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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이 낳은 탁안철이 글 한편 올린다. 시인 인태야, 날 용서해라.
난 그저 생각나는 대로 갈기는 사람이니.
수수 애란님은 잠이 잘 안 온다고 했으니 잘 읽어보길 바란다.
다 같이 우리 어머님과 대화 한다고 생각하고
잘났던 못났던 잘 살았던 못살았던 같은 입장에서
함께 옛날은 추억하면서 내 얘기 들어보세..
●해설: 옥천마을 회관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든다. 아무리 시골이라고 하지만
오전 11시면 점심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다. 뭐 한적한 시골에 아무리 농번기라 할지라도
급할 게 없다. 오래 전에 기별을 들었던 사람들 중 주인공 할머니와 친분이 많은 할머니들은
무슨 좋은 구경 난 것처럼 앵두나무 우물가에 호미자루 내동댕이치고 치마를 흔들며
삼삼오오 몰려든다.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들을 보는 것도 시골에서는 흔하지 않은
풍경이니까?
주인공 임분애 할머니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
고통의 하루하루를 보낼 때는 일각이 여삼추였는데, 이제 돌이켜보니 누구 말처럼
'사람은 철들자 죽는다'더니 팔십 평생이 눈 깜짝할 순간에 가버리고 말았구나.
경위야 어떻든 마지막으로 동고동락했던 동네사람들에게 빚을 갚고 떠나는 심정이어서
너무도 후련하단다.
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작은 여인이 철의 여인이라니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가 자못 궁금하다.
Q: 할머니, 먼저 팔순 동네잔치를 축하드립니다.
A: 다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촬영까지 해줘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못난 이 할미를 이렇게 인터뷰까지 시켜주어서 너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Q: 정확히 올해 팔순은 아니라면서요?
A: 팔순 잔치는 내 나이 팔십에 가족끼리 부산 아구찜 하는 둘째 아들내 집에서 했지. 그런데 항상 동네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이 들어서 늘 마음이 무거웠어. 얻어먹기만 했지, 어대 그럴싸하게 대접을 못했거든. 내 생각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한 턱 내는데, 내가 한 턱 못 내고 죽는 다면 정말 큰 한이 되는 것이제.
늙은이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 빚마저 갚지 못하면 눈을 감을 수도 없지.
혹여, 여봐란 듯이 으스대려는 의도에서 잔치를 고집한다고, 노망든 노인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런 허접한 생각은 나의 본심은 그런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세요.
Q: 기왕 벌이는 잔치인데요, 누가 그런 오해를 하겠습니까? 아무튼 잔치 잘 마무리 하시고 건강하시고 오래사세요.
A: 오래 사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고 봐요.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제때에 갈 수만 있다면 늙은이들의 최고의 바램이자 행복이겠지요.
(고난의 원인)
Q: 할머니 얘기를 좀 더 듣기 위해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옛날 추억이라 생각하시고 재미있게 들려주세요. 우스갯소리나 노랫가락
한 소절 씩 섞어 주시는 센스, 잘 아시죠?
참으로 많은 고비를 넘기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 전 인생을 돌이켜
가장 힘들었든 일 몇 개만 소개해 주시지요.
A: 잘 알다시피 1920년대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니 나면서부터 고생길이지요.
나라를 잃었으니 누가 백성을 돌봐주겠습니까? 특히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일본 놈 들의 수탈은 끝이 없었지요. 사람이면 사람, 물자면 물자, 나무에서 놋그릇까지
산에 나무면 나무, 이 작은 섬에도 광산이 여러 군데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다 빼앗아 가니 우린 시대와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지요. 그때는 특히 봄에 가뭄이 심해서 보리 고개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다고나 할까요?
Q: 결혼 전에도 인생의 험난함을 알고 있었나요?
A: 그 어둡던 시절에, 교육이나 경험이 없던 시절, 다른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나 역시 다들 철이 없었고, 미래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요.
Q: 그렇다면 할머니의 인생고난 1막은 결혼과 함께 시작된다고 봐도 되겠네요.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보통 동화 속에는 왕자님과 결혼하면서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인데..
A: 내가 17살로 시집 올 때만 해도 정말 조선시대의 봉건적인 유교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이었지요. 칠거지악, 삼종지도는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 시대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노예와 같지요. 가부장적인 농촌사회에서 약자인 여인이 시집가서 시집의 귀신이 된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하니까.
요즘 유행어로 "어디, 감히 여자가 지 마음대로 하고 있어!"
말이 필요 없는 답답한 시대였지요.
Q: 작은 한 고개만 넘으면 지족에서 옥천인데요, 옥천마을에 대해서 시집오기 전에
옥천이나 시집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나요?
A: 왜정시대에 옥천마을에 강습소가 있어서 초등교육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기본적인 일본말과, 산수, 체육 등을 배웠습니다. 옥천의 산과 들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시집을 왔을 때도 생소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Q: 고인이 되신 남편 탁민규 할아버지와의 만남, 그리고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궁금한데요.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
A: 지금 흔히 말하는 자유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었지요. 추측컨대, 한학을 하신 우리 아버지가 여러 곳에 수소문을 하다가 일본에도 들락거리고 키도 커고 인물도 출중한 청년인 제 남편을 낙점한 것 같아요. 집안내력은 은 거의 무시하고 그 청년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샀던 것이지요.
