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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에 멈춰버린 인간 시계, 고문 사망자 김영철
증언자: 김순자(부인·45세·식당업) 김상윤(친구·49세·사업) 생년월일: 1948년생 사망일:1998년 8월16일 "상원이는 안죽었다. 내가 얼마전 만났는데 왜 죽었다는 소리를 하느냐.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차라리 잠잔다고 해라." 80년 5월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기획실장을 맞은 바 있는 김영철씨는 살아 생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총탄에 자신의 옆에서 쓰러져 사망했던 윤상원의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시민군 대변인역을 맡으며 광주항쟁을 주도해갔던 윤상원의 죽음 뿐만 아니라 `들불야학'의 멤버로 80년 5월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과 의형제 사이였던 박용준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눈앞에 안보일 뿐 그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죽는 날까지 굳게 믿었다.
물론 그 일차적인 원인은 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과 총을 들고 끝까지 맞서다가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에 들어간 뒤, 신군부의 명령을 받은 수사대가 자신을 내란 수괴 및 간첩으로 몰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하자 머리를 콘크리크 모서리에 부딪혀 자살을 기도한 데 있었다. 광주항쟁의 진실을 호도하고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그들의 의도대로 자신이 간첩으로 몰리게 되면 5월항쟁이 일반 국민들에게 왜곡되어 알려질 것을 우려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 때의 일로 그는 교도소 내에서 3개월만에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뇌에 이상이 온지 모른 채 처음엔 열병 환자 취급을 받다가 분리수용, 진통제 등을 맞다가 198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특사로 나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치료 시기를 놓친 탓인지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머리를 가족들이 교대로 지켜야 할 정도로 자신의 머리를 방안이나 화장실 벽을 가리지 않고 찧곤 했다. 걸핏하면 집 밖으로 뛰쳐나가 이웃들이나 파출소 직원들과 드잡이를 벌이곤 했다. 생전 남을 뒷전에서 험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그의 평소 행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80년 5월 당시 임신 팔개월 상태였던 그의 아내 김순자씨(46세)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생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그가 교도소에 끌려가 있는 동안 그의 몸과 정신에 이상이 온 줄 알고 병보석 신청과 진정서·탄원서 등을 관계요로에 보내는 석방운동에 나섰던 김씨는 과일과 빵장사, 포장마차와 우유배달, 공장노무자 등의 직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수사과정에서의 고문 등에 의해 몸의 왼쪽부분을 쓰지 못해 밥도 혼자서 먹지 못하고 나중에 대소변까지 가리지 못하게 된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서 였다.
하지만 광주 시내 대학병원은 물론 전주 예수병원 등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뇌파검사나 신경조직 검사를 시도했지만 한결같이 "이상이 없다"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다. 남편의 치료와 함께 가정살림을 이끌어 가야 했던 그의 아내는 그 와중에 두 차례의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 김씨의 피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4년 1월 급기야 국립 나주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죽기 몇 개월을 제외하고 살아있는 날들의 대다수를 나주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그는 1980년 5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투입된 공수부대에 의해 시민 학생들에 대한 무차별 구타와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하자 5월 18일 일단 주변 사람들과 관망하다가 5월 19일부터 `들불야학' 팀과 함께 본격적으로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먼저 그는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상을 알리기 위한 대자보와 투사회보 제작에 앞장섰다. 또 당시 광주 YWCA 여성 활동가들과 함께 검은 리본을 만들어 시민들의 가슴에 달아주기도 하고,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장례식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상황이 급박해진 5월 25일 재조직된 `시민 학생 투쟁위원회'의 조직 업무를 총괄하는 기획실장을 맡아, 탈취한 차량과 유류 통제, 당시 항쟁 본부였던 도청 출입 통제, 무기 및 보급품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며 항쟁의 지도부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그의 항쟁에의 참여는 이미 준비되어 왔을 수도 있다. 1948년 전남 순천에서 현 순천 도립병원의 전신인 안록산 병원의 의사였던 아버지와 수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의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던 그는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했던 관계로 천성적으로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웃들에게 형제애를 나타냈다. 또 광주의 명문 학교인 광주 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했음에도 경제사정으로 대학진학이 어려워 당시 5급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 승주군 별량면(현 순천시) 면사무소로 발령 받았으나 공무원들의 만연한 비리에 곧바로 그만두고 군대에 입대했던 것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정의감 역시 강했다.
