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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 충청도 : 동북쪽은 강원도와 경계요,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로 동남쪽은 경상ㆍ전라 양도의 경계로, 남쪽은 전라도와 경계로 서남쪽 및 서쪽ㆍ서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다. 54고을 좌도 21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옛 마한(馬韓)의 땅으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웅주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성종이 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를 두었는데, 예종이 관내도(關內道)에 합쳐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 다시 명종이 나누어 2도를 만들었고, 충숙왕이 다시 합쳐서 1도로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하였고, 공민왕이 충청도라고 불렀다. 신우가 평창군(平昌郡)을 나누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 을해년에 양광주(楊廣州)가 거느린 군현을 경기에 예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충청도라 일컬었다. 태조 무인년에 진위현을 나누어 경기도에 예속시켰고, 정종은 영월군을 나누어 강원도에 예속시켰으며, 강원도 영춘현(永春縣)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영흥(永興)ㆍ안성(安城)ㆍ음죽(陰竹)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를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상도의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충주 : 성(城)이 있다. 고구려 때의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며, 난장성(亂長省)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진흥왕이 소경(小京) 귀족 자제들과 6부(部)의 호민(豪民)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을 두었으며 뒤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고쳐서 충주라 하였고, 성종은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였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혁파하였다. ○ 대원(大原) 결(缺) 예(蘂)는 본래 고구려의 원성(原城)인데, 신라 때 병합하고 진흥왕이 소경을 두었고, 경덕왕이 중원(中原)이라 하였으며, 고려 때 충주라 고쳤다.
○ 청주 : 성이 있다.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니, 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우곡(娘于谷)이라 한다. 이라 한다. 신라 때 서경ㆍ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고려 태조가 청주라 고쳤다가 뒤에 전절군(全節軍)으로 삼았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 청주ㆍ낭성(琅城)이라고도 한다. ○ 2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리가 된다. ○ 청주는 속현이다. 옛날 살매현(薩買縣)이니, 또는 청천(淸川)이라고도 한다.
○ 청풍(淸風) : 고구려 때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이니, 신라 때 청풍이라 고쳤고, 현종 경자년에 군을 부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 단양 : 고구려 때 적산현(赤山縣)이니 적성(赤城)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단산(丹山)이라 고쳤다가 또 단양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천안 : 본래 동서(東西) 도솔(兜率)의 땅이니, 고려 태조가 병합하여 천안부를 만들었고, 성종이 환주(歡州)라고 고쳤는데 뒤에 영주(寧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영산군(寧山郡)이라 고쳤다가 조금 후에 천안으로 고쳤다. ○ 임환(任歡)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19리이다. 풍세(?歲)는 폐현이다. 백제 때 감매현(甘買縣)이니, 또는 제천(?川)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순치(馴稚)라 고쳤다.
○ 괴산 : 고구려 때의 잉근내군(仍斤內郡)이니, 신라 때 괴양(槐壤)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괴주(槐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 시안(始安)이라고도 한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옥천 : 신라 때 고시산군(古尸山郡)이니 뒤에 관성(管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옥주(沃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옥천군(沃川郡)으로 고쳤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 이산(利山)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이다. 안읍현(安邑縣) 신라 때의 아동혜군(阿東兮郡)이니 안정(安貞)이라 고쳤다. 양산현(陽山縣) 신라 때의 조차천현(助此川縣)이니, 고려 충선왕 때 3현을 나누어 여기에 예속시켰다.
○ 문의(文義) : 백제 때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니, 신라 때 연산(燕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문의현이라 고쳐서 가림(嘉林)과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복구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6리이다.
○ 제천 : 고구려 때의 내토군(奈吐郡)이니, 신라 때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제주(堤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제천현(堤川縣)으로 고쳤다. ○ 의천(義川)이라고도 한다. ○ 의원(義原)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0리이다.
○ 직산(稷山) : 본래는 위례성(慰禮城)이니 백제가 도읍을 세웠고,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이라 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직산으로 고쳤다. 태조 계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태종 신사년에 다시 강등시켰으며, 연산군 때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다가 중종 때 복원하였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3리이다. ○ 경양(慶陽)은 폐현이다. 고려 때 하양창(河陽倉)이다.
○ 회인(懷仁) : 백제 때의 미곡현(未谷縣)이니, 신라 때 매곡(昧谷)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회인이라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 연풍(延?) : 고구려 때의 상모현(上芼縣)이니, 고려 때에 장연(長延)이라 고쳤고, 태조 갑술년에 장풍현(長?縣)과 합쳤으며, 태종 계미년에 연풍으로 고쳤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 장풍(長?)은 폐현이다.
○ 음성(陰城) : 고구려 때의 잉홀현(仍忽縣)이니, 신라 때 음성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 잉근내(仍斤內)는 선조 임진년에 혁파했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두었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8리이다.
