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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 걷는일 유적 탐사 기록
자유인 조동화는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의 연일정씨 유적중 배산입구에 있는 정려각에 대하여 알아보고 두발만능자가용으로 걷는일을 하면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었다.
나의 어머니가 연일정씨 옥호동(배산 인접마을)에서 태어났기에 연일정씨 문중산을 걷는일은 감회가 서리고 어머니의 조상(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어머니의 부모)들의 묘역이 있기에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를 느낀다.
자주 배산을 산책하며 배산입구에 있는 정려각을 아무생각 없이 지나쳐 왔으나 왠지 정려각에 대하여 알고 싶은 충동이 생겨 오늘은 자세히 관찰해 보았지요.
배산의 연일정씨 유적을 관찰하며 걷고 걷는일, 보약중의 보약으로 생각하고 그냥 그려려니 세상사는일이 좋아 마음먹으니 자유스럽고 행복하였다.
배산입구에는 정려각이 있는데 어느시대 어떤사람의 정려각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자세히 정려각을 관찰하여보니 연일정씨부인의 정려각으로, 남편이 젊은나이에 복막염으로 죽으니 26세의 열부 평양조씨가 남편의 뒤를 따라 남편이 죽은 다음날 자결하여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실천한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문중들이 정려각을 설치하였다.
3강오륜중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나 그시절 유교사상에 입각한 가옥한 시대상이 정려각에 비문을 세겨 놓았다.
연일정씨 배산문중이 모여살았던 원모인마을과 옥호동사람들이 타지로 많이 떠나서인지 정려각관리가 허술한 느낌이 들었다.
날마다 바쁘지 않은날이 없지만,
인간은 태초에 두발로 걸으며 진화해 왔으며, 가장 간편한 운동요법인 걷기운동으로 몸의 독소를 땀으로 배설하자.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걷자! 또 걷자. 틈나면 걷자.
그누가 인생은 나그네라 말했던가?
덧없는 세월의 흐름속에 젊음은 흘러가고 찬란했던 시절은 떠나간 세월아!
한세기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떠나가고 인생무상 아니던가?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산책시간 및 거리 : 14:30-15:30(2:00) 도보1만보
배산입구 연일정씨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 열녀 정려각 내용
한문으로 세겨진 열녀 평양조씨의 정려각을 더듬더듬하여 한글로 바꾸어 정려각 내용을 보니 비극이였다.
남편이 병사하였다고 남편이 죽은 다음날 죽음으로서 사랑을 표현하였다니 지극한 사랑이었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부인의 정절을 기려 열녀문을 세우곤 하였지요.
열녀 평양조씨 조명희(趙明姬)는 수원의 명문가정에서 1922년8월9일(임술년) 태어났다.
연일정씨 정진희(鄭鎭禧)와 수원전문학교(현서울농대)재학당시 수원에서 결혼하여 남편과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정진희는 전남지방의 금융기관에 재직했다.
평양조씨 조명희 남편 정진희(丁巳年 1917.11.21.-丁亥年1947.2.19)는 홍문관 대재학을 지낸 학포(學圃) 정숙주(鄭叔周)의 후손이다.
열부 조명희는 당시 고향에서 노부모를 모실 때에 정성을 다하여 극진한 효도를 다했다.
그리고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두 시동생을 교육시키면서도 불평하거나 힘에 겨운 표정하나 없이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후 남편은 이리농림학교로 옮겼는데, 1947년2월19일 평소 지병이던 복막염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조씨는 그 자리에서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여 남편이 죽은 다음날 1947년2월20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때 나이 꽃다운 26세였다.
무자년 1948년 중추절 세움
조명희 열녀문 정렬각(貞烈閣)을 관찰한 느낌
연일정씨(延日鄭氏) 배산문중(盃山門中) 정진희(鄭鎭禧) 처(妻) 평양조씨(平壤趙氏) 조명희 정렬각 세워진지73년, 배산입구에 홀연희 열녀의 정열각이 비바람에 싯겨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고 정렬각(貞烈閣) 주변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볼성 사납네.
