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저의 <반야심경> 번역 해설작업의 일부를 올립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뜻이고,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완성’이란 뜻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深般若波羅蜜多)”는 ‘지혜의 완성’이란 뜻이다.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는 “행심반야바라밀다행(行深般若波羅蜜多行)”으로 바로 잡아서 번역해야 한다
그런데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는 정확하게 한역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한역하면, ‘행심반야바라밀다행(行深般若波羅蜜多行)’으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원문 “감비람gambhīrām(深심,깊은) 쁘라야prajñā(般若반야,지혜)-빠라미따pāramitā(波羅蜜多바라밀다,완성)-짜리얌caryām(行행,수행) 짜라마나caramāṇa(行행,닦고 있는 중)”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총8개의 <반야심경> 한역본 중 지혜륜(智慧輪) 번역과 반야와 이언 등의 번역, 이 두 개만이 이 부분을 “행심심반야바라밀다행(行甚深般若波羅蜜多行)”으로 번역하여, 옳게 번역해 놓았다. 나머지 6개의 한역본은 번역하면서 ‘수행’의 의미인 “行(행)”자를 빼버리고 번역해 놓았다. 그럼 왜 이와 같이 ‘수행’의 의미인 “行(행)”자를 빼버렸을까? 그것은 번역자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을 싫어해서 수행의 경전인 <반야심경>을 신앙, 주문(呪文)의 경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行(행)”자를 빼버렸다고 볼 수 있다. “행심반야바라밀다행(行深般若波羅蜜多行)”은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은 관찰삼매에 들어 존재의 다섯 요소[오온]를 관찰해가는 것이다.
“바라밀다(波羅蜜多)”를 ‘건너갔다’는 뜻으로 해석해 놓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를 번역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 원음을 그대로 사용한 까닭은 번역자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이라는 뜻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波羅蜜多(바라밀다)”, 즉 “빠라미따(pāramitā)”의 뜻을 의미단위로 나누어 분석해보면, ‘최고(最高)’라는 뜻의 ‘빠라미(pārami)’에 과거분사형 어미 ‘따(tā)’가 붙어서 ‘최고 상태를 이룬’, ‘완성’ 등의 뜻이 된다. 그러나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저 언덕’이라는 뜻의 ‘彼岸(피안)’, ‘저 언덕에 도달했다’는 뜻인 ‘到彼岸(도피안)’, ‘건너갔다’는 뜻인 ‘度(도)’, ‘무한(無限)·무극(無極)에 건너갔다’는 뜻인 ‘度無極(도무극)’ 등으로 한역(漢譯)돼 있다. 이런 여러 한역 중 ‘완성’이라는 뜻은 없다. 중국에서 불경을 번역하면서 “빠라미따(pāramitā)”를 ‘완성’으로 번역한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태껏 “반야바라밀다”를 ‘지혜로 저 언덕 너머로 건너가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현장(玄奘)이 산스크리트어 <반야심경>의 단어 뜻을 그 밑에 한자로 표기해 놓은 <범한(梵漢)대조 반야심경>을 보면, 현장은 “반야바라밀다”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쁘라야 빠라미따(prajñā-pāramitā)”를 “pra般반jñā若야-pā波바ra羅라mi蜜밀tā多다”로 표기해 놓아, 그 뜻을 중국말로 번역하지 않고, 인도말의 음을 한자로 표기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실력으로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를 ‘지혜완성(智慧完成)’으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번역하지 않고 이렇게 해 놓았을까? 그것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이라는 뜻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보다 신앙을 더 중시하고, 부처님 법을 ‘소승법’이라고 부르며, 폄훼해온 불순대승불교주의자들은 이 부분에서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이 모습을 드러내고 밖으로 나올까봐 염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총8명의 <반야심경> 한역가(漢譯家) 중 무려 6명이 “행심반야바라밀다행(行深般若波羅蜜多行)”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수행’의 의미인 “행(行)”자를 빼버리고,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로 번역해 놓았다. 또 8개의 <반야심경> 한역본 중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를 중국말로 번역해 놓은 것은 하나도 없다.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지혜완성(智慧完成)’이다. 석가부처님 불교를 “소승법”이라는 말로 내리쳐버린 중국불교에는 지혜를 완성해가는 개념이 없을 뿐더러 지혜의 개념조차 없다. 중국 역경가(譯經家)들은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야심경>을 주문(呪文)의 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매일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반야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을 알지 못 하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중국인들이 석가부처님 법을 얼마나 경시하고, 멀리했는지는 <아함경>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육성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아함경>은 AD. 340년대에 한문으로 번역이 완료돼 있었다. 하지만, <아함경>은 중국불교 역사상 출간되어, 유통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지혜를 완성하여,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진리를 깨닫는 석가부처님 법과 거리가 먼 불교였다.
