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도의병대 홈페이지를 비롯하여 여러 이른바 독도관련단체에서
최근의 독도의용수비대 논란을 둘러싸고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사무처장 및 독도수호대 대표를 맡고 있는 김점구 대표에 대한 최소한의
절차 혹은 사실관계마저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을 재현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자료를 배포하기에 앞서, 혹은 배포된 자료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혹은 다른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최소한의 사실관계 확인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몇년을 함께 몸담아왔던 관계자들이기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도 없이 이러한 논란들이 확장되고 있다는데
더할 수 없는 회의감과 함께 무차별 배포하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인은 1998년 이후 천리안 통신모임으로 조직되었던 천리안 독도사랑
동호회를 조직하는데 혹은 회장으로서 동호회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2000년 3월 부터는 김제의(2001년 5월 교통사고로 사망) 회원과
함께 독도수호대를 창립하는데 집행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
으며, 독도수호대 창립과정에서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중이
던 김점구 현 대표에게 독도수호대 참여를 권유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2000년 겨울까지 독도수호대 상근간부로서 활동하다가, 2001년 부터는
당시 대학원에서 해양관련 석사과정중이라 상근직을 접고 다시 학교 및
연구소로 복귀하였으며, 2002년 이후 현재까지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면서
독도수호대 운영위원으로서 활동중에 있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진실규명과 관련하여서도 그 내용을 매우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한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한 독도의용수비대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들은 2002년 독도수호대 사료조사위원회로 부터 였습니다.
지금 현재 알려져 있는 거의 모든 독도의용수비대 관련자료가 홍순칠 대장
의 수기를 기반으로 한 1953년 4월 부터 3년 8개월 동안 활동한 30여명의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독도의용
수비대와 국제법'를 저술한 김명기 교수님, 나홍주 박사님 등 여러
관계자의 저술에서도 그러한 내용을 쉽게 볼수 있으며, 울릉군 등 정부기관
홈페이지에도 그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저 또한 1988년 천리안 독도사랑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제가 직접 제작하였
으며 여러 단체에서 수없이 인용한 동호회 홈페이지를 통해 그런 사실을
전파하여 왔으며, 그 과정에서 직접 홍순칠 대장님의 부인이신 박영희
사모님의 자택을 찾아 직접 찾기도 하였으며, 독도수호대 회원들과 함께
자주 경기도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위치한 홍순칠 대장님의 묘소도
참배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에 독립운동의 역사가 그 중심을 자리잡고 있듯이,
독도운동의 역사에 독도의용수비대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현실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도의용
수비대의 현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2003년 울릉도에 위치한 독도
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님께서 스스로 동지회 간판을 내리셨습니다.
정부의 주변의 무성의와 무관심에 항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0년이 지났지만 활동보고서조차 발간되지 않았습니다.
독도수호대에서는 2가지 목표를 잡았습니다. 1)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보고서 발간 2) 울릉도에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공원 건립이었습니다.
특히 기념공원건립 노력에 관해서는 아이디어 개발연구소 한송본 소장
님을 비롯하여 당시 관계자분들이 너무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울릉군의 비협조로 건립노력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활동보고서 발간을 위해 제가 위원장으로 있었던 독도수호대 사료조사
위원회(독도수호대 회원으로 구성)에서는 당시의 언론자료 및 한일왕복
외교문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홍순칠 대장의 수기 기록을 모아갔습
니다. 홍순칠 대장의 알려지지 않는 수기 '월간 학부모' 에 기고한 글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연세대 도서관을 직접 찾아가 복사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널리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사가 새롭게 규명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2002년). 즉 홍순칠 대장의
수기에 의해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역사가 1953년 4월 부터인데, 1953년
5월 혹은 6월에 일본관리가 직접 독도에 상륙되었다는 왕복외교문서
기록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때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주둔
했다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처럼 여러 공식적인 자료를 수기와 비교 분석한 결과,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 역사가 전면 재조정 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은 지금도 확신하며, 그 어떠한 관계전문가의 문제제기가 있더라도
명확한 자료로서 반증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한 내용에 대해서는 박영희 사모님 또한 동의하였습니다.
