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삶이 빛나는 그 한순간
-김산하 『비숲: 긴팔원숭이 박사의 밀림 모험기』
요즘 텔레비전에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멋있게 등장하는 직업을 꼽으라면 아마도 요리사일 것이다. 요리를 주제로 한 쇼 프로그램도 늘어났고, 연예인 뛰어넘는 입담으로 인기를 끄는 요리사도 많아졌다. 한 외신은 요리에 관심없던 한국 남성들이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을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로 싣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요리인들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관심에 떨떠름한 표정이다. 여러 요리인들이 언론 기고나 인터뷰를 통해 단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쉽게 요리의 길에 뛰어들지 말 것을 정색하며 당부하고 있다. 화면을 통해 보는 화려하고 멋진 모습 뒤에는 쉼없이 반복되는 까다롭고 고된 일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업이란 곧 삶이다. 이따금씩 반짝 빛나는 순간이 있지만, 나머지 시간들은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고단하며 대체로 별스러울 것 없는 일들로 잔뜩 채워져 있다. 요리를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찰나의 섬광뿐 아니라 일상의 단조로움과 고됨도 함께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한 단련과 고투의 시간을 감내할 각오 없이는 그 빛을 볼 수도 없다.
결과 이면에 숨은 고단한 과정들
사실 요리뿐 아니라 모든 업은 대체로 지루하다. 그리고 실은 그 예측할 수 있는 지루함이야말로 그 일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나날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삶이 행복하다고 하기 어려운 것처럼, 매 순간 비상사태가 이어지는 직업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 또는 과학자라는 이름은 밖에서 보면 제법 화려하다. 자연의 숨은 질서를 드러내고 새로운 부의 원천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일이 과학자의 임무이자 권능이라고 우리는 늘 듣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과학자들은 그 거창한 수사의 이면에 역시 삶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과학은 호기심을 좇는 지적 탐구에서 출발하지만, 직업으로서의 과학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노동이 된다. 정신노동일 뿐 아니라 대개 그 정신노동을 위한 물리적 토대도 직접 마련해야 하는 육체노동이기도 하다. 한켠에 간이침대가 접혀 있고 벽에는 동네의 모든 배달음식점 스티커가 붙어 있는 친숙한 이공계 대학원의 실험실 풍경은, 과학이라는 커다란 지식과 실천의 체계가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삶을 연료 삼아 가동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책 『비숲』(사이언스북스 2015)의 지은이 김산하가 “그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 나에겐 삶이 없다”고 토로했듯이, 과학자들은 “멋대로 나고 생긴 대로 사는 자연에 객관적인 체계를 부여해야 하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생활을 희생해가며 고단하고 지리한 작업에 매진한다.
무엇이 그렇게 고단하고 지리한가? 논문이나 신문기사로 정돈된 연구결과를 볼 때는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쁘게 접시에 담고 가니시와 쏘스로 장식한 한 접시의 요리가 상에 오르기까지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정리된 과학연구의 결과 이면에는 그것이 언젠가는 빛을 보리라는 보장도 없이 묵묵히 수행되는 반복적인 실험, 관찰, 또는 계산이 숨어 있다.
쏜살같이 달아나는 밀림의 긴팔원숭이 한마리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달 동안 “땀과 피와 진흙 범벅으로 귀가하지 않는 날은 없었다”는 지은이의 체험은 과학연구의 과정이 얼마나 길고 험난한 것이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실로 “‘이곳에 동물이 X마리가 있다.’라는 단순한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독자들에게는 그 과정은 곧잘 생략된 채 결과만 전달되는 것이다. 대중매체가 스타 요리사의 화려한 기교와 입담만을 보여줄 때 시청자가 요리사와 요리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명 과학자의 대표적인 성취와 그를 둘러싼 영웅담만을 접한 이들은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온전한 상을 형성하지 못하고 왜곡된 영웅주의적 관점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왜곡된 과학관은 젊은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게 하며, 결과적으로는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과학에 대해 실망하고 거리를 두게 만들 수 있다. 영웅적 과학자의 무용담이라기보다는 여린 마음으로 고민하는 과학자가 갖은 고생 속에서 건져 올린 흔들리는 단상들을 담은 『비숲』은 이런 점에서 소중하다.
치열한 삶만이 찾아낼 수 있는 빛나는 순간
지은이가 택한 야생 영장류학이라는 분야는, 그 자신이 국내 최초의 야생 영장류학자라고 스스럼없이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과학자사회 안에서도 상당히 소수파에 속한다. 그가 홀홀단신 인도네시아 자바의 밀림으로 찾아가 긴팔원숭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겪었던 일들은,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는 말할 나위도 없고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과학자들도 놀라워 마지않을 이야기들이다. 지은이의 개성과 예술적 재능도 이 책에 독특한 색채를 더하고 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자연과 벗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체험과 부모의 교육철학이 자신의 연구 방향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겸양한다.
하지만 『비숲』을 유별난 분야를 공부하는 유별난 과학자가 쓴 유별난 이야기로 전제해버리는 것은 이 책을 가장 재미없게 읽는 길이 될 것이다. 특이한 시간과 공간이 부여하는 아우라를 걷어내고 다시 찬찬히 읽으면, 『비숲』은 과학자라면 모두 겪는 고민과 어려움에 대해, 그럼에도 그들이 과학을 계속하도록 이끄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자취도 잘 남지 않는 고단한 작업을 며칠씩 또는 몇달씩 계속하는 고단함, 연구를 위해 일신의 편안함이나 건강 등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움, 언제나 관찰자의 위치에 스스로를 놓음으로써 “혼자라서 외롭기보단 삶 밖으로 나와 있어서” 느끼는 외로움, “긴팔원숭이가 밀림에서 뭘 먹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악의 없지만 힘 빠지게 만드는 질문 등은 분야에 상관없이 순수학문에 투신한 이들이라면 모두 맞닥뜨렸을 법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와 세상의 상관 여부는 나에게 달려 있”다고 당당하게 대꾸하며, 오히려 “보아 하니 다들 동물을 좋아하는데 왜 전혀 딴 걸 하고 살지?”라고 반문하는 지은이의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하다. 이 당당함으로 지은이는 밀림에서 몇달 동안의 숨바꼭질 끝에 긴팔원숭이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고, 야생 코끼리와 마주 서며, “비라는 하늘과 숲이라는 땅의 맞닿음과 상호 침투” 안에서 무아지경을 맛본다. 이렇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들이 흙투성이 피투성이의 고단한 연구생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고, 과학자에게는 “한 동물을 향한 이 몸짓에서 그토록 요원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5.7.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