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들 청풍명월이 없겠는가. / 해월 스님
우리네 인생살이는 저마다 빈 가슴으로 떠도는 구름처럼
사념을 쫓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앞뒤를 볼 시간도 없이 바쁜 숨결을 토한다.
삶을 관조하는 여유를 조금이나마 갖고 있어도,
우리는 어디에서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미(美)에는 변화의 미, 침묵의 미, 사실의 미가 있다.
변화의 미는 흐르는 멋이다. 만드는 멋이다.
풍상의 시간이 만든 절의 색 바랜 단청은 화려한 듯
단순하면서도 수수한 기품을 갖추었다.
비와 바람의 세월에 돌의 살결이 적당히 부드러워지는 멋이 있다.
가는 멋, 흐르는 멋, 무너지는 멋, 일어나는 멋,
달라지는 멋은 변화의 미(美) 이다.
침묵의 미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맛이다.
나와 너, 시간과 공간을 잊고 그저 무심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무심으로 보면 모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다.
홀로 있는 맛, 고요한 맛, 흙 담 뒤에 할 일을 다 하고
버려둔 쓸모없는 물건에도 고요가 사무친 침묵의 미가 있다.
사실의 미는 수용의 미(美)이다. ‘있는 그대로’가 미이다.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보듬는 미이다.
고움과 추함, 깊음과 얕음, 높음과 낮음, 기쁨과 아픔,
환희와 절망, 청춘과 늙음, 죽음과 삶을 모두 부정하지 않는 미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생기면 생기는 대로
인위를 가미하지 않은 그대로의 미이다.
부정이 없는 수용의 미(美)이다.
불교에 있어 미(美)는 근원의 미이다.
고요함과 아늑함, 평안함으로 스며드는 미이다.
자신을 누를 수 있는 절제의 미이다. 그저 깊은 침묵의 미이다.
지극한 정성의 미이다. 가질 수 있는데 가지지 않는 청빈의 미이다.
갈 길을 가는 고고한 행위의 미이다.
드러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겸허의 미이다.
불교의 미(美)는 근원에서 흐르는 몸짓들 이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슬픈 민족이다.
나무가 없으면 나무 그림자도 없듯 문화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물질문화만이 아닌 내면의 문화가 절실하다.
여름이 익어 가면 꽃은 무심으로써 나비를 부르고
나비는 무심으로써 꽃을 찾을 것이다.
미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이다.
어느 집인들 청풍명월이 없겠는가?
청풍명월을 즐길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해월 스님 동화사 강원 강주
출처 : 불교신문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