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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원고택 만휴당 앞 정경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한적한 어촌이었던 강원도 정동진을 국내 최고의 해돋이 명소로 만든 사람은 배우 고현정이다. "귀가시계"라는 말을 낳을 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SBS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이 도바리(도망다니던 운동권을 의미하는 은어)시절 몸을 숨겼던 갯마을이 바로 정동진이다.
춘천 남이섬은 한류돌풍을 불러일으켰던 "겨울연가"에서 배용준과 최지우가 데이트를 하던 곳이다. 거의 망해가던 (주)남이섬 소유의 관광지를 '욘사마' 배용준이 "일본^동남아 한류팬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아원고택내 갤러리 공간.
지금 세계 팝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아이돌 스타는 누가 뭐래도 방탄소년단(BTS)이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BTS가 작년여름 금 쪽 같은 시간을 쪼개 화보도 찍고 잠도 자며 한국 전통문화체험을 한 곳이 있다. 전북 완주 소양면 대흥리에 자리한 아원(我院)고택이다.
BTS가 다녀간 이후 주말이면 청춘들로 소란스럽다. 아원고택-소양고택·오성한옥마을-오스갤러리로 이어지는 대흥리코스는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서울 명동보다 더 북적인다.
설화당앞 정원
아원고택과 오스갤러리는 건축인테리어사업으로 사세를 키운 오스아트그룹(대표 전해갑)이 운영한다.
두 곳의 키워드는 '휴(休)'다. 전 대표는 "소유보다는 공유의 가치를, 지친 일상에 휴식을 전하는 공간으로
지켜나가고 있다"고 했다.
연화당 마루
아원은 경남 진주와 전북 정읍의 고택을 전북 완주 종남산 산자락 아래 자리한 오성마을로 이축한 수백 년 된 유서 깊은 한옥이다. 전국 각지를 수소문하며 찾고 옮기고 완공하는데 걸린 기간이 무려 12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미리 경관 좋은 곳을 점찍어 부지를 매입한 뒤 해체해 옮겨온 고택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정원 공간에 맞춰 조립해 배치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전통가옥 공간구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목다실 통창에 비친 다양하게 중첩된 이미지.
고택 입구부터 독특하다. 노출콘크리트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풍으로 지은 미술관인 '뮤지엄 공간'을 통해 입장해야 한다. 뮤지엄에서 그림과 조형물을 감상한 후 어둡고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가 야 고택의 정원에 진입할 수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전통과 자연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다.
천묵다실에서 바라본 만휴정
고택 면적은 넓지 않다. 하지만 대나무숲길도 있고 양옆에 기와장을 쌓아올린 짧은 산책길도 있다. 산 경사면을 따라 천지인-만휴(萬休)당, 사랑채-연하(煙霞)당, 안채-설화(設話)당, 별채-천목다실(天目茶室)을 배치했다.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천지인 방에서바라본 종남산 풍경
아원에서 방문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천지인-만휴당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쉼을 얻는 곳'이란 뜻이다. 사랑채 이름은 연하당인데 앞 마당은 흙이나 잔디가 아닌 물로 채웠다. 그리고 그 너머엔 우뚝 솟은 종남산 능선이 물결친다. 전망이 일품이다.
연두색 수국이 활짝 핀 산책길
그래서 방문객들은 연하당 앞 '물마당'에서 종남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가 아니면 대청마루에 눕거나 앉아있다. 잡념은 들어설 틈이 없는 아늑한 전경이다. 우리가 간 지난 주말은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햇볕이 작열했다. 하지만 소낙비가 내리는 여름엔 후두둑 후두둑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들리고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엔 하얀 솜이불처럼 눈이 소복히 쌓인 마당이 정겨울 터였다.
오스갤러리 휴게공간
더 머물고 싶지만 스탭들이 마감시간이라고 했다. 방문객은 오후 4시까지만 관람할 수 있다. 4시 이후에 아원고택은 온전히 숙박객 차지다. 4시까지는 BTS의 발자취를 따라 '인증샷'을 남기기 위한 방문객들의 관람료(1만원)로 수입을 올리고 이후엔 숙박비(20만원부터 100만원까지)로 매출을 올리는 구조다. 돈 버는 사람은 마케팅 전략도 남다르다.
오스갤러리 내부
오스갤러리는 아원고택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있다. 호수에 인접한 오스갤러리는 30여 년 전엔 잠사생산을 위한 누에 사육장이었다고 들었다. 이곳에 전 대표가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의 빨간 벽돌과 전주초등학교의 나무를 재활용해 지난 1991년 서재를 지은 뒤 2000년쯤 바로 옆에 갤러리를 지어 오픈했다.
서재는 어느 순간 카페로 변신했다. 카페와 갤러리는 다른 공간이지만 물 흐르듯 연결된 느낌을 준다. 그림을 관람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카페로 옮겨 차를 마신다.
호수와 접해있는 갤러리 정원
오스갤러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멋진 작품은 그림보다 호수인 듯하다. 산이 감싸고 있는 호수는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고 갤러리도 품고 있다. 멋진 풍경이다. 그래서 코로나에 지친 도시인들이 차를 타고 멀리서 달려와 그 비싼 차값(아메리카노 8천원)을 아낌없이 쓰는 거다. 산골 누애사육장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