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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이영화는 혁명가로서의 체게바라의 활동보다는 젊은 시절의 남미여행을
주로 다룬 영화인데 한장면 한장면의 배경이 정말 예뻐요...
20대가 가기전에 배낭여행가는게 제 꿈이었는데...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아 슬퍼지네요.
예전에 3개월간 홀로 호주 배낭여행을 한적이 있는데....그때 그때의 생각이나 감정
을 적어 놓지 않은게 후회가 되요....(글 쓰는걸 싢어해서리...)
시골로 가면 혼자 아시아 여자 이기도 하고 영어를 못해서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평생 못잊을 추억이었던 것 같네요.
밑에 글은 참고 하시구요..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1956년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 |
너무나 인간적인,그리고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 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과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 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이 격정의 60년대 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 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 번 에 걸쳐 실시한 남미 전역 여행은 게바라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세상을 위해 인술을 펴겠다는 꿈을 품었던 햇병아리 의사의 가슴에 '변혁'의 열망을 심은 것은 칠레 추키카마타 구리광산의 모습이었다. 미국인 광산소장이 하루 수백만달러의 수익을 거둬가던 광산의 거대한 노동자용 공동묘지. '얼마나 묻혔나요?' '대략 1만명'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 질적으로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된 것이다. 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권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56년 7월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게바라는 같은 해 11월 80여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돼 거의 전멸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게바라, 카스트로 등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산맥 에 숨어 게릴라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은다. 이들은 수만명의 바티스 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오다 58년 산타 클라라전투에서 승리하면 서 승기를 잡는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59년 1월2일 수도 하바나에 입성한다. 그뒤 쿠바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 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1965년 4월 쿠바혁명을성공시킨 체 게바라는 보장된 2인자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 쿠바 국립은행총재 재직당시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던 모습으로 민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은 그가 대신 선택한 삶은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 하는것이었다. 그 1년 뒤 게바라는 우루 과이의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67년 10월9일.31세의 나이에 쿠바혁명을 이끈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1년전 남미민중해방운동의 요충지인 볼리비아로 숨어든 그는 볼리비아정부군을 지원하는 미국 CIA의 정보망에 걸려 죽기 하루전 체포된 뒤 다음날 바로 처형당하고 만다. 인간만을 믿으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체 게바라.1956년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은 3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그의 진면목을 엿보게 한다. | ||
그의 시대정신을 사랑하는것인가? 그의 저항성을 상품화 하는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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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게릴라로 일관한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오늘날 되살아나고 있다. 67년 체포되어 처형당한 체 게바라가 30년만에 유럽을 강타하고 드디어 한국에까지 게바라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일생을 다룬 소설에서부터 평전, 게바라의 얼굴을 그려넣은 시계, 재떨이, 티셔츠 등이 불티나듯 팔리며 게바라의 부활을 실감케 하고 있다. 96년 스위스의 한 신문에서는 유럽에서 불고 있는 '체 게바라' 열풍을 특집으로 다루며 '혁명은 끝나고 공산주의도 몰락했는데 게바라만은 살아있다'고 보도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3천부를 넘기 힘든 평전의 판매 부수가 한달만에 2만부를 넘기고 있고 체의 이름을 딴 까페까지 인기를 끌 정도이니 체 게바라가 시대를 역행하며 살아있는 셈이다. 하지만 체 게바라 열풍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들은 혹시 낭만적 혁명가로서의 반항적 이미지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치열한 그의 삶과 문제 의식을 떠나 브로마이드 속의 반항적 이미지만을 쫓는다면 게바라의 부활은 박물관의 미이라와 다를바 없다. 평전 속에 나타난 그의 삶과 문제의식을 돌아보며 과연 21세기의 체 게바라가 살아남은 진정한 혁명가인지 환영에 지나지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게바라가 유럽에서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죽는 날까지 권력을 등진채 게릴라로 일관한 전설적인 삶 때문이었다. 쿠바 혁명을 완성하는 순간 모든 권력과 특례를 버리고 다시 게릴라가 된 게바라에게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체 게바라 열풍이 게바라의 시대정신과 치열함을 얼마나 담아내고 있는지 우려된다.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지 않은채 게바라의 브로마이드와 상품속의 이미지만을 쫓는 것은 영화배우 '제임스 딘'을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게바라의 치열한 삶과 시대정신인가, 아니면 고독하고 우수에 젖은 게릴라의 이미지인가? | ||