Q: 그 당시 한학을 하셨던 아버님의 식견이라면 아주 탁월한 배우자 남편선택기도 하지만, 쉽게 말해 왕의 왕비 간택이었던 셈이군요.
A: 그렇죠. 요즘이야 배우자가 될 사람을 재고 또 재다가 볼이 다보고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당시 분위기로 배우자에 대해서 어디 감히 어린 여식이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지요. 그저 먼발치에서 진행상황만 지켜볼 뿐이었지요. 그리고 어른들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는 그런 사정이었지요.
Q: 잠깐,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결혼 당시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후 왜 그토록
남편을 원망하게 되는 거죠?
A: 사실대로 말한다면, 처음부터 신랑이 원망스런 존재는 아니었지요.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요새 대세인 배우 현빈처럼 잘 생겼었지요.
그리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신식 물정에도 밝았으니까요.
운명의 비비 꼬임은 한국전쟁부터 시작되었지요. 전쟁에 나가 전쟁터에서 적의 포탄에 머리 두개골의 4분의 1정도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다들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미군 야전 병원에서 수차례 뇌수술을 받고나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지요. 그리고는 고향으로 후송되었는데, 그 이후 10년 동안 기본적인 쉬운 말도 못할 정도였으니 어디 가장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의 짐은 커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원망이 커져갈 수밖에는 없었겠지요.
다들 잘 아시다시피 가장의 노동력이야말로 농촌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 속칭 반 병신이다라고 하면 그 가정이 어찌 순조롭게 잘
유지되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국가유공자 보훈제도 같은 것을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잘 알지도 못했고,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어서 국가로부터의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지요.
Q: 그래도 남편만은 아내편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군요.
A: 처음엔 괜찮았던 것 같았지만 현실의 파고 속에서 그런 그나마 괜찮았던 감정은
완전히 없어지고 현실의 무게 속에 경멸과 증오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지요.
(냉정한 시집살이와 고난 극복)
Q: 시집오고 나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친정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감옥과 같은 시집의 질곡에서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A: 처녀 때부터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었지요. '이놈의 가수나야, 여자는 한 번 시집을 가는 순간부터 그 집의 귀신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살기가 힘들다 하여도 포기하지 말고 행여 죽더라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 등의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지요.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시집간 여자가 도망가서 할 일이란 별로 없었을 뿐더러 다들 인간으로 태어나 남들에게 손가락 받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는 이데올로기적인 교육을 받았었지요.
요즘 좋은 말이 있더군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아마 나한테 꼭 맞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Q: 그럼 '피할 수 없다면 즐기겠다'라는 심정으로 살기 시작한 건 어느 시점이었을까요?
A: 시집온 후 3년 정도 지나자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하고, 집에서도 어느 정도 나의 능력과 성실성 그리고 인간성과 책임감에 대해서 서서히 인정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였지요. 시어머니도 가정의 경제에 대해 신경을 좀 내려놓고 나에게 가정살림의 대소사를 맡기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지요.
Q: 이건 임분애 할머니에게 좀 불쾌할 수도 있는 얘기인데, '밤중네'라는 말에 얽킨 얘기를 좀 소개해 주시지요. 일단 무슨 뜻인가요?
A: '밤중네'는 글자 그대로 밤중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언뜻 보면 너무 열심히 일하는 가족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밤까지 일하는 지독한 가족이 아니라 낮에는 거의 자고 놀고 저녁 무렵에 잠시 들에 나와서 일하는 척하는 너무나 게으른 가족이라는 용어이지요.
요즘말로 좋게 표현하면 '저녁형 인간 들'이지만 정말 듣기 거북한 말이랍니다.
Q: '밤중네'가 다름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할 탁씨네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A: 참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지요. 그런 수치스런 얘기를 들을 만큼 미련하고 게으른 것은 인정합니다. 다들 그러했으니까요.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들로부터 치사 혹은 칭찬은 듣지 못할 망정,
대를 이어 주변 이웃으로부터 그런 수모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당시 탁씨 가족을 보고 너무도 절망했습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결심했죠. 밤중네라고 불리는 그 대물림의 고리는 내가 반드시 끊어내고야 말겠다. 조상들은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나의 자식들은 절대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비장한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겠다고 결심했죠. 바로 나 아래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아주 굳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나의 생각에 부응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던 우리 아이들이 정신없이 매질을 당하는 날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선생님도 자식이 있을지 모르지만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있습니까?
그 금쪽같은 아이들이 가차없는 교육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지요.
