럼 소란스럽네.
一般是性俱無礙 한 가지 성품이라 모두 막힌 데가 없으니
何釋何儒何道耶9) 어떤 게 佛이고, 어떤 게 儒이며, 어떤 게 道란 말인가.
그의 산림생활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의 견해를 시화한 작품이 제작되기도 하는데, 위의 시들이 바로 그것이다.『大學』의 格物致知는 운곡의 <儒>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것은, 理는 사물마다 내재해 있는 것이며 사람이 그것을 窮究할 때에만 다만 그 物理의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며, 주관(心)의 인식 작용에 따라서 객관의 理가 心에게로 이른다는 뜻이기도 하다.10) 그는 ‘光風霽月( 비개인 뒤의 밝은 달빛이나 바람결처럼 상쾌하고 시원하다는 뜻)’에 빗대어, 儒道의 본질을 ‘洒然’이라 묘사하였다.
운곡의 <道>시는 老子가 “하나의 명칭마저도 없는 것이 천지가 시작되던 시기의 상태이며, 어떤 이름부터 생겨 만물의 어머니가 되었으므로, 언제나 마음을 완전히 비운 직관으로 사물의 미묘한 근원을 보며, 언제나 어떤 욕망이 있는 마음으로는 사물의 주변적 상황을 볼 뿐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근원에서 나와 이름만 달리 할 뿐으로, 한가지로 현묘하다고 일컫는다. 이는 현묘하고 또 현묘한 것으로, 만물의 근원은 이것을 통하여 나오는 것이다.”11)라고 한 것에 유래를 두고 있다. 운곡은 仙道는 본래 감각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들을 수도 없고(希), 볼 수도 없으며(夷), 잡을 수도 없는(微)의 것이 혼합하여 절대의 하나가 된 것, 즉, ‘希夷’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仙道의 본질을 운곡은 ‘寂然’으로 표현하였다.
한편, 운곡은 <佛>시에서 圓融會通의 이치를 강조하였다. 圓融會通性은 普照國師가 출가한 이후에 고려불교계가 점차 禪敎和會의 방향으로 바뀌면서 나타난 불교 적 경향이다.12) 운곡은 불교에서는 明心見性하면, 越死超生하고, 自利利人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고 하였다.13) 위의 시에서 운곡은 佛道를 不立文字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말, 글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도가 전해져 깨달아야 한다고 하는 不立文字의 이치를 말하였다. 운곡은 ‘湛然’한 마음, 곧, 때 묻지 않은 맑은 마음이 佛道의 본질이라 하였다. <佛>시에서 ‘十玄門’은 모든 법이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하나를 취하면 어느 것이든지 모두 全一의 관계로 된다는 인식을 기초로 한 法語다. 佛家에서는 月印千江의 이치를 중요시하는데, 위의 시에서도 釋迦의 光明함을 달(‘氷輪’)에 비유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이 맑으면 부처가 이에 응하여 나타나는데, 그것이 마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는 것이다.
운곡은 위의 시들을 통해, 세 종교의 특징을 각각 ‘洒然, 寂然, 湛然’이라고 비유하여 유, 불, 선이 화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道의 餘地를 마련하였다.
위의 시들 가운데 <會三歸一>시를 보면, 왕조교체기인 그 당시에 건국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오는 혼란상이 그려지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키려는 節義精神을 초점으로 하여 해석하기도 한다.14) 운곡이 이 시에 幷記한 序文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여여거사는 삼교일리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 성인은 함께 나서 두루함이 있으니 바른 가르침으로 주장을 삼았다. 유교는 窮理盡性(이치를 궁구하여 본성을 다하는 것)으로 가르쳤고, 불교는 明心見性(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는 것)으로 가르쳤고, 도교는 修眞鍊性(참됨을 수련하여 본성을 단련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 이로써 본다면 세 성인이 가르침을 베푼 것은 오로지 治性(그 성품을 다스림)으로 하였으니, 이른바 盡性이나, 鍊性이나, 見性의 도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지극하고 맑고 맑은 곳으로 돌아가면 모두 하나의 性이니 무슨 막힘이 있겠는가. 다만 세 성인에게는 각각 문호가 있어 뒤의 문도들이 각각 종지에 의거하여 모두들 자기를 옳다고 하고 남을 그르다고 하는 마음으로 속이고 헐뜯으니, 사람마다 가슴 속에 세 종교의 性이 밝게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나귀를 탄 사람이 다른 나귀를 탄 사람을 보고 비웃는 격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따라서 네 절구를 지어 거사의 뜻을 잇는다.15)
여기에서 운곡은 불교를 배척하느라고 혈안이 된 儒者들의 목소리를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대어 비판하였다. 그러한 유자들 가운데 정도전의 경우를 보면, 오직 유교적 입장에서만 불교를 비판하고 있어서 반대를 위한 반대이론을 말하기도 하였으며, 유교와 불교는 상통하는 이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부정하기 위하여 공자의 교훈까지도 부정한 결과를 초래한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6) 운곡은 生前에 이미 程子, 周子와 비견할만한 분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碩學이었으니, 운곡 역시 同榜及第한 삼봉의 변론에서 논리적인 오류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교신자였던 李穡마저도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려 당대에 사찰에서 벌어지는 민폐의 실상을 고발할 정도로 불교가 부패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승려와 불자들이 세속적 욕망을 끊고 불법에만 충실하여 사찰이 청정도량의 원칙을 유지하였다면, 사대부들의 비판이 이와 같이 거세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곡의 시대에는 斥佛論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곡과 마찬가지로 三敎의 화해와 공존을 강조한 지식인으로는 涵虛和尙을 들 수 있다. 그는 세 종교는 솥의 세 발과 같이 공존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삼교의 도가 모두 마음에 근본을 두고서 유교는 드러난 마음을, 불교는 그 진을 추구하는데, 도교는 그 두 가지 가운데 걸쳐 있다고 보았다.17) 이와 같이, 운곡과 함허화상은 세 종교를 포용하는 거시적이고도 통합적인 사유인식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운곡의 경우, 다음의 글을 통해, 참된 佛道의 구현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淸風軒 신원 스님은 溪月軒 無學 大師의 문도인데, 호는 寂峰이며, 뜻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어느 날 나를 찾아 와 말하였다. “우리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江海에 노닐고 산천에 다니면서 스승을 찾아 道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行脚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나옹 선사로부터 불법을 이어받으셨으니, 저는 나옹 선사의 손자가 됩니다. … 저도 남방에 노닐면서 선사들께서 유람하시던 자취를 한번 보고 평생의 뜻을 이루어 볼까 하여 지금 떠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대답하였다. “ … 나옹 선사께서는 大道에 뜻을 두셨기 때문에 그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홀로 만 리를 유람하시며 밝으신 스승을 찾아뵙고 宗旨를 밝히셨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스님의 뜻이 곧 나옹 선사의 뜻입니다. … 그 敎를 끝까지 연구하고 道를 사모하는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의 이번 유람은 선사께서 깨달으신 곳에 歸敬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실로 승려로서의 뜻을 이루는 행각입니다. 헤어지는 마당에 저의 구구한 정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원 스님의 그 뜻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그 행각을 장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써서 路資로 드린다.18)
위의 글을 보면, 운곡은 懶翁 禪師의 학문적 손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신원스님과 더불어 나옹 선사의 行脚에 대해 對談하고 있다. 나옹 선사는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生에 대한 의문이 생겨 출가하였는데, 고려는 물론, 중국의 강남지방을 다니며 行脚하였다.19) 운곡과 스님의 대화를 통하여, 진정한 佛弟子가 되는 길이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원스님이 만 리길의 행각을 다짐하는 까닭은 밝은 스승을 뵙고 佛學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함이다. 운곡의 안목은 신원스님이 곧 부패되어가는 伽藍을 일으킬 불제자의 자질까지도 직감하고 있다. 운곡의 기대감은 이러한 승려들이 있어야 만이 나옹 선사와 같은 高僧大德의 修行方式이 계승되어 善知識의 大道가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운곡은 세상의 혼탁함을 救濟할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Ⅲ. 贈僧詩의 시세계
운곡은 혼탁한 세상에서 때 묻히기를 싫어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치악산 아래에 숨어 살면서 산수자연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시화하는 등 介潔한 선비로 살았다. 그의 江湖自然에서의 삶은 立身揚名을 기다리기 위한 假漁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시에서는 淸澄無垢한 자연의 모습이라든지20), 簞瓢로 영위하는 졸박한 생활이라든지, 학문으로 나날이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학자의 삶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비단 원주지방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로만 인식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후로도 京鄕의 儒林들에게 강직한 선비의 모범으로 각인되어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또, 운곡이 제작한 贈僧詩를 음미하면, 그의 삶과 시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증승시에서는 불, 유, 도를 모두 품에 안은 스케일이 큰 대장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운곡은 불교를 믿기 때문에 스님들을 공경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른 스님의 道를 尊慕하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그는 비록 儒者라 할지라도, 유학 이외의 다른 학문에 대해 편협하지 않았다. 佛敎, 道敎로 깨달음에 이른 경우, 그는 다른 儒者들처럼 그것을 이단으로 매도하지 않았으니, 도는 모두 하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 先覺에의 欽崇
운곡이 거처했던 치악산 지역은 如前히 구룡사, 영천사를 비롯하여 千年古刹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곡의 시대에, 원주지방에서는 치악산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사찰들이 高僧大德을 모시며, 호국불교의 도량이자, 선방으로 자리하였었다. 이 지역을 왕림하게 된 고승들이 隱士로 살아가는 운곡과 교유하였던 사실은 운곡의 인품을 염두해 볼 때 그에게는 예사로운 것이었으며, 그의 증승시는 그들과 교유하며 영위해간 삶의 편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에서는 先覺의 스님들에게 기꺼이 欣慕하고 공경하는 정감이 표출되어 있다.
次道境詩韻 도경 선사의 시에 차운하여
師本曹溪翁 스님은 조계종의 원로이시니
好飡法喜食 법희식을 드시기 좋아하시네.
無訂亦無修 고치실 것, 닦으실 것 또한 없으셔서
善因曾所植 선근을 일찍이 심으셨네.
於四威儀中 가실 때나 머무실 때나 좌정하실 때나 누우실 때
正念不消息 바른 생각 잠깐이라도 놓으시지 않고
端坐悟眞如 반듯하게 앉으시어 진여를 깨달으셨으니.
虛閑是六識 六識 모두 비우셨네.
差予欲何爲 아아, 나는 무엇을 하려고
此理未純熱 이러한 이치를 익히지 못했던가.
役役苦河中 괴로움의 바다에 돌아다니면서
瀾漫且狼藉 지리한 생활만 계속해왔네.
常隨眼耳根 언제나 눈과 귀에 따라
局於聲與色 성색에만 얽매었었네.
願師垂一言 스님께 한 말씀 내려주시기 바라오니
實相從何得21) 실상을 어디에서 얻어야 할지요.
위의 시에서, 시적 대상인 도경 선사는 가지산문계통의 禪僧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운곡은 선사들과 더불어 議論을 주고받을 정도로 佛家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춘 분이었다. ‘法喜食’, ‘善因’, ‘四威儀’, ‘正念’, ‘眞如’, ‘六識’, ‘苦河’, ‘眼耳根’과 같은 불가의 용어들을 시어로 거침없이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의 핵심은 ‘眞如’에 있으며, 이는 곧 六根淸淨한 ‘實相’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위의 ‘眞如’를 細分하여, 얽매어 있는 진여와 얽매임을 벗어난 진여로 인식하는데, 단정하게만 앉아 있다고 하여 결코 얽매임을 벗어날 수 없으니, 定慧의 힘으로 자기마음을 밝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22) 위의 시에서 운곡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六根이 작용하는 色, 聲, 香, 味, 觸, 法의 六識과 같은 얽매임을 벗어난 진여의 경지에 바로 도경 선사가 도달하였음을 우러르고 있다.
次道境詩韻 도경 선사의 시에 차운하여 쓴 시(2)
由來達士自懷珍 원래부터 현달한 선비는 스스로 보배로움을 지녀
雖在塵間逈脫塵 티끌 속에 있어도 티끌을 벗어나네.
富貴多憂貧賤苦 부귀하면 근심 많아지고 빈천도 괴로우니
一生長羨臥雲人23) 일생동안 부러워하네, 구름 속에 누워 사는 사람을.
