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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을 인질로 붙잡아
증 언 자 : 임낙평(남)
생년월일 : 1958. 8. 3(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전남사회문제 연구소 근무)
조사일시 : 1988. 9
1980년 당시 나는 해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별 어려움 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안형편은 중산층에 속했다.
1978년 전남대 독문과에 입학하여 교외활동으로 1년 6개월 정도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노동문제연구학회'를 창립했으나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채 5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 3, 4월 학원민주화 투쟁에 이어 학생들은 5월에 정치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중순부터는 교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5월 14, 15, 16일에 학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특별한 역할은 없었으나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학생 및 일반대중을 집회 및 시위에 동원시키는 일을 했다.
과연 정부당국이 어떤 자세로 광주의 학생,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지 예측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시민, 학생대중들은 대부분 계엄군을 투입할 수 없을 것이며 민주화의 흐름 또한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엄군을 투입하여 대학을 휴교조치하고 학생지도부를 연행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17일 오전, 대학의 캠퍼스는 연 3일 동안의 함성의 뒤끝이고 토요일이라 한산하기만 했다. 나는 오전에 복적생 문승훈 선배와 제1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가 한참 동안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토의했다. 문선배는 새도 캐비닛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학생대중들의 민주화 열기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지도부의 연행으로 '박관현의 지도력'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고 다만 상호 연락체계를 확인하고 그런 상황이 오면 즉각 대처하기로 합의했다. 이미 지난 14일 가두투쟁 때부터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회를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청 앞에서 12시에 집결한다'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총학생회의 지침에 의거해 각 지도부는 각각의 방안들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나도 같은 학과생들과 '휴교령 발동시 시내 어느 다방에서 혹은 어느 건물 앞에서 일단 집결하자'고 약속되어 있었다.
17일 저녁 7시 구YWCA에서 박현채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YWCA 소강당 1층과 2층을 꽉 메우며 박선생의 경제 전망을 듣고 있었다. 물론 나도 노준현 선배와 함께 강연회에 참석했다. 이날 강연회에는 그동안 잘 알고 지내던 학생운동권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고 또한 재야인사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강연회가 끝나고 주최 측과 재야인사 그리고 운동권 학생들이 구전남매일 앞 한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김태종, 김원기, 황일봉, 나 그리고 갓 제대한 김상집, 휴가 온 박석면 등이 자리했고 문병란, 장두석 등 재야인사들이 참여했다.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마치고 젊은 층만의 2차가 있었다. 구전남매일 앞 막걸리집에서 밤 12시가 되도록 술을 마시다 노준현 형과 나는 어렵사리 택시를 타고 광천동에 사는 윤상원 선배 집으로 갔다. 우리는 선배와 함께 상황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며, 나의 주도에 의해 진행되던 전남대 내의 '노동문제학회'를 어떻게 활성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상의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술에 취한 상태였고 선배 박 효선이 찾아와 그냥 자버렸다. 얼핏 보니 윤상원 형은 이날 따라 차분하게 무엇인가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했다.
5월 18일 윤상원 형의 호통 소리에 눈을 떴다. "야, 계엄령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 모두 연행되었다"라고 했다. 윤상원 형은 아침 방송을 통해서 계엄확대의 뉴스를 듣고 즉시 주변 공중전화를 통해 선후배, 재야인사들의 연행 소식을 들은 다음 우리를 깨운 것이었다. 박효선 형은 그가 기획하고 있던 '동리소극장'의 개관과 개관기념공연이 무산될 것이고, 그동안의 연습이 헛수고라며 계엄당국의 조치에 분노하며 먼저 집을 나섰다. 윤상원 형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과연 오늘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미 형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전화로 확인한 뒤였다.
노준현 선배와 나는 아침을 먹은 다음 이미 약속된 학교 정문 앞 10시 집결을 염두에 두며 광천동에서 20번 버스를 탔다. '과연 일요일인데 학생들이 나올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버스가 조선대 부근에 이르렀을 때 조선대 정문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내려 조선대 정문으로 갔다. 오전 10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정문에는 완전 무장한 얼룩무늬 공수대원들이 대위 계급장을 단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철통같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있었고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정문 앞으로 따라가니 공수대원들이 조선대생 1명을 정문 안쪽 가로수에 묶어 매달고 마구 구타하고 있었고, 주민들은 풀어주라고 항의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묶인 조선대생은 군화발로 채이고 곤봉으로 구타당하면서도 보내달라고 항의했지만 공수부대의 구타는 계속되고 있었다. 공수부대는 '본보기 보여준다'는 식의 효과를 노려 등교하는 학생을 매단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주민 틈에 끼여 조마조마하며 그가 풀려나기를 고대했다.