지난 2004년 독도의용수비대 50주년 기념식 자료집에서 그간의 연구
결과를 실었으며, 제가 직접 기념식 자리에서 발표하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활동보고서 발간을 위해 알려진 33인의
구체적 활동으로까지 연구는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생존대원들
로부터 증언담 녹취는 향후 일본과의 독도영유권 분쟁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에 더욱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었습니다. 각자의 역할에 대한 논란,
어떻게 33인이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제보, 훈장을 받게 된 내부얘기들,
아직도 그 접근은 진행중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원 진위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더욱 분명히 하자면,
이미 독도의용수비대 대원간에 진위논란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2002년 초기에 면담했을때 의용수비대 대원들이 증언을 하지 않았던
부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차츰 독도수호대의 진심이 알려지면서
하나하나 대원들이 증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2002년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사하면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부터
때로는 세상에 알리기 힘든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고민은 사실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저는 그 시점에서 회의를 할 때마다 저의 초심을 생각했습니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로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서 올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우리의 논리가 객관적이어야 한다 " 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당신의 저작에 저의 이름을 직접 올리셔서 저의 활동을 격려해
주셨던 때로는 저희 집으로 직접 울릉도 미역을 보내셔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마음을 보여주신 돌아가신 이종학 선생님 (초대 독도박물관 관장)의
유훈이시기도 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자료를 동분서주하면서 모으는 목적은 국제사법재판소
에서의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집된 이 자료를 증거
자료로 하여 세계 만방이 독도는 엄연한 한국의 땅임을 스스로 알게 하여,
일본에게 감히 무력에 의한 전쟁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종학)
지난 2007년 4월, 독도의용수비대 진실규명 논쟁에 있어서 오마이뉴스가
참으로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당시를 잘 알고 있는 전직 경찰관의 제보를 오마이뉴스가 특종인양
받아들이면서 그 기사가 세상에 나왔다고 봅니다.
미역채취 목적으로 갔다느니, 독도에 가보지도 않았다느니 하면서
매우 선정적인 기사로 한쪽의 일방주장만을 질러놓았습니다.
이때 독도수호대에서는 성명서로 오마이뉴스를 질타하였으며, 저는
당시 오마이뉴스에 장문의 반박문을 기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론
이 기사에 대해 다른 독도단체에서는 그리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봅니다. 독도수호대에서는 오마이뉴스에 대하여 독도의용수비대 명예
훼손을 이유로 고소를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2005년에 제정된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관련해서는 저는 법의 내
용이 1953년 부터 33인으로 구성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어, 당시 법을 추진
하였던 국회의원실에 직접 메일을 보내 법 문구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953년 부터 활동되었다는 내용이 그대로 실린다면,
50년 독도운동 역사가 너무도 부끄럽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원법은 현재까지도 잘못된 내용으로 버젓이 올라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난 50년 독도운동의 현실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주장은 있었지만, 어떻게 우리 선조들이 지켜왔는지
그 내용은 완전히 건너뛰어온, 그래서 현재만 있지 감히 과거는 없는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역사의 진실을 바로보기 위해 노력하면서, 혹은 독도
의용수비대 진위논란을 둘러싼 작금의 그야말로 비생산적인 행위들을
지켜보며 지난 50년 한국독도운동의 한계를 보는 듯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뿐입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목청껏 소리쳤을지 모르지만, 독도의용수비대의
그 역사적인 활동을 참으로 강조하여왔지만, 바로 그 옆에는 독도의용수
비대 대원이 스스로 간판을 내려야 했으며, 변변한 활동보고서 한장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 특히 한국 독도운동을 감히 책임지고 있다는 주체
분들은 더더욱 바꿔야 합니다. 민간 운동 주체들의 선택에 따라서 한국
