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대혜 종고 선사가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를 만나 일대사를 해결했던 중국 베이징 외성 서북쪽에 위치한 천녕사. |
목숨 걸고 간화선 수행에 매진한 우리나라 고승들의 일화를 읽고 그들의 시퍼런 칼날 같은 기상을 좋아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국 간화선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니 참으로 격세의 느낌이 든다.
선종 최고의 저작물 ‘벽암록’ 원오 선사가 저술한 공안집 발간 뒤 사라지는 비운 맞아
수제자인 대혜 선사가 소각 구두선에 매몰된 후학 경책 분별늪 빠진 제자 향한 자비
장명원 거사가 다시 간행해 체험 없으면 진리 왜곡되고 문자 없인 깨달음도 어려워
선종(禪宗) ‘최고의 저작’이라 불리는 ‘벽암록(碧巖錄, 碧巖集)’은 중국 임제종의 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 선사가 찬술한 공안집이다. 그러나 찬술된 뒤 얼마 되지 않아 ‘벽암록’은 비운을 맞았다. 원오 선사의 수제자인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가 이 책을 불태우고 그 판본까지 없애 후세에 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소각 후 약 150여년이 지나 ‘벽암록’이 다시 복간될 때 허곡 희릉(虛谷希陵, 1247~1322) 선사는 후서(後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혜 선사는 수행승들이 입실(入室)하여 자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매우 뛰어나므로 자못 의심스러웠다. 조금 따져 물으니 수행승의 비뚤어진 날카로운 기세는 저절로 꺾이고, 다시 한 번 족치니 순순히 굴복하여 자백하기를 ‘저는 벽암집의 내용을 외운 것이지 실제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혜 선사는 후학들이 근본을 잘 모르면서 말만을 숭상하여 입만 나불거리는 자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 ‘벽암집’을 불태워 버려 그 폐해를 막으려 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저술한 것이나 이 책을 불태운 것이나 그 마음 씀씀이는 하나이니 어찌 서로 다르겠는가?”
대혜 선사는 제자들의 경지를 개별적으로 점검하는 입실(독참이라고도 한다) 시간에, 그들이 내보인 뜻밖의 훌륭한 경지에 놀랐다. 제자들의 경지가 이렇게 높을 리 없다고 생각한 대혜 선사는 그들을 불러 다그쳐 물었더니 잘난 체 뽐내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들을 불러 족치니 어쩔 수 없이 순순히 자백했는데, 놀랍게도 ‘벽암록’ 내용을 외운 것이지 실제로 자신들이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었다.
이 사실에서 짐작해 보면, 당시 선 수행자들 중에는 참선은 제대로 하지 않고 ‘벽암록’ 내용만 외워서 마치 깨달음을 얻은 양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많았던 듯하다. 대혜 선사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도 이런 자가 있음을 발견하고 진상을 밝혀낸 결과, 그 폐단의 근원이 ‘벽암록’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선을 통해 진리의 직접 체험을 생명으로 삼는 간화선(看話禪)이 입만 나불거리는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하는 것을 본 대혜 선사는 간화선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고, 더 이상 구두선에 빠진 가짜 수행자들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대혜 선사는 문자에만 집착하여 본래의 수행을 잊은 후학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벽암록’을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스승이 저술한 ‘벽암록’을 불태우고 그 판본까지 없애 버려 더 이상 이 책이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법맥을 중시하는 선종에서 제자가 스승의 역저를 불태우고 그 판본까지 없애 버린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고 임제종의 종풍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 하더라도, 이 얼마나 대담하고 무서운 결단인가?
진정한 선 수행자라면 이 결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대혜 선사의 눈물겨운 자비심을 간파해야 한다. 그것은 문자나 언어에 매달려 지독한 분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제자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하려는 대혜 선사의 절절한 자비심의 발로였다.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고목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벽암록’이 소각되고 대강 150여년이 지난 원나라 대덕 연간(1297~1307)에 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장명원(張明遠) 거사가 이 책의 사본을 찾아내어 다시 간행하게 되었다.