한참 만에 주민들, 특히 부녀자들의 항의에 의해 공수부대의 대위가 부하들에게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절뚝거리며 풀려나온 그를 부축하여 그의 자취 방까지 데려다주며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 이전에도 다수의 학생들이 등교하려고 항의하다가 그렇게 당했다고 했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
10시경 조선대 정문 앞 상황이 잠잠해지자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전남대 정문으로 향했다.
우리가 전남대 정문에 내렸을 때는 이미 상황이 벌어진 뒤였다. 학생들이 공수부대들과 한바탕 붙은 다음 시내로 진출했다는 것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뒤늦게 도착하여 이 사실을 듣고 시내로 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시내에서도 조직적인 학생대열이 기동대에게 밀려 흩어진 것 같았다. 우리는 즉시 금남로 한일은행 앞 사거리로 갔다. 학생들의 투석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거의 정오 가까이 되었다. 누가 지도하고 선동해서 그런 것보다는 모두 주체가 되어 싸우고 있었다.
다만 14, 15, 16일의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지도부는 눈에 띄지 않았고 그동안 학생운동을 해온 학생들도 보기가 힘들었다. 경찰기동대가 페퍼포그차를 선두로 도청 진출을 완강히 막고 있었고 그들과 우리는 열심히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시민들은 인도에서 학생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교생들도 참가했으며, 또한 여고생들도 교복을 입은 채 돌멩이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투석전이 계속되는 동안 하늘에는 헬기가 작전을 지휘하는 듯 맴돌고 있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한일은행 부근 외에도 시내 곳곳에서 경찰기동대와 접전이 계속되는 듯 헬기는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하였다. 그러다가 화염병에 의해 페퍼포그 차량이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이자 학생,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광주의 학생운동이 1978년도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나는 이때 화염병을 처음 보았다. 이렇듯 시위는 18일부터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페퍼포그차는 화염에 휩싸였다가 금방 꺼지고 기동대의 최루탄 공격이 시작되자 우리는 투석으로 맞섰다. 그때 헬기가 다가왔다. 처음에는 헬기에서 단지 작전을 지휘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 헬기는 시위진압에 직접 투입된 것이었다. 얼마간의 투석이 계속되고 시위대가 불어나자 헬기가 다가와 저공 비행하면서 프로펠러의 바람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짓을 반복했다. 시위대는 골목골목으로 피했으나 바람과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헬기가 오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투석하기를 반복했다.
오후 2시쯤, 누군가가 공원 쪽에서 학생들이 집결한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조직적 지도부의 결정이 아니라 현장에서 이루어진 임기응변이었다. 학생들은 골목으로 흩어지고 시민들만 남았다. 우리도 광주공원 쪽으로 학생들과 함께 흩어져 가다가 현대극장 부근에 왔을 때,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도 스크럼을 짜고 공원에서 오는 대열에 합류했다. 눈덩이처럼 대열이 불어났다. 광주천을 따라 광주공원 쪽으로 가면서 구호를 외쳤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비상계엄 철폐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등의 구호였다. 그리고 '투사의 노래', '농민가', '훌라송' 등의 노래도 불렀다. 대열의 선두에는 태극기를 든 학생이 있었다.
한참을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뛰어가는데 우리가 속해 있는 대열만큼의 학생대열이 태평극장 쪽에서 구호를 외치며 오고 있었다. 대열은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했으며 사기충천했다. 처음 이 대열은 금남로를 통해 도청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기동대가 완강히 버티고 있어 외곽으로 돌면서 도청 앞 광장으로 나가기로 했다. 시위대는 광주천을 따라 가다가 돌멩이로 무장하고 구시청 앞, 전남대 의대 사거리를 지나 전남공고 앞으로 나왔다. 노래와 구호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전남공고 앞에서 마침 조선대에 진주한 공수부대에서 식사배달을 마치고 가는 차량이 일반차량과 함께 시위대 쪽으로 다가오자 시위대가 돌멩이를 퍼부었다. 앞 유리창이 깨졌으나 누군가 '먼저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고 외쳐 의대 쪽으로 빠져나갔다.
