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을 드나들던 이탈리아인들은 쇠퇴해 가는 이 도시를 점차 한 세계의 문화 중심지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경이로움을 저장한 곳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특히 고대 그리스 문헌의 보고이며 이에 정통한 학자들이 많다고 알려졌다.
동로마 제국이 껍데기만 남은 1397년 그리스 학자 마누엘 크라솔로라스는 르네상스의 중심인 피렌체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고전 그리스어는 광범위하고 진지하게 서유럽에서 연구되기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학자 베로나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크라솔로라스의 연구그룹에서 몇 년간 공부하기도 했다. 1408년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로나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플란톤의 저작을 비롯한 54권의 그리스 고전의 필사본을 가져왔다.
1420년대에 들어서면 지오반니 아우리스파가 플라톤의 나머지 필사본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들여왔다. 이 두 사건은 그리스 고전의 첫 대이동이었다.
1438년, 피렌체에서 열린 동서 교회의 통합을 위한 공의회에 콘스탄티노플의 지식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공의회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지식인들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고, 그들이 가지고 온 그리스 고전의 필사본은 서유럽의 문예부흥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많은 피난민을 낳았고 그들의 보따리 속에서 담긴 많은 자료들이 서유럽에 전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