또 덧붙이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네요. 하도 밤중네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사람들아, 태그네(태기엄마)라는 좋은 이름을 두고 쓰지 밤중네라는 말은 나에게는 더 이상 쓰지말라"라는 엄중한 경고를 이웃들에게 하였습니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길을 가다가도 딱 세워 놓고 다시는 그런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도록 다짐을 받기도 했었지요.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태기엄마(사람들은 저를 태기엄마라고 부릅니다)의 별명은
'칼'이 되었지요. 사리가 분명하고 약속을 어기면 그 누구라도 어김없이 베어버리는 그런무시무시한 사람이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Q: 아무리 이 가정을 내가 책임진다고 결심한다 해도 현실은 정말로 냉정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회사생활의 가장 어려운 점이 대인관계라고 하는데, 일단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일하기가 힘들다는 뜻일 텐데요, 일단 앞에 '시'자가 붙어있는 어른들 대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고 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가족이라는 운명으로 계속 부대껴야 하는 데, 참으로 하루하루 고통이 심했겠습니다. 밤중네의 원조는 아니더라도 그 책임의 시초이자 한 가운데 있는 시아버지부터 잠시 소개해 주시지요.
A: 참으로 악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한마디로 미련하고, 게으르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었지요. 나쁜 양아치가 힘없는 친구들 괴롭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역사에 출현하는 안하무인의 폭군을 연상해도 되겠네요.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의
거의 절반이상은 욕이지요. 고함치는 것은 기본이요, 별 아이디어도 없으면서
열심히 진행해 놓은 일을 훼방하는 것이 취미였지요.
입에 담기는 좀 그렇지만,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수없이 갈겨도 분이 안 풀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꼴에 같은 탁씨 들이라고 편을 만들어 즉, 시숙이나 시누이 들이 합세할 때는 참으로 가관인데, 그럴 때면 진시황이 귀찮게 구는 학자들을 큰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었다는 얘기(분서갱유)처럼 저 떼들을 나도 큰 구덩이 넣고 기름 팍 부어 태워버려도 주리가 남을 것 같은 심정이었지요.
Q: 예, 그 심정은 대충 저도 이해가 가는 군요. 그건 그렇고 시아버지와의 일대일 대낮 맞짱 사건은 어떤 것이었는지, 유쾌하실지 불쾌하실지 모르겠지만 잠시 간단히 회상해 주시지요.
A: 선생님, 좀 짓굿네요. 그렇지만, 질문을 하시니까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요. 누가 봐도 그 사건은 완벽한 패륜사건이지요. 어디 백주의 대낮에 며느리가 하늘같은 시아버지와 일대 일로 맞짱을 뜬다?
사회질서가 일거에 무너지고, 동네사람들이 곡괭이 들고 나서는 천인공노할 일이며, 잘못하면 아랍의 바람피운 여인처럼 돌팔매질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위기일발의 사태이지요. 그러나 사태의 진행을 살펴본다면 "흠, 그럴 만하군" 하면서 다들 고개를 끄덕거릴 것입니다.
Q: 남들이 수긍할 만하다? 매우 궁금해지는데요, 사건의 전말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지요.
A: 때는 바야흐로 시집살이 20년차 정도 들어설 때였지요. 매년 꾸역꾸역 살아가는데 의미를 두고 있었지만, 해마다 돌아오는 성묘는 참으로 난감한 행사였습니다.
경향각지의 탁씨 종친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본에서도 몇몇 성공한 탁씨 어른들이 가장 큰 연중 집안 중대사랍시고 우리 선산을 방문하여 정성을 모아 다 같이 성묘를 행하곤 했지요.
우리 산골집이 선영과 접해있는 관계로 반드시 사람들이 우리 집에 마지막에
집결하게 되는 것은 그날의 마지막 코스로 경부선과 호남선이 올라가면 대전에서
만나는 이치와 같았습니다.
쪽 팔림도 1, 2년이지,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로구나. 내가 시집온 지 20년,
이집 살림살이 책임을 진지도 10년이 넘었는데, 언제까지나 못산다고 해서 이토록
거지같은 집, 장판하나도 제대로 없는 집에다가 사람들을 모셔야하나. 마땅한
제기하나도 없는 집, 이건 아니다. 마침 큰아들 머슴살이 선불로 받은 세경도 있으니 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괜찮은 장판도 깔고 그럴싸한 제사용 촛대야, 제기 등도 마련하리라.
크게 마음먹고 성묘가 다가오기 전에 배타고 삼천포 시장에서 발품 팔아 적당한 것들을 산 다음 이고 지고 길가에 넘어져 가며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왔건만, 치사는 못할망정 고성으로 꾸짖으며, 사람을 계속 쫓아가며 계속 나무란다.
완전히 뚜껑이 열려버리는 시추에이션, 그래 너 오늘 아주 잘 걸렸구나. 말 한마디 막힘없이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하다.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하여라. 무엇이 이치에 맞는 것이고 틀린 것이냐?
한 번 속 시원히 말해보아라. 요즘 말로 끝장토론에 들어간 거죠.
말문이 막히니까 이 미련한 인간이 꼴에 시아버지라고 폭력으로 나를 제압하려고 할 거 아닙니까?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양심이 있다면 어찌 인간으로서 나의 마음을 모르느냐?
