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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표 부활 (창 4;1-15)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그의 손으로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남녀 관계속에 처음으로 태어난 사람이 가인입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의 성격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벨은 목축을 하고, 가인은 농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마다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나쁜 곡식을 드렸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안 받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제물이었습니다. 성의없이 드렸습니다.
화가 난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첫 사람이 둘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원인은 자기인 데 소경 개천을 나무라는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 정신으로 죽인 것이 아닙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1요 3;12)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가인속에 들어간 사탄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판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간 사탄이 예수를 팔게 한 것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종노릇한 것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다윗속에 들어 가서 간음하게 하고, 죽이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삼하 12;14)
사탄이 득세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다윗이 살인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탄에 속았습니다.
사탄이 다윗을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가인을 죽이고 아담의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 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
이 때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 4;15)
왜?
왜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감싸신 것인가요?
왜 그에게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 하게 한 것일가요?
아무리 성경을 찾아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 곳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생명의 표를 이마에 준 이유에 대하여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
한 가지 이유는 가인은 하나님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성경은 살려달라고 하는 이를 살려주는 책입니다.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을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 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
벌이 무겁습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일가 두렵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이런 고백입니다.
가인은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할 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천하에 몹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이게 가인을 통하여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에게는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양심에 털난 가인입니다.
양심에 털난 소리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이 말을 TV 설교에서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항의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너무 심한 말이 아닙니까? 어떻게 양심에 털난 것이 복음입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양심에 털난 소리가 복음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평생 강도짓하던 강도가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받았습니다. 단 한번도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는 강도입니다.
십자가 구원 1호의 사람이 강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요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치다가 고래뱃속에서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성소를 보게 하옵소서!”
살려달라는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래뱃속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는 것이 양심에 털난 소리가 아닐가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못 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못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과 같이 살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같이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 탄로 났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통하여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살려달라고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살려주시겠다고 본보기를 보여 주시는 것이 가인입니다.
둘
왜 가인의 이마에 생명의 표를 하나님이 해주셨는 지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말씀을 성경에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1)
아담과 하와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죄인입니다.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첫 아들로 가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면 자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죄가운데서 책망받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가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귀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가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그런 죄를 지었을망정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것보다, 하나님은 가인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은 다 오사마 빈 라덴을 잡아 죽이라고 외칠 때
그의 어머니는 TV에 나와서 목메어 외치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내 아들! 라덴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세상이 다 너를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너는 위대하다. 잘 했다. 숨어라.
오! 알라여! 내 아들을 지켜 주옵소서!”
이것이 어머니의 절규입니다.
지존파 두 목 김 기환이 사형당하였습니다.
친척, 친구 한 명도 챙피하여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만은 사형당한 싸늘한 시신을 붙들고 울며 장례를 치루는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끔찍한 죄를 지었을망정 한번도 기대하셨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가인은 남녀 관계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사랑하시고 내일은 회복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죽이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지구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세 사람밖에 없는 데 죽일 다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문제를 풀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900살 시대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만 나오지만 그들을 낳고 100년후만이라고 하여도 인구는 제법 있었을 것입니다.
설사 세 명만 있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미래 이야기입니다.
앞으로도 누가 그를 죽이지 못 하게 막는 표였습니다.
이마에 어떤 표를 하였을 지도 생각하여 볼 만한 주제입니다.
마치 동생 선교사에게 일로 일로에서 경찰서장이 증서를 만들어 준 것과 같습니다.
“강 요한 선교사는 교통 위반하여도 잡지 말아라.”
이 증서만 경찰에게 보이면 항상 무사통과였습니다.
가인의 이마에 하나님이 표룰 주셔서 죽이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배의 벌을 받는다고 썼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사귀어 주셨는 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곳까지만 가면 좋습니다. 모두는 추측으로 미루어야 합니다.
셋
가인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속았습니다. 사탄이 속였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1요 3;12)
사탄에게 속은 가인을 하나님은 건지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을 이기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탄은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습니다.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에덴 동산을 쑥밭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하고 정리시키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고 정상적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아벨을 천국으로 부르셨습니다. 가인을 회개하여 새롭게 살게 하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마에 표를 주셨습니다.
가인의 이마에 하나님이 주신 표가 주는 영적 의미가 셋 있습니다.
1. 양심에 털난 소리가 복음이다.
2. 하나님은 모든 죄인에게 기회를 주신다.
3. 하나님은 마귀를 대적하신다.
이마 표의 부활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이마에 하나님이 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끝인 요한 계시록에서 사탄이 이마에 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표는 생명을 주시는 표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이마표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표입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666이니라."(계 13;16-18)
이 표를 받으면 지옥에 가고
이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만이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리니”(계 20;4)
사탄은 지금 하나님에게 복수하려고 덤벼들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이려는 가인에게 하나님이 이마에 표를 주어서 살린 것을 알고,
이마에 표를 주어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입니다.
