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이 겨울의 서원
무생지 서재량
‘나는 추운 겨울이 좋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가까운 이들은 웃는다.
언제부턴지 날씨가 조금만 쌀쌀해져도 옷을 겹겹이 입는 나는 차가운 기운이 대기에 가득한 겨울이 되면 옷을 입는다의 수준을 넘어 옷을 둘둘 휘감는다는 말이 적합하게 되어버렸다. 혹시나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그에 휩쓸릴 나의 온기를 염려해 휘두른 옷을 여미고 또 여미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나에게는 살갗을 에는 듯 쨍한 날이면 자신을 밖으로 내모는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그리움이 있어 그 기운을 따라 헤매며 즐기는 묘함이 있다.
괜한 바깥으로 향하는 궁금함 때문에 없던 약속을 갑자기 만들어 바람 찬 산기슭이나 강가를 헤매이다 얼어붙어 푸릇푸릇한 몸으로 돌아와 보면 오늘이 올겨울 최고의 추위였습니다란 말을 듣곤 한다.
의도된 방황이 아닌 이를 곰곰이 보면 추위를 무척 타면서도 그 가운데로 나가 그를 즐기듯 함께 하는 이 버릇은 분명 주변인들이 실소하듯 모순이다.
‘겨울은 추워서 싫어.’의 단순함이 아니라 ‘나는 추위를 무척 타지만 이 추운 겨울의 쨍함이 좋아’의 이중성은 단순치 못한 모순덩이인 나의 한 단면이다.
추위를 타면 겨울을 싫어하든지 아니면 추위에 강하든지, 잘살든지 아니면 관심이라도 없든지 이도저도 아닌 어설픔이 매사의 현실이 되어있는 나의 모습이다. 그런 어설픈 힘들이 모이고 뭉쳐져서 나의 차가운 냉기가 되는 것은 아닌지 유달리 올겨울은 추위에 눌려 몸을 웅크리고 또 웅크린다. 이 엉거주춤한 나의 삶의 자세를 보는 나는 그게 공연한 그리움만 키우고 있음을 안다.
동공화 된 검은 그리움, 이 웅크림의 果는 한점으로의 결집이 아니라 전체를 휘감고 도는 소용돌이가 된다. 전체가 빙빙 도는 늪이 된다.
걸치고 걸쳐도 감도는 냉기. 두겹 세겹 겹겹에도 이 겨울에 나는 추웠다.
내가 추운 것이다.
겨울로 추운 것이 아니라 존재가 추운 것이었다.
덕지덕지 밖의 따뜻함을 추구하던 나의 순행력이 나의 속뜰을 춥게 한 것 아닐까?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추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환경에 대경에 눌려 칩거하듯 달아날까 두려워하며 온기를 구하고 간직하던 나는 구하던 그 자리가 바로 냉기의 늪임을 大寒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남한강변에서 보았다.
내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이 자리, 여기가 바로 삶의 원천인 동시에 침몰하기도 하는 늪이기도 한 곳이라는 지극한 평범을 깊게 절감코 가슴 깊숙한 곳 나의 질화로를 본 곳은 강물을 감싸고 서있는 나옹큰스님의 다비장이었다는 신륵사의 그 바위언덕 위에서였다.
우연의 점도 계속이어지면 하나의 분명한 필연의 선이 되듯이 이런 날씨에 내 안에서 일어나 나를 밖으로 내모는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긴 그리움이 무엇인가를 조금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내 안의 냉기가 바깥의 툭 터질듯 쨍한 냉기를 찾아 방황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흔적 대신 세찬 겨울 강바람이 큰스님을 대신해서 매섭게 몰아치던 그날 내안의 냉기를 본 것이다.
나의 냉기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자로 돌아선 나의 自屈心이었다.
추위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내가 품어내고 있는 자굴심에서 비롯되었기에 감싸고 감싸도 추워만 지는 것이었다.
