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청주] 행복하십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아가 2, 8 - 14
† 복음 : 루카 1, 39 - 45
★ 아가는 하느님을 연인으로 묘사하며, 그 연인이 자신의 창가에서
봄이 왔음을 알려 준다. 이는 주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제1독서).
★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간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에 사로잡혀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어려움이나 고통은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은 약한
모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고통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힘든 일이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고 할 때 외로움과 슬픔은 더욱 깊어집니다.
고통이나 슬픔, 병이나 약함은 혼자만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아닙니다. 고통이나 약함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를 풀이해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기대어 살고,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고독한 섬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존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유다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두
여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는 가운데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하면서 자신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여인은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촌 간의 우애로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두 여인은 유다 산골에서 서로 용기를 주며
구세사의 꿈을 키워 갔을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2012년 다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복음 : 루카 1,39-45
<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
순교복자 수녀회의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의 강의 테이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기억의 치유’라는 주제로 한 강연 중에서
‘태중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면 평생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로
몇 가지 사례를 들어주셨습니다.
한 번은 수녀님이 종신서원자 피정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한 평범한
수녀님이 갑자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수녀님과
상담을 하다가 그 수녀님의 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동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자신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흰 가루 같은 것들이 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루가 몸에 닿을 때는 매우 따가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 꿈이 무언지 모르고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가졌을 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엄마의 대답입니다.
“네 오빠를 낳고 몸이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복용했단다. 그런데
네가 들어서 있었단다. 엄마는 바로 아이가 또 들어설 줄은 몰랐단다.”
사실 이 수녀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무엇이 닿기만 해도 매우
통증을 느껴서 샤워를 할 때도 때수건으로 문지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결국 꿈속에서 본 동굴은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그 아이는
자신이었으며 그 하얀 가루는 바로 진통제였던 것입니다. 그 진통제가
피부를 약하게 만들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아주 작은 것,
이것은 골수까지 박혀서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원죄가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동료 수녀님 중 한 수녀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수녀님이 어머니와 대화를 할 때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얘, 내가 너를 가졌을 때 네가 남잔 줄 알았단다. 그래서 배내옷도
다 남자 것으로 준비했었지. 그런데 네가 나왔을 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니?”
이 때 그 수녀님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고 합니다.
“그 때 ‘네’가 할아버지보다 더 실망했잖아!”
어머니에게 ‘너’라고 자신도 모르게 불러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가족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려고 남자처럼 행동하며
받았던 스트레스와 상처들이 한 번에 폭발해 버렸던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지만 이런 작은 말 한 마디도 아이들에게는 평생 응어리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나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인데, 하느님께서는 왜 빵나무를
만들어 주지 않으셨을까?’
탈무드는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빵나무를 만들어 주시지 않은 이유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의 동반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완성품을 주시지 않으시고 재료를
주십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협조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창조하는데
협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태중상처나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관해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낳는 과정에서 부모의, 특히
어머니의 아주 작은 것도 자녀가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심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았다고 말합니다.
그 기뻐 뛰놀게 된 이유는 주님의 어머니의 인사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인사말을 듣는 것은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에게 좋은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그 태중의 아기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서 ‘태중의 아기’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번역하면 ‘태중의
열매(karpos)’입니다. 태중의 열매가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나무에 따라 열매가
결정됩니다. 사과나무에서 도토리가 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 태중의 아기가
성모님의 인사말 때문에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말이
엘리사벳을 빼고 아이가 혼자 듣고 뛰놀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어머니를 통해 열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먼저 성령으로 차야
그것이 아기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나무고 아기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정체성은 그 열매인 태중의 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맺은 열매는 하느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그 열매를 맺은
성모님도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분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흠도 티도 없는 세상의 모든 죄의 보속을
위한 희생제물이시라면 그 열매를 맺은 어머니도 흠도 티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복되시기에 아기도 복된 것이고, 어머니가
깨끗하기에 그 열매도 깨끗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열매 맺어지기에 합당한 흠도
티도 없는 나무는 성모님 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됩니다. 신자들을 보면
사제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행복하면 사제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제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나 성체가 그렇게 전달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맺는 열매를 제쳐놓고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저주받아 말라버린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은 나를 통해 맺어지는
열매들이 행복해지게 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법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병든 나무일 수는 없습니다.