起句와 承句에서는 운곡은 먼저 도경 선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持論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轉句와 結句를 통해 자신의 지론대로만 100%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의 회한을 드리우고 있어서, 이 시의 안짝과 바깥짝은 서로 대비되어 있다. 그것을 통하여, 삶의 항로는 부귀를 지향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두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일찍이 아내와 사별을 한 후에 홀로 자제들을 길렀다는 일화 속에서도 삶의 波瀾曲折을 읽을 수 있다.
시상의 중심은 結句로 귀결되고 있는데, 그는 선사를 ‘臥雲人’이라고 別稱하고는 凡俗하지 않은 선사의 풍격을 우러르게 된다. 운곡에게도 삶이 苦海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며, 그럴 때에는 속세의 번민을 잊기 위해, 한번쯤 도경 선사를 생각하며 超逸의 경지를 꿈꾸어 보기도 했으리라 생각된다.
答黙言宏上人 묵언 굉 상인께 답례하며
兀然端坐黙無言 우뚝 꼿꼿하게 앉으신 채 묵묵히 말씀 없으시니
此是維摩不二門 이것이 바로 유마힐의 불이문(不二門)의 이치일세.
一顆明珠光始現 밝은 구슬 한 알이 광채를 보이니
十方無礙大平痕24) 시방세계 막힌 데 없이 태평세상 이루신 흔적이네.
위의 시에서 운곡이 오로지 欽羨하는데에만 마음을 쓴 굉 상인은 치악산의 산봉우리에 無住庵을 세운 禪僧으로도 알려진 분이다. 산봉우리를 택하여 절을 지을 뿐만 아니라, 黙言의 방식으로 修道를 하기도 하였던 그의 삶은 苦行의 연속이다. 이와 같이, 불도를 사수하려는 굉 스님의 치열한 삶이 운곡의 詩心에 와 닿았을 것이다. 묵언수행으로써 부처의 경지를 깨닫겠다는 굉 상인의 목표는 維摩居士가 체득한 ‘不二門’의 이치를 몸소 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는 말로써 전해질 수 없는 불법을 깨닫기 위해, 직접 도의 세계를 들어가는 굉 상인의 적극적인 구도 자세에 초점을 두고 있다. 유마거사는 비록 出家하지 않았어도 불도에 전념하여 여느 불제자들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거사의 수행방식 또한 널리 전파되기도 하였다. 운곡은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굉 상인의 정신력이 유마거사의 佛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2. 山林處士의 日省
人跡이 드문 窮鄕에 살면서도 나날이 시를 쓰며 자신의 행실에 대해 반성하였다는 점은 바로 산림처사인 운곡의 眞面目을 확인케 한다. 그의 증승시 중에는 언제든 만날 수 있는 比隣이어서 더욱 친분이 두터웠던 스님들로부터 야채나 과일, 술을 받았을 때에 제작된 것들이 있다. 여기에서 운곡은 그분들에 대한 細情을 표출하는 것으로 詩想을 멈추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날그날의 自省을 담아 그분들을 禮待하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다.
幽谷宏師前以水芹見惠 今復惠瓜 詩以謝之
유곡 굉 스님이 전에 미나리를 주셨는데, 이번에 다시 오이를 주시므로 시로써 이에 사례하며
往日連連惠水芹 지난 날, 미나리를 계속 보내주셨는데
摘瓜今復寄寒門 오늘은 오이 따서 가난한 집에 보내셨네.
莖莖昔作靑絲食 지난날엔 마디마디 푸른 실을 먹더니
箇箇今將碧玉呑 오늘은 알알이 푸른 구슬 삼키게 되네.
再度有心澆我渴 번번이 마음 쓰시어 나의 갈증을 삭여주셨는데
一生無計報師恩 일평생 스님의 은혜에 보답할 방도가 없네.
啖終懷抱淸如鏡 오이를 먹고 나자 마음이 거울같이 맑아지니
坐看南山控小軒25) 작은 헌함에 비껴 앉아 남산을 바라보네.
운곡이 山中生活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바로 가까운 이들과 人情을 나누는 것이었다. 위의 시는, 菜農하는 스님이 운곡에게 布施한 菜果들이 계기가 되어 지어졌다. ‘靑絲’와 ‘碧玉’ 같은 푸른 채소들이 善事하는 맑고 깨끗한 味感을 ‘淸如鏡’에 담아 스님에게 贈呈하는 정황은 운곡 자신이 淸流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이 시에서 그날그날의 성찰하는 모습을 빼놓지 않고 있으니, 尾聯이 그러하다. ‘南山’을 바라본다는 말은 자연에 뜻을 둔 자신의 마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점은 陶淵明이 田園에 대한 志趣를 읊은 시들 가운데 유독 ‘南山’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과도 연관되어 있다. 즉, 운곡의 자연취향은 도연명의 그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又謝沈瓜 또 스님께서 보내주신 침과에 대해 사례하며
無人見訪簞瓢巷 簞瓢로 살아가는 누추한 집을 찾는 이가 없는데
有物來從松桂門 소나무, 계수나무에 둘린 山門으로부터 이 침과가 왔네.
甘脆數枚曾細嚼 달고 연한 것 몇 개 조금씩 베어 물다가는
舑酸一榼又全呑 달고 신 맛에 한 통 전부 먹어치우겠네.
已痊渴病兼飢病 소갈증과 굶주려 생긴 질병마저도 이미 다 나았으니
深感天恩與法恩 하늘의 은혜와 법의 은혜를 가슴 깊이 느끼네.
擬欲共師同飽炙 스님과 더불어 배불리 구워 먹고자 하니
宜須淨備掃茶軒26) 다헌을 掃除하여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게.
위의 시에서, ‘簞瓢巷’은『論語』「雍也」篇의 “一簞食一瓢飮在陋巷”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것은 孔子가 顔回의 安貧樂道하는 정신을 들어 어질다고 격찬한 대목에 실려 있다. 안회처럼 固窮의 지키는 운곡의 모습은 도연명의 託傳 대상인 五柳先生과도 흡사하다. 시적 화자인 운곡 역시 <五柳先生傳>의 “環堵蕭然 不蔽風日. 短褐穿結 簞瓢屢空 晏如也. 常著文章自娛 頗示己志. 忘懷得失. 以此自終.”27)에서와 같이, 청렴결백한 인격을 함양하고 있다.
簞食瓢飮으로 지내어 飢渴(‘飢病’, ‘渴病’)까지 들었다가, 어느 날, 스님으로부터 귀한 과일을 받게 되자, 마침내 그는 감사드리는 마음에서 詩心을 가다듬게 된다. 하지만, 운곡의 詩想은 여기에서 멈추고 않고, 詩佛 王維의 詩境으로까지 확대되어 있다. 즉, 위의 시는 왕유가 “世事浮雲何足問, 不如高臥且加餐”28)이라고 하여, 세상일 뜬구름만 같으니 물어 무엇하랴. 조용히 지내며 맛있는 것 맘껏 먹느니만 못하다고 읊은 것과도 그 意想이 상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운곡은 스님에 대한 禮待를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雨中謝靈泉堂頭送酒 빗속에 술을 보낸 영천사 당두스님께 사례하며
落花春檻雨霏微 꽃이 지는 봄 난간에 보슬비 내리는데
病客無聊獨掩扉 병든 나그네 쓸쓸하여 홀로 사립문을 닫았네.
廬岳一壺來慰寂 여악(廬岳)의 술 한 병이 외로움을 달래주니
陶然身世㧾忘機 얼근해져 이 내 몸은 기심(機心)을 모두 잊어버렸네.
嫣紅掃盡狂風際 거센 바람 불더니 붉은 꽃 다 쓸어버리고
嫩綠初均小雨餘 가랑비 지나가자 고운 잎새 푸르러지네.
賴此麯生攻萬恨 이 술에 의지해 모든 한을 가다듬었으나
惜春新句等閑書29) 봄을 아껴 새로운 시구 무심히 지어보겠소.
이 시는 원래 詩題의 오른쪽에 ‘覺林寺時也’가 별도로 附記되어 있다. 각림사는 치악산에 있는 절인데, 太祖 李成桂가 독서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운곡은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山寺를 찾아가서 학문에 정진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위의 시는 이 때에 지어진 것이다. 치악산 영천사의 당두스님이 운곡에게 보낸 술을 통해, 그들이 僧侶와 處士라는 마음의 거리를 두지 않고 人情을 나누며 지냈음을 알 수 있다.
杜甫가 <曲江>시에서 “一片花飛減却春 風飄萬點正愁人. 且看欲盡花經眼 莫厭傷多酒入唇. … 細推物理須行樂 何用浮名絆此身”30) 이라고 한 것처럼, 운곡의 마음은, 지는 꽃잎이 많음을 가슴 아파하여 술잔을 기울이는 두보의 그것과 같다. 또, 운곡이 술로써 뜬구름 같은 명리(‘機心’)를 잊는다고 한 것도 역시 이 <曲江>시에 근거를 둔 것이다. 機心을 버려 마음의 티끌이 없이 사는 것은 스님과 운곡 모두가 지향하는 바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두보시의 意想을 담아 티끌 없는 마음으로 스님에게 禮待하고 있다.
3. 詩友와의 交感
운곡의 증승시에서는 禪僧들의 깊은 學德을 잊지 않아 항상 以心傳心으로 그분들과 교감하고 있음을 밝히기까지 한다. 즉, 자신의 詩心을 헤아려주는 스님에게는 別離의 정감을 路資로 드리는가 하면, 竹林 속에서 詩僧과 의기투합하기도 하며, 그리운 스님에게 시를 부칠 수밖에 없는 悲傷한 심정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寄道境大禪翁丈室 도경 대선옹의 장실에 보내며
桑林椹多熟 뽕나무에는 오디가 많이 열렸고
栗樹花已垂 밤꽃도 이미 늘어졌네.
巢鷰盡離乳 둥지의 어린제비들 모두 젖 떼었고
箔蠶初引絲 박에 오른 누에들은 실타래 만들 준비 시작하네.
行看物像變 사물의 현상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니
却嘆光陰移 세월의 바뀜에 문득 탄식하게 되네.
人世恰如寄 인간 세상에 마치 붙어사는 것 같아
吾生良可悲 우리의 삶이 정령 슬프다네.
悠悠長慘感 언제나 서글픔 느끼면서
役役幾奔馳 사방으로 허덕이며 돌아다니네.
勝地難容足 경치 좋은 곳에는 발 디디기 어렵지만
幽居欠蹙眉 숨어 살다보니 눈썹 찌푸릴 일 없네.
未除塵土累 티끌세상 얽매임을 벗어나지도 못하고서
空懷水雲奇 부질없이 물과 구름 찾아다니네.
欲往終無計 가고 싶어도 아무 계획도 없고
重遊早失期 거듭 놀러 가려 해도 때는 이미 놓쳤네.
徒然消永日 하는 일 없이 긴 나날을 지내다가
倏忽過良時 좋은 시절마저 돌연 지나쳤네.
舞蝶斯予拙 춤추는 나비는 나의 졸함을 비웃고
鳴蜩訴我癡 우는 매미는 나의 어리석음을 부르짖는구나.
相將千斛恨 모두들 천 섬이나 되는 한을 지녀
題作一篇詩 이 한 편의 시를 짓게 하네.
奉寄禪床下 선옹의 책상 아래에서 받자와 올리노니
此心須細知31) 이 마음 응당 헤아려 주시기를.
韓退之의 말을 따르면, 하늘은 사계절의 때에 맞게 잘 우는 것을 골라서 그것으로 하여금 울게 하는데, 사람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伊尹은 殷나라에서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어 울었고 周公은 周왕조의 기초를 다지고 예악을 제작하는 등 周나라에서 큰 업적으로 울었다.32) 위의 시를 보면, 운곡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시를 지어 울었다고 생각된다.
운곡은 하늘이 나타내 보이는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찰나적인 인생 역시 죽음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비애감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심정을 담은 시를 도경선사에게 부쳤는데, 선사는 운곡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比隣이었다. 또, 선사는 운곡의 시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승려이기도 하다.
운곡이 ‘桑林’, ‘箔蠶’ 등으로 序頭를 연 것은 도연명이 <歸田園居>에서, “相見無雜言 但道桑麻長.”33)이라고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운곡 역시 청정한 마음으로 詩友로써 선사와 交感하고 있다고 하겠다.
天台演禪者 將赴叢林 自覺林寺來過余 觀其語黙動靜 甚是不凡 雖當釋苑晩秋 將是以復興其道 臨別需語 泚筆以贐行云
천태 연 스님이 총림에 가시다가 각림사를 지나게 되어 나를 찾아오셨다. 스님의 언사가 묵묵하시고 거동이 진중하심을 보게 되었는데, 매우 범상치 않으셨다. 비록 불교가 쇠락해가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장차 불도를 다시 일으키실 것이므로, 이별하는 마당에 시 한 수를 지어 붓을 적셔 노자로 드린다.