짐승이 따로 없구나. 한 때 때리면 바로 반격을 가하니 아무리 남자이고 시아버지인들 정당하고 혈기 방장한 며느리를, 보리가마니 들고 날라 다닌다는 나에게 어찌 적수가 될 쏘냐? 술잔이 식기 전에 화웅의 머리를 베어오겠다는 관우의 심정으로 일합 일합으로 대처했지요.
난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파이터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지만 적당히 뿌리치면서
복싱 같으면 스트레이트와 훅, 그리고 어퍼컷을 적당히 날려주는 거지요.
시어미나 남편이 말리지 않았으면 더 큰 사단이 나고 말았겠지요.
나도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무서운 사람이니까.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시아버지의 전횡은 많이 줄어들었지. 그렇다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동네사람들아, 내가 며느리 년에게 터졌어, 너희들이 저 간악한 며느리를 동네에서 쫓아내 줘"라고 말하면서 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럼 두 번 우사이고 자신도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니까.
Q: 그러면 이제 고난의 극복대상 2호인 시어머니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A: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인자하게 생겼고 또 어진 행동도 많이 하였지요.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의 외모인 인물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인물이 전부인 경우도 많지요. 보시다시피 난 인물은 별로라 생각합니다. 키도 작고 눈도 작고 남자들이 보는 여자의 입장에서는 별로 매력이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인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시어머니는 타고난 미인이었지요. 그래서 나의 신랑도 멋있게 생겼었고, 그 덕분에 우리 자식들도 어디나가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을 만큼의 인물을 갖게 된 그 시초가 바로 우리 시어머니이지요. 우리 자식들이 항상 너무 감사하는 부분이지요.
어쨋거나 나는 별로 인물의 중요성에 찬성하는 바는 아닙니다. 사람이 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만 진정 사람이지요.
Q: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잠시 우리 아드님, 따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군요.
A: 야야, 얼굴 한 번씩 카메라에 비춰줘. 다들 인물이 좋은 편이로군요.
Q: 그래도 시어머니도 여자이니 어떻게 보면 같은 시대의 피해자 입장으로 요즘말로 과부가 과부사정 안다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서로 잘 지내었을 것 같은 데요.
시어머니의 성격도 인자하고 무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인간적으로 본다면 크게 흠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단점이 많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요즘 말로 하면 서로가 코드가 많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역할이 있지 않습니까? 위에서 내려오는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 나름대로 막아주고, 아랫사람에게는 선악을 구별해서 판단을 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시키고, 특히 자녀교육은 부모의 역할이 지대하니까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죠.
예를 들면, 당신의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본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씨발년'
등의 욕을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해도 "시간이 지나고 크면 괜찮을 거야, 신경
쓰지 마. 다들 어른이 되면 달라지겠지."라고 말하면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난 하루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고, 사람처럼 대우하고 대접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들 만큼은 내가 확실히 가르치겠다고 맹세했지요.
금쪽같은 내 새끼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이런 주변의 못된 행동을 보고 배울까봐 두려워 과민하게 아이들을 훈육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필요 이상의 매를 많이 맞았다고 봐도 됩니다.
Q: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많이 볶아댔다는 이야기를 막내 아드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대인으로 생각되시는 임 할머니께서 왜 그러셨는지요?
A: 지금 생각하면 나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리고 막내아들이 그렇게 말하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군요. 막내가 고3때까지 시골에 있었으니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상대인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보다도 억울하고 괴로운 세월은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원망, 넋두리, 보상심리 같은 것이 아니었겠나라고 생각합니다. 변명 같지만, 너무나 심한 정신적 상처인 트로우마를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통해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 치료의 방식으로 마구 쏟아 낸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시어머니가 정말 야속했던 에피소드 하나 더 소개하지요. 아까 말씀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9순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좀 봐 주세요.
그 어려웠던 6, 70년대, 한참 커는 아이들이 먹는 것이 어디 한정이 있습니까?
무엇이든 먹으려고 허덕거리는 시기이지요.
그럴 때, "야, 이놈아, 그만 먹어, 우리도 좀 먹고 중 노동을 해야지. 이젠 됐어."
그렇게 정확하고 단호하게 말을 해야지요.
"어, 저 놈이 또 내 보리밥을 뺏어 가버렸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나의 몫도 누룽지 조금인데, 바보 같은 할망구야, 자신의 밥을 다 빼앗겼으니 그럼 보리밥은 고사하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내 누룽지조차도 또 나누어 먹자는 얘긴가? 저 철부지 인간이 배가 불러도 일은 안하고, 어디엔가 가서 말썽만 부리고 놀고 올 텐데, 과연 당신이 생각이 있는 인간인가?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지요. 누가 자기 자식이 이쁘지 아니하겠는가?
옛말에 '얼러 키운 놈이 호로자식'이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 따위로 하니
아이들이 그 모양이 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죠.
그러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지 않겠어요.