조선중기 이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남편을 사별할 경우 그 부인이 따라 죽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비통해서 죽음을 맞이한 여인에게는 열녀라는 수식어가 붙어 열녀문을 세워줬지요.
열녀를 칭송하며 미화하는 시대의 자화상이 많은 열녀가 탄생되여 열여각이 세워지곤하였다.
조선시대 시대상이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의 삶을 26세의 나이에 정지시키고 말았구나.
조선시대 제도와 관습이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여인의 삶이 미덕으로 칭송되었던 시절,
열녀라는 말로 과대 포장되고 미풍양속이란 말로 미화되었던 과거의 모습이 26세의 삶에 딸을 하나 남기어 놓고 종지부를 마치었다니 가슴아픈 과거세상의 모습이로구나.
그 딸도 세월의 수레 바뀌속에 칠십객으로 변하였겠고만.
1947년(정해년) 연일정씨 정진희의 처 평양조씨 조명희가 죽은 이듬해 정열각을 세웠네
1948년에 세워진 평양조씨 조명희 정여각은 연일정씨 정진희에 대한 정절을 기려 세웠건만 세월이 흘러도 기념물로 지정도 않되고, 안내판 하나 없이 관리도 허술하게 방치되여 잡초만 무성하여 눈살을 찌푸리는구나.
평양조씨 조명희씨여!
구름처럼 바람처럼 우주의 깃발로 저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오.
2021.11.17. 연일정씨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 열녀각을 지나며..... 조동화
※정열각(貞烈閣)
정려각(旌閭閣), 열려문(烈閭門) 같은 의미로 열여를 칭송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고을 입구에 세운 붉은 비석 또는 문을 가리킨다.
정려문(旌閭門)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려기(旌閭記)를 게시한 문을 지칭한다.
정려기를 대문에 걸면 정려문이라고 하고, 독립된 건물형태에 게시하면 정려각(旌閭閣)이 된다.
마을 어귀에 세워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는 경우는 정려각의 형태로 한다.
※참고 : 현대상식과 동 떨어진 조선시대 여자에 대한 규범
⇒삼종지도(三從之道)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
⇒칠거지악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③ 음탕한 것(淫行), ④ 질투하는 것(嫉妬),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惡疾), ⑥ 수다스러운 것, ⑦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배산입구 열녀문 30여m아래에는 "연일정씨배산문중 제실"이 있으며 옆에는 연못이 있고 호남선 철길이 지나가고 있다.
수년전에는 연못주위에 탁자를 놓아 음식을 팔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 농기계와 탁자만 어지럽게 널려 있다.
연일정씨배산문중 제실은 “연일정씨배산문중종무원(延日鄭氏盃山門中宗務院)”의 현판과 “연일정씨화수회(延日鄭氏花樹會)” 현판이 걸려있다.>
옥호동마을(연일정씨 문중산 배산인근 마을)
옥창산(옛 철도아파트)아래 동쪽에 자리한 옥호동마을은 어머님의 친정마을이며 나의 외가집 마을이다.
고현초등학교 뒤 옥창산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름이다.
옥창산에 명당혈이 있는데 이를 금반옥호(金盤玉壺)라 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옥호동이라 하였다. 금반옥호란 금으로 만든 쟁반에다 옥을 갈아 만든 병을 받쳐 놓은 형국이란 뜻이다.
배산 연일정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타지역으로 많이 떠나 외지인들이 들어와 도시화로 변하고 말았다.
배산 일대는 세종 때에 나라에서 연일정씨(延日鄭氏)에게 내려준 사패지지(賜牌之地)이며, 또한 연일정씨의 세천지지(世阡之地)로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賜牌之地(사패지지)란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을 말하며 가족들이 터를 잡아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고려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도 같은 연일정씨라 마음의 사표로 삼으며 연일정씨 배산문중은 종중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다.