‘벽암록’이 언제 처음으로 간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복간된 ‘벽암록’에 실려 있는 복간 전의 서(序, 본문 앞에 쓴 서문)와 후서(본문 뒤에 적은 서문)의 저작 연도가 각각 1128년과 1125년이므로 적어도 이 시기에는 ‘벽암록’이 유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아 남쪽으로 쫓겨 가서 남송을 개국한 것이 1127년이므로, ‘벽암록’은 송나라가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벽암록’을 소각한 시기는 대혜 선사가 금나라에 대항해 싸우자는 강경한 주전론으로 유배를 가기 전후이거나 묵조선을 크게 공박하고 있던 때로 추정된다. 대혜 선사가 호남성 형주로 유배 간 것이 1141년, 53세 때 일이며, 이후 형주와 광동성 매주에서 15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또한 ‘변정사설(辨正邪說)’을 지어 묵조선을 비난한 시기가 1134년, 대혜 선사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다. ‘벽암록’을 복간할 때에 새로 붙여진 서와 후서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이 1300년(대혜 선사 입적 137년 후)에 저작된 것이므로, 소각과 복간 사이에는 약 150여년의 간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 | ▲ '불과원오선사벽암록' 보물 제1093호. |
대혜 선사가 그렇게 무서운 각오로 불태우고 그 판본까지 없애 버렸던 ‘벽암록’을, 그것도 무려 150여년이란 세월 동안 선 수행자들에게 외면되어 온 책이 영원히 사장되지 않고 다시 복간된 이유는 무엇일까? 주치(周馳) 거사는 복간한 ‘벽암록’에 서문을 쓰면서 복간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공자님은 도를 체득(體得)하신 뒤 역시 아무 말씀 하지 않으려 하셨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의 출세간의 법을 닦는데, 가히 문자나 언어로써 그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또한 문자와 언어를 완전히 버릴 수 없는 사정도 있다. 그것은 지혜로운 이는 적고 어리석은 이는 많으며, 이미 배운 이는 적고 아직 배우지 못한 이는 많기 때문이다. 대장경 5000여권은 모두 후세 사람들을 위해 설한 것이다. 참으로 말을 버려야 했다면 석가모니는 입을 다물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장황하게 설하게 되었을까? 천하의 도리는 일상의 생활 속에 있으면서 또한 일상을 초월해 있다. 알기 쉬운 듯하면서도 실은 알기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평생 체득할 수가 없다. 옛날에 이름을 날린 사람은 천 명 중에 한 명 나오는 영웅이 아니면, 만 명 중에 한 명 나오는 호걸이었다. 태아(太阿)의 검(劍)은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는 칼이다. 산에 가면 범과 표범을 죽이고, 물에 들어가면 교룡을 벨 수가 있다. 사람들이 이 칼에 대해 안다 한들 이 정도가 전부이다. 그러나 옛사람 중에 이 칼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이는 성벽에 올라가 싸우면서 바람을 따라 칼을 휘둘러 대군을 무찔러서 그 피가 천리를 붉게 물들였다. 그러니 어찌 내 자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려 들겠는가? 나는 이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전심전력으로 찾아 헤매었다. 우중 땅에 사는 장씨가 새로이 판목에 새기려고 하여 나에게 의논하러 왔다. 이에 찬성하여 이 책을 완성시키고 그 서문을 쓰게 되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듯이, 체험 없이 말이나 문자로 전하는 것에만 의존하면 상당한 왜곡이 따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말이나 문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깨달음의 근처도 가지 못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까지 45년간 설법을 계속하고, 그것을 토대로 대장경 5000여권을 만든 것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진리는 일상생활 속에 있으면서 또한 일상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알기 쉬운 듯하지만 실은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눈 밝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심안(心眼)은 평생 열기 힘들다. 스승의 천금 같은 질타와 번뜩이는 한마디가 없다면 ‘나’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오기란 참으로 어렵다. 일생을, 그야말로 평생을 스스로가 만든 테두리 안에서 아옹다옹 살다가 갈 뿐이다.
천하의 명검을 눈앞에 보고 있지만 사람들은 고작 사냥이나 하는 칼로밖에 여기지 못한다. 천하의 명검을 명검답게 제대로 쓰고 싶지 않은가? 명검을 자유롭게 휘둘러 끈질기게 집착하는 ‘나’를 죽이는 살인도(殺人刀)로 쓰는 동시에, 대자유의 본래 모습으로 살려내는 활인검(活人劍)으로 쓰고자 한다면 눈 밝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 하물며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본성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소식을 접하는데, 어찌 원오 극근 선사의 탁월한 가르침을 담은 ‘벽암록’을 외면하겠는가?
주치 거사는 ‘벽암록’이라는 절세의 공안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었다. 이 책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장명원 거사와 함께 다시 판본을 만들고 그 서문을 지었다. 주치 거사는 간화선에 매진하면서 화두 참구야말로 캄캄한 사바세계를 밝히는 영롱한 빛이라는 체험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찾아 헤맨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벽암록’이지 않는가? 주치 거사가 수소문 끝에 처음으로 이 책을 대했을 때의 기쁨은 어떠했겠는가?
어느 이름 없는 헌책방의 한 구석에, 폐지처럼 쌓아 두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책 한 권. 소각이라는 비운을 모면하려고 150여년 동안 돌고 돌아 이제 겨우 이곳에 숨어들었건만. 이걸 어쩌나! 눈 밝은 이의 눈은 속일 수가 없으니.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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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서는 지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도를 보는 사람이 문제지 지도에 허물이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몸은 가지 않고 지도만 달달 외는 사람은 문제지만 지도를 들고 실제 길을 가는 이에게는 지도만큰 요긴한 것이 없겠지요. 이 카페도 훌륭한 지도라고 생각하며 박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