세월이 한 참 지나고 나서도 시어미 얼굴만 대해도 옛날일이 끊임없이
샘물처럼 솟아오르니 견딜 수가 없어서 무의식중에 마구 퍼부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예요. 남들이 비난하고 나에게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Q: 고인이 되신 분인데, 좀 과한 것 같습니다. 이제 남편얘기를 좀 더 해 보지요.
고인이 되신 남편과는 사랑과 증오의 애증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A: 맞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나의 남편이고, 금쪽같은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장본인이니까요.
앞에서 잠시 언급이 있었지만 결혼 초기는 좋았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사정은 180도 바뀌었지요.
반쯤 병신이 되어 돌아와 그래도 남자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했지만,
시건이 빤하고, 미련이 가득하니 가정이 제대로 굴러 가겠습니까?
남의 말이라도 잘 들어 준다면 좋으련만, 고함을 치고, 폭력을 휘두르고,
술이라도 취 할 때면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한 적이 아주 많았습니다.
Q: 그랬는데도 고인이 되신 남편이 중풍에 쓰러졌을 때 왜 지극정성으로
치료하셨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어차피 돌아가실 분인데, 빨리 가시면 더 나았을 것 아닙니까?
A: 뭐 나라고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나라도 열심히 보살펴야 아이들이 보고 배우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애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밖에요. 그냥 두자니
애처롭고 살리자니 보통이 아닌 아주 힘든 상황이 발생하는 거지요.
이 자리를 빌어 우리 마산 송철이 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식물인간인 덩치 큰 시아버지를 그냥 홀딱 벗겨서 달랑 안고 목욕통에 넣고는
몸 구석구석 씻겨서 한량으로 만들어 놓는 그런 괴력을 발휘 하기도 했지요.
Q: 근 40년 동안 한 집안의 가계를 책임지고 빚에 빚을 물고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식구는 많고 소득은 적은 상황에서 어떻게 가계를 꾸려나왔나요.
A: 난 솔직히 대기업 재무 담당자가 나보다 더 괴로웠겠는가? 라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작은 살림이지만, 흑자가 나면 재미라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나갈 돈은 많은데 손에 있는 돈이 없으니 무조건 빚을 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말이 쉬어서 그렇지 어디 빚이란 것이 변화무쌍해서 신용이 없는 아무나에게 마구 빌려주나요?
그런 면에서 나는 철저히 신용을 지켰습니다. 빌려준 채권자 아무개가 갑자기
돈을 갚으라고 하면 높은 이자를 쳐 주고라도 다른 곳에서 빌려 즉시 갚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돌려막기이지요. 나의 분명함과 신용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빚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겠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에 대한 그런 인간적 믿음이 나를
지탱해 주었고 내 나름대로 살림을 꾸려가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6, 70년대는 인플레이션 시대였으니 시대가 날 도와주었지요.
3부 이자를 물고도 견딜 수 있었던 시대이니까요. 내가 무슨 경제를 알겠습니까만,
남들보다 이자 많이 쳐 준다고 하니, 그리고 믿을 수 있는 태기 엄마니까 마구
빌려주었던 거지요. 이 자리를 빌어서 저에게 믿음을 보여주신 고인이 되신
많은 동네어른들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Q: 돈에 시달리는 일은 제일 괴로운 일 중의 하나인데, 요즘 젊은 신용불량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만, 살기 위해 빚을 내야지, 즐기려고 혹은 남에게
과시하려고 빚을 내면 절대 안된다라는 말을 말해주고 싶네요.
Q: 40년 이상 빚을 이고 지고 한 가계를 이끌어 오셨는데, 정말 괴로울 땐 어땠나요?
A: 답이 없지요. 현실이 창살 없는 감옥인데, '자다가 죽으면 제일 좋겠구나'라고
생각하곤 했지요. 세상이고 자식이고 아무런 생각 없이 잘 때 죽으면 너무 좋겠다.
부관참시를 당한들 죽은 시체가 무슨 고통이나 모멸감을 가지겠는가? 그런
심정이었지요.
Q: 제가 주변에서 들은 바로는 6, 70년대 조국 근대화의 변화무쌍한 시대, 어떻게 보면 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가족 전체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해야 된다는 그런 기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단호히 거절했습니까?
A: 저도 몹시 고민에 고민을 하였지요. 그러나 결론은 No였답니다. 남편이 삼천포
말 구루마 사업을 하겠다고 거의 10년간 노래를 불렀어요. 집, 논, 밭, 야산 팔아서
말사고 구루마 사고 작은 집사고, 어떻게든 될 테니까 일단 나가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성공확률은 2분의 1이지만, 온전치 못한 우리 남편이 과연 뛰어난 도시 놈들의 상대가 되는가? 만약 실패라도 해서 10식구가 생면부지의 길가에 누워 구걸로 생을 연명한다고 생각하니 나가기가 무서웠고, 혹여 내가 내는 안에 모든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준다는 보장이 있으면 결단을 내리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죽 살아본 결과 거의 없다고 결론을 지었지요.