⇒아래 한 장의 사진은 옥호동 외가집에서 외할머니가 51세(1954년)의 이른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환갑날(1964년)에 가족들이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여 추모하고 기념사진을 남겼나보다.
조동화는 당시 복장을 보니 중학입학을 앞두고 있었구나.
그도 이제 흐르는 세월을 어찌할수 없어 노년으로 변해 버렸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의 뿌리를 찾다.
인간의 근본은 어머니로부터 세상에 나왔기에 어머니는 이세상을 떠나갔지만 언제나 어머니를 사모하면서 세상을 개척하며 살아간다.
어머니가 계시었기에 조동화도 이세상에 존재하며 이세상의 희노애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과 감사를 드리며 어머니의 뿌리를 찾아보았다.
나의 어머님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순봉(鄭順奉)께서는 모현동 옥구동에서 1928년도(소화3년) 음력 8월15일(양력 9월28일)에 태어나 1996년5월5일(양력, 음력은3월18일) 69세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두 살때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를 26살 때 여의시었다.
부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는 1890년(개국499년, 명치23년) 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현 모현동)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30년 40세에 사망하시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 김제조씨)는 1903년1월16일(명치36년) 김제군백구면월봉리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20년(대정9년) 17세에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와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으며, 1954년6월12일(음) 51세의 나이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께서는 초여름쯤 되면 해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기일에 고기나 생선을 준비하여 옥구동으로 가시어 기일을 추모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3년 나이 차이가 난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남2녀를 두시었는데, 어머님의 오빠가 정진산이고 언니가 정순례, 그러니까 나의 어머님 정순봉이 막내이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1923년(대정12)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모현동)에서 출생하여 2008년 85세에 사망하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7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하였으며 3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여 두 여동생들을 극진히 보살피었다.
언니 정순례는 1925년(대정14년)11월2일 출생하시어 황등면 방아다리로 출가하시었다.
나의 이모님 정순례(鄭順禮)께서는 방아다리에서 김동수 동구 동식 동만 아들 넷을 두어 장남 김동수(나의 이종동생)는 경기도 마석에 자리잡았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은 1928년생으로 오빠 정진산이 다섯 살 위이시고 언니 정순례는 세 살 위이시었다.
※참고(대한제국 국권상실1904-1910 일제강점기 한일합방 1910-1945)
개국(開國) : 조선의 연호 1392년을 시점으로 함
(개국이란 朝鮮의 개국 연도인 1392년을 기준)
명치(明治) : 1868년이 원년-1912년까지(45년간 사용)
대정(大正) : 1912년부터-1926년까지(15년간 사용)
소화(昭和) : 1926년부터-1989년(64년간 사용)
⇒아래의 사진은 나의 어머님께서 생전에 간직해 두었던 나의 외할머니 사진 한 장이 보관되여 있어 세상에 빛을 보게 하였다.
나의 외할머니 김제조씨(金堤趙氏) 조숙희(1903.1.16.-1954.6.12.)께서 내가 네 살적 저세상으로 가시어 외할머니 얼굴도 기억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 아쉬움으로 간절히 사모하고자 함이다.
외할머니는 왼손 네 번째손까락(약지)에 반지를 끼고 사진을 찍으셨구나.
정덕성신도비(鄭德成神道碑) 묘역
정덕성신도비는 배산입구 "평양조씨 조명희열녀각" 부근 정씨제각(연일정씨배산문중종무원) 뒤편에 있는 묘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형대석에 운룡문을 장식한 이수를 갖추고 있다. 1943년에 세워진 이 비는 비신은 오석으로 높이가 178㎝ 이고 폭이 60㎝, 두께가 33㎝ 이다. 방형의 대석은 규모가 작은데 비해서 이수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정덕성의 본관은 연일로서 신라 간의대부 정종은을 시조로 하고 후손 정승은 고려 성종 때에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덕성의 증조 정록은 전공총랑(典工摠郞)이고, 승정원 좌승지 정천봉의 아들이다.
