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5분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고민끝에 결정을 했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게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 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 아 ~ ,이제 3분 후이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지나가 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 아 ~ ,다시 한번
인생을 더 살 수만 있다면.... "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 난 그는
그 후,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
수 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형수가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날들,
하루하루를 우리 모두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져보았던
마지막 순간의 5분처럼
소중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금쪽같이 좋은 날,
시간을 아껴서 살아있음에 누리는 이 행복에
감사하면서 멋지게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물자료>: 도스토예프스키 간력 소개
이름: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출생: 1821년 11월 11일
사망: 1881년 2월 29일
출신지: 러시아
직업: 문학인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공병사관학교
데뷔: 1846년 장편소설 "가난한 사람들"
경력: 1846년 "가난한 사람들" 발표
1866년 "죄와벌" 발표
대표작: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하생활자의 수기", "악령","백치" 등.
<참고자료1>: 도스토예프스키 시베리아 유형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억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에 가담하여, 이상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이 토론되었다. 그는 이 토론회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소책자를 불법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소규모 비밀결사에도 참석했다. 서유럽을 휩쓴 혁명운동이 러시아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1849년 4월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 오랜 수사가 끝난 뒤 체포당한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말 극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의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리고, 황제 폐하의 사면을 알리는 칙령이 낭독된 것입니다."
황제의 사면령이 발표되기 직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처형에 대비했던 무시무시한 경험은 그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후기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형선고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다시 4년 동안 군대에서 병졸로 복무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중죄를 범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당연한 죄값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일반 죄수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정신적 고통에 짓눌렸고, 이 무렵에 첫번째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간질병은 그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유형지에서 그에게 허용된 책은 〈신약성서〉뿐이었는데, 이 책은 1825년 12월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이른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 한 사람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거듭 읽었다. 〈신약성서〉는 유형지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배웠다. 죄인을 일으켜 주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다.
감옥생활은 그가 장차 작가이자 사상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젊은시절의 급진주의 사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존중과 민중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주의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은 굴욕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는 1854년에 석방된 뒤 시베리아의 세미팔라틴스크라는 도시에서 병졸로 복무하게 되었지만, 군인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형생활보다 더 지루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여 결국 하급 장교가 되었고, 친구도 몇 명 사귀었으며, 유형생활 동안 책을 읽지 못해 생긴 공백을 벌충하기 위해 책과 정기간행물을 보내 달라고 형에게 거듭 간청하곤 했다.
이 무렵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857년에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와 결혼한 일이다. 결핵 환자인 이 과부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으로 경제적 부담까지 짊어지게 되자, 지난 몇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나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유형생활중에 생각해둔 다양한 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익살스러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숙부의 꿈 Dyadyushkin Son〉(1859)은 세미팔라틴스크를 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한 한 지방도시의 위선적인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그보다 앞서 활동한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의 창작 방법을 따르고 있다.
뒤이어 좀더 야심적인 중편소설 〈스테판치코보 마을과 주민들 Selo Stepanchikovo i ego obitateli〉(1859)이 발표되었는데, 비록 예술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있지 않지만, 이중인격자인 주인공 오피스킨에 대한 묘사 덕분에 이 작품은 졸작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2편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2편의 작품을 발표한 직후, 그는 쇠사슬에 묶여 유형을 떠난 지 만 1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그가 사랑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참고자료2>: 도스토예프스키가 감옥으로 끌려갈 때 형에게 쓴 편지 (발췌)
형님, 나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삶은 삶입니다.
삶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불행 속에 있어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이며 인생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이 생각이 나의 살과 피가 되었습니다. 여하간 내겐 사랑할 수도 고민할 수도, 기억할 수도 있는 피와 살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처럼 풍부한 정신 세계가 내 내부에 비등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건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과오와 나태와 무능한 생활을 했는지 후회 막급입니다. 얼마나 시간을 소홀히 했는가.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해왔는가를 생각하면 창자가 잘리는 느낌입니다. 삶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삶 자체가 행복이어야 하는 겁니다. 일순간 일순간을 영원의 행복으로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형님! 맹세합니다.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정신과 육체를 청정(淸淨)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감옥으로 끌려갈 때 형에게 쓴 편지 중 발췌 >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이 약간 미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이 그의 내면의 반쪽이 원하는 대로 평화로웠다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미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불륜을 싫어하면서도 ‘불륜이 없으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사나.’하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매우 복잡하고 매우 이중적이며 극한의 대립을 자기 내면에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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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은 어제 죽은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 순간순간을 후회없이 살아야 할텐데요. 머리카락 같이 많은 날들이라고 대충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지금 이시간이 다시 돌아오지않을 시간이기에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고 이시간들을 함께했던 가족들 ..친구들..언젠가는 추억속에 모습들이 되겠죠?...제기억속에 곱게 간직하렵니다..제모습도 그사람들 기억속에 좋은 모습으로 남게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