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ꁕ 음악(가요, Pop뮤직) 스크랩 엘비스
하운 추천 0 조회 126 08.04.23 16:2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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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엘비스 프레슬리
2007.08.29 / 김교석 기자 

미국 역사상 프레슬리만큼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아니, 전세계에 그 누구도 엘비스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잊히기는커녕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살던 멤피스의 그레이스랜드는 엘비스 팬들에게 메카가 됐다. 심지어 아직도 엘비스의 죽음을 믿지 않으며 그가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는 음모론을 30년째 꾸준히 믿는 미국인들도 있다. 그 덕분에 앨비스 프레슬리는 2001년 ‘포브스’가 집계하는 사후 수익 부문에 있어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아직도 한 해 평균 47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존 레논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이전엔 아무것도 없었다." 21세의 나이로 대중문화와 시대의 변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엘비스는 삶과 죽음이 모두 신화가 됐다. 특히 올해는 1977년 8월 16일 그가 죽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여서 추모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이미 그의 30주기를 기념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올슉업>이 국내에서도 성황리에 공연됐다. 지난 8월 12일 런던에서는 엘비스의 전매특허인 깃 세운 점프슈트와 화려한 나팔바지, 큰 칼로 정돈했을 법한 구레나룻을 제대로 구현한 사람들이 모여 열띤 모창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록과 컨트리의 본산인 멤피스에서는 지난 12일부터 19일까지를 ‘엘비스 주간’으로 선포, 전세계 600여 개의 팬클럽이 집결했다. 전통의 모창대회는 물론, 스크린 속 엘비스의 연인들이 한 자리에 함께하는 기념행사가 거하게 치러졌다. 국내에서도 파주 엘비스 기념관과 각종 팬클럽을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있었고, 전세계는 엘비스를 기리는 촛불을 밝혔다.

왕은 오직 엘비스



1950년대 엘비스가 얻었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초유의 인기, 그리고 초기 로큰롤 음악과 전체적인 팝 음악사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의 음악을 처음 들은 음유시인 밥 딜런은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고 말했고, 팝계의 거성 엘튼 존은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엘비스”라고 고백했다. 블루스의 대부 비비 킹 또한 “선 스튜디오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열렬한 팬이 됐다”고 회고한다. 엘비스의 느끼함에 토사물을 게워낼 것 같던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조차 “모방의 시대에 있어 그는 진정한 독창적 뮤지션”이었다고 추켜세운다. 브루스 스프링스턴과 로드 스튜어트는 입을 모아 “왕은 오직 하나”라고 외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과연 무엇이 대도시도 아닌 미국 남부 멤피스의 가난한 백인 촌사람을 전설의 자리에, 엘비스보다 음반 판매량이 많았던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도 결코 오르지 못했던 그 자리에 서게 했는지.

고매함과 거리가 멀었던 엘비스는 어쩌면 단지 당대에 최고로 성공한 스타일뿐인지도 모른다. 그는 각종 약물을 생필품으로 삼고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런 삶조차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1954년 7월 5일 멤피스의 선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데츠 올 나잇(That's all right)’으로 음악사에 길이 남을 로큰롤이 탄생했고, 엘비스는 로큰롤의 태도를 자신의 삶을 통해 몸소 보여줬다. 거기에 엘비스 특유의 가열 찬 힙 댄스는 로큰롤 부흥의 촉매제가 됐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서구사회의 풍속에 갇힌 개인적인 쾌락들을 해방시킨 뮤지션이다. 그의 로큰롤은 서구 십대들의 욕망의 문을 열어젖혔다. 피터 해리 브라운이 쓴 전기 <엘비스 끝나지 않은 전설>의 한 구절은 엘비스라는 존재가 갖는 문화적 의미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엘비스가 나타나서 ‘하운드 독(Hound dog)’ ‘블루 스웨이드 슈즈(blue suede shoes)’ ‘핫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을 불렀을 때 그는 미국 주류의 엉덩이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문화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원자를 분해하는 것 혹은 전구를 발명한 것과 같았다. 온갖 지옥이 자유롭게 풀려난 것이다." 히피에서 펑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20세기 청년문화의 시작점에도 바로 엘비스가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 엘비스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성공신화를 대변한다. 미국남부 시골 판잣집에서 태어나 트럭 운전수에서 로큰롤의 왕으로 자수성가한 그를 통해 사람들은 미국식 평등주의, 자유주의의 환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비스의 삶은 가장 미국적인 영웅 서사시다.