禪門絶名相 禪家의 宗門에서는 이름과 모습을 다 끊었으니
閫閾本幽深 그 문턱이 본래 그윽하고 깊었네.
祖脉傳台嶺 祖師의 맥은 台嶺에서 전했고
宗風隔少林 종단의 風儀은 少林을 격했네.
應吹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를 불기도 하고
閑弄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를 타기도 했으니.
此別何須恨 오늘의 헤어짐을 어찌 한하겠는가
不同塵土心34) 속세의 마음과 같지 않네.
餞別하며 주는 詩를 路資라고 비유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운곡과 스님의 교유는 이미 예사로운 교분이 아니라 하겠다. 이 시의 제작 동기는 각림사로 향하는 도중에 방문한 스님에 대한 禮待때문이다.
‘絶名相’, ‘無孔笛’, ‘沒絃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서 그가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幽深’한 無의 경지다. 이것은 그가 스님에게 심정적으로 한층 더 다가가려는 배려에서 지어진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般若心經』을 보아도 거의 無에 대한 法語로 구성되어 있듯이, 佛道가 심오하게 여겨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無와 空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頸聯과 尾聯에서는, 오늘의 相見은 세속적인 생각으로부터 超逸한 만남이므로, 운곡과 스님의 교감이 이루어진 것임을 보이고 있다.
次宋獻納(愚)上興法丈室詩韻 헌납 송우가 흥법사 장실에 올린 시에 차운하여
無念亦無證 생각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는
大慈仍大雄 큰 자비로움이시고 큰 웅혼함이시네.
寫經興妙法 寫經을 하시어 오묘한 법도를 흥기하시고
揮塵播眞風 총채를 휘둘러 참된 風化를 퍼뜨리시니.
禪翁稀世上 세상에서 드문 선옹이시며
詩客間時雄 시대에 뛰어난 시객이시네.
相對論懷處 서로 마주하여 회포를 나누는 곳
茶烟颺竹風35) 차 끓이는 연기가 竹林의 바람 속에 피어오르네.
위의 詩題에 소개된 흥법사는 원주시 지정면에 있는 절이다. 이 시에서, 운곡은 이 절의 장실스님이 知行合一을 실천한 것에 感化되어 있다. 즉, 스님은 禪僧이기는 해도 面壁修行만 하지는 않았으며 풍속의 교화에 주력하였으므로, 이러한 정신을 우러르고 있다.
또, 스님은 詩僧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운곡은 俗氣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스님의 시정신에 교감하고 있다. 이 시의 ‘竹風’은 속기가 사라진 고결한 정신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竹林에 淸談으로 모인 老莊的 시인들로부터 사대부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동양정신의 상징적 코드로 인식한 것이 바로 ‘竹’이다. 위의 시는 蘇東坡가 <于潛僧綠筠軒>시에서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36) 라고 한 것과 그 意想이 상통한다. 소동파는 대나무가 없으면 속물이 되기 마련이며, 俗病이 든 선비는 고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소동파가 대나무 시를 지어 우잠 고을의 惠覺 스님과 교유하였듯이, 운곡은 대나무의 기상을 읊으며 고결한 마음으로 스님과 의기투합하고 있다.
Ⅳ. 맺는 말
지금까지 본론에서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贈僧詩를 제작한 운곡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불교관을 살펴보았다. 운곡이 이해한 불교는 明心見性하면, 越死超生하고, 自利利人할 수 있다는 데에 핵심을 두고 있다. <會三歸一>시를 통해, 운곡은 왕조교체기인 그 당시에 건국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오는 혼란상을 극복하는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즉, 그는, 유, 불, 선의 정수는 모두 마음의 깨달음에 있다고 보았으므로, 각 문도들이 서로 배격하기 보다는 도의 이치를 구현하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洒然’, ‘寂然’, ‘湛然’을 읊조리면서 유, 불, 선이 화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道의 餘地를 마련하고 있다.
先覺을 欽崇하기 위해 지어진 시들 가운데, 詩題가 <次道境詩韻>인 것들은 六識과 같은 얽매임을 벗어난 도경선사의 풍격을 음미한 작품이다. 그리고, <答黙言宏上人>시에서는 굉 상인의 정신력이 유마거사의 佛心과 다르지 않음을 칭송하고 있다.
그날그날의 自省을 담아 禮待하는 모습을 보이는 작품들도 있는데, 푸른 채소들이 善事하는 맑고 깨끗한 味感을 ‘淸如鏡’에 담아 贈呈하는 시(<幽谷宏師前以水芹見惠 今復惠瓜 詩以謝之>)와, 簞食瓢飮으로 지내어 飢渴까지 들었다가 스님으로부터 귀한 과일을 받게 된 날의 感應을 읊은 시(<又謝沈瓜>)가 그러하다. 또, 杜甫詩의 意想을 담아 티끌 없는 마음으로 스님에게 禮待하는 시(<雨中謝靈泉堂頭送酒>)도 있다.
운곡과 스님 모두 詩友가 되어 교감을 이루는 시들에서는, 자신의 詩心을 헤아려주는 스님에게 別離의 정감을 路資로 드리는 시(<天台演禪者 將赴叢林 自覺林寺來過余 觀其語黙動靜 甚是不凡 雖當釋苑晩秋 將是以復興其道 臨別需語 泚筆以贐行云>)와, 그리운 스님에게 인생무상의 悲哀感을 감추지 않은 시(<寄道境大禪翁丈室>), 그리고, 대나무의 기상처럼, 超逸한 마음으로 詩僧과 의기투합하는 시(<次宋獻納愚上興法丈室詩韻>)가 있다.
운곡은 불교를 믿기 때문에 스님들을 공경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른 스님의 道를 尊慕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그의 贈僧詩를 통해, 불, 유, 도를 모두 품에 안은 스케일이 큰 대장부가 바로 운곡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삶과 시를 아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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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곡 원천석의 불교 인식
심재관 박사 (강릉대)
1. 이끄는 말
필자의 고향은 원주로, 범학(梵學)과 불학(佛學)을 본업으로 하고 있던 차에, 운곡의 학문세계를 논의할 수 있게 된 인연을 얻게 되어 남다른 기쁨이 있다. ꡔ택리지(擇里志)ꡕ에서 표현한 바, 원주는 산협이 있어 유사시에 피해 숨기 쉽고 무사할 때는 서울로 나갈 수 있는 까닭에 많은 사대부들이 이곳에 살기를 즐겨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원주에서 지냈던 역사속 은일(隱逸)의 인물들을 이러한 원주의 지리적 특성과 연계지었던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운곡도 필자의 머리 속에서 단순히 그러한 은자(隱者)로만 자리잡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을 고쳐먹게 된 계기를 갖게 되었다.
필자가 여기서 논의할 바는 운곡의 불교인식이다. 이미 여러 학인들에 의해서 운곡의 전체적인 학문관이나 종교관이 어느 정도 그려졌고, 그 가운데 불교에 대한 운곡의 관점도 여러 곳에서 서술되었다. 따라서 이를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다만, 그의 불교인식을 포괄적으로 그려보되, 그 속에서 그동안 이루어진 논의들을 보완 또는 재검토해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물론 운곡의 불교이해에 대한 독립적인 논문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나, 사실 운곡이 남긴 문집만으로는 그러한 연구가 나오기에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당대의 이색(李穡)의 경우와 달리, 그의 구체적인 불교 교학에 대한 평가나 수행에 대한 구체적 행적을 보여주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운곡이 이해했던 불교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고려말의 중앙불교계의 상황과 당시 사대부의 전반적인 불교인식, 그리고 원주 불교계의 상황을 그리되, 승려 제인(諸人)들과의 교류 상황과 고려의 원주 불교사적(史跡) 등을 통해 운곡에게 끼쳤을 원주불교의 역사문화적 지형을 탐색한 다음 개진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본격적인 작업은 차후로 미루고, 우선 필자는 그의 시 속에 드러난 불교용어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운곡이 이해했던 불교 교학의 일단을 아주 간단히 피력할까 한다.
2. 운곡의 불교관 일반
불교일반에 대해 운곡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분명하게 표현된 것은 영남(嶺南)으로 떠나는 선승(禪僧) 윤주(允珠)에게 주었던 시의 서문(1-112)과, 잘 알려진 바대로, 운곡의 삼교일리(三敎一理)라는 시의 서문(3-060)이다.
앞의 시 서문을 약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을 저술한 것이 경(經)이고, 보태어 이룬 것이 논(論)인데, 그 도(道)는 대개 효경(孝敬)에 근본을 두고 온갖 덕을 쌓아서 무위에 귀결시킨 것이다. 부연해서 가르쳐 세상에 전한 것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선(禪)이고, 하나는 교(敎)이다. 교(敎)는 앞에서 말한 경(經)과 논(論)이고, 선(禪)은 (부처께서) 49년 동안 삼백회가 넘는 법회를 가진 뒤에 최후로 영산(靈山)법회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는데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때부터 인도의 47조사(祖師)와 중국의 23조사가 서로 전수하여 아무리 사용해도 끝이 없었다. ..... (지금 스님께서는) ..... 담선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께 문안드리기 위해 천릿길을 멀다하지 않고 찾아오셨으니, 이것이 어찌 효경(孝敬)에 바탕을 둔 행실이 아니겠는가.
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운곡은 선․교(禪․敎)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분명하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선불교적 기원과 그 전등(傳燈)의 조사선맥(祖師禪脈), 그리고 경․논으로 구분되는 교학의 정의도 분명하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道)를 효경(孝敬)에 둔 점에 있다. 그리고 운곡은 그 예(例)를, 윤주스님이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에서 들고 있다. 비록 이러한 불교이해가 불교 본연의 근본적 도리는 아니라할 지라도, 당대 불교에 호의적인 유학자가 불교를 이해하는 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효경을 도외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불도(佛徒)가 세속의 인연과 절연하여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는 근본은 불교의 근본 취지 속에 효경이 있어서가 아니다.
당대 정도전(鄭道傳) 등의 유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수많은 배불론(排佛論)자들이 척불(斥佛)을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효경의 인륜(人倫)을 불교가 저버린다는 것에 있었으므로, 운곡이 불교의 근본도리를 효경으로 평가한 것은 그만큼 운곡이 불교에 애정을 갖고 있었고 옹호하고자 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운곡은 그의 삼교일리라는 시에서 보다 분명히 불교의 근본취지를 밝히고 있다. 즉, ‘불교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을 가르치고, 자리이인(自利利人)을 수단으로 한다’는 것이었다.(釋敎敎以明心見性 .... 自利利人 此特釋氏之筌蹄矣) 여기서 운곡은 불교가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종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상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불교적 이상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근본정신에 분명했던 운곡이 전자의 예와 같이, 효경을 불교의 근본으로 이야기했던 것은 가능한 유교와의 접점을 마련하고자 했던 취지에서 비롯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종교학적 자세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운곡은 자신의 여러 시 속에서 유교와 불교와의 친화성을 그려내고 있다. 가령, 중국 당대(唐代)의 유가(儒家)와 불도(佛徒)였던 지둔(支遁)과 허순(許詢)의 관계나 태전(太顚)과 한유(韓愈)의 예를 들면서 예부터 유교와 불교가 깊은 유대를 맺어왔음을 시 속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4-087-04)
3. 운곡의 불교세계에 대한 편력
1) 정토사상
운곡은 운우경(雲雨經) 독송회나 수륙재(水陸齋)와 같은 기복적 불교행사 등에도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서방구품도 제작과 같은 불사(佛事)행위에도 동일하다. 그런데, 서방구품도 제작을 기리는 시(3-033/034)에서 특정한 불교이해를 보여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서방구품도를 그리려 하는 까닭은
임금께 축수하고, 나라 위해 복 빌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라네.
시주들이여! 모두 같이 태어날 원(願)을 세우는 데에
털끝만치라도 아끼거나 있고 없고를 따지지 마시게.
서방정토(西方淨土)는 미묘 장엄해서
그 차례가 십육관(十六觀)으로 나뉘어졌네.
