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모사들,그리고 야망과 배신이 어우러지는 세계의 끝까지 살아남고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끝내 주도권은 전혀 타인에게 넘어가는 사라져간
3인의 핵을 거론하면은 조조,유비,손권은 각자 나름대로의 장단을 갖고 있었으며,그외에 다른 호족들과도 그리 별반의 차이는 없었으나 어느 하나의 남들은 따라올수 없는 장점으로 성공한 자들임에는 분명한 사실이다.
삼국지에서 보다 물론 역사가들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보다는 진수의삼국지를 위주로 다루기에 알고있는 부분에서 그 3명의 영웅은 좀더 이랬더라면은..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들이 있다.
1.조조의 천하통일 실패-그는 황제를 보필함을 기점으로 호족들을 포섭 혹은 정벌을 하면서 위나라 건국의기반을 닦는다.물론 그는 수많은 호족들을 제거하여 천하제패가 목표였지만 말이다.
분명 조조는 비록 후에 제갈량에게 계속해서 농락과 패배를 연발하였으며,강동정벌에 끝내 실패하여 천하제패에는 실패했지만은 그가 좀더
이렇게 했으면은 분명 그는 천하통일을 이루었을것이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는 유비를 위험인물로 경계하는 부분이 자주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비가 성장하도록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는 부분은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로 보아서 아무래도 그는 유비를 과소평가를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나싶다.
먼저,유비를 계속해서 놓아둔것은 천하삼분을 키워준 조조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할수 있겠는데,
그 예를 열거하면 첫째,원소와의 전쟁도중에 유비가 여남에서 허도를 습격하던 중에 조조는 유비를 섬멸하였다.하지만 당시에 원소가 더 시급하였으므로 유비를 형주로 가기도전에 추격을 하지못함은 그렇다하여도
후에 형주점령 후에 강동을 치기전에 앞서서 유비를 끝까지 제거하지 않음은 조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유비의 참모인 서서까지 허도로유인할 정도라면은 공명을 보유한 유비는
어째서 강하와 유강구까지 먼저 치지않았는가하는 의문이든다.
적어도 원소의 두 아들이 요동으로 달아났을 때에는 요동을 치지않으면
먼저 거기서 원소의 두 아들의 목을베어 공손강이 먼저 항복을 예언한 곽가의 말대로 강동보다 우선적으로 유비를 먼저 쳤으면 어땠는가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돋는다.
그리고 그는 적벽대전 후에 너무도 강동에만 신경을 곤두세운 나머지
유비의 서촉정벌을 너무도 우습게 알았던 점이었다.
사실 강동정벌 이전에 마등과 마초를 먼저 선수를 칠정도로 그는 후환을
걱정하지 않았는가 하면은 유비가 서촉을 정벌하러 갈당시에 과거
순욱이 조조에게 말한 유비가 서주에 있을당시의 여포로 하여금 서주공략을 유도케하는 구호탄랑지계를 사용했더라면은 적어도 승산은 잇었을것이다.즉,유비가 나가고 난 이후의 형주를 치는 것이다.
아니면은 적어도 유비와 손권간에는 형주반환문제로 상당히 보이지않는
외교분쟁이 있었으면은 손권과 사전에 연합하여 형주를 동시에 치면은
어떠하였을까하는 생각도 있고,아니면은 서촉을 장송이 왔을 당시에
미리 그를 정중히 예우하였다면 서촉을 유비보다 먼저 먹었을것이다.
그리고나서 혼자남은 손권은 이미 시간문제였을거라는 거고,
적어도 유비가 서촉을 정벌후에 조조는 한중을 정벌했다면 그 여세를 몰아서 서촉을 치자는 유엽과 사마의의 말을 듣지않는 것 또한 그의 실수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유비를 너무 방심한 것이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2.유비- 그처럼 삼국제에서 주인공으로 다루어지고 가장 유명한 것이
삼고초려와 도원결의라고 하겠다.하지만 그는 조조처럼 재산도 배경도 없기에 단지 이름세와 소수의 무장들만으로 숱한 난관에 시달린다.
그가 성정하게된 결정타는 바로 공명의 삼고초려인데 그 후부터 조조와
손권과의 전력을 백중세로 몰아가면서 천하삼분을 이루나 그는 형주반환에서 너무도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솔직히 형주는 유비가 서촉을 치러가기전만하여도 동오는 형주공략을 시도하였고,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형주를 반환할 의사는 없었음을 삼국지를 읽으면 알수있다.
이것은 공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유표가 형주계승을 권유할 당시에 이미 처음부터 받았거나,
당시에 인의로 사양했다면은 어째서 동오에게는 사실상 말이 연합이지
생명을 맡기고 있던 손권에게는 돌려주지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정도이다. 공명도 이 부분은 중대한 실수를 한것이었다.
관우에게 북으로 조조를 치고 동으로는 손권과의 연합을 권유한다면
적어도 한중정벌후에 형주의 완전반환을 추진하여 적어도 대부분이라도 주었다면은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며,관우가 죽는 일과 유비와 손권의 잔쟁 또한 없게 되지는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 부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