열매가 나무에 달려있듯이, 또 열매로 나무를 알아볼 수 있듯이,
우리의 행복도 우리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행복하십니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행복하십니다
제18대 대선에서 64년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자는 국민대통합을 이루는 대통령,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국민행복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꼭
이루기를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마냥 행복할까요?
지금은 큰 행복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행복은 권력을 차지했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 누린다 해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되면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가슴 설레는 여행길
2012년 다해 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 루카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가슴 설레는 여행길>
반가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이 저녁에 잡혀있다면
오후부터 마음이 설렐 것입니다. 혹시나 늦지나 않을까 서둘러
길을 나설 것입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러 갈 때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왜 이리 길이 막히나, 왜 이리 시간이
더디 가는가, 하는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발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이 위대한 사건을 조금이라도 빨리 지혜롭고 경륜이 풍부한
사촌 엘리사벳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징표를 엘리사벳을 통해 확인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고, 그분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에
있어 게을러도 미적미적 마지못해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의 여행은 아직 앳된 청소년이었던 마리아에게
보통 어려운 여행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상황이었기에 사흘이나 되는 여행길을 홀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마리아였기에 용감히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 막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분의 뜻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리아였기에 기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윽고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한 마리아가 인사를 하니 그 인사말을
들은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 외침은 오늘날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수백 차례씩 암송하고
있는 성모송의 둘째 부분입니다.
성모송의 첫째 부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는
하느님의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외친 말입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대신한 엘리사벳이 놀라 경탄한 말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은 죄인인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교회가
첨가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렇게 성모송은 아주 짧고 간단한 기도문이지만 구약을 상징하는
엘리사벳이 신약을 상징하는 마리아와 연결되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기도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이 성모송 안에서 수렴되고 조화를 이룹니다.
마침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확신에 찬 믿음을 칭송하는 말로 환영의
인사를 마무리 짓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놀라운 하느님의 업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
우리 인간들의 의혹과 불신은 컸지만 마리아의 믿음은 찬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인간
측의 진심어린 동의와 기여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간 측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인간 측의 협력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라며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전인적(全人的)인 동의와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이제는 잘 듣기 위해 노력합시다.
툭하면 부부 싸움을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소한 것에서도
싸움을 하는 이 결혼 생활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평소부터 늘 존경했던 신부님을 찾아 도움을 청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신부님께서는 간단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내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게.”
그는 신부님의 이 충고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쉽지 않았지만, 아내의 사소한 말에도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글쎄 한 달 동안 부부 싸움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입니다.
그는 신부님을 찾아가 부부 싸움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기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조언 한 가지만 더
해달라는 부탁을 하지요.
“신부님, 어떻게 하면 신혼 시절처럼 우리가 서로를 신뢰하고 깊이
사랑했던 감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제는 아내가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게.
사랑이란 별 것 없네. 사랑이란 이해와 공감이 생기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일세.”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말하지 않는 것까지도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바로 이해와 공감을 가져오는 것이며,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크게 동감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더군다나 말하지
않는 것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스스로 우리들의 모든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셨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선택했던 성모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소식을 들으시지요. 어떻게
보면 꿈같은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천사의 말을 듣습니까?
그런데 평소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또한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집중하셨기 때문에 이 천사의 말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들으시기 위해 노력하셨고, 또 들으셨기에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보이듯이 엘리사벳
성인으로부터 찬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가장
복된 분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이웃의 말을 얼마나 잘 듣고 있었을까요? 잘 들리는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이제는 잘 듣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래야 서로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으며, 비로소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에
들어서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태엽은 단 한 번만 감긴다. 시곗바늘이 언제 멈출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은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이다(조지 켄들러).