결국 나의 꾸준한 반대로 모든 논밭을 팔아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Q: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 좀 할머니의 포스(force)를 느낍니다. 제가 와서 죽 보니까 옥천마을은 완전히 사면이 둘러싸인 요새이자 분지 같은 느낌이 듭니다. 60년간
이 작은 분지에서 그 강렬한 포스를 작렬시켰다면 다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포스에 쓰러졌을 것 같은 데요.
A: 좀 과장된 부분은 있습니다만,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었지요.
지금도 동네사람들이 함부로 나를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자기 자랑 같지만, 제 나름 대로의 인생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왔다고 봐요.
아낌의 미학이랄까, 겸손의 미덕이랄까? 난 단 한 번도 내 자랑, 내 자식 자랑을
사람들 앞에서 해본 적이 없어요.
설사 내 아이들이 재벌이 되고, 국가의 주요 지도자가 된다 해도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신뢰하고 많은 존중을 보여
주었던 거지요.
Q: 이 작은 마을에서 아드님이나 따님이 비교적 성공했을 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만도 한데 할머닌 그런 마음이 정말 없으셨나요?
A: 인간이라면 어찌 그런 유혹이 없었을까만, 살아온 세월자체가 생활이자, 교훈이니 뭐 달리 자랑해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자랑하고 다녀봐야 나만 작아지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많이 삼갔지요.
Q: 죽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참 숙연해 집니다. 소박하게 사셨지만 철학자의 냄새가 나는 군요.
A: 난 철학을 잘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하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루를 살아도 올바르게 살아야 인간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살았지요.
Q: 고난극복의 상징인 우리 임분애 할머니께서 가장 힘들었던 보릿고개시절의 전형적인 하루 일과를 말씀해 주시지요.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참으로 편하게 사는 우리들 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과거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A: 살기가 가장 힘들었던 60대 중반의 어느 하루를 스케치해 보겠습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려나 보다. 오늘은 몹시 몸의 상태가 좋지 않다. 아마도 봄비가 저녁에 쏟아진 모양이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비이지만, 이놈의 몸은 왜 천근만근인가? 매일 매일 노동에 몸이 이제 못 견디는 모양이다. 어제 밤의 모시삼기가 조금 일찍만 끝났더라도, 오늘 아침 비가 내리지만 않았더라도 좀 몸이 가벼울 텐데..
며느리인 주제에 날구지 한다고 더 누워있을 수도 없고 이리 저리 몸을 굴러본다.
대 식구 먹을 양식도 없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꽁보리 절구에 찍어서 죽물이라도
돌려야지. 쌀은 아예 구경을 못한다. 밥의 양을 늘이기 위해 무야 고구마야 바다에서 건져온 몰이야, 주치이야 마구 넣고 가마솥에 끓인다.
이 모든 것을 연출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사는 것이 드라마이다. 죽기는 싫으니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변변한 땔감이 어디 있나? 소나무 갈비 좀 때다가 부석(아궁이)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푸른 명감나무 가시야, 푸른 솔캥이(푸른 소나무 잎)를 함께 섞어서 불을 땐다. 코는 울어서 콧물이 흐르고 눈을 매워서 눈물을 흘린다.
그럭저럭 대식구의 아침식사를 마치는 것도 혼이 나갈 지경이지만, 이제 아침 절에
더욱 힘차게 일해야 한다. 일 년 농사의 시작이니까.
지난 주 똥개 한 마리라도 식구대로 삶아 먹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을까?
내일부터 모내기 품앗시에 들어가는 데, 어찌 12시간의 중노동을 이겨 낼까?
걱정이 태산 갔구나. 허리가 아프다고 구들장을 침대로 하여 누울 수도 없다.
비가 그치기 전에 고구마를 놓아야 한다. 제법 무강(고구마 순)에서는 순이 한자
이상으로 길어졌구나.
식구대로 나와서 두엄을 뿌리고 작은 비료지만 골고루 흩고 똥 장군 지고나와
빨리 똥바가지로 고루 뿌려라. 남정네는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해가 나기 전에 빨리 고구마 순을 적당하게 흙 이랑에 심어라.
내일이면 모든 것을 전폐하고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내기를 시작하여 15일 죽음의 행군을 시작해야지. 모내기는 시기를 놓치면 심는다 해도 쭉정이 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점심은 밀가루 국수를 만들어서 이른바 할머니 손칼국수를 만든다.
큰 도마 위에 열심히 반죽을 크고 얇게 밖으로 밀어낸다. 가마솥은 벌써
하얀 김을 뿜기 시작한다. 실컷 먹을 수야 있겠냐만, 허기만 채우고 다시
산으로 간다. 엄달 산 논에는 거름이 없어서 파랗게 돋아난 풀을 베어서 논에 넣어야 한다.
짚신을 신었는지 벗었는지도 모른다. 산길을 다니다가 독사에 물린다면
그래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이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런 오늘을 종결짓는
독사라면 흔쾌히 초대하리라. 그런데도 독사들은 다 어디로 도망갔단 말인가?
저녁식사 준비나 어린 아이들은 시어머니가 시누이하고 준비하고 있겠지.
