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1. 주일예배설교
빌립보서 4장 11~19절
처함과 채움의 은혜
■ 인간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 소리쳐도 인간이 한계적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한계적 존재라는 것은 형편/상황에 휘둘리거나 영향을 받는데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때 이 사실을 기저에 놓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한계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이해함으로 서로의 이해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계’라는 것은 ‘약점’이기도 하고 ‘부족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점은 강점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고, 부족함은 채우기 위해 수고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행태와 태도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바람직한 행태지만,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 바울은 ‘신앙의 끝판 왕’이라 불러도 좋을 사람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은 참으로 귀감(龜鑑)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동역자 문제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결별한 일과 같은 것은 귀감으로 삼기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그럼에도 바울은 존경 받기에 충분한 믿음의 선배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사랑하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인 오늘 본문에서 한계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이 한계를 바람직하고 바르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마도 이 말씀은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암송할 정도로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본래의 뜻과 의도와는 달리 ‘긍정의 힘’의 말씀으로 오용/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기만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오용/남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이니 믿음을 구하고,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과 믿으면 다 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믿으면 다 된다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의미나 의도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13절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13절이 이러한 의미라는 것을 12절을 바르게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의 고백인즉, ‘어떠한 형편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좋은 경우만이 아니라, 나쁜 경우에도, 잘 된 경우만이 아니라, 잘 안된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 즉 믿음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것은 좋은 경우이고, 잘 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의 경우에도 처할 줄 아는 믿음을 배웠다고 하니, 이는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배우고 추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은 더 이상 ‘믿기만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오용/남용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처함의 은혜’로 이해해야 합니다.
■ 그렇습니다. ‘처함의 은혜’입니다. 잘 된 경우, 채워진 경우야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잘 안된 경우, 채워지지 않은 경우가 문제이고 어려움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처할 때 즐겁고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 웃는 표정을 지어도 그것은 웃는 게 아닙니다. 곱절의 슬픔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형편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전적으로 은혜가 아닐까요? 견뎌낼 수 없는데, 견뎌낸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 어떻습니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은혜입니다. 이것이 13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을 우리는 ‘처함의 은혜’라 부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처함의 은혜’는 ‘채움의 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떠한 형편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마음, 믿음의 행위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채움의 은혜’요, 하늘의 입맞춤입니다.
사실 자족(自足)이라는 말이 쉬운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말이자 고통스러운 말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기 전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상태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족을 감당케 하시는 하늘의 입맞춤인 ‘채움의 은혜’가 임하시니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자족의 삶, 어떤 형편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가능한 것은 플러스 알파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플러스 알파? 무엇일까요?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11~13절을 고백하며 앞뒤로 빌립보 교우들이 그간 보여준 태도에 대해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감사의 내용인즉, 바울 자신의 필요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한 것입니다. 14~16절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형편을 견뎌낼 수 있는 데는 하늘의 입맞춤인 채움의 은혜로도 가능하지만,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은 은혜의 플러스 알파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시적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진 인간은 가시적인 것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를 아시는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는 플러스 알파로 선물하신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하나님이 부어주신 자족의 마음으로 이미 채움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만,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이 풍성의 은혜를 더하게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플러스 알파’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명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덤이 주는 기쁨과 위로가 적지 않은 은혜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시장에서 덤이라며 기분 좋게 얹어주는 가게에 마음이 끌려 단골이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 위에 얹는 덤이지만 이것이 주는 기쁨과 위로는 상당합니다. 그러니 많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 이렇게 ‘처함의 은혜’와 ‘채움의 은혜’를 통해 사는 바울은 참으로 평화롭고 여유롭습니다. 물론 이 태도가 “웬 자존심? 웬 건방짐?”이라고 오해할만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16~18절을 연결해서 읽어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가진 것도 없으면서, 굉장히 당당하지요? ㅎㅎ~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물질적 후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니 듣기에 따라 건방져 보일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해입니다. 바울은 채움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이미 감사함을 표한 것입니다.
17절과 19절에서 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17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 바울은 자신을 사랑으로 섬겨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들의 삶에 필요한 것을 풍성히 채워 주십사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 기도의 행위는 처함과 채움의 은혜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보이는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인 것입니다.
■ 인생에서 당당하지 못한 경우 중 하나가 물질적 어려움에 놓였을 경우입니다. 형편이 어려우면 당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끄러워하기조차 합니다. 그래서 삶과 관계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지만, 신앙인의 모습으로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인 우리가 이 형편이라는 산을 넘어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조처하시는 것이 처함과 채움의 은혜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처함과 채움의 은혜를 한 번 입었다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입어야 매일의 형편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만함이 지속될 수 있는 영적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말씀 묵상’과 ‘깊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찬양 듣기/하기’입니다. 이러한 경건을 돕는 영적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은혜 충만함은 유지되고 보수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11~13절의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