바라건대 사람마다 피안(彼岸)에 오르시어
이 그림 이뤄지면 먼저 마음 속으로 보소서
서방구품도의 제작에 앞서 운곡이 이 시를 지은 것을 놓고 운곡이 직접 이 구품도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1), 불화제작은 금어(金魚)나 화원(畵員)에 의해 전문적으로 불화제작의 의궤(儀軌)를 수업한 후 가능하다는 일반 사례를 고려할 때, 다시 고려해야할 점이 아닌가 싶다. 불가에서 서방구품도의 제작은 중요하고 규모있는 불사(佛事)의 하나이기 때문에 운곡이 사찰에서 이루어진 이 불사를 앞두고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운곡이 이 시를 지으면서 ꡔ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ꡕ에 시설(施說)되어 있는 16관법(觀法)2)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16관법은 관무량수경의 핵심본문에 해당하는 정종분(正宗分) 전체를 이루고 있는 내용인데, 이를 두고 운곡은 서방정토의 ‘차제상이 16관으로 나누어졌다’고 말한다. 이는 아미타불의 국토인 서방정토를 마음 속에 그리는 관상법의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 경전의 근본사상인 정토사상과 수행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또한, ‘그림이 이루어지면 마음으로 보라’는 글귀는 그가 사찰의 주불전(主佛殿) 후불탱화나 하단탱화에 걸리는 서방구품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불화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6관법은 천태종의 지관(止觀)수행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천태사상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정토사상이나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전제로 노래한 듯 하다.
2) 천태 법화사상
정토사상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운곡의 행적을 따라가면 우리는 그가 각굉스님을 두고 다양한 불법의 경지를 이룬 인물로 격려와 찬사를 보냄을 볼 수 있다. 특히, 굉스님을 두고 ‘반야(般若)의 도리를 얻고, 삼관(三觀)의 이치를 좋아한 이’였다고 말하고 있다.(2-010) 뿐만 아니라, 운곡은 나옹의 법손(法孫)인 신원(信圓)스님이 강남(江南)으로 운수행각을 떠나기 전에도 그를 동일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4-030) 이 때, 운곡이 표현한 ‘삼관의 이치’는 천태교학에서 말하는 공(空), 가(假), 중(中)의 삼관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관은 천태종의 교의(敎義)와 실천(實踐)의 골격을 이루는 법문으로, 불법의 실천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공관(空觀)은 현실세계가 갖는 허망한 의미의 세계를 초월해서 공(空)을 깨닫는 것이고, 가관(假觀)은 체득한 그 깨달음을 토대로 다시 허망한 현실세계로 돌아와 중생을 교화하면서 수행을 익혀나간다. 공의 깨달음(공관)과 현실세계 내에서 중생의 제도(가관)는 수행자에게 필수적이지만, 한쪽에 치우치기 쉬우므로, 중관에 이르러야한다. 따라서 중관(中觀)은 앞의 공관과 가관 두 입각지 사이에 놓여진 불법실천의 긴장을 균형감각을 갖고 실천해나감을 말한다. 이를 간단히 공가중(空假中) 삼관(三觀)이라고 한다.
물론 기타 종파나 경전에 의해 다른 맥락의 삼관을 제창한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필자가 운곡이 말한 ‘삼관’을 천태의 그것으로 추측한 것은, 천태교학에서는 ꡔ관무량수경ꡕ과 그 경전의 주석서들을 통해 정토실천법을 펼치고 이 속에서 삼관이 해석되기 때문이다. ꡔ관무량수경ꡕ은 이미 운곡에게 익숙했던 경전이 분명하므로 그가 말한 삼관은 천태의 그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다시, 운곡이 원주 영천사(靈泉寺)에서 이루어진 법화법석(法華法席)에 대해 권화시(勸化詩)를 쓴 사실로(2-110) 더 굳어진다. 이 법화법석은 단순한 법화경 강의가 아닌, 이미 앞시대에 이루어진 요세(了世; 1163-1245)스님에 의한 천태종 법화결사(法華結社)가 제 사찰의 법석에 미친 결과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운곡이 천태 법화사상의 핵심에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천태교학의 핵심어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법화경의 제2방편품(方便品)에서 유래한 말로서, 회삼귀일이란 삼승(三乘)을 모아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4성제(四聖諦)에 의하여 깨친 성문(聲聞)과 12연기(緣起)를 이해함으로써 깨우친 연각(緣覺)과, 그리고 6바라밀(波羅蜜)을 닦아 성불한 보살이 모두 불타의 최고 진리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유래한 이 가르침은, 기존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진리(또는 불법)을 추구해온 경지들이 모두 하나의 방편(方便)들로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모든 가르침들이 평등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운곡은 이러한 천태 법화사상의 취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회삼귀일이란 이 단어를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에 빗대어 말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운곡은 여여거사(如如居士)의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에 기대어서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근본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그 가르침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자신의 종교관을 분명히 내보인다.(3-060) 불교의 삼승이 모두 하나의 진리로 포섭되듯, 이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도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을 법화경의 언어인 회삼귀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종교관을 불교용어를 빌어 한마디로 압축해냈던 것이다.
그 외에 ‘일승(一乘)에서 삼승(三乘)이 나눠지고, 삼심(三心)이 일심(一心)으로 포섭된다’는 등의 천태사상을 드러내는 이러한 글귀나(4-089-02), ‘보문(普門)으로 나타나는 건 영감에 달렸다기에 나무관세음을 염한다’(5-115-02)는 만년의 싯귀는 ꡔ법화경ꡕ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그의 천태사상이나 법화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사한다.
이러한 여러 단서들로 짐작해 볼 때, 운곡은 천태 법화교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3) 화엄사상
한편, 운곡이 보여준 삼교일리론의 詩句 가운데 불교의 덕을 노래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은 ‘하나의 원융한 성품이 열가지 묘리를 갖추고 있음(一性圓融具十玄)’을 보이는 것이라 말한다.(3-060-03) 십현(十玄)은 분명히 화엄(華嚴)철학의 용어이다. 화엄학에서 보자면 우주의 모든 존재나 사건은 독립적으로 발생하거나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와 사건은 서로가 서로를 서로 받아들이고(相入) 하나가 되어(相卽) 진행되며, 이로써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은 무수히 많은 인연 속에서 발생한 우주 자체이며, 그 사건은 그대로 또하나의 우주적 사건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부른다. 여기서 십현, 또는 십현연기(十玄緣起)는 세계가 끝없이 연기적으로 발생함을 설명하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있는 핵심적인 말이다3).
다시 운곡은 이러한 화엄의 세계를 벽봉(璧峰)의 詩에서 발견한 듯 ‘화엄의 바닷물에 환하게 담궈 냈으니 체(體)와 상(相)을 말하기 어렵고 쓰임도 끝이 없네’(3-101)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운곡의 시에서 가끔식 보이는 적용(寂用)이라는 말도(5-108, 5-164) 그가 탐색했던 화엄학의 단면을 시사한다. 이 말은 진여(眞如)의 모습이 여러 차별상의 모습을 떠나 고요한 상태의 모습으로 있으나 그 선량한 쓰임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자유자재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ꡔ화엄경ꡕ의 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에는 10가지의 삼매(三昧)가 설해지는데 그 가운데 적용무애삼매(寂用無涯三昧)가 설해지며, ꡔ화엄경소(華嚴經疎)ꡕ에서는 사나불신(遮那佛身)이 갖춘 10종 무애(無礙) 가운데 하나로 적용무애(寂用無礙)가 설해진다.
운곡이 ‘적용암(寂用菴)’이란 사찰에 들러 그 암자의 이름을 풀면서 ‘적용(寂用)의 공부가 곧 선(禪)’(5-108)이라 말한 것이나, 후에 또다시 그 사찰의 단청(丹靑)불사를 둘러보면서 ‘적용의 공부가 성품을 구하는 것’(5-164)이라고 읊은 것은 화엄경 속에 함장된 그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된다.
4) 선불교(禪佛敎)의 이해
운곡이 읽었던 불경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충분히 그가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ꡔ원각경(圓覺經)ꡕ이나 ꡔ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ꡕ, ꡔ화엄경(華嚴經)ꡕ을 제외하고라도, 분명히 그의 탐독의 대상이 된 것들만 뽑자면 ꡔ능엄경(楞嚴經)ꡕ과 ꡔ유마경(維摩經)ꡕ, ꡔ법화경(法華經)ꡕ, 그리고 ꡔ금강경(金剛經)ꡕ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대체로 선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에 해당하는 경전들이다. 특히 ꡔ능엄경ꡕ류는 고려말 사대부에게도 널리 애독되었던 것으로, 그러한 사례는 운곡 뿐만이 아니라,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정추(鄭樞), 권근(權近), 이숭인(李崇仁) 등도 폭넓게 읽었으며, 척불의 선도에 섰던 정도전(鄭道傳) 또한 이 경을 접한 바 있다. 조명제가 논문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이러한 능엄경의 유포는 당대 고승이었던 나옹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5) 나옹과 그 문하승들이 특히 이 경을 중시하였는데, 태고(太古)화상보다는 나옹의 법맥에 더 친밀함을 가지고 있었던 운곡으로서 당대에 유행하던 이 경전의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전을 통한 선사상의 이해 뿐만 아니라, 운곡은 그의 시 속에서 여러 가지의 실참수행(實參修行)을 위한 화두(話頭)를 남기고 있다. 화두는 그 자체로는 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의 습관을 오히려 궁지로 몰아가서 순간적 득오의 경지를 이끌어내는 수행의 한 방편이다. 따라서 화두는 그 자체로 무의미하며, 글의 의미를 따져서는 별 소득이 없는 문구이다. 익히 알려진 조주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비롯해 ‘이뭣고’,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마삼근(麻三斤, 삼서근)’ ‘뜰 앞의 잣나무’가 대표적 화두이다.
운곡의 시 속에는 예를 들면,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나 ‘앞의 셋과 뒤의 셋(前三三後三三)’(3-094), ‘무(無字)’ 등의 화두가 그것이다. 이러한 화두는 역시 당대의 사대부들이 선승으로부터 받아 수행한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운곡이 자신의 시 속에 이 화두들을 표현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운곡이 실제로 화두를 들고 실참수행을 했는가 하는 점인데, 이는 입증할 어떠한 글귀도 필자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실참을 했다면 그 심리적 정확이 당연히 그의 시 속에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수행의 상황이나 심정을 토로한 싯귀는 발견되지 않는다. 일부 연구자들은 당연히 고려말의 일부 사대부들이 실지로 화두참구했던 정황을 들어 운곡도 그러할 것이라 판단하지만6), 이는 다소 심사숙고해야할 점으로 보인다.
사대부들이 실참을 했는가는 개개인의 성향의 문제이며, 비록 그들이 어떤 종류의 공안(公案)이 있고, 그 공안들이 어떠한 사연하에서 등장했는지는 알 수 있어도, 공안은, 말한 바처럼 그 문장 자체로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운곡이 화두실참을 했다기 보다, 다만, 당대의 선수행의 풍조를 잘 이해하고 승려들이나 사대부들이 참구했었던 화두의 종류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만, 비록 운곡의 싯귀 속에서 그의 실참수행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운곡이 선불교의 취지나 정신을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 상당수는 선적(禪的)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특히 그가 승려와 주고받은 시나 승려의 시집을 읽은 후 썼던 시들은 선시(禪詩)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가 자신의 시 속에 남긴 교학의 언어들을 통해볼 때, 그가 선불교나 교학에 밝았던 것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 정신 속에서 깊은 귀의처(歸依處)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색(李穡) 등의 경우와 같이 화두실참의 흔적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운곡 자신의 성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4. 맺는 말
ꡔ운곡시사(耘谷詩史)ꡕ만으로는 운곡이 이해한 불교의 전모를 이해하는 것이 불충분하지만, 그 속에서 그가 선택한 불교적 시어(是語)만을 통해보더라도 운곡이 폭넓게 불전(佛典)을 섭렵했으며 그를 통해 깊이 있는 불교이해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의 근본 취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선교(禪敎) 양면에 모두 섭렵해 있었다. 운곡은 교학적으로 정토(淨土)와 천태(天台), 화엄(華嚴) 계통의 전적(典籍)들을 많이 접했던 것으로 보이며, 선불교(禪佛敎)의 소의경전도 두루 섭렵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태교학에 깊은 이해를 갖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천태교학 자체가 갖는 세련됨과 체계성이 운곡의 전대(前代)에 왕실과 사대부에게 큰 영향을 미쳤었고, 이러한 사상적 경향이 운곡에게 그대로 계승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운곡이 접했던 천태종 승려, 특히 달의(達義)스님(3-145)과 고달사(高達寺)에 있었던 의징(義澄)스님(3-122), 각림사에서 만난 연(演)스님 등을 고려할 때, 그가 천태교학에 깊은 이해를 갖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ꡔ법화경(法華經)ꡕ을 읽었던 것에서도 천태교학과의 친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운곡은 고려말 크게 흥성한 선불교의 유행 속에 있었고 특히, 태고(太古)와 나옹(懶翁)으로 대표되는 선풍(禪風)의 영향 속에 있었다. 운곡은 태고보다도 나옹 계열의 승려들과 훨씬 자주 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나옹이 갖는 태고 계열 승려들이 갖는 정치적 상황을 나름대로 고려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선종 계파에 대한 운곡의 선택은 단순히 정치적인 고려를 떠나, 그의 학문적 성향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옹은 임제선(臨濟禪)의 맥을 잇고 있지만, 나옹은 지공(指空)으로부터 또다른 사상적 계보를 잇기 때문이다. 지공의 영향 때문에 나옹의 계열은 참선 뿐만 아니라 교학과 계율도 함께 수학하는 것이 강조 된다.
