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가듯이” 박목월, 말년의 시에는 산보다 밥상과 가족이 더 많이 들어왔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학교에서 박목월을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아마 이 구절부터 떠올릴 것이다. 산, 달, 청노루, 메밀밭. 1946년 조지훈·박두진과 함께 낸 <청록집> 속 박목월은 한국 서정시의 가장 맑은 풍경을 만든 시인이었다.
그런데 박목월의 시를 거기서 멈춰 기억하면, 그의 인생 절반쯤을 놓치게 된다.
전쟁이 지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뒤, 시 속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난·기타>와 <청담>으로 가면서 산과 달 대신 집, 밥상, 가족, 생활비와 가장의 피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이 그의 중기시를 ‘가장으로서 흔들리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시기라고 보는 이유다.
아들 박동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교과서 속 서정시인과 꽤 달랐다.
다섯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강의를 다녔고, 양복은 안감이 닳을 만큼 오래 입었다. 어느 날 큰아들은 집 앞 전봇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 쉬고 있는 아버지를 봤다. 다음 날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박목월은 자식들이 제대로 자라는 것을 보는 일이 자신의 보람이라는 뜻으로 답했다.
아이들에게는 의외로 세심한 아버지였다.
자녀들이 기타를 연주해 보여주면 누구 하나 속상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100점을 줬다. 큰아들이 대학 진학을 고민하자 국문학을 권한 이유도 단순했다. 같은 분야를 공부하면 언젠가 아들과 책을 함께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생활이 그대로 시 안으로 들어왔다.
젊은 박목월이 자연을 압축된 이미지와 리듬으로 그렸다면, 중년 이후에는 ‘가정’, ‘밥상’, ‘어머니’ 같은 제목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후기에는 존재와 죽음, 기독교 신앙이 더 짙어졌고, 사후 출간된 <크고 부드러운 손>에는 종교시들이 모였다.
몇 년 전에는 우리가 알던 박목월의 모습이 더 넓어지는 일이 있었다.
장남 박동규의 집과 경주 동리목월문학관에 있던 노트 80권에서 미발표 시 290편이 발견된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만 있지 않았다. 가족과 어머니, 신앙, 해방과 한국전쟁,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한국전쟁 뒤 부모를 잃은 구두닦이 소년을 바라본 시도 있었다.
우리가 ‘나그네’와 ‘청노루’의 시인으로 기억해온 사람이 실제로는 전쟁 뒤 거리의 아이와 가족의 밥상, 늙어가는 자신과 죽음까지 오랫동안 노트에 적어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셈이다.
1970년대의 박목월은 한양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도 계속 시를 썼다. <사력질>과 <무순>에 이르면 젊은 날의 맑은 자연은 그대로 있되, 그 안에 시간과 존재, 끝을 의식하는 시선이 겹쳐진다.
1978년 박목월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박동규에게 오래 남은 장면 하나가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불을 끄고 잠든 밤이면 아버지는 밥상에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연필을 깎아 심을 세운 뒤 다시 글을 썼다고 한다.
젊은 날에는 산과 달을 바라보던 시인이었다. 말년의 박목월 앞에는 그 밥상과 잠든 가족들, 그리고 오래 생각해야 할 삶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잊지못할 8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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