체가 쿠바를 떠나며 피델카스트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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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
지금 이 시간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오른다네, 자네를 마리아 안토니아 집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자네가 나에게 자네 그룹에 합류하기를 청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대비해 누구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지를 미리 말했을 때, 이 가능성은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나타났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로 현실임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혁명을 할 때-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면-우리가 승리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 말일세. 실제로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에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가. 오늘에는 이 모든 것들이 덜 극적으로 보이네. 우리가 더욱 성숙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나 또한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쿠바 땅에 국한된 쿠바 혁명에서 내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네. 이제 나는 자네와, 동지들과, 그리고 이제는 나의 것이기도 한 자네의 인민들과 작별하려 하네. 나는 내가 점하고 있는 당의 직책과 장관직과 사령관의 직위, 그리고 쿠바 시민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네. 이제 나와 쿠바를 잇는 어떤 법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네. 오직 공문서 따위로는 파괴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관계만이 나에게 남을 것이네. 내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건대, 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게 또 한결같이 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다만 하나 내 잘못이라면 시에라마에스트라 시절 처음부터 자네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자네의 지도자적 자질과 혁명가적 기질을 좀더 빨리 이해하지 못한 것이겠지. 나는 경이로운 세월을 살았고, 미사일 위기가 계속되는 최근에까지 자네 곁에서 우리 인민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네. 이런 경우에는 어떤 국가원수도 자네만큼 영민하게 대처할 수 없었을 터, 보고, 사고하고, 위험과 원칙을 형량하는 자네 뒤를 주저 없이 따른 것이 자랑스럽네. 지구상의 다른 땅들이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하는군. 쿠바의 영도자로 남을 자네의 책임이 자네로 하여금 포기하게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것을 나는 하려 하네. 이제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온 게지. 내가 기쁨과 고통이 교직하는 가운데 떠난다는 걸 이해해 주게. 나는 여기에 건설자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희망을, 내가 사랑하는 자들의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남겨두고 가네. 나를 아들로 받아준 인민의 곁을 떠나네. 내 정신의 한쪽을 남겨두겠네. 새로운 전장에서 자네가 나에게 심어준 믿음을 간직하겠네. 우리 인민의 혁명의식과 내 의무의 가장 고결한 부분을 완수한다는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간직하겠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그곳에 이들이 모두 함께할 것이네. 내 아픔을 쉽게 치유하고 위로하는 바는 이것뿐일세.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쿠바에 대한 모든 책임을 벗고, 오직 이상형의 쿠바만을 기억하겠네. 그래서 다른 하늘 아래 내 최후의 시간이 도래한다면, 내 마지막 생각은 쿠바 인민들에게, 특히 자네에게 향할걸세. 자네의 가르침과 자네의 모범에 감사하네. 내 행동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충실하게 간직하려 노력하겠네. 나는 늘 우리 혁명의 대외관계에 집착하곤 했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쿠바 혁명가의 책임을 완수할 것이며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네. 나는 나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어떤 물질도 남겨주지 않을 터,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들이 먹고, 교육받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가 줄 것이기 때문일세. 자네에게, 인민에게 할말이 많았는데, 그것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어찌 말로써 다하겠는가. 종이만 더럽힐 뿐이겠지.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뜨거운 혁명의 열기로 얼싸안으며 | ||
첫댓글 아흣...정말 보고푸네여...조만간 저질러야겠슴다...울동호회분들이 협조안하신다믄 저혼자라둥...글구 SK님 저두 조조 말고는 잘 안보는 편인데영..ㅋㅋ 조조볼때의 그 뿌듯함은 말도 못하져...조조맛 들이면 제돈 주고 절대루 야간엔 못보져...그래서 영화와 멀어지고 있지만서도...
ㅎㅎㅎ 좋으셧겟습니다..저두 가끔 혼자 영화를 보곤하는데..기대이상의 작품을 보고나오면..정말 뿌듯하죠?? 같이하믄 더 좋았을것을...아쉽습니다..기대이빠이~~모니카님 곧 일 저질러야겟는데요?
내용이 쁘듯 하군요. 감사합니다.
솔로만이 가질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부럽네요... 저두 결혼 전엔 혼자 영화도 자주 보구, 여행두 마니 다니구 했는데...^^;; 대학때, 친구들과 모여 술 마시며, 게바라에 대해 열을 올리며 얘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 좋은 글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