정덕성은 세종대왕이 재위 16년(1434)에 6진을 개척할 때 대호군의 작을 내리어 좌우군을 거느리고 여진을 정벌하라 명하니 압록강을 건너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한 달 동안에 적들을 토벌하여 북변을 진정 하였다. 환군하니 왕이 주찬을 보내어 위문하고 자헌대부병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훈련원사에 제수 하였다.
학포(學圃) 정숙주(鄭叔周) 묘역 신도비
延日 鄭씨 양숙공파 14대손, 덕성공파 7대손
정숙주신도비는 작은 배산으로 가는 정씨 제각 옆 관한약수터 상부에 소재하고 있으며, 자연 암석을 좌대로 삼고 옥개형 개석(屋蓋形 蓋石)을 얹었다. 1944년에 세워진 이 비는 비신은 오석으로 높이가 160㎝, 폭이 60㎝, 두께가 30㎝이다.
묘역은 신도비 상부에 정숙주묘역이 있으며 좌측에 좌측에 정부인 황주변씨 묘가 있고, 정숙주묘역 후단부에 정부인 한산이씨 묘가 있다.
정숙주는 조선 선조 40년(1607)에 전주부에서 증좌승지 정담(鄭膽)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 6년(1665)에 죽었다. 자는 자정(子禎)이고 호는 학포(學圃)이다. 일찍이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반정 후에야 과거시험에 나아가 인조 13년(1635) 2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더불어 창의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향리로 돌아왔다.
효종 4년(165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즈음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왕실과 인척을 맺고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몇몇의 토호들은 그들의 뜻을 받들고 아첨하여 송덕비를 세우니 공이 이를 심히 지적하자 이들의 방해로 하직하게 되었다.
정숙주는 젊어서부터 사우들과 더불어 경사를 강론하고 의리를 중히 여겼으며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벼슬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올 때는 곡간이 텅 비어 있었다.
연로한 뒤에는 사우(士友)들과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리를 강설하다가 59세에 죽었다.
정숙주[鄭叔周]의 묘표(墓表) -송시열(宋時烈)
정숙주(鄭叔周) 자정(子楨, 자(字))공은 영일(迎日) 사람인데, 대대로 전주부(全州府)에서 살았다. 인품이 출중하고 큰 뜻이 있어 비록 높은 관원이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마음속으로 그 불선(不善)한 것을 알아차리면 반드시 침을 뱉고 떠났다. 이로 인해 종신토록 하위에 침체되어 있다가 숭정(崇禎)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나 고을의 서쪽 옥야현(沃野縣) 연주산(聯珠山)에다 장례를 치렀다. 부인 이씨(李氏)와 변씨(邊氏)는 모두 뒤에다 부장(祔葬)하였다.
정씨는 동방의 대성(大姓)인데, 포은 선생(圃隱先生)이 또한 그중에 으뜸가는 분이다. 증조(曾祖)는 정창록(鄭昌祿)이고, 할아버지는 정홍의(鄭弘毅)이고, 아버지는 정섬(鄭贍)이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만력(萬曆)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공이 태어났다.
광해조에 폐모(廢母)의 의논이 일어나자 공의 나이 매우 젊었는데, 분연히 말하기를, “차라리 죽어 꿋꿋한 귀신이 되고 말지언정 어찌 차마 이런 의논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내 봉곡(鳳谷) 김동기(金東起)공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김공은 원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문인이었다.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과거를 보아 거듭 초시에 장원하여 명성이 서울까지 났으므로 서울 사람들이 모두 공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2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이끌고 나가 국난(國難)에 몸을 바치려는 뜻을 가졌었고, 또 격문(檄文)을 지어 ‘국록을 먹으면서 자신이나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하려는 사람’을 책망하였다. 난리가 끝나자 시사(時事)에 강개한 생각이 들어 ‘대명의 해가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난다.[大明天日赫臨頭]’는 글귀를 지었다. 침랑(寢郞)에 임명되었는데, 시기하는 사람이 ‘샛길을 통해 그 벼슬을 얻었다.’고 무함하였다. 공이 벽에다 스스로 자신의 고과(考課)를 쓰기를, “권력이 있는 가문에 이처럼 빌붙고 창고의 곡식을 쥐처럼 훔쳐 먹고 있으니, 고과가 하등 중에 하등이다.” 하고, 소매를 펄럭이며 돌아와 버렸다.