흑인 목소리를 가진 백인



엘비스를 전설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 그의 타고난 가창력과 음색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백인이면서 처음으로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노래한 선구자였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미시시피 강 유역의 목화밭에서 흑인 노동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컨트리와 블루스를 로커빌리 스타일로 혼합했으며, 당시 스탠더드 팝이 유행하던 50년대, 그들이 경멸하던 흑인 보컬의 ‘필’을 끌어들였다. 엘비스는 “로큰롤 뮤직의 리듬과 비트를 사랑한다. 결국 로큰롤은 포크 또는 힐빌리와 가스펠 가창의 결합”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세대와 비교하자면 당시 엘비스의 출현은 흑인들과 함께 디트로이트의 8마일 저편에서 살아온 가난한 백인 청년 에미넴이 완벽한 에보닉스를 구사하며 하이 톤의 속사포 랩핑으로 힙합계에 충격을 던져준 것과 비견될 일이다. 그러나, 당대의 엘비스가 몰고 온 인기와 충격파를 어찌 에미넴이 따라오겠는가. 엘비스의 창법과 가창력은 가스펠과 록을 넘어서 전통적인 스탠더드 팝 발라드 계열의 노래도 출중하게 소화했다. '이츠 나우 오어 네버(It's Now Or Never)'나 '더 원더 오브 유(The wonder of you)' 같은 곡들에서 엘비스의 이런 재능이 잘 드러난다. 엘비스의 황금 같은 목소리를 직접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희소식이 있다. 30주년을 기념해 <더 에센셜 엘비스 프레슬리>가 지난 8월 16일 미국 현지와 국내에 동시에 출시됐다. 초기 로큰롤에서 후기 감미로운 발라드까지 52곡의 주요 곡이 담겨 있다. 엘비스와 동시대를 보내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록의 황제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입문서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교과서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엘비스 앳 더 무비



선정적이며 반항적인 터프함을 로큰롤의 태도로 규정한 엘비스는 기성세대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팬층을 넓혀 기성세대도 끌어안기 위해 그의 매니저 콜 파커가 세운 전략은 엘비스를 군대로 보내고 전역 후에는 할리우드로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엘비스는 총 31편의 영화와 2편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1965년 3월, 콜 파커가 지난 10년간 결산하는 회견에서 밝혔듯이 엘비스는 레코드 1억 장 판매로 150만 달러, 영화 17편 출연으로 135만 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 매니저의 전략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1961년의 <블루 하와이>로 엘비스는 할리우드에서 성공궤도에 올라선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일 년에 3편씩 출연하며 군인으로 나온 <지아이 블루> <블루 하와이> 같은 뮤지컬, <걸스!걸스!걸스!> 유의 비치파티무비와 드라마까지 다양한 형식의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쇼 비즈니스계를 배경으로 삼은 뮤지컬 <킹 케롤>, 앤 마가렛과의 스캔들로도 유명한 <비바 라스베가스>는 그중 기억에 남는 영화로 꼽히고 있다.

대부분 여성을 구해주는 멋진 남자로 등장하는 영화 속 엘비스의 모습은 그의 상업성에 기댄 감이 강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수작들이 있다. 스토리는 뻔하지만 엘비스가 느닷없이 기타를 두르고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 잡는 것 자체가 주는 재미도 크다. 무엇보다 다른 배우들이 등장했던 할리우드영화와 엘비스 영화의 차별 점은 그의 가창력이 빛나는 주옥같은 곡들이 삽입돼 있다는 것이다. ‘리턴 투 센더(Return to sender)’ ‘하드 헤디드 우먼(hard headed woman)’ ‘올 뎃 아이 엠(All that I'm)’ ‘론리 맨(Lonely man)’ 등은 음반으로 소개되진 않았지만 영화음악으로 히트했던 곡들. 30주년 기념으로 전세계적으로 발매된 영화 삽입곡 모음집 <엘비스 앳 더 무비>를 듣는 것도 엘비스를 알아가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엘비스가 이 땅에 처음 등장한 50년대, 각종 매체들에서는 그가 점잖지 못하다고 야단이었다. 미국의 사회문화 잡지 ‘룩’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경계하라!’라는 특집기사를 통해 엘비스를 방송에 내보내는 TV와 라디오 편성 담당자들에게 우려의 충고를 던졌던 게 어언 30년. 지금은 명실상부한 로큰롤의 왕이자 엔터테인먼트계의 전설로 남았다. 엘비스 사후,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경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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