남들이 고사리를 다 끊어 갔구나. 난 재빨리 450미터 대방산 정상까지 한 걸음에
다다른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의 발길이 없었던 터라 봄 비를 맞고 자란 그 굵은
고사리들이 연중행사로 날 맞이해주고 있구나. 발품을 판 보람으로 1시간 만에
한 바구니를 다 채웠구나.
이제 산해진미의 대미를 장식하는 개발이(해변에서 조개 등을 채취하는 것)를 하러
지족우리 마을 개펄로 달려가야지.
뭐니 뭐니 해도 산해진미에 해산물이 빠질쏘냐?
무슨 가미가제 결사대의 정신으로 미친 듯이 바닥을 호미로 파고 긁는다.
그래도 한 바구니는 한 시간이면 채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태어나
자란 내 구역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각종 녹조류, 갈조류까지 채취하게
된다. 어른들에게 점수 좀 더 딸려고 사력을 다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일은 끝나지가 않는다. 새끼줄이 부족하면 새끼도 꼬아야하고
잠시 볕이 나면 보리나 깨를 도리깨로 타작을 하여야 한다.
도무지 장정을 포함하여 다른 식구들이 때리는 도리깨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는 둥 마는 둥, 개 바위 무심코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질도 나고 악도 바쳐서 더 힘차게 도리깨를 휘두른다.
자기 전에 우리 아이들과 식구들 찢어진 무명 옷 바느질을 마쳐야 한다.
옷도 약하고 실도 약하다. 거의 하루를 빠뜨리지 않고 바느질을 해야 하다니.
전기불도 아니고 등잔 밑에서 눈을 비벼가면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과연 죽기 전에 이러한 비극이 끝날 수 있을까?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인가? 편안히 호강하는 삶은 없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이제 저녁 8시를 넘기는 구나. 잠은 이미 쏟아진지 오래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제는 자야겠다. 여기저기서 코를 고는 소리가 진동한다.
그러나 불면증을 호소하는 것은 아마도 무리이겠지. 천둥이 쳐도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Q: 듣고 보니 조선 여인의 한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창선 섬의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옷, 먹거리, 그리고 주거문화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지요.
A: 요즘 아프리카 여행지에서 보는 그런 옷들이었지요. 여름이라면 주요 부위만 가리는 정도이고 겨울이면 마구 껴입는 둔탁한 패션이라고나 할까요. 딱히 봄, 가을 용 옷은 없었지요. 찬 밥 더운 밥 가릴 입장이 아니었으니까요. 네 옷 내 옷 구분도 할 수 없는 시절이지요. 특히 모시 삼베 옷 짜는 과정은 몹시 성가신 과정이었지요.
실제로 베를 짜서 돈으로 만든 경우도 있었어요. 혹시 베틀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날 물건이 되고 말았지요.
가장 서러운 것이 배고픔 아니겠습니까? 식구는 많고 먹을거리는 없으니
항상 배가 고팠지요. 그리고 양심상 음식이 생겨도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실컷 소고기야, 과일이야 먹자고 아랫집 산석이 엄마하고 약속도 했지만, 그 친구가 빨리 가는 바람에...
요즘 어린 아이들이 음식투정하고 음식 버리는 것을 보면 우린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요.
집이야 시골집이 다 그러하지요. 초가집에 사랑채 하나, 사랑채는 외양간과 창고가
있지요. 본채에는 방이 2개이고 정기라고 불리는 부엌하고 안청이라고 불리는 제사지내는 중간 방이 있지요. 아무래도 어른들이 무서우니 큰방에는 어른들이 작은 방에는 아녀자와 어린이 들이 뒤엉켜 자게 되지요. 특히 과거 6, 70년대에는 하얀 이가 많아서 밤마다 옷을 벗어서 이를 잡고, 할머니들은 손자들의 등을 더듬어서 이를 잡아내곤 했지요.
Q: 임 할머니께서는 어쨌든 성공적인 일생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축하드리고 순조롭게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 가장 큰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요?
A; 특유의 돌파력이었지요. 나 아니면 열 식구 다 굶어 죽는다.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살았던 것이지요.
Q: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면 생을 포기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위기 때마다 어떻게 극복을 하셨습니까? 신앙의 힘이 있었습니까?
A: 아무래도 조상신이나 토속신앙에 의존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제사나 명절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곤 했었죠. 아마도 아이들이 보고 느낀 점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크게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자각 같은 것 말입니다.
Q: 연로하신데도 장시간의 재미있고 교훈적인 얘기를 들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 대로 반듯하게 성장해준 자식들에게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A: 생각나는 대로 대충 고마움과 미안함을 5남 2녀 자녀들에게
짧은 편지를 써 놓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공개하지요.
Q: 임 할머니 인생을 한마디로 총평을 해 주시죠?
A; 많은 짐을 지고 시작했지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게 돼서 너무
많은 것에 감사하고 지금의 이런 상황을 보고 눈을 감게 되어 너무나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그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서 장구 치면서
밀양아리랑을 마을사람들과 합창하고 싶네요.