운곡이 선불교와 교학 모두에 이러한 조화로운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러한 불교계의 경향과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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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耘谷 元天錫의 處士的 삶과 義理精神
崔光範 박사 (고려대)
1. 머리말
耘谷詩史에 수록된 작품들에 의하면 운곡은 50대 중반까지는 주로 백성들의 피폐한 삶에 연민을 느끼며 권신들을 비판했지만, 위화도회군 이후로는 고려 국운 자체를 우려하며 급진개혁파를 집중 비판하는 한편 고려에 대한 절개를 굳게 다져 갔다. 조선건국 이후에도 이러한 의리정신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운곡은 스스로 학문 수양에 전념하는 한편 교육에도 힘썼으니, 雉嶽山 覺林寺에서 講學하면서 鄕校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太宗이 微時에 그에게서 배웠는데,1) 조선건국 이후에 大官으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太宗이 동쪽 지방에 나갔다가 그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운곡이 피하고 만나주지 않자,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그의 아들 炯에게 基川縣監을 제수하여 부모를 모시게 했다고 한다.2)
벼슬길을 스스로 마다하고 淸風高節을 견지한 점에서 우리 역사상 운곡은 處士를 대표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許穆은 耘谷의 墓銘에서 “내가 듣기로는 군자는 은거하여도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지 않은 자이며, 道를 지켜 변치 않아 그 몸을 깨끗이 한 자이다.”4)라고 하였다. 이어서 贊하기를 “巖穴의 선비 나아가고 물러남에 때가 있나니, 비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나니, 후세에 가르침을 세운 것에서는 禹·稷과 夷·齊가 한가지다.”5)라고 하였다.
운곡은 은거해 살면서도 세상을 잊지 않았다. 耘谷詩史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운곡의 시들은 왕조교체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운곡의 문학을 조명함에 있어서 이러한 현실비판적인 작품들이 우선적으로 다루어져 왔고, 그러한 작품들의 중요성을 재론할 여지조차 없다. 다만 본고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표출한 작품보다는 전원에서의 처사적 삶을 보여주는 시들을 주로 다뤄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들이 耘谷詩史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작품의 내적 성취도 역시 빼어난 작품들이 많다. 이에 본고는 운곡의 처사적 삶이 잘 드러난 시들을 분석 대상으로 하여 그 속에 내재된 운곡의 의리정신과 인간적 고뇌, 그리고 정신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 麥秀之嘆과 義理精神
處士라 하면 才識과 德行이 一代에 추앙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遺逸로 벼슬에 제수되어도 나아가지 않고 힘써 古道를 행하는 자이다. 또한 종신토록 곤궁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여도 뜻을 옮기지 않아 그 淸風高節의 風貌와 人品으로 百代의 尊敬을 받아야 감히 處士라 할 수 있다. 운곡의 처사로서의 삶을 일관되게 지탱해 준 것은 고려에 대한 의리정신이었다. 다음의 몇 작품을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古意>
白虎山頭松一樹 백호산 꼭대기에 소나무 하나
凌寒獨抱千年操 추위를 이기며 홀로 천년의 지조를 지키네.
幾看遺臭與流芳 역사의 선악을 얼마나 보았던가
老幹半樛依古道6) 늙은 줄기 반쯤 휘어 옛 길에 의지해 있네.
백호산 꼭대기 소나무가 추위 속에서 홀로 지조를 지키며 歷史의 善惡, 興亡盛衰를 굽어보고 있다. 운곡은 선비로서의 굳은 신념을 이 소나무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늙은 소나무 줄기가 옛 길에 의지하고 있듯이 자신이 지조를 지키며 지향하는 바는 오직 古道의 回復인 것이다. 이것은 기울어 가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운곡은 많은 시에서 소나무, 국화 등을 통해 자신의 절개를 의탁하였다.7)
마지막 구에 소나무가 반쯤 휘었다는 것은 자신의 포부를 펴 보지도 못한 채 애처럽게 절개를 지켜가는 자신의 신세를 비유한 것이다. 그는 “꿈은 용만 북녁의 금궐을 달리는데, 몸은 봉령 서쪽의 사립문에 기대 있네. 밤 창에서 역사책을 읽으며 짧은 초 태우고, 봄 밭에서 오이 심으며 진흙을 뒤지네.”8)라고 한 것처럼 은거해 있으면서도 우국의 일념으로 역사의 법칙을 궁구하며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켰던 것이다. 운곡의 義理精神은 조선건국 이후에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다.
<次半刺先生韻>
飜覆固難測 번복함을 진실로 헤아리기 어려우나
興亡從可尋 흥망은 찾을 수 있네.
大凡無善狀 대체로 좋은 상황 없어
都是不平心 다 불평하는 마음뿐이네.
危險世間路 위험한 세상 길에
孤高天外岑 孤高한 천외의 봉우리.
對此思古國 이를 대하며 古國을 생각하니
松翠送悲音9) 푸른 솔은 슬픈 소리 보내주네.
조선건국 해인 1392年末에 지어진 것인데, 번복하는 세상 속에 歷史의 興亡盛衰를 생각하는 운곡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 길은 험난하기만 한데 그 속에서도 孤高한 봉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우뚝 하늘 끝까지 솟아 있다. 이 천외의 봉우리는 변함없는 자신의 외로운 절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외로운 마음의 지향점은 바로 古國인 것이니, 고려에 대해 절개를 지키며 홀로 슬퍼함을 마지막 두 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松’은 굳은 절개와 더불어 松都를 연상케 하고 있다. 운곡은 麗末의 정치현실과 자신의 이상과의 괴리에서 오는 고독감을 많이 읊었는데, 이러한 심정은 조선건국 이후에도 양상은 다소 다르지만 계속되고 있음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自詠>
幽懷鬱悒幾時平 깊은 속마음 답답하니 언제나 평온해지나
少壯元無事業成 젊어서 이룬 사업 원래 없네.
飜覆人情每相反 번복하는 인정 매번 서로 반대되고
縱橫世態漸多更 종횡하는 세태 점점 많이 바뀌네.
浮雲起滅天彌碧 뜬 구름 일었다 사라지니 하늘 더욱 파랗고
明月虧盈水自淸 밝은 달이 이지러졌다 차니 물 절로 맑네.
物外煙霞那足道 물외의 연하를 어찌 족히 말로 하리
但將薇蕨送餘生10) 다만 고사리로 여생을 보내네.
이 시는 조선건국 이듬해인 1393년 가을에 지은 것인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번복하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前朝에서 미관말직조차 한번 하지 않은 자신도 高麗에 대한 절개를 지켜 나가는데, 세상 인정은 이와 반대로 志操를 쉽게 저버리고 趨時附勢하고 있다. 운곡은 이러한 세태를 한탄하면서 오직 자신의 마음을 순수한 자연에 부치려 하고 있다. 이 시에 쓰인 ‘碧’과 ‘淸’의 이미지는 그의 다른 시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정신세계나 삶과 긴밀한 관련성을 지닌다. 마지막 두 구의 홀로 物外의 自然에 묻혀 夷齊와 같이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그의 삶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운곡 시에 보이는 ‘物外’나 ‘方外’, ‘孤’, ‘獨’ 등은 不正한 世界와의 非妥協的 意志를 내포한 自我의 강한 主體意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의 시들은 운곡이 조선건국 이후에도 오직 高麗에 대한 丹心을 굳게 지켰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耘谷詩史에는 조선 건국을 찬양하는 듯한 표현이 담긴 시들이 몇 편 실려 있다.11) 운곡은 고려 멸망후 이미 現實化되어 버린 朝鮮에 대해 일반 백성들의 삶을 고려하여 消極的인 期待感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러한 시들은 대개 새 왕조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鄭道傳, 神照 등)과의 교유시에 보이고,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읊은 것은 거의 없다. 조선 찬양의 표현을 하고 있는 시들에서도 자신의 말 못할 답답한 심회를 은근히 드러내며 麥秀之嘆을 함께 읊고 있다는 점에서 朝鮮 讚揚의 표현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더욱이 운곡의 조선비판 시들이 삭제된 것으로 보이고, 남아 있는 것들도 후손의 가필 여부가 의문시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12)
3. 行道的 出處觀
耘谷은 樂天知命으로 逍遙自適하면서 百姓들의 삶과 國運을 염려하며 處士로서의 삶을 견지하였다. 왕조 교체라는 대변혁기에 선비들의 進退行止는 儒敎倫常의 存亡과도 직결되는 것이며, 儒者의 處身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운곡의 성장기에 고려는 원나라 지배하에 있었고, 청장년기에는 공민왕의 자주적 개혁 움직임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감으로 인해 국운이 급속히 기울어 갔다. 그가 出仕를 단념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20대에 이미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회의와 세속적 명리에 초연하고자 하는 뜻을 밝힌 시들이 확인된다. 그는 31세(1360년)에 國子監試에 응시하여 합격, 進士13)가 되었으나 본시격인 禮部試에는 응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군적에 올라 있었기에14) 어쩔 수 없이 國子監試에 응시한 것이었고, 이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禮部試에는 응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줄곧 치악산에 은거하여 세속적 명리를 멀리하였다.
본절에서는 운곡이 당시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된 이유와 지향점을 밝힌 몇 편의 시들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처사로서 일생을 마치게 된 배경을 밝혀보기로 한다.
<丙寅冬至感懷示元都領>
(前略)
枉謀謬算百無效 계획이 그릇되어 모두 효과없이 되었으니
孑然行止何凉凉 외로운 나의 행지 어찌 이리 쓸쓸한가.
曾知窮達在于命 궁달이 명에 있음을 일찍이 알았으니
倚樓休復嗟行藏 누에 기대 다시는 行藏을 한탄치 않으리.
早作乾坤一閑物 일찍이 천지간에 한가로운 것이 되어
獨携簑笠遊滄浪 홀로 도롱이에 삿갓으로 滄浪에서 노니네.
(中略)
回看世路幾飜覆 世路를 돌아보니 번복이 심해
似聞人海波瀾狂 마치 人海의 미친 물결 소리 듣는 것 같네.
爭名求利日奔競 명리를 구하려고 날마다 다투니
羶蟻燈蛾難可防 양고기의 개미와 등불의 나방 막기 어렵네.
騈頭進步却忘返 머리 맞대고 나아가며 돌아올 줄 모르니
未省前路危機當 앞길에 위기를 당할 것 살피지 못하네.
廉讓風衰世以變 청렴하고 사양하던 기풍이 쇠해 세상 변하니
挽回古道知何方 옛 도를 만회하는 방안이 무엇인가.
魴魚赬尾法令弛 지칠대로 지쳐 법령은 이완되고
瘡痍滿眼堪悲傷 백성들의 疾苦가 눈에 가득하니 슬프도다.
儒冠自古多誤己 선비는 옛부터 자기를 그르침이 많은데
況予才智元無良 하물며 나의 재주와 지혜 원래 변변치 못함에랴.
(後略) 15)
耘谷은 窮達이 命에 달려 있음을 알고, 도롱이와 삿갓으로 方外의 공간인 滄浪에서 노닐고 있다. 미친 물결처럼 飜覆하는 세상에서 名利를 다투어 날뛰는 소인배들이 판치니, 옛 도는 사라지고 기강은 해이해졌다. 私念을 따르면 利를 추구하게 되고, 公心을 따르면 義를 추구하게 된다. 운곡이 바라본 세상은 義를 버리고 利를 추구하는 자들이 판치는 세상인 것이다.
