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4월 27일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이 백악관에서 존슨 미 대통령과 베트남전에 대하여 대책을 논의하고 미 상,하원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북베트남의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도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호치민과 지압은 대프랑스 항쟁 시에도 열세한 병력, 화력, 장비를 가지고서도 끈질긴 공세로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하였고 디엔 비엔 푸에 병력을 집중하여 함락함으로써 프랑스의 전의를 꺾고 승리한 대담한 공세기질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디엔 비엔 푸 전투 같은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전면공세를 계획하려고 하였다.
북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 회의가 1967년 4월 중에 열렸다. 현재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군은 점점 패퇴하고 있고 남베트남인들도 점점 사이공 정부에 동조하여 가고, 티우-키 체제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다 미군은 계속 병력을 증원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대책이 토의되었다.
1968년도 구정에 총 공세를 실시함으로써 도시를 중심으로 민중봉기를 전국적으로 유발시켜 일거에 승리를 달성한다는 총공세-총궐기를 결행하자는 지압의 제안에 대하여 강, 온건파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지압은 미국과 남베트남의 정치적, 군사적 정세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가정에 입각하여 1968년 구정공세는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공세를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 미군 병력은 국내 반전여론, 병력 규모로 보아 현 투입 규모 이상으로 증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 존슨 미 대통령은 현재 주베트남 미군 사령부의 군사작전에 대하여 가하고 있는 라오스, 캄보디아의 성역 인정 등의 전략적 제한을 해제하지 않을 것이다.
• 미 국내에서 반전 무드가 확산되고 있어 1968년도 같은 미 대통령선거의 해에 북베트남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한다면 미국은 권투경기에서 코치가 타올을 던져 경기를 포기하듯이 베트남에서 타올을 던질 것이다.
• 남베트남군은 약체군대로서 싸우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저항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기습적인 강력한 공격으로 남베트남군은 와해될 것이다.
•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남베트남 국민들은 북베트남이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 전국에서 봉기하여 사이공 정권을 붕괴시킬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북베트남 노동당 남부위원회(COSVN, 남베트남군 3,4군단 전 지역과 2군단의 5개 성을 포함한 지역의 정치, 군사작전을 총 지휘하고 있는 북베트남 노동당 남부지부)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하고 있으면서 미군의 막강한 전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구엔 치 탄(Nguyen Chi Thanh)은 이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중론을 주장하였다.

구엔 치 탄(왼쪽)과 보 구엔 지압(오른쪽에서 두번쨰)
남베트남에서 미 지상군이 개입한 이후에는 미군의 전력을 무시한 무모한 강공을 계속함으로써 현재의 병력 손실은 북베트남의 인구 증가율을 상회하고 있다. 매년 17세가 되는 남자가 20만 명인데 이들을 모두 군대로만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손실이 보충 능력을 초과하게 될 것이다. 현재 호치민 통로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에로의 일방 통행로로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혁명전쟁의 초기 단계인 대중 동원 단계로 되돌아가 지구전을 전개하면서 우선 하늘에 미군 비행기부터 제거하는 노력 즉 협상으로 미군과 연합군부터 남베트남에서 철수시키는데 주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 베트남군 야전장교가 생포한 베트콩 포로를 심문하고 있다.
지압을 중심으로 하는 총공세 주장파들은 이에 맞서서 장거리 경주에서 거리가 멀어서 승리가 불가능하다면 거리를 단축시켜서라도 승리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거리를 단축시키는 계속적인 전면공세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베트남에서 탁월한 정치, 군사 이론가로 알려진 트룽 친(Truong Chinh)은 신중론을 옹호하고 대미전쟁은 단기결전으로는 승리할 수 없고, 장기 지구전을 전개하여야 한다는 그의 대미 지구전 논리를 주장하였다.

트룽 친
대미결전에서는 장기전으로 미국을 지치게 만들어 그들의 전의를 고갈시킬 수는 있어도 전장에서 막강한 그들의 전력과 대결하여 결전으로 승리할 수는 없으며 또한 어느 결전에서 승리하거나 몇 개의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오래 참고 견디어 나가는 편에 승리가 돌아갈 것이며 ‘시간’만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결정적 요소로서 새로운 전면공세는 승리할 수도 없으며 현재의 소모전도 지양하고 혁명전쟁 이론대로 적이 강하기 때문에 일단 회피하여 다시 대중을 동원하고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혁명전쟁의 초기단계로 되돌아가 지구전을 전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북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 회의는 1968년 구정공세 실시에 대한 결정만은 유보하고 “단기간 내에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하자는 원칙론적인 결의를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탄이나 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군사적 압력을 계속 강화하겠다는 강경론자들의 주장이 반영된 결의였다.
경주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필요로 하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손실은 엄청날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대프랑스 항쟁에서도 무모한 정면대결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시간을 단축하였던 것과 같이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호치민이나 지압은 결전을 시도하려고 결정은 하고 있었으나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잠시 유보한 것뿐이다. 프랑스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세계 최강의 미군과의 정면대결에서 입게 될 인명손실 따위는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성될 결과가 그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결의를 방해하던 자가 사라졌다. 1967년 6월 하순에 구엔 치 탄이 미군의 B-52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탄의 부관이 그의 유해를 프놈펜(캄보디아의 수도)를 거쳐 하노이로 운구하였다. 1967년 7월 7일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 준 후 호치민과 지압은 즉시 1968년 구정공세를 결행한다는 노동당 정치국 결의라는 절차를 밟은 후 공세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노이에 있는 구엔 치 탄의 묘소
첫댓글 드디어 테트 공세군요. 항상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베트남어 표기법에서, 표준적으로 제정된 건 없긴 하지만...
Nguyen은 응우엔, Tran은 쩐, Truong은 쯔엉 으로 발음이 난다고 합니다.
저시기쯤 되면 북베트남도 전쟁피해가 계속 누적되어 있을텐데, 만일 테트공세직후에 북베트남이 기진맥진한 틈을 타서 남베트남이 북진을 했으면, 역으로 북베트남이 먼저 무너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실제로 테트 공세에서 북베트남이 입은 손해는 크지 않았습니다. 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이었죠. 남베트남이 패망한 이후에 베트콩 세력이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삼국지 소설에서 관도대전 당시의 전풍과 곽도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군요.... 근데 여기서는 결과가 반대로 되나요 ㅋ(하긴 남베트남과 미국이 조조는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들이 원소에 가까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