숭정(崇禎)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보다 앞서 그곳 부사(府使)가 왕실과 혼인하여 끊임없이 횡포를 자행하였는데, 어떤 토호(土豪)가 아부하느라 비석을 세워 매우 칭송하였다. 공이 미워하여 벗들과 함께 글자마다 곁에다 주석을 붙여 풍자하였으므로 부관이 매우 앙심을 품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자제가 홍문관에 선발된 공의 이름을 삭제하고 등급을 낮추어 성균관(成均館)에 예속시켰다. 일찍이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어 희생을 도둑질한 자를 적발하여 죽였었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적신(賊臣) 허적(許積)이 재이(災異)로 인하여 들어가 고하기를, “정숙주가 무고한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하늘을 감동시켜 재이를 초래할 만합니다.”고 하니, 임금이 매우 노하였다.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공이 반복해서 거듭 변명하고 이어 공이 제사에 공경을 쏟은 정성에 대해 말하였기에 일이 무마되었다.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고 병조(兵曹)로 옮겼다가 어떤 일로 다시 예조 좌랑이 되었다. 보령 현감(保寧縣監)이 되었다가 또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중상모략을 당하여 체차되었다. 그 뒤에 연달아 강진 현감(康津縣監)ㆍ순천 현감(順天縣監)ㆍ제주 판관(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연로하다는 이유로 체차되었다.
공이 젊어서부터 날마다 사우(師友)들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리를 이야기하였다. 집에서는 형제들과 같이 살았고 벼슬살이할 적에는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랑하였다.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돌아갈 때에는 행낭이 씻은 듯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찍이 과장(科場)에서 지은 글을 고관이 보고 칭찬하였는데, 어떤 귀족의 자제가 꾀를 부려 그 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공을 억울하게 여긴 사람이 공을 위해 바로잡아 되돌려주려고 하니, 공이 유연(悠然)히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번영과 몰락은 운명이다.”고 하였다. 대체로 과거는 사람의 큰 욕심이 있는 것이므로 이 한 가지 일의 측면을 통해 공의 대략을 알 수 있다.
아들 정상린(鄭祥麟)ㆍ정상룡(鄭祥龍)ㆍ정상두(鄭祥斗)는 모두 변씨의 소생인데,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동년(同年)의 진사(進士)이다. 둘째 아들은 일찍이 흉측한 불꽃을 무릅쓰고 상소하였다가 귀양을 가자 사람들이 공을 매우 닮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로 있다. 막내 아들은 무예(武藝)에 종사하여 지금 영장(營將)으로 있다. 사위는 세 명인데, 강빈주(姜周)ㆍ최전(崔)ㆍ김회창(金會昌)이다. 측출(側出)에서 난 아들은 정상발(鄭祥發)ㆍ정상우(鄭祥虞)이다. 손자 정국빈(鄭國賓)ㆍ정석빈(鄭碩賓)은 맏아들의 소생이고, 정진빈(鄭晉賓)ㆍ정태빈(鄭泰賓)은 둘째 아들의 소생이며, 정훈빈(鄭勛賓)ㆍ정화빈(鄭華賓)ㆍ정하빈(鄭夏賓)ㆍ정문빈(鄭文賓)은 막내 아들의 소생이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공과 나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비록 사는 곳이 멀어서 조석으로 만나지 못하였지만 항상 공의 기개를 사모하면서 하늘의 고니와 땅의 벌레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탄식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아들들이 과분하게도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기에 늙고 병들어 죽어가지만 이와 같이 개략적인 것만 대략 열거하였다.