노동청 부근에서 경찰기동대가 막고 공격을 시작하자 시위대는 공고 옆 골목으로 해서 교육청 앞을 거쳐 화천기공 사장집(현, 금호문화재단) 옆골목으로 치달았다. 우리는 호화주택 화천기공 사장집에 돌멩이를 던진 후 동명로로 갔다. 시위대열은 거의 대학생으로 대략 2000여 명이었다. 시위대는 동명파출소에 투석하고 최규하 사진을 박살내는 등 집기를 부순 뒤 태극기를 빼와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우리는 법원 쪽으로 후진하면서 지산동 파출소에 투석하고 오토바이, 집기, 전화기 등을 꺼내와 불질렀다.
경찰을 인질로
시위대가 대열을 정비하여 동명로 쪽으로 진격할 때 경찰기동대 차량이 다가오자 투석으로 맞섰고 차량은 시동을 꺼버렸다. 학생들이 '와' 하며 몰려들어 기동대 차량의 바퀴에 바람을 빼고 철판을 뜯어 유리창을 박살낸 다음 차량을 뒤엎으려고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차량을 둘러싸고 강제로 문을 열어 40여 명의 기동경찰대(함평경찰서 소속 경찰관?)를 생포하였다. 경찰들은 40, 50대의 지방경찰들로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다. 이때가 오후 3시쯤이었다. 시위대는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20여 명씩 두 쪽으로 갈랐다. 그들을 에워싸고 동명동으로 전진할 때 여대생들이 고생한다면서 요구르트, 물 등을 얻어 경찰관들에게 주었다. 경찰관 40여 명을 생포하면서 시위대의 현장 지도부간에 의견이 대립되었다. 그냥 무장 해제시켜 보내야 한다는 것이 학생운동을 해왔던 이들의 의견이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시위대의 주동자는 현장에서 협상해야 한다며 인질 경찰과 연행자의 교환을 요구했다. 20여 명의 경찰관은 무장해제되어 주택가 골목에 두고, 남은 20여 명의 경찰을 앉혀놓고 경찰에게 협상조건을 말했다.
오후 4시쯤이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많은 대열을 이루었던 학생들이 줄어들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동명로에서 공수부대가 차에서 내렸고 법원 쪽에서 공수부대가 뒤로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개시와 함께 학생대열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때 붙잡힌 학생들은 무수히 구타 당하고 군트럭에 던져졌다. 이로써 5·18 전과정에서 학생들의 조직적인 시위는 막을 내린 것이었다. 골목길로 피한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이상으로 엄청난 공 수부대의 잔악한 시위진압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사망설은 물론이요, 환각제를 타서 먹였다는 소리도 들렸다.
시민, 학생과의 대치상황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다수의 시민들이 연행되었다. 골목으로 피한 우리는 차를 탈 수가 없었다. '무조건 연행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부근 주민들이 통금단축 뉴스를 전해 주었고 공수부대의 만행과 소재지를 알려 주었다.
골목을 통해 시외곽으로 빠져나온 나와 노준현 형은 부지런히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렸다. 이미 저녁이 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안부와 공수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으나 공수부대의 시민 포획작전은 계속되는 듯 엄청난 소문들이 그들의 잔혹함을 말해 주었다.
백림약국 부근에 이르렀을 때 다수의 학생, 청년들이 공수대에게 잡혀가 두들겨 맞는다고 했다. 인근 주민들은 '전남대, 조선대 앞 하숙집, 자취집을 뒤져 학생들을 연행한다', '차량 검문시 학생, 청년을 연행한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오늘 밤에 연행한다'고 하여 집으로 귀가하지 말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우리는 열심히 수화기를 돌렸다. 모두가 가족을 찾는 목소리였다.
인공 때보다 더 한다
하루 내내 함께 있었던 노준현 형과 헤어져 나는 지산동 친구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공수부대의 검문길이 아니어서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운전수가 전해 준 공수부대의 만행은 생생하였고, 또한 운전수가 '인공' 때보다 더하다고 욕하는 것을 들었다. 친구집에 온 나는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의문을 가지면서 하루밤을 지샜다.