현장(玄奘)의 <범한(梵漢)대조 반야심경>을 보면, 현장은 “prajñā(쁘라야)·지혜, pāramitā(빠라미따)·완성”를 ‘지혜완성(智慧完成)’으로 번역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 음을 한자로 표기하여,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표기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 <범한(梵漢)대조 반야심경>을 보면, 거기에는 “prajñā(쁘라야)·智慧(지혜), pāramitā(빠라미따)·到彼岸(도피안)”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바라밀다(pāramitā)”를 ‘到彼岸(도피안)’으로 번역해 놓았다. “바라밀다(pāramitā)”를 ‘彼岸(피안)’, ‘到彼岸(도피안)’, ‘度(도)’ 등으로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인데, ‘지혜로 피안에 도달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마치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건너간 것처럼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깊은 지혜의 완성은 관찰수행을 통해 지혜가 극도로 밝아져서 존재의 다섯 요소[오온]는 다 실체가 없는 것들임을 꿰뚫어보게 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그럼 중국의 불경 번역가들은 왜 “바라밀다(pāramitā)”를 ‘완성’으로 번역하지 않고, ‘도피안(到彼岸)’ 등으로 번역했을까?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이라는 뜻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추측이 빗나간 것이라면, 중국의 중하근기(中下根機) 중생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중하근기 중생들은 더 많은 복(福)을 받기를 원하고, 영생(永生)을 얻기를 원하지, 깊은 지혜가 완성되어, 자신이 소멸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 번역가들이 깊은 지혜로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서 거기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번역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브라만교(힌두교)에서는 깨달아서 해탈하고 나면, 피안의 세계에서 영생을 누리는 개념이 있지만, 석가부처님 법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하지만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람들은 마치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닦아가다가 ‘오온이 다 공(空)한 것들’임을 밝게 비추어 보면, 피안(彼岸), 즉 파라다이스가 펼쳐질 것처럼 번역해 놓았다. 수행의 중간 과정에 파라다이스에 도달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은 지혜가 완성되면, 도달할 피안이나 파라다이스도 없고, “나”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이 다 소멸되어, 空(공)이 돼버린다. 空(공), 즉 열반은 의식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다 해체(解體)되어, 다시는 다음 존재를 받지 않는 것이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브라만교(힌두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해 놓았다.
“우리는 이 육신을 입은 채 아트만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만약 그를 알지 못 하면, 큰 파멸이 있을 것이다. 그를 아는 자는 불멸(不滅)의 세계로 가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고통만 겪으리다.”
“만약 ‘내가 곧 아트만’이라는 진리를 깨닫는다면,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 때문에 육신의 고통을 겪겠는가?”
“아트만은 스스로 생겨났고, 유일한 힘의 존재이니, 그를 아는 자는 영생불멸(永生不滅)을 얻으리다.”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당시에는 인도불교는 브라만교의 아트만 개념을 수용하여, 유식(唯識)불교 이론이 팽배해 있었고, 석가부처님 법을 “소승법”이라는 말로 내리쳐버린 중국불교는 거의 브라만교가 되어 있었다. 석가부처님의 가르침보다는 브라만교에 더 가까웠던 역경가들은 <반야심경>을 번역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번역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피안에 도달하여, 영생(永生)을 누리겠다는 마음이 가장 큰 욕심이고,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영생을 얻어서 피안(彼岸), 즉 파라다이스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하는 욕심 때문에 중생들은 더욱 괴롭다. 영멸(永滅), 즉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하여, 영원히 소멸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참다운 발심(發心)이다.
필자는 “행심반야바라밀다행시(行深般若波羅蜜多行時)”를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있을 때’라고 번역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번역이 나왔는지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통해 알아보자.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통해 본 “행심반야바라밀다행시(行深般若波羅蜜多行時)”의 뜻 확인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있을 때’는 산스크리트어 원문 “감비람gambhīrām[深심,깊은] 쁘라야prajñā[般若반야,지혜]-빠라미따pāramitā[波羅蜜多바라밀다,완성]-짜리얌caryām[行행,수행] 짜라마나caramāṇaḥ[行행,닦아갈 때]”를 번역한 것이다. “감비람gambhīrām[深심,깊은] 쁘라야prajñā[般若반야,지혜]-빠라미따pāramitā[波羅蜜多바라밀다,완성]-짜리얌caryām[行행,수행]”은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짜라마나caramāṇaḥ는 ‘닦는다’, ‘~에 전념한다’는 뜻의 동사 짜car의 진행형으로서 ‘~을 닦고 있는 중에’, ‘~에 전념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감비람gambhīrām[深심,깊은] 쁘라야prajñā[般若반야,지혜]-빠라미따pāramitā[波羅蜜多바라밀다,완성]-짜리얌caryām[行행,수행] 짜라마나caramāṇaḥ[行행,닦아갈 때]”는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있을 때’라는 뜻이다.
深般若波羅蜜多(심반야바라밀다) : 깊은 지혜의 완성
深般若波羅蜜多行(심반야바라밀다행) :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
行<深般若波羅蜜多行>時(행심반야바라밀다행시) : <깊은 지혜를 완성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있을 때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 : 오온은 다 실체가 없는 것들[空공]임을 꿰뚫어보고,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 이 글은 <위빠사나금정선원> 원장 관정(觀頂)의 글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귀한 분들께 카톡으로 전해주시기 바라고, 유튜브에 "관정 스님 반야심경 강의"를 쳐서 많이 시청, 구독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합장
첫댓글 바라밀다에 대한 매우 새롭고 신선한 해석입니다.
기복 종교를 뛰어넘어, 석가의 진정한 가르침을
일깨워주는 탁월한 번역입니다~
수행의 본질은 마음의 정화를 통한 지혜의 완성이라고 봅니다ㆍ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 마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하고 오염이 곧 고통임을직시해야 합니다ㆍ
삼독심에서 벗어난 밝은 마음이 지혜의 씨앗이 아닐까요ㆍ
밝은 지혜로 해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