兵曹佐郞鄭公墓表
鄭公叔周子楨迎日人。世居全州府。俶儻有大志。雖達官要人。心知其不善。必唾而去之。以故終身轗軻。而卒於崇禎乙巳五月十四日。葬于州西沃野縣之聯珠山。二夫人李氏,邊氏皆祔于後。鄭爲東方大姓。圃隱先生亦其宗也。曾祖昌祿。祖弘毅。考贍。妣李氏。公以萬曆丁未生焉。光海朝讎母議起。公年甚少。奮曰。寧死爲毅鬼。何忍聞此議。遂從鳳谷金公東起學。金公。文元公老先生門人也。仁祖改玉。就場屋。荐魁解額。聲聞京師。京師人皆遲其至。二十九。中司馬兩試。丙子虜變。倡率同志。有捐軀死難之志。又作檄文。以責食祿而全身保妻子之人。亂已。慨念時事。有大明天日赫臨頭之句。除陵寢郞。有忌者誣謂由蹊逕得之。公自署其考于壁曰。蝨附權門。鼠竊廩食。考下下。遂拂袖而歸。崇禎癸巳。登文第。先是府官連姻王室。橫恣無已。有土豪媚承。立石盛頌之。公惡之。與儕友逐字註其傍以刺之。府官甚銜之。至是其子弟削公槐院選。降隷成均館。嘗差典祀。察戮盜竊犧牲者。未幾賊臣許積因災異入告曰。鄭叔周枉殺無辜。足以感召也。天怒甚震。同春宋公浚吉反覆申辨。仍言公致敬祀享之誠。事得已。陞典籍。歷司憲府監察,禮曹佐郞。移兵曹以事還。仍禮郞。爲保寧縣監。又被修隙者所中而遞。後連拜康津順天縣監,濟州判官。皆以年老遞。公自少日與士友。講論經史。談說義理。處家兄弟同居。居官吏民畏愛。解紱歸時。行橐如洗。嘗於科製。考官稱善。有貴游子弟以計移於己。有冤公者欲直公而歸之。公悠然不許曰。榮落命也。夫科第。人之大欲存焉。於此一事。可以見公之大略也。男祥麟,祥龍,祥斗皆邊氏出。伯仲同年進士。仲嘗犯凶焰上疏謫去。人謂極肖。今爲繕工監奉事。季業孫吳。今爲營將。三女壻姜䎙周,崔,金會昌。側出男祥發,祥虞也。孫男國賓,碩賓長房出。晉賓,泰賓次房出。勛賓,華賓,夏賓,文賓季房出。內外曾玄多不能盡錄。公與余同年生。雖居止遠。不得朝暮遇。而常慕公氣槩。而每有黃鵠壤蟲之歎。今諸胤猥有不朽之託。而老病垂死。略擧其槩如此云。時崇禎強圉單閼仲秋日。德殷宋時烈述。
연일정씨 배산문중 신도비(神道碑)
연일정씨 배산문중 묘역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
배산입구 묘역에 설치된 정덕성신도비(鄭德成神道碑)가 있고,
작은 배산으로 가는 정씨 제각 옆 관한약수터 상부에 학포(學圃) 정숙주신도비(鄭叔周神道碑)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관직으로 뚜렷한 공로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가 될수 있는 경우에 생전에 세운공로나 인품을 기록,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신도비의 비신 윗부분에 비의 명칭을 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 하며, 대개 전서체(篆書體)로 가로로 길게 쓰게 된다.
작은 배산 배산정(盂山亭)
관한약수터에서 오르막을 길을 지나 좌측으로 올라서면 작은 배산이 있고 우측으로 100m 올라가면 큰 배산 연주정이 나온다.