이번에 군대가는 신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군대 잘 다녀와라~~
기도 응답
어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선거 때문에 기분이 아주 안
좋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기분
좋아지시라고 다음과 같은 유머 하나 던집니다.
한 시어머니가 자식이 없는 며느리를 데리고 성당에서 하는 기도회에
찾아 갔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당부를 했지요.
“아가! 신부님이 기도하실 때 너도 역시 무조건 ‘아멘, 아멘'
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된단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아기를 가질
거야.”
신부님의 기도가 계속 이어졌지만 며느리는 침묵만 할 뿐이었습니다.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아멘’이라는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으니까요.
이에 다급해진 시어머니가 며느리 대신 옆에서 연신 ’아멘,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네요. 글쎄, 몇 개월 뒤에
시어머니가 임신을 해버렸다고 합니다.
기도의 응답. 간절하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잘못된 응답도 생길
수 있으니, 정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부산] 두 여인의 만남
오늘 복음은 성령 안에 살아가는 두 여인의 만남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특히 엘리사벳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주님께서
굽어보시어”(루카 1,25) 느지막이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음을 안
엘리사벳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신하게 들어앉아 태교를 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여인의 태교는 곧 하느님께서 해주신
일들을 되새겨 보며 감사하고, 또 해주실 일들을 내다보며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하느님 뜻에 맞게 키우고자 준비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일 것입니다.
이런 여인한테 친척 아가씨 마리아가 찾아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맞이하며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1,42 참조) 찬가가
오늘 말씀의 중심이고, 그 뒷 구절은 우리 기도 삶에 뗄 수 없이
익숙해진 성모송 앞부분에 해당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하는 말들을 곰곰이 짚어보면 상대방을
‘복되다’고 칭송하는 말이 첫인사요 끝인사입니다. 곧 축복인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상대방이 주님께 선택받은 이요, 그 구체적인
축복이 구세주 잉태임을 알아봅니다. 나이 어린 친척 아가씨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높여 부르며, 찾아와 준 것을 송구하게 여기는
엘리사벳의 겸손한 태도도 돋보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기가 뛰놀았음을 알아차리며 이 귀한 만남을 기뻐합니다.
그녀의 환대는 다시 한 번 마리아를 칭송하는 말로 끝납니다. 첫
칭송이 하느님의 간택된 그릇의 ‘복됨’에 대해서였다면 마지막
칭송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도 복되고, 그에 대해 마리아가 보여준 믿음도
복되다는 커다란 찬송입니다.
우리 삶 안에는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그분 일에 참여하는
이들을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내 삶이 엘리사벳처럼 성령 안에
놓여 있을 때, 내가 만나는 이들이 하느님께 받은 고유한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고, 이를 함께 기뻐하며 힘을 북돋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크고 작게 스치는 만남들, 그 앞에서
나는 과연 어떤 말과 태도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지 오늘
엘리사벳한테 배우면 좋겠습니다.
- 이정훈 신부(서울대교구 청년 성서모임 지도신부) -
◈ [기타] 기뻐하고 환호하며
2012년 다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 39-45)
기뻐하고 환호하며(루카 1, 39-45)
믿는 이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놀라운 일들을 하시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이신 성령의 활동을 깨달아 환호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깨달은 영혼은 놀라워하며 하느님께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쁨을 아무에게나 말하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의 영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것을 나눕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놀라운 초대에 ‘예’ 라고 응답을 드리고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갑니다. 그분의 발걸음은 사뿐사뿐
기쁨의 발걸음이요 희망의 발걸음이요 놀라움과 경탄의 발걸음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즉시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마냥
기뻐하고 환호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고 말하며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적은 마리아에게 겸손하게 환대합니다.
누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경탄해하고, 또 겸손한
모습으로 임하게 될 때, 시기나 질투나 교만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때를 알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로
알아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합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누구에게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하느님의 권능에 개방되어 나갈 때, 우리 안에서
인도하시고 일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내 안에서 충만한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주님의 탄생의 기쁨을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