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는 언더우드의 발걸음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많다. 예를 들면, 김포, 송마, 누산, 용강, 풍곡, 그리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군하(통진?)교회가 다 언더우드의 발걸음과 함께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초에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 가운데 김포지역의 모교회인 김포읍(현, 김포제일)교회를 먼저 찾으려 한다. 김포를 가기 위해서는 48번 국도 서울방향에서(김포공항 앞길, 88도로와 연결됨) 김포로 향해 가면 된다. 혹은 외곽 순환고속도로 김포 IC에서 나와 김포시내 방향으로 들어가면 된다. 김포 IC로부터 약 6km를 가면 김포읍내이다.
읍내로 들어가는 길과 우회하여서 강화 방향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데, 이 지점에서 큰길을 따라 우회하면 우측에 아파트 단지(풍년마을)가 있다. 1km도 안되는 거리를 가자면 앞에 육교가 보이고, 육교 바로 앞에 사거리(걸포사거리)가 있다. 여기서 좌회전해야 한다.
김포제일교회는 특별한 것이 있다. 공식적으로 113주년을 맞이한 교회로써 지하실에 역사 자료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내려서는 입구에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를 비롯한 초대 목회자들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고, 지하1층 전시실에는 제직회의록, 재정장부, 재산문서들, 공과책, 성경, 전도문서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것을 대하는 필자는 벅찬 가슴을 쓸어 내렸야만 했다. 그러나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은 제대로 관리도 안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충 몇 가지 양해를 얻어 필름에 담고, 사진으로 연대별 활동을 전시해 놓은 것을 훑어보고 돌아 나왔다. 아쉽지만 언더우드의 친필서한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분실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가능하다면 좀 더 신경을 써서 보존하고 역사에 길이 남겨줄 수 있도록 영인본이라도 제작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현재는 1층 당회실로 옮겼음)
김포제일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1897년에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이미 교인이 300여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이미 그 이전에 전도는 물론 집회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 교회에서는 1894년으로 설립연도를 기념하고 있다.
최근에 발행된 어떤 기록에는 “김포에 살던 김영일과 6명의 젊은이들이 새문안교회를 다니기 위해서 새벽2시에 김포를 떠났고,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이것은 공식적인 교회설립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양군 세교(細橋)교인 고군보(高君甫)와 그 처 박산라미(朴?羅米)가 當地에 到하야 열심 전도함으로 본읍인(本邑人) 천덕현(千德鉉), 이봉춘(李奉春)과 傑甫里人 유공선(劉公善), 박성삼(朴聖三), 황춘근(黃春根), 유중근(劉重根)이 始信하고, 유공선 私郞에서 회집 예배하더니 至是하야 信者가 日增하야 300여인에 달한지라. 同心協力하야 本邑西里에 16間 가옥을 매수하야 예배당으로 사용하니 당시 조사(助師)는 홍성화(洪聖化-추후 타락함)러라.
이 기록에 의하면 1897년에 이미 300여명의 신자가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고, 최초의 신자들은 유공선을 비롯해서 6명이었으며, 김포읍내 사람이 둘, 傑甫里사람이 4명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전도는 한강 건너 고양의 세교교회 신자들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던 김포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한국 선교의 초기에 있었던 일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지역을 특별한 관심과 함께 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1905년 3월 그는 이 곳 3500여평의 대지를 구입해서 예배당을 지을 수 있도록 했고, 김포지방 구석구석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는 역할을 준비했던 것이다. 초기 이 교회의 당회록이 있다면 좀더 소상히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고, 김포의 모교회로서의 역사적 위치와 언더우드의 발자취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