하나님에게 공개 도전장을 낸 것이 이마의 표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이끌 사람에게 표를 주신 것처럼
사탄도 자기가 끌고 갈 사람에게 이마에 표를 주고 있습니다.
그 사탄의 표를 성경은 짐승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666이니라."(계 13;16-18)
하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으로 이끄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한 사람도 놓지지 않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에게 이마에 표를 하려고 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이 속에는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 마디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중간이 없습니다. 좌아니면 우입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입니다.
흑아니면 백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냐 사탄의 사람이냐이지 중간이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갑니다라는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진리냐 비진리냐의 양자 택일을 하여야 합니다. 중간에 설 수 없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에 빠진 목사들이 배교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목사들에게 들어가서 조정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을 지옥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마에 짐승표를 받으면 안 됩니다.
안 받으면 목베임을 당하거나, 피난처에 가서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숨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잠간입니다.
죽고 나서 조금 후면, 숨어 살면서 조금 후면 주님이 오십니다. 변화된 몸으로 살아납니다.
받으면 곧 종기가 납니다. 불치병에 걸립니다. 성경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계 16;2)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9-11)
개구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구리를 잡아서 뜨거운 물에 집어 던지면
깜짝 놀라서 순간적으로 튀어 나와 조금 데일망정 살아납니다.
그러나 개구를 따뜻한 물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온도를 높입니다.
편안하게 가만히 있다가 익어서 죽어 버립니다.
지금 사탄은 이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마에 표를 받으라고 하면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이마에 표를 받게 만들어 갑니다.
첫 단계 신용카드입니다. 참 편리합니다.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째 단계 무선 전화입니다.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 바뀌고 나니 참으로 편해졌습니다.
세 번째 단계 핸드폰입니다. 유선 전화에서 핸드폰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핸드폰없이는 못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단계 스마트 폰입니다. 모든 정보를 이를 통하여 받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단계 인터넷입니다. 이름 그대로 국경을 넘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이 베리칩입니다. 모든 기능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감정을 통제하는 기능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희비애락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편리하다는 사탕속에 먹으면 죽는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이 베리칩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베리칩을 처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과학자 칼 샌더스 박사입니다.
그는 정부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00명 정도의 과학자들과 함께 32년 동안 연구하여
드디어 1968년 처음으로 최소형 마이크로칩인 베리칩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베리칩을 만든 공로로 미국 IT 대통령 최고 상을 받았습니다.
쌀알만한 크기입니다. 위성과도 연결 가능한 초미니, 초현대식 칩입니다.
몸에 넣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넣을 수 있습니다.
흉터도 남지 않게 몸속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들고 보니 이 것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임을 알고 도로 찾아 오려고 하였습니다.
정부는 주지 않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랬는 지 간암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세계를 돌면서 외치고 있습니다.
“베리칩을 받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닌가하는 마음이 듭니다.
한국 어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 교수가 이 강의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베리칩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짐승표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받겠습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베리칩을 받아도 된다는 교회와 받으면 지옥간다는 교회로 갈리게 될 것입니다.
일본 강점기에 신사참배는 국가 예식이지 우상이 아니라는 교회와
우상숭배이니 절하면 안 된다는 교회가 갈라진 후 두 번째 역사입니다.
받으면 잠감 편리합니다.
그러나 금방 불치병 종기에 걸립니다. 그리고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그까짓 받으면 어떠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시켜 주는 것이지 받고 안 받고가 무슨 문제냐?
예수만 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허구입니다.
감정 통제로 예수를 믿을 수 없게 만들어집니다.
짐승표이기에 짐승인 사탄에게 잡히게 되는 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의 가인의 이마표가 마지막 때에 부활하였습니다.
생명의 표가 멸망의 표로 포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표를 사탄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인의 표를 주셔서
다시 회복하고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토록 탕자를 포기하지 않고 자나깨나 기다리는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것이 가인의 이마에 주신 표입니다.
이 설교를 여기까지 타이핑하고 있는 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받았습니다.
“목사님! 우리 순교해요. 성경대로 곧장 가요. 흔들리지 말아요.
나는 목사님과 함께 순교할 꺼예요. 지금 기도가 끝났어요(이 시간이 아침 10시입니다.
새벽기도가서 지금까지 기도하고 기도하며 받은 것을 전화로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같이 할 사람이 많아요.” 하나님이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마지막 때 강의를 준비할 때 왜 관부터 만들어 놓으라고 하셨는 지 알고 있습니다.
순교의 때가 서서히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