5월 19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 쪽으로 갔다. 이미 형사들이 쫙 깔려 있었고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정문 앞 시위가 불가능하다며 학생들은 속속 시내로 가고 있었다. 시내에 들어온 나는 시위대에 합류하여 공수부대, 경찰들과 대치하여 투석하고 흩어지고 다시 투석을 계속했다. 금남로에는 장갑차가 왔다갔다하면서 공수부대들이 전면에 서서 진압하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시내는 '박관현 체포설'과 공수부대의 만행이 무수히 떠돌며 시민들을 자극하였다. 시내 전역이 시민, 학생들과 공수부대들과의 대치 속에 투석으로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나는 노준현 형을 만나 둘이서 광천동 '들불야학'에 들렀다. 점심 때쯤이었다. '차를 타면 연행된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걸어서 갔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오후 2시쯤 우리는 다시 시내로 나왔다. 계림동 부근이었다. 그사이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공수부대의 진압은 더욱 잔인해졌다. 대인시장 부근에서 시민들 틈에 끼어 대치하다가 다시 밀리고 다시 대치하기를 반복했다. 광주고 부근의 시위대는 젊은 청년, 학생보다 아저씨, 아주머니의 모습이 더 많았다. 공수대는 완전히 분대단위 작전을 수행하며 시민들을 살상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끊임 없었다.
우리는 계엄군에 밀려 계림국교 부근까지 후퇴했다. 그들이 광주고교 부근에서 작전을 수행하리라는 판단으로 산장 입구 옆골목으로 후퇴하는데 난데없이 공수 부대들이 골목길에서 튀어나왔다. 지척에서 공수부대와 맞닥뜨린 우리는 계림국교 담을 뛰어넘어 곧장 교무실로 피신했다. 곧이어 전남대 농대생이 머리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교장은 우리를 숙직실로 가게 하여 여선생에게 부상당한 학생을 치료하게 했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학교를 나와 시외곽 으로 갔다.
시 전역이 아수라장이었다. 시민들은 어디를 가나 분노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젊은이 살상작전'은 어제보다 더 극심했다. 살상에 대한 소문은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경상도 공수부대의 살상', '박관현의 체포·죽음설' 등이었다.
주변주택가를 무작위로 뒤져 젊은이는 초주검되어 연행된다고 귀가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집에 가지 못하고 후배의 자취방에 들르니 부친이 시골에서 와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풍향동 부근의 후배 여동생 집으로 갔다.
이날 저녁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토의했다. 이날 밤까지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으로 시민, 학생들이 초토화되어 더이상 저항이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밤 사이 비가 내렸다. 저녁 내내 장갑차, 찻소리 등이 요란했다.
피신
5월 20일 아침을 먹은 다음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담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담양으로 나가는 길목은 피신하는 시민, 학생들이 많았다. 차를 탈 수 없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걸었다. 이후 광주외곽 담양 접경에서 피신해 있다가 5월 27일 새벽 라디오를 통해 진압소식을 듣게 되었고 상황을 알게 됐다.
5·18항쟁 이후 많은 것을 느껴 학생운동의 재건을 위해 활동했으며 학생운동의 양·질적 변화 및 이념정리 작업에 임했다. 1980년 후학기 '인간문제연구회'를 등록하여 조직의 재건 착수와 서클 활성화에 힘썼다. 그리고 1981년 9·29사건이라는 5·18 이후 전남대 최초로 있었던 집회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2년 2개월의 투옥생활을 거쳐 1983년 후학기 자율화 조치와 함께 정부의 복교조치로 1984년 후학기에 복학하였다. 1985년 졸업 후에 지금의 전남사회문제연구소에 들어갔다.
내가 생각한 5·18항쟁의 의의라고 한다면, 이전까지의 운동이 단순한 '반독재 민주회복 투쟁'이었다면 이후 운동에 있어 '반제반파쇼 민족해방 운동'이라는 학생운동의 양·질적 변화를 꾀했다고 본다. 또한 5·18항쟁에 대한 객관적 연구와 실제조사를 통해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윤상기)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