독도운명이 바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1998년 이후 독도민간운동을 해오면서, 한국 정부의 자율적인 독도
정책은 감히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여론의 동향에 따라 급변하는
정부정책만이 존재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아마 적지 않는 분들이 동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오늘도 현장에서 이 현실을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한국독도운동 단체들의 주체분들께서는 이점을 다시금
상기하셔서 책임있는 역할들을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글을 정리하면서, 왜 독도의용수비대 진실규명 논란에 뛰어들었는지
지금도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독도의용수비대 명예회복의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울릉도에서 왜 지역주민들에게 대원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했는지 굳이 긴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또한
한일독도논쟁에 있어서 우리가 이길수 있는 자료를 객관적으로 훼손
없이 지키기 위한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거주
했다는 그 자체는 그리고 실제 일본인들이 독도 땅까지 밟고 가는
그러한 상황에서 대원들이 없었다면 독도의 역사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알려진 역사로 이어진다면 상대국 일본은 허술한 자료를
이유로 그 역사적 의미를 삭감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여번 넘게 올라가봤던 독도경비대 막사터. 바로 50년전의 서도 물골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 막사터였습니다. 그리고 더 50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바로 그자리가 러일전쟁때 일본해군 망루가 있던 자리입니다.
저는 독도의용수비대 역사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독도는 감히 일본영토였다고 생각합니다.
독도의용수비대를 바로세우는 길.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희생을
후손들이 지켜가는 길. 감히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2001년 교통사고 먼저 세상을 떠난 김제의님와 이미향
님의 명복을 빕니다. 편하게 제의라고 부르겠습니다. 1998년 처음으로
제의를 만났고 천리안 독도사랑동호회 회원으로서 참 오랫동안 함께
했습니다. 2000년 제가 독도수호대 상근일을 시작할때 서슴없이 따라와
주었습니다. 2001년 5월 제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참 저를 많이 미워
해했습니다. 힘들게 일하는 점구형, 병성형, 세견, 성광이 등을 두고 상근일을
먼저 접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의가 떠난지 6년. 때로은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서 독도를 바라보았
습니다. 지난달에 울릉도 갔을때 제의 일을 아주 잘아는 울릉군 문화
관광과 김철환 형님을 찾아갔습니다. 편의상 김점구 대표를 점구형으로
부르겠습니다.
"점구..장가 안보낼꺼니?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안가고 사무실
하염없이 지키고 있으니...점구가 그러더라..제의 때문에 이 일 못놓겠
다고. 그냥 사무실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제의 때문에 이 일 못놓겠다고"
김철환 형님께서 저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가 바로 점구형입니다.
함께 했던 민병성(독도수호대 운영위원)형, 저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점구형은 더 무게를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제의가 미향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때 점구형이 기사였기 때문입니다.
점구형 성격이 세상과 쉽게 타협할 줄 모르며, 관련 단체들과 자주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끔 웃으면서 넘어가자고 할때 점구형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압니다. 바로 제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년간 제의랑 함께 할때 바로 제의의 성격 그대로 입니다. 제의는 대신에
많이 웃기라고 했습니다. 회원관리도 담당이다 보니까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점구형은 잘 웃지조차
않습니다.
1998년 독도운동을 시작할때 내질렀던 구호들이 8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유효함이 슬픔니다. 일본은 진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진화하지 못함이
때로는 억울하기조차 합니다.
오늘 제의가 참 그립습니다. 오늘 이종학 관장님이 참 그립습니다.
2007. 7. 9
김윤배
천리안 독도사랑동호회 초대회장 역임 (1998-1999)
독도수호대 집행위원장 역임 (2000)
독도수호전국연대 공동의장 역임 (2000)
독도학회 이사 역임 (2000)
2000년 독도연감(발행 국회독도사랑모임) 편집인 역임 (2000)
독도의용수비대 50주년 기념식 준비위원 역임 (2004)
현 독도수호대 운영위원 (2003 - )
현 발해1300호기념사업회 사무국장(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