이는 군 제대 후 신문배달과 청과물 장사, 목장잡부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도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애쓴 그의 행동에서 입증된다. 먼저 그는 1977년 광주 영신 영아원 원장인 서경자씨의 권유로 신협 지도자 과정을 수료한 후, 그 첫번째 사업으로 광천동 시민 아파트 개발운동에 나섰다. 또 직접 6×25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부랑민들을 위해 지어진 낡고 오래된 광주아파트로 이사, 아파트 개조사업을 통한 아파트 제값받기 운동 등을 전개했다. 아울러 당시 빈민촌으로 치부되던 광천동에서 '유진 청년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 개설, 어린이 능력개발훈련과 각종 놀이 지도, 그리고 동네 주민들을 위한 신협 창설 등 주민운동을 주도해 갔다.
엄밀히 말해 그러나 그때까지 생활개선 내지 의식개혁 차원의 주민 공동체 운동에 머물렀던 그가 정치적 각성과 사회적 자아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 광주 운동권을 주도해가던 김상윤과의 만남을 통해서 였다. 그는 친구인 김상윤을 통해 `들불야학'의 강학--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의미로 지어진 호칭--이었던 박관현·박효선·신영일·임낙평·전용호 등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 그리고 후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동지 사이로 발전했던 윤상원 등과 만나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 극복을 위한 실천운동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그가 교장으로 취임했던 `들불야학'은 그 매개고리였다. 그는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과 함께 전국 최초로 '사회조사반'을 구성, 광천동 공단과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조사에 나섰다. 노동자 각성과 도시빈민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기초작업의 하나였던 것이다. 또 일찍이 주민운동에 앞장서 지역민들의 신망이 높았던 관계로 들불야학 야학생 모집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처음에는 마을 청소와 자위대 구성 등 소박한 수준의 주민운동에 나섰던 그가 5·18을 맞아 `들불야학' 팀을 순발력 있게 결집, 광주항쟁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데는 단순히 의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의 의식 성장에 의한 준비된 행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5월 27일 이후 그의 삶은 살아있어도 거의 정지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도청을 함께 사수하다가 옆에서 쓰러져 죽은 윤상원의 죽음을 알고 자결하려고까지 했던 그가, 윤상원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에서 보여주듯, 그의 모든 사고는 1980년 5월 이후 한 발자욱도 진전하지 않았다. 80년 5월 이후의 온갖 좌절감과 새로운 형태의 탄압과 무관했던, 그러기에 훼손되기 이전의 5월 정신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을 법한 그의 모든 정신세계는 5월 직후에 멈춰버리거나 고착되어 있었다.
대신 그의 사랑스런 아내와 당시 어린애들이었던 1남2녀의 희생은 너무도 컸다. 먼저 생활비와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두번의 교통사고를 당해야 했던 그의 아내는 87년 저혈압으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또 코와 입으로 피가 넘어오고 극심한 영양실조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극도의 건강악화 상태에 빠진 적이 있다. 지금도 역시 조금만 신경을 써도 온몸이 붓고, 목이 막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체중이 급격히 줄고 허리가 아파 세수를 제대로 못하는 증세를 갖고 있다.
그의 자녀들 역시 성장기에 아버지의 정신이상과 부재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 울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 가운데 그의 큰 아들 동명군의 경우 초등학교 시절 학교 공부도 팽개친 채 한동안 데모군중과 함께 몰려다니면서 유인물을 뿌리는 등 과격한 반응을 보이기조차 했다. 제 아버지가 제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아버지의 결손은 더욱이 어린 그의 자녀들에겐 견디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친척의 소개로 1976년 결혼 만 3년4개월 동안 가난하나마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그의 아내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니었다.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과 이해의 부재였다. 특히 그의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할 무렵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이 컸다. 김대통령 자신 역시 어떤 식으로든 5월 관련자이고, 또 그의 남편 또한 전부는 아니나, 남편이 그렇게 된데는 김대통령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만큼 "한번만이도 병실을 찾아주었다면 그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냐"는 것이다. 아직도 다 끝나버린 역사적 사건처럼 치부되고 있는 광주항쟁의 희생자와 그의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웃과 사회의 따뜻한 애정이 절실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죽기 얼마 전 그는 그의 아내에게 "빗을 달라"고 했다. 그리곤 그의 아내 머리를 곱게 빗어주며 "이젠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라"고 했다고 한다. 보상금을 탔다고 하지만 은행 대출금 등 1억여 원이 넘는 빚만 남기고 간 자신을 위해 희생한,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남긴 무거운 짐들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아내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의식 이었다. 그리곤 시선을 1시간 이상 아내의 얼굴에 고정한 채 쳐다보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했던 북구 신안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