작은 배산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대구 달성서씨 묘소와 제각이 있다.
배산정(盂山亭)은 작은 배산의 바위위에 세워진 정자로 1926년 연일정씨 문중에서 정자를 세워 일주정(一株亭)이라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헐리게 되자 그 자리에 1980년도에 김병량시장 재직시 시비로 건립한 정자이다.
작은 배산 배산정자 안 상부에 “배산정기” 편액이 걸려 있다.
배산정기(盂山亭記) 편액
이리의 명소로 알려진 이배산은 큰 배산 작은배산으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산상은 모두 바위로 덮어져있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이 작은 배산은 반석이 넓게 깔려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앉아 놀수있게 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산상에 올라서면 약진하는 이리시가 한눈에 보이고 비옥한 들이 끝없이 펼쳐져있는 광경을 맞보게되는 것도 또한 감탄한일이다.
더욱이 세속을 떠나 한때 나마 이곳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어 맑은 공기속에 풍겨오는 소나무의 향기를 맞보게 되는 쾌감은 신기할 따름이다.
지난번 이반석위에 우령대(禹靈臺)가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우씨(夏禹氏)가 9년 치수를 이곳에서 했다는 고사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한편 1926년 연일정씨 문중에서 일주정(一株亭)을 지어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 기관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풍마우세로 30여년만에 헐리게 된 것은 가석한 일이다.
지난번 이리시에서는 큰 배산에 이리청년회의소의 협조로 연주정(聯珠亭)을 지였고 이번에 또 작은 배산에 시비(市費)로 배산정을 지어 이리시의 공원으로 면모를 일신한것은 서로 기뻐할일이다.
이리시민은 모두 이 배산을 소중히 여겨 돌 한덩이 나무 한포기에도 사랑의 손길이 뻗혀지기를 바라옵고, 이 배산정에 올라 신선한 향기속에서 번영하는 이리시의 새모습과 광활한 평야를 굽어보면서 호연의 기상을 기르기를 원하는 바이다.
배산정의 건립을 기리기 위하여 그 전말을 써서 기록하는 바이다.
서기 1980년 9월 15일
이리시장 김병량
익산 배산(盂山)
배산(盂山)은 세종시대 연일정씨가 나라에 공적을 세워 임금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사패지로서 연일 정씨 배산문중의 소유이며, 97m의 작은산으로 편백나무와 노송들이 많아 익산시민들이 즐겨찾는 유일한 휴식처이고 운동장소이다.
큰 배산의 정상에는 1910경 지어진 정자가 있었는데 오래되여 철거하고 1979년 연주정(聯珠亭)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은 배산의 정상에는 1980년 배산정(盂山亭)을 이리시비로 건립하여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용하고 있다.
익산 시내에 있는 유일한 산 97m의 배산!
배산 산책로 곳곳에 앉아서 쉴수 있도록 의자도 설치해 놓았다.
배산의 편백나무 숲에는 시민들이 쉴수 있도록 편백나무로 만든 벤치형 침대들도 있고 여럿이 앉아 쉬어 갈수 있는 평상도 설치되여 있어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매년 1월1일 해맞이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 큰 배산(盂山) 연주정(盂山亭)이다.
큰배산 정상에 세워진 "연주정(聯珠亭)" 편액
연주정(聯珠亭)은 배산(盃山)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배산은 두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작은 배산, 큰 배산이라고 부른다. 큰배산 봉우리에는 연주정(聯珠亭)이, 작은 배산에는 배산정(盃山亭)이 건립되어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산의 소유주인 연일정씨(延日鄭氏) 문중에서 1926년에 건립한 일주정이 폐사된 후 휴식 공간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익산시와 전라북도의 협조를 얻어 1979년 이리청년회의소(JC)가 창립15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하였다.
여덟개의 기둥이 있는 팔각형 2층 정자로 사방이 탁 트여 남쪽으로는 익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서북쪽으로는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배산 전체가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발길이 잦은 곳이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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