그리고 세상은 고생한 만큼 그 보람도 크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들 전국의 노인 여러분, 말년을 행복하게 마무리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너무 긴 소설이었다.
창섭아, 금준아, 덕호야, 용규야, 넌 잘 알겠지. 분지떵에서 호망골에서 매반뜰에서 놀았으니 죽기전에 우리 만나서 한 번 저수지 물길에서 다시 한 번 그 멋진
캠프파이어 해볼날이 있겠나. 옥천 큰 저수지 물막이 콘크리트에서 모닥불 피어
놓고 단순무식한 고고춤을 추며 어는 겨울 밤을 보냈던 그날이
나의 최고 절정의 행복 장면(scene)이란다. 옥식아, 내말에 동의 한다면
댓글 한 번 더 달아라.
첫댓글 울엄마 보다 딱 열살 더 드셨네. 이번주 일요일 울엄마 칠순이신데. 소설같은 인생사다. 니내할것없이 그시절엔 그랬으니, 지금이라도 옛얘기한면서 살면 그게 행복인거다.
태연아, 정확하게 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겠다. 아마 황명자 친구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면 그림이 나올 것 같구나. 우리 아이들이 울 아빠는 효성이 지극하시다고 아빠란에 적었다고 하더구나. 난 그저 마음가는대로 행동했는데, 어린 아이들이 더 잘 아는 구나. 살아서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태연님께 근사한 막걸리에다
우리가 소풍가서 선보였던 단순 고고춤을 선사하고 싶네...
역사소설 읽은 느낌이네~~정말 훌륭한 옥천의 아들이다 ~~
애란아, 내가 그냥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난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목숨이 없으니 맞아죽을 각오하고 쓰는 글이지 누가 날 욕하고 죽이려고 해도 난 예, 예 하고 살란다.
애란아, 니가 읽어 주었다면 난 아무런 한이 없구나. 넌 최고의 독자이니까. 우리 동기들은 태반이 안철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가 아는 안철쌤은 동기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약간 괜찮은, 제법 멋있는 동기라는 것만 기억해 다오. 내 너를 위해 김인순의 여고 졸업반을 감정 넣어 멋지게 불러 줄게. 동창선 출신 아이들이 난리 나겠네.
우리가 열혈 응원상 출신인데, 안철쌤이 우리를 무시하다니라고 덤빌것 같애.
그래 고마워~이번에 늦게라도 가게 된다면 꼭 그노래들려주길 바랄게~~약속이당!!!
일선아 현숙아 꼭 만나자 복희도 을순이도..영자도 시간내서 온나 이번엔~~
장문의 글쓴다고 수고많았구 난시력이 안좋아서 읽는다고 무지 고생했네앞에동료가 뭐그리 열심히 읽냐고 물어봄"
"여고졸업반 " 그노래 여친들이 좋아할걸 난 안철쌤이 누군지 작년에 봤음체육대회가서 아는체하려니 좀그러네
현숙아, 사실 남자들은 생각이 동물이라 실망이 클 것이다. 나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조금 철이 드는 수도 있는 가 보다, 다음에 만나면 꼭 코스모스라고 자신을 소개해줘요. 괜한 글 써서 민폐만 끼쳤구나. 현숙아, 행복해 주세요. 그런데, 어느 초등 출신인지?
답글을 안 올릴수가 없네..항상 웃고 다니더니..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을 글로 쓰면 책한권은 될거라는 얘기가
엄마들의 역사인가봐..그 어머니에 그 아들 효성이 남다른 아들...
문선아, 이렇게 너의 글을 보니, off-line에서 만난것 같은 느낌이 드는 구나. 널 볼 때마다 여장부의 넓은
마음을 느낀단다. 서정적이고 감동적인 나의 노래를 들려줄 기회가 죽기 전에 한번은 올것같다.
글이 너무 작아서 재편집을 했습니다. 창선중 출신 다른 기수의 카페가 있다면 좀 퍼 날라 주시오.
아마도 우리가 어릴때 들었던 친숙한 말들이 그들의 향수를 부를것이니.
기냥 단편소설 한편 읽는다 생각하고 피처 맥주 한병 옆에 놓고 옛날 그 아득한 농촌의 생활을 한 번 추억해 보렴.
기적같은 삶이라고 생각하면 댓글한번 달아라. 정성껏 나도 달아줄게.
어느 미친 넘이 이런 글을 써 올리겠는가? 대단한 생각과 인내심이 없다면 불가능하지.
나를 미워하고 폄훼해도 좋다, 싫어한다고 외쳐도 좋다. 내가 그런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면 아예 이 사이트에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런 짓거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안철쌤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나의 허물을 난 인정한다. 나를 씹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이 사이트를 통해서 글을 올려다오.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 받아줄게..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난 아예 동기회 사이트에서 사라져 줄게...;
바빠서 그런지 요즘은 장문의 글을 다들 싫어하는 구나. 역시 영상세대는 다르구먼. 감동이 넘치는 글이면
문자와로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긴 글을 읽는 요즘사람들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