자신이 才智가 없다고 한 것은 세상을 염려하나 어찌하지 못함을 한탄한 것이니, 孟子의 말처럼 궁하여도 義를 잃지 않고, 영달하여도 道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兼善天下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세상이 자신의 의지와 어그러졌으니 獨善其身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古道가 다시 회복되고 綱常이 바로잡힐 것을 염원하며 곤궁함 속에서도 義를 잃지 않고 선비로서의 志操를 지켰다. 그러기에 이 시의 後略된 부분에서 “강변의 맑은 梅花의 아름다운 열매가 번화한 桃李의 場에서 꺼림을 당하고, 차가운 솔이 貞節을 품고서 차디찬 눈서리의 산에 홀로 서 있다.”16)고 하여 매화와 소나무로 자신의 절개를 보여주고 있다.
<牧伯見和復次韻>
幼年心願壯年違 어려서의 소원을 장년이 되어도 못 이루니
窮達由來未堪期 궁달은 본디 기약할 수 없는 것.
才本無奇無用處 특별한 재주 없어 쓸 곳 없지만
心如有道有逢時 마음에 道가 있다면 때를 만나기 마련.
白雲流水還堪隱 백운 유수는 도리어 은거할 만하니
皎月淸風共不離 밝은 달 맑은 바람도 함께 떠나지 않네.
百爾所思誰與說 온갖 생각 뉘와 이야기하리
且憑盃酒暫開眉17) 술로써 잠시 눈썹 펴 보네.
이 시는 운곡이 장년기에 접어든 31세(1360년)에 지은 것으로 어려서 품었던 뜻을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하고 어느덧 장년이 되어 버린 것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窮達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자신의 이러한 신세를 命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 시 둘째 수에서 “젊어서부터 行止는 斯道에 말미암았는데, 壯年의 功名 어느 때나 있을까.”18)라고 한탄하였다.
비록 자신은 특별한 재주가 없다고 겸손해 하면서도 道를 굳게 지키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 道를 지키려는 자신의 삶은 당시의 현실과 화합할 수 없는 것이기에 3연처럼 白雲流水와 淸風明月를 벗하며 은거하고 있다. “道가 곧아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워, 일생의 자취를 자연에 부쳤네.”19)라고 한 것은 이같은 은거 이유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곧은 도를 굽히지 않으려는 맑은 정신을 “연하에 늙은 한 선비 있어, 鳥獸만 벗 삼을 수 있네. 마음 한가해 득실이 없고, 道 곧으니 어찌 굽혔다 폈다 하리.”20)라고 한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利를 위해 자신의 道를 굽힐 수 없다는 孟子의 기개21)와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비록 도를 굳게 지키며 은거해 살면서도 제자들이나 벗들에게는 자신을 본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 정치를 맑게 할 것을 권하였다.
<久雨獨坐鄕學書五絶以示諸生>
滿庭蒼薢雨紛紛 뜰 가득한 푸른 이끼에 비 어지러워
浙瀝簷聲日夜聞 처마에 빗소리 밤낮으로 듣네.
頃刻變成千萬狀 잠깐 사이에 천만가지 모습 변하니
奇觀只有雉山雲 기이한 경관은 다만 치악산 구름에 있도다.
才薄何言釋世紛 재주 없으니 어지러운 세상 안다고 어이 말하리
自慙孤陋寡攸聞 고루하여 들은 바 적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네.
各須努力成功業 각자 공업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지니
莫効愚夫臥白雲22) 愚夫가 백운에 누워 있는 것 본받지 마라.
이 시는 1389년 향학에서 제자들에게 준 시로써 전체 다섯 수 중에 1,3수이다. 다섯 수 모두 紛,聞,雲을 韻字로 쓰고 있는데, 紛과 雲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 수에서 뜰 가득한 이끼에 비가 어지럽다고 하고, 구름이 짧은 순간에 변화하며 기이한 경관을 연출하는 치악산을 전체 다섯 수의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지럽게 내리는 비는 세속을 멀리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향학 뜰의 이끼마저 어지럽게 하고 있다. 이것은 어지러운 정치현실이 은거하여 살아가는 운곡의 마음까지 어지럽히고 있는 것과도 흡사하다. 어지럽게 내리는 비와 치악산을 감싸고 기이한 경관을 연출하는 구름은 다음 시상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이 된다.
생략한 둘째 수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에 정진하여 靑雲의 꿈을 이룰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위에 제시한 셋째 수에서는 제자들의 前途와 자신의 삶이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구의 마지막에 있는 白雲은 세속을 멀리한 운곡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신이 白雲에 누워 있는 것은 세상 모르고 들은 것 적어서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한편 자신의 이러한 삶을 따르지 말고 학문에 정진하여 장차 功業을 이룰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스승이라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늙고 병들어 부질없이 구름만 봄을 부끄러워하네.”23)라며 자신을 한탄하였지만, 제자들에게는 세상에 나아가 자신들의 포부를 펼 것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가 후학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당시의 頹廢한 紀綱을 바로잡아 孔子의 遺風을 떨치는 것이었다.24)
운곡은 弟子들뿐 아니라 자신과 같이 隱居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갖고 세상에 나아갈 것을 권하기도 했다. 두문동 72현의 일인인 邊龜壽25)의 시에 차운한 시에서 그의 은거하는 삶을 예찬하면서도26) “다행히 어진 사람 찾는 밝은 시대 만났으니, 공명 업신여기며 초가에 누워있지 마오.”27)라고 하여 세상에 나아갈 것을 권하였다. 이 시가 1390년에 지어진 것을 고려한다면 밝은 시대를 만났다고 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다만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邊龜壽의 삶을 안타깝게 여겨서 한 말에 불과하다. 이러한 의식은 朝鮮建國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니, 앞 절에서 살핀 <次新及第邊處厚所寄詩韻>이나 半刺先生에게 준 시에서 “德을 天下에 베푸는 것은 男兒의 일이니, 陶潛이 홀로 초가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마오”28)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자신은 은거하여 살면서도 남들에게는 세상에 나아갈 것을 권유하는 한편 이미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선정을 기대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4. 田園에서의 自樂
지식인으로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강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곡처럼 일생동안 출사를 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산 것은 그의 이전 시대는 물론이요, ‘隱’을 많이 표방하였던 당시에도 드문 일이었다. 그가 은거한 곳은 속세와 완전히 단절된 탈속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의 근거지인 田園이었다. 그는 世俗과 脫俗의 中間的 空間이라 할 수 있는 田園에서 한가로운 삶을 즐기며 현실로부터의 실망과 좌절을 보상받고 있었다.
<頃者 於弁巖南峯之下 新作一茅齋 其地勢也危僻 締構也不巧 且向背往復 俱不適宜 陋而拙者甚矣 其主人 行已也違於道 立志也違於世 又處事之迂闊 居止之淸凉 其爲陋拙 又有甚焉者矣 以其齋之陋拙 合於主人之陋拙 名之曰 陋拙齋 因成長句六首以自詠>
霜後山椒翠色濃 서리 내린 후 산초는 푸른 빛 짙고
一株蒼檜數株松 한 그루 푸른 전나무와 몇 그루 소나무라.
憐渠冷落千年操 천년의 냉락한 그 지조를 여엿비 여기니
伴我衰遲十載容 십년동안 늙어가는 내 모습을 짝해 주네.
遠聽村墟長短笛 멀리 마을터의 길고 짧은 피리소리 듣고
近聞隣寺暮朝鍾 가까이 이웃 절의 아침 저녁 종소리 듣네.
此間深有誅茅意 이 사이에 띠집 짓고 살려 하니
莫向閑人道所從 29) 閑人을 향해 찾아 오는 길 알리지 마오.
자신의 거처인 陋拙齋는 弁巖 남쪽 봉우리 아래의 띠집인데, 지형이 험하고 엉성하게 지었으며, 向背와 往復이 모두 부적당하여 누추하고 졸렬함이 심했다. 그 陋拙함이 자신의 누졸함과 같다고 하여 이를 陋拙齋라 이름하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세상을 멀리하고 살아가는 處士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데, 그가 벗하는 것은 푸른 산초와 전나무, 소나무다. 운곡은 이를 통해 자신의 굳은 지조를 보여주고 있다. 멀리 마을터의 피리소리를 듣고 가까이 이웃 절의 아침 저녁 종소리 듣는다고 한 것은 누졸재의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속세와의 거리감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속세인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탈속의 공간인 절을 가까이 하고 있음을 뜻한다. 尾聯에서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혼탁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견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운곡이 자신의 거처를 陋拙齋라고 명명한 것도 名利에 얽매이지 않고 곤궁한 삶 속에서도 덕을 쌓으며 純粹한 本性을 지켜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시라 할 수 있다.
다음 시는 자신이 처한 전원의 미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次康節邵先生春郊十詠詩> 其七 春郊雨中
雲氣政彌漫 구름 기운 정녕 가득하더니
雨昏天地間 비가 천지간을 어둡게 하네.
空濛能潤物 공중에 부슬부슬 만물을 적시고
暗淡巧遮山 어둠침침 묘하게도 산을 가렸네.
壟上人多喜 밭둑 위에는 사람들 매우 기뻐하고
溪邊鷺獨閑 시냇가에는 해오라기 홀로 한가롭네.
時看烟草路 이 때 연기 낀 풀길을 보니
簑濕牧童還30) 도롱이 젖은 목동이 돌아오네.
이 시에서 시인은 觀照的 자세로 봄의 景物을 客觀的으로 描寫하고 있다. 봄기운을 품은 비가 어슴푸레하게 천지간에 가득하니 산마을 풍경은 신비로움을 띤다. 그 속에 時雨를 기뻐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한가로운 해오라기의 모습이 어루러져 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극치를 이루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때마침 저편으로 雨烟 속에 도롱이 쓰고 유유히 돌아오는 牧童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평화로움을 한껏 더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운곡은 일반적으로 물경을 묘사하더라도 이를 통해 자신의 마음 속에 가득한 감정을 표달하여 意와 境이 交融을 이룬 작품들을 많이 썼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객관적인 境만을 읊은 작품이 드문데, 위 시는 흥취나 주제를 표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여타의 작품들과 구별된다.
신비로운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인위적인 갈등이나 욕망과는 거리가 먼 농부와 목동의 어우러진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실상 이러한 경치는 전원에 살다 보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운곡은 이 지극히 평범한 듯한 광경을 觀照를 통해 포착함으로써 人慾이 排除된 自然과 人間의 調和라는 진실된 아름다움의 발견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화의 경지는 麗末 對立과 不調和의 政治 狀況 속에서 운곡이 염원했던 和諧의 世界像인 것이다.
<次康節邵先生春郊十詠詩> 其八 春郊雨後
一雨洗殘春 한 줄기 비가 남은 봄을 씻어내니
山川面目眞 산천은 참모습을 드러내네.
爛紅纔減昔 찬란히 붉던 꽃 옛 모습 점차 사라지고
嫩綠又增新 신록은 또 더욱 새롭네.
松嶺嵐猶礙 소나무 고개엔 이내 아직 서려있고
蔬畦碧已勻 채소밭엔 푸른 푸성귀 이미 두루 자랐네.
裁詩報晴霽 시를 지어 비갠 것을 알리니
誰道負良辰31) 누가 좋은 때를 저버렸다고 말하리.
비 갠 뒤 新綠이 깊어가는 늦봄의 景物을 대하는 시인의 기쁨이 드러나 있는 시이다. 穀雨쯤 되어 보이는 暮春에 만물의 生長을 돕는 비가 내리고, 막 개자 싱그러운 신록이 윤기를 띠며 산천은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신록은 낙화로 인한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3연에서 시인은 이내 낀 소나무 고개와 더불어 채소들이 푸르게 자라는 것을 흡족히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운곡 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그의 시는 자연을 소재로 삼더라도 인간의 구체적 삶의 공간으로써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뿐 아니라 운곡 시의 대부분은 전원적 삶의 모습이 시 속에 배어 있다. 그러기에 자연을 화려한 수식에 의한 표현의 기교나 감정의 격정이 없이 관조적 자세로 수채화를 그리듯이 담담하게 묘사한다. 부드럽고 眞率하며 平淡한 그의 이러한 詩風은 다소 맥빠지는 듯하나 이것이야말로 自然과의 調和를 이룬 閑適한 삶에서 우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耘谷은 邵雍과 陶淵明의 淡泊한 삶뿐 아니라 詩風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전원의 소박한 삶과 무욕의 정신이 저절로 드러나는 自然스럽고 平淡한 風格의 시를 많이 지었는데, 특히 田園에서의 自樂하는 生活을 읊은 시들의 대부분이 그러한 것들이다.
다음 시는 자연 속의 자락을 잘 보여준다.
<次趙侍郞所寄詩韻 又>
弁巖山色靑彌靑 변암산 산빛은 푸르고 푸른데
雉岳雲光白又白 치악산 구름빛은 희고 또 희네.