나의 넉넉한 따사로움은 다 내버려두고 대경인 날씨에 매달린 나의 옹졸함과 또 본연의 당당함은 다 내려놓고 좁고 좁은 자리로 몰고 가던 연속된 자굴심은 원래 평등한 안온함과 갖추어진 당당함으로 더불어 다 한자리에서의 나의 용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자리를 보고 구하고 있었다.
그는 이 한자리에서 順境도 逆境도 내가 그를 쓰는 주체자임을 항상 잊고 있음에서 비롯된 냉기였다. 그 매섭던 지금의 강바람이 데려간 나의 고려시대 나옹스님의 회상도 또 큰스님의 향훈을 느끼며 합장하고 있는 나를 휘감던 강바람도 그 자리는 다 한자리였다. 이 한자리에 시간도 공간도 그 안에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한 질화로의 온기로 나는 나의 어깨를 비로소 좌악 펼 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의 훈기와 온기로 지금도 여기 이 차가운 공간에서의 나를 녹인다.
둘이 아닌 한 자리에서의 나의 용심이 자존이기도 자굴이기도 한 것이다.
다 갖추어진 자리에서 너는 어느 길로 가고자 하는가 하시는 꾸중과 또 새로 만들어서 가는 길이 아니라 갖추어진 그 길로 나아가는 실천의 행동에 있는 길이라는 귀한 선사의 가르침을 바람 가운데서 찾았다.
그 동장군의 날 남한강가 신륵사에서 나의 냉기를 보는 귀한 만남이었다.
가득하신 불보살님께 지심으로 예경을 올립니다.
두루하시어 법설을 펴주시는 법보님께 지심으로 예경을 올립니다.
항상 두들겨 주시는 스승님께 예경을 지심으로 올립니다.
이 마음으로 훈훈해 하던 날들 가운데서 난 질화로가 아니라 활화산 같은 에너지로 온화함을 실천하신 보살님을 우연히 뵈올 수 있었다.
간접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보살님과의 만남은 그분의 말씀대로 축복이었다.
실천의 자애보살님이신 데레사수녀님과의 만남은 바로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Mother Teresa’의 관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분의 부동하고 불변한 믿음!!!
‘나는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몽당연필입니다. 이 연필을 쓰시는 분은 오직 그 분이십니다.’
머리와 가슴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귀의를 말해왔던가.
진정한 귀의는 오체투지의 예배로 예경으로 참으로 나를 가장 낮은 곳으로, 바닥으로 나의 모든 것을 던짐에서 비롯함을 의미한다고 안다. 바로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함이 우리의 진정한 귀의일진대 나는 어떠하였는가? 그분의 말씀과 실천행위의 합일되는 일치를 보면서 나는 나를 돌아보고 나를 돌아본다.
가장 낮은 곳의 사람,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 가운데 임하고 계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신의 임무를 말씀하실 때 나는 또 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믿는다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란 것을, 이 길은 새로이 만들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구족된 그 길로 한발 내딛는 자리에 바른 믿음이 있다는 실천적 삶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시었다 그분은.
그러기에 그분은 보살님이시다. 이 시대 우리 곁에 오셨다 가신 보살님이셨다.
당당함의 용기와 실천하는 힘은 이 믿음의 활화산에서 당겨쓰는 흐름임을 보여주신 그분 삶의 여정을 통해서 본다. 수행자의 삶은 정견도의 一刀兩斷의 실천에 있음이리라. 수행공덕의 바다를 그 분의 믿음을 통해서 느끼는 어리석음을 본다. 보인 어리석음이 희망이 된다.
나의 얼어붙은 냉기로 인해서 나는 이 겨울 에이는 강바람과 따뜻한 영화의 죽비가 전하는 경책으로 깊게 사무쳐야 할 나의 진귀의 처를 바로 돌아보고 발원한다.
지심으로 귀의 발원합니다.
上求菩提 下化衆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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