雲自如君獨等閑 구름은 절로 그대처럼 등한하나
山應笑我多忙迫 산은 나의 바쁨을 웃으리.
結廬將欲向三峯 장차 오두막 짓고 삼봉으로 향하려 하는데
餌勢何煩奔九陌 어찌 번거로이 권세 낚아 서울로 향하리오.
金屋朱門陷貴人 황금 지붕 붉은 문은 貴人을 빠뜨리나
松風皎月招閒客 솔바람 밝은 달은 閒客을 불러주네.
生涯自足一枚瓢 생애는 표주박 하나에 만족하고
身上元無三尺帛 몸에는 원래 세척의 비단도 없네.
若問窮居氣味長 만일 은둔해 사는 재미를 묻는다면
碧溪水外靑山隔32) 벽계수 밖이요 청산 너머라네.
변암 푸른 산과 치악산의 흰 구름은 속진을 멀리한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이다. 운곡은 자신이 이토록 맑은 자연 속에 은거하여 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4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에 자신의 지향점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으니, 서울로 향해 권세를 좇는 것이 아니라 三峯(치악산 서쪽)에 오두막 짓고 살려 하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閑客을 솔바람과 밝은 달이 반겨주니 빈한한 삶 속에서도 낙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낙을 세속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에 은둔해 사는 맛을 구구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마지막 구가 그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笑而不答心自閑”33)의 경지다.
다른 시에서도 “鵠峯의 비 갠 빛 비록 즐길만 하지만, 雉嶽의 개인 풍광 또한 좋다네.”34)라고 하여 개경에서의 벼슬살이도 할 만한 것이겠지만 치악산에 은거해 사는 것도 하나의 지낼 만한 삶이라고 하고 있다. “붕새와 메추라기의 소요함이 다 분수가 있음이니, 隱居함이 어찌 인연이 없으리. 계곡과 산, 나무는 진정 그림같고, 눈 속의 달과 바람 속의 꽃은 돈과 닿지 않네.”35)라고 한 것도 비록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고 있지만 은연중에 은거하는 삶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方外의 空間에서 悠悠自適하는 脫俗者의 모습을 보기로 한다.
<自詠>
身世悠悠百感兼 근심 많은 신세 온갖 생각 이는데
秋霖不止灑茅簷 가을 장마 그침없이 띠집 처마에 뿌리네.
眼前時事年年變 눈 앞의 세상 일 해마다 변하고
頭上衰華日日添 흰 머리는 날마다 더해 가네.
却笑飜雲幷覆雨 飜覆하는 비 구름 비웃으며
無心附熱又趨炎 권력 붙좇는 것에 무심하네.
外人欲識忘筌處 外人이 忘筌하는 곳을 알고자 하면
軟飽風軒到黑甛36) 바람부는 난간에서 술 마시고 낮잠 자 봐야 하리.
이 시는 권세를 떨칠 때는 붙좇고 권세가 쇠하면 버리고 떠나는 경박한 인정 세태를 번복하는 구름에 비유하여 비판하고 있다. 首聯의 지루한 가을 장마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어두운 시대상을 암시하는 것인데, 이것은 頷聯·頸聯의 어지럽게 변화하는 세상과 인심을 의미한다. 마지막 연은 세속적 욕망에 젖어 있는 세인들이 맛볼 수 없는 자연 속에서의 한가로운 삶을 보여줌으로써 附炎棄寒하는 자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삶의 자세를 莊子 「外物」에 나오는 ‘忘筌’에 비유하였으니, 이것은 一切 事物의 拘束을 超越함으로써 本質에 接近하여 悠悠自適하는 天遊의 境地를 志向하려는 것이며, 이를 위해 無心히 自然 속에 同和되어 살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과 대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外人’이라 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다른 시들에서도 볼 수 있다.37) 객관적으로 본다면 現實 制度圈 밖에 존재하는 耘谷이야말로 外人인 것이다. 그러나 운곡은 자신의 空間을 內로 보고 있으니, 이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을 道가 실현되는 調和와 眞實의 空間으로, 그 밖은 道가 무너진 不調和와 對立의 공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耘谷은 麗末에서 鮮初에 걸쳐 일관되게 義理精神을 견지하였다. 특히 急進改革派들과의 깊은 개인적 교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高麗 王朝 顚覆 意圖를 강하게 批判하였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 한번 하지 않았지만, 朝鮮建國 이후 高麗 遺民을 자처하며 節義를 지켰다. 이 義理精神이야말로 운곡의 處士的 삶을 지탱시켜 준 근간인 것이다.
젊어서부터 世俗的 名利에 얽매이지 않았던 운곡은 결국 道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멀리하며 종신토록 은거생활을 하였다. 은거하면서도 上古의 淳風이 회복되길 염원하며 德性 함양에 힘썼다. 그의 隱居는 逃避的, 厭世的 성격이 아니라, 不正한 現實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의지의 逆說的 表現인 것이다.
그의 삶의 공간인 田園은 不正과 不調和의 政治現實과는 대립적인 純粹와 調和의 空間 즉 그가 염원하는 和諧의 世界像인 것이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隱逸思想의 영향으로 많은 문인들이 陶淵明을 흠모하며 隱逸的 성향의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이 現實政治를 떠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운곡의 陶淵明에 대한 好尙은 관념적 내지는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具體的으로 實現된 것이었다. 그의 田園詩는 雕蟲篆刻의 修辭的 技巧를 排除하고, 자연스럽고 平淡한 가운데 소박한 전원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自然과 人生에 대한 觀照的 姿勢를 통해 도달한 生活文學 · 田園文學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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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麗末鮮初 思想界의 動向
-節義論을 중심으로-
정 호 훈 박사(연세대)
1. 머리말
조선 건국은 13, 4세기 고려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던 격렬한 사회 변동의 정치적 귀결이었다. 고려의 국가체제로는 사회 내부의 변화를 수습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틀을 창안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같은 지향은 고려 말, 왕실을 비롯하여 官人․儒者들이 사회변화, 정치개혁을 위해 벌인 숱한 노력 위에서의 方向 設定이기도 했다.
조선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대체로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의 법질서, 문화 전통을 충분히 활용하여 이를 새로운 체제로 변환시키자는 온건 개량파(고려체제 준수파)적 입장이 그 하나라면, 고려의 질서와는 절연하여, 새로운 국가체제를 혁신적으로 수립하자는 급진개혁파(신국가 건설파․혁명파)적 입장이 그 하나였다. 고려사회의 개혁과 개조와 관련해서는 사대부들이 이를 대체로 동의했지만, 고려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울 것인가 하는 점에서 양자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온건 개량파와 급진 개혁파와의 갈등을 내재하는 가운데, 급진파의 정치적 動力과 指向을 근거로 이루어졌다.
여말선초의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특별한 정치적 태도를 요구했다. 舊體制․舊秩序를 긍정하며 거기에 머물러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거기에 적극 동참하며 살 것인가 하는 양자 택일의 결정이 요구되었던 것인데, 그러한 상황에서의 결단은 그것이 義理, 人情, 背信, 名分 등등의 복합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에 단순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살았던 학자․정치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유교적 관념, 곧 절의와 연관한 사유 속에서 행동과 사유의 기준을 세우고 자신의 행동 준거로 삼거나 혹은 타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절의의 문제가 행동과 사유의 주요한 화두로 대두된 것은 정치적 상황이 워낙 특별나게 진행되었거니와, 한편으로는 유학-성리학의 사유가 앞선 시기에 비해 비상하게 귀족 -지식인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던 思想史-知性史적 조건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유교-성리학에서 발달한 出處論이 크게 작용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고려 말 유교-성리학이 발전하는 조건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처론을 준거로 한 판단과 행동이 큰 의미를 지니며 나타났었던 것은 단순히 출처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출처론을 배태한 유교사상-성리학 사상을 본격적으로 필요로 하는 역사적 조건-배경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출처론은 개인의 행동과 사유방식과 연관된 주제를 넘어, 출처론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사상의 정치적 역사적 역할에 관한 문제를 포괄하는 주요한 사유체계가 될 것이다. 출처론에 대한 연구 역시, 출처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여말선초의 시대 상황에 대한 해명이 될 것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여말선초, 절의론을 근거로, 새로운 정치질서의 참가와 연관하여 입지와 거취를 결정한 인물로는 李穡 鄭夢周 元天錫 吉再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고려에 벼슬하거나 혹은 과거에 급제했던 인물로, ‘不事二君’의 忠節을 고수하며 자신의 입지와 거취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조선 건국 후 충절의 龜鑑으로, 국가 혹은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推獎되었으며, 조선후기로 갈수록 그들을 선양하는 의식은 강화되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이들 절의론자들을 밑받침했던 이념이 무엇인지 하는 점을 중심에 두고 이들의 동향과 역사적 성격을 살피고자 한다.
2. 麗末鮮初 節義派 人物의 행동과 그 理念
고려말 조선초에 전개되었던 절의에 대한 논리와 인식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절의’의 절대성을 고집하고 이를 정치적 실천 속에서 지켜나가려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절의’의 절대성보다는 形勢의 可變性을 중시하는 경우이다. 조선 건국의 필요성이 대세를 이루던 상황에서 형세의 가변성에 주목하고 절의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형세 변화에 적극 동조하였다.
두루 알려진 대로 李穡, 鄭夢周, 吉再, 元天錫과 같은 인물은 이 시기 절의파의 핵심이었다. 이들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상호 연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절의론은 본인들의 정치적 자세를 결정하는 주요한 근거이자, 뒷 시기 조선사회의 절의파의 역사적 선구로서 주목되었다.
절의파들이 내세우는 것은 不仕二君의 논리였다. 한번 군신 관계를 맺은 사람이 새로운 성격의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란 곧 節義를 지키는 일, 忠節을 지키는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 관계를 훼손하거나 접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자 행동방침이었다. 이들의 행동은 유학에서 설정한 바 전형적인 절의파인 백이․숙제의 삶을 따르는 일이었다. 주지하듯이 유학의 대표적인 인물상으로는 伊尹과 伯夷라는 뚜렷이 대비되는 두 인물이 제시된다.(ꡔ孟子ꡕ 萬章 下) 이윤은 천하의 책임을 자임하면서 군주나 정치가 어떠하든 간에 상관없이 民을 위하여 이상정치를 위하여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현실참여형이라면, 백이는 섬길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않고 부릴만한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아서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려워지면 물러나는 절의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절의파들의 행동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이들이 가진 정신의 高潔함, 사사로운 이익에 급급하지 않는 淸廉함, 상황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꿋꿋함 등등을 주목하게 된다. 아마도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은 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학문 사상적 요소와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질까? 이들의 행동을 그들이 익히고 지니고 있었던 사유체계와 연관하여 살핀다면 어떤 점을 주목할 수 있을까?
이들은 모두 성리학-주자학을 익힌 인물들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들은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사상의 존재를 긍정하였다. ‘三敎會通’적인 요소를 이들에게서 고루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崇正學闢異端’의 기치를 내세우며 불교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려던 태도와는 구별되었다. 그런 점에서 사상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순정 주자학자들에 비해서는 훨씬 유연했고 포용력이 있었다.
이들의 절의론을 밑받침하고 있던 사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자료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穡의 생각은 이들 절의파의 이념적 기반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지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색의 생각을 밑받침하고 있었던 것은 ‘家天下’적인 정치이념이었다. 고려사회는 국왕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가족질서 속에서 구성되었으며, 국왕은 家父長으로서, 구성원들은 하나의 가족으로 혈연적인 유대관계를 맺는다는 의식이었다. 여기에서는 孝는 가족도덕으로서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되고 모든 덕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효라고 하는 가족적 유대감을 강조하는 가운데 국가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公的인 政治的인 질서와 그것을 규율하는 제 규범도 사사로운, 혈연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인정이 강조되고 가족적 유대감이 크게 의식되었다. 이색은 국가 공적 질서의 최 정점인 군주권이나 법률 기타 국가 규범을 가족 도덕의 연장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 이색은 군신관계를 의제된 가부장적인 관계로 연결시켜 영원한 관계 불변의 관계로 파악했다. 왜냐하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가 되어,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절대불변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색과 같은 사대부가 易姓革命期에 절대불변의 의리를 내세웠던 사상적 이유는 군신관계를 혈연적인 관계로 擬制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가천하적인 정치이념은 고려 유학의 성격과 연관되어 있었다. 고려유학은 한당유학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가운데 발전하였으며, 혈연관계 내부를 규제하는 윤리인 효제를 군신관계의 윤리인 忠順으로 전환시켜 가부장적 국가질서를 확고히 해나감에 유용한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원천석에게서도 확인된다. 좀더 깊이 살펴야 하겠지만, 원천석은 조카 元湜에게 보낸 편지에서 ‘縣令과 백성과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고 파악하고 刑政을 집행할 때는 너그럽게 하고 인사는 公道에 맞게 하라고 하였다.1) 그는 또한 백성을 갓난 아기처럼 사랑하고 보살피라고 하기도 했다.2) 공적 정치적으로 이루어지는 官民 관계를 부자관계-혈연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수용되고, 이색이나 정몽주 원천석과 같은 인물들이 주자학을 깊이 익히고 있었다. 이들은 주자학의 聖學論․聖人可學論에 힘입어 스스로의 주체적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바 修己治人의 능력을 기를 수 있는 노력과 학습을 통하여 현실을 주체적으로 떠안고 가야 한다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색, 원천석에게서 볼 수 있듯, 이들은 공적․정치적인 관계를 혈연적 가족적 관계로 등치시켜 사유하는 고려유학의 특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 절의론자들의 생각은 義나 公으로 맺어진 인위적(비혈연적)인 유대감을 중시하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공적 관계를 주목하는 정도전과 같은 易姓革命派들의 생각과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이들은 군신관계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부자관계, 혈연관계에서 성립하는 규범과는 구별하려고 하였다. 이를테면 군신관계와 부(모)자관계에서 충돌이 일어날 경우, 군신관계에 어긋난다면 모자관계라도 단죄해야 한다는 것, 즉 혈연관계라도 국가의 공적인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혈연적인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私恩과 공적인 군신관계에서 유래하는 大義를 대비하면서 후자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춘추3전에서 대의멸친이라 한 것은 사회적 관계가 혈연적 관계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는데, 정도전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군주를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忠義의 대상으로서 파악하지 않았으며 명분질서가 합치되는 정통의 군주에게 忠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ꡔ書經ꡕ의 천명사상이나 ꡔ孟子ꡕ의 역성혁명 등을 언급하면서 왕조의 존립근거 군주의 명분 등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주어진 군신관계보다는 天命의 대행자 왕정의 최고 책임자인 군주를 객관화시켜 그 존립 이유와 근거를 되돌아 보았고 정당성 여부를 따졌다. 정도전 등이 역성혁명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도모한 사상적 논거는 주자학의 명분론, 춘추의리론에 철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도전 계열의 사대부는 公義나 公的 關係를 내세우면서 중앙집권과 국가의 공권을 강화하는 국가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였다. 정치운영상의 사은 사정을 중시하는 것은 정치체제상 私的支配․私權力과 조응하고 반대로 공의를 중시하는 것은 공적 지배 공권력과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시 호족이나 권귀들의 사적 지배를 용인하고 있던 고려의 정치체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혈연적 유대감에 기초한 법제 관행과 그 사상적 근거, 더 나아가 고려의 정치체제를 비판하고 대신에 주자학의 의나 공에 입각한 정치운영과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 朝鮮前期 節義派의 推獎과 그 推移
조선 건국 후, 조선 건국에 저항했던 절의파들은 국가로부터, 그리고 사대부 일반으로부터 크게 추숭, 선양되었다. 국가와 사대부들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이 조선을 다스리는데, 그리고 유자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신과 태도의 전범을 보였다 하여 정치적으로 학문적으로 그들의 업적을 기렸다. 고려말 조선초의 격동기, 환란기를 살며 정치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던 이들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이 재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절의파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주로 정몽주, 길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三隱의 한 인물로 평가받았던 목은 이색에 대한 적극적인 표창작업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더불어, 원천석의 경우에도 17세기에 가서야 그 행동과 사상이 적극적으로 재조명되고 절의의 인물로서 주목되었다.
조선에서 이들을 忠義, 忠節의 인물로서 현양하려는 작업은 태종 때 처음 나타났다. 태종 원년(1401년), 參贊門下府使였던 權近이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정몽주 金若恒 길재 등을 포상하여 조선왕조에 대한 신하들의 절의의 규범을 확립하는 길을 열 것을 제안하였다.3) 그의 이 제안은 같은 해 11월에 생존해 있던 길재를 제외하고 정몽주 김약항 두 사람에게 조선의 관직을 추증하는 형태로 수용되었다.4) 길재의 경우에는 그의 사후, 세종 8년(1426) 通政大夫司諫院左司諫大夫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으로 추증하였다.5)
절의파 인물에 대한 국가에서의 현창 사업이 절정에 오른 것은 ꡔ三綱行實圖ꡕ 편찬사업이었다. 이 책은 세종 13년에, 유교의 삼강윤리를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중국과 한민족의 역사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례를 찾아 정리하여 만들어졌는데, 「忠臣圖」 등 크게 君臣 父子 夫婦 관계의 윤리를 담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정몽주와 길재는 ‘夢周隕命’ ‘吉再抗節’의 항목으로 수록되었다. 조선국가가 안정을 이루고 정상적으로 작동되어 가는 상황에서, 정몽주와 길재와 같은 인물의 충절을 높이고 이를 근거로 신료들에게 그 충절의 실행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왕실, 정부에서의 절의파에 대한 정책적인 예우작업은 이들을 忠節의 師表로 내세워 신하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兩班․儒者들 내부에서 이들의 사상과 행적을 주목한 것은 16세기 중반, 이른바 ‘士林派’들의 정치적 학문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부터였다. 善山에서 터를 잡았던 길재가 제자들을 기르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길재의 생각과 사유가 영남 지방에 펼쳐지고는 있었지만, ‘사림파’의 본격적인 활동이 있기 전까지 그의 학문과 관련한 논의는 아직 중앙 혹은 전 학계로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절의파에 대한 추숭 작업은 중종 12년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앞선 시기에 있었던 戊午士禍, 甲子士禍 被禍人들을 정치적으로 사면하는 문제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우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말의 儒宗”인 바 “性理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서 뜻을 혼자 알았으며” “忠孝의 大節이 당대를 진동하였으며 부모의 喪을 입고 사당을 세우는 것을 家禮대로 했으며, 학교를 세워서 유학을 크게 일으켜 斯道를 밝히고 후학에게 열어준” 공로가 있다는 것이 宗廟從祀論의 근거였다. 이때 정몽주를 종사하자는 논의는 金宏弼을 종묘에 종사하자는 논의와 같이 나왔었다.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하며 김굉필의 경우에는 그가 공부하던 곳에 家廟를 세운다는 조치로 이 논의는 마무리되었지만, 어쨋든 중종대 사림들의 본격적인 진출과 더불어서 사림파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근원으로서 정몽주를 거론하고 있었음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절의파가 사림파에 의해 다시 주목된 것은 중종 38, 9년 경이었다. 중종 38년 金安老가 죽은 뒤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했던 사림파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피화 사림들의 신원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은 ‘賢臣’으로 ‘無邪’ ‘無罪’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중요한 쟁점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이 鄭夢周, 吉再로부터 연원하여 계통적으로 전승된 것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곧, “광조의 학문은 김굉필에게서 얻었고, 굉필은 김종직에게서 얻었고, 종직은 前朝臣 길재에서 얻고 길재는 다시 정몽주에서 얻었다. 그것은 濂洛으로 거슬러 올라가 洙泗에 窮源한다”6)는 것이었다.
중종대 己卯士林의 이러한 모습은 道統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학문적 입지를 정리하려고 한 점, 그리고 영남지역의 김종직 김굉필과 길재 정몽주의 학문을 연결하려고 한 점, 그리고 고려의 절의파로서 정몽주와 길재를 거론하는 점 등등의 주목할만한 사항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節義派의 후예로 내세우면서, 그들의 政敵 혹은 사상적 대립세력들과 구별하고자 하였다. 道統을 내세운 배타적 태도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주자학의 세계관과 윤리규범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학문적 역량을 확충하였으며, 이 같은 노력을 매개로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地主로서, 그리고 兩班으로서 향촌사회에서 실력자로 살아가는 가운데 중앙 정계, 관계로의 진출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바의 君臣關係論-公議優先論을 중시하면서도 또한 사적으로 이루는 가족관계-혈연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들은 ꡔ小學ꡕ의 학습, ꡔ二倫行實圖ꡕ․ꡔ警民篇ꡕ의 간행 등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윤리를 적극 개척하고, 중앙에는 지치주의의 정치론을 펼쳤다.
이들의 생각은 어찌 보면, 고려말 조선초 사상계의 두 모습, 혈연적인 유대감에 기초한 정치론을 강조하는 흐름과 公義의 비혈연적 관계에 기초한 정치론을 중시하는 흐름 모두를 받아들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생각은 앞선 시기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실지로는 크게 벗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가족윤리는 가족윤리로서, 그리고 공적인 윤리는 공적인 윤리로서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가족윤리를 공적인 정치론으로 의제하여 활용하는 가천하적인 정치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윤리가 天倫이며, 그 어떤 윤리보다도 앞서는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군신관계를 포함하여 군주 정치론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들이 내세웠던 至治主義는 그 대체의 논리였다. 이것은 주자학적인 성학론에 근거하여 제시된 것으로, 군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신료․사대부의 정치적 이해 범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그 내용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사림파들이 고려말의 절의파 중에서도 정몽주, 길재와 같은 인물을 중시하는 측면도 아마 이 같은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생각은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고 사림 일반의 공론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2년(1569), 기대승은 동방의 학문이 ‘정몽주에 이르러 성리학을 알게되고 이후로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문계보를 재차 천명하였다.7) 이때 그는 이색을 “동방학문의 원류”라고 높이 평가했지만, 성리학의 이해와 연관해서는 정몽주와 분리하려고 했었다.
이처럼 16세기 사림파들의 절의파에 대한 생각은 고려말-조선초의 절의파들을 다 포괄하지 아니하고 협애화되는 양상을 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여타의 절의파들의 존재가 묻혀진 것은 아니었다. 李滉은 ꡔ耘谷詩史ꡕ를 읽고 “역사가 시에 담겨 있다”8)고 평가하였고, 朴東亮은 절의의 서로서 ꡔ운곡시사ꡕ의 가치를 드러내었다.9) 16세기 말 이후로 사상계의 분화가 가속되는 상황 속에서 절의파들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내용으로 다양하게 펼쳐져 갔다.
4. 맺음말
麗末鮮初 사상계의 움직임은 한 국가가 소멸하고 새로운 국가가 성립하는 격변하는 상황과 맞물리며 전개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측면으로 이 시기 사상사의 흐름을 살펴야 할 것이다. 節義論을 축으로 그 흐름을 살피고 정리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기존의 연구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발표문을 작성하였다.
고려말 절의파들의 행동과 사상을 정치이념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것은 쉽지 않다. 자료의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이색의 경우를 보면, 혈연적 유대감을 강조하는 家天下적 政治論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이점은 원천석에게서도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정몽주와 길재의 경우에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가천하적 정치론에 영향받게 되면, 군신관계를 혈연적, 불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사은 사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한번 맺은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이 경우는, 혈연적 관계에 기초한 절의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 건국 후, 이들 절의파들은 정치적으로 학문적으로 조선의 관인유자들, 그리고 정부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는다. 충의와 충절의 행동과 윤리가 새로운 사회 국가를 운영하는데 크게 의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크게 주목받는 인물은 정몽주와 길재였다. 이색과 원천석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ꡔ삼강행실도ꡕ를 통하여 정부에서는 정몽주와 길재를 충의 충절의 인물로 현창했고, 사림파들은 이 두사람을 자신들의 학문적 근원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림파들의 주 활동공간 때문에 오는 현상으로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사림파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학문의 성격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족윤리는 가족윤리로서, 그리고 공적인 윤리는 공적인 윤리로서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가족윤리를 공적인 정치론으로 의제하여 활용하는 가천하적인 정치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윤리가 天倫이며, 그 어떤 윤리보다도 앞서는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군신관계를 포함하여 군주 정치론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들이 내세웠던 至治主義는 그 대체의 논리였다. 이것은 주자학적인 성학론에 근거하여 제시된 것으로, 군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신료․사대부의 정치적 이해 범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그 내용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 ‘節義’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사림파들의 절의파 이해는 상당히 좁아졌는데, 그러나 16세기 말 - 17세기 초로 들며 사상계의 분화가 가속되고 또 임진왜란의 전쟁 경험을 거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朴東亮에 의한 원천석의 재발견은 그 구체적이고 뚜렷한 징후였다.
제4회 운곡학회 학술대회
발표요지문 소개 끝
[출처] 제4회운곡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수정전)|작성자 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