○ 청안(淸安) : 청당현(淸塘縣)이니 청연(淸淵)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도안(道安)과 겸하여 다스렸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 때 도서현(道西縣)이니 신라 때에는 도서(都西)로 고쳤다. 태종 을유년에 양현(兩縣)을 합쳐서 청안으로 고쳤다. ○ 청당(淸塘)이라고도 한다.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진천(鎭川) : 고구려 때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니, 만노(萬弩)라고도 하며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흑양(黑壤)으로 고쳤는데 또는 황양(黃壤)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강주(降州)라 일컬었다가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창의(彰義) 의령(義寧)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계사년에 진천현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는데 중종이 복원하였다.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 목천(木川) :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岳郡)이니 신라 때 대록(大麓)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목주(木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목천현이라 고쳤다. ○ 신정(新定)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 영춘(永春) : 고구려 때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신라 때 자춘(子春)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쳤으며, 정종 기묘년에 옮겨 예속시키고 현(縣)을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0리이다.
○ 보은(報恩) : 신라 때 삼년산군(三年山郡)을 삼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保齡)으로 고쳤으며, 태종 병술년에 보은현으로 고쳤다. 보령(保寧)과 음(音)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삼산(三山)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 영동(永同) : 신라 때 길동군(吉同郡)을 영동으로 고쳤고, 고려 때 계주(稽州)로 승격시켰다가 도로 폐하여 현으로 하였다. ○ 영산(永山)ㆍ계산(稽山)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0리이다.
○ 황간(黃澗) : 신라 때의 소라현(召羅縣)이니, 황간 신라 때 수영(水永)에 속해 있었다. 이라 고쳤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청산(靑山)과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 상태로 회복하였다. ○ 황계(黃溪)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0리이다.
○ 청산(靑山) : 신라 때의 굴산현(屈山縣) 삼년군(三年郡)에 속해 있었다. 이니, 돌산(?山)이라고도 하는데 기산(耆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 청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3리이다. ○ 주성(酒城)은 속현이다. 보은 북촌(北村)에 들어갔다가 땅이 작다 해서 분할하여 부속시켰다.
○ 우도 공주 : 백제 때의 웅천(熊川)이니, 문주왕(文周王)이 북쪽 한수(漢水)로부터 도읍을 이곳에 옮겼는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 신라 때 웅천주(熊川州)라 고쳤다가 또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공주로 고쳤다가 뒤에 안절군(安節軍)이라 일컬었다. ○ 회도(懷道)라고도 한다. ○ 2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유성(儒城)은 속현이다. 백제 때 노사지현(奴斯只縣)이다. 덕진(德津)은 폐현이고, 백제 때 소비포현(所比浦縣)이요, 신라 때의 적조(赤鳥)이다. 신풍(新?)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벌음지현(伐音只縣)이니, 또는 무부(武夫)라 했다. 신라 때 청음(淸音)으로 고쳤다.
○ 홍주(洪州) : 성(城)이 있다. 고려 때의 운주(運州)이니, 홍주라 고쳤다.
○ 안평(安平)ㆍ해풍(海?)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이라고 한다. ○ 2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신평(新平)은 속현이다. 면천(沔川)ㆍ동촌(東村)으로 들어갔으니, 백제 때 사평현(沙平縣)이다. 여양(驪陽)은 폐현이고 백제 때의 사시량현(沙尸良縣), 또는 사라(沙羅)라고도 하는데, 신라가 신량(新良)이라 고쳤다. 고구(高丘)도 폐현이며 백제 때의 우견현(牛見縣)이니,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쳤다. 흥양(興陽)도 폐현이고,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다. 합덕(合德)도 폐현이다. 본래는 덕풍현(德?縣)에 속하여 부곡이 되었다.
○ 임천(林川) : 백제 때의 가림군(加林郡)이니, 신라 때 가림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임주(林州)를 두었다. 태조 갑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신사년(1401, 태종 1)에 도로 강등시켰으며, 계미년에 또 다시 승격했다가 갑신년에 도로 강등시키고, 계사년에 임천(林川)으로 고쳤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9리이다.
○ 태안 : 백제 때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다. 신라 때 소태(蘇泰)로 고쳤고, 고려 때 태안군으로 고쳤다. ○ 전성(蓴城)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8리이다.
○ 한산(韓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산현(馬山縣)인데, 고려 때 한주(韓州)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사년에 한산군으로 고쳤다. ○ 마읍(馬邑)ㆍ아주(?州)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서천(舒川) : 백제 때의 설림군(舌林郡)이니, 남양(南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림(西林)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주(西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면천(沔川) : 백제 때의 혜군(?郡)이니, 신라 때 혜성(?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면주(沔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면천군으로 고쳤다. ○ 마산(馬山)ㆍ해종(海宗)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서산 : 백제 때의 기군(基郡)이니, 신라 때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산으로 고쳤으며, 서주(瑞州)로 승격시켰다가 서령부(瑞寧府)로 강등시켰었는데, 태종 계사년에 다시 서산군이 되었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8리이다. ○ 지곡(地谷)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지륙현(知六縣)이니, 신라 때 지육(地育)이라 고쳤다.
○ 온양 : 백제 때의 탕정군(湯井郡)이니, 신라 때 주로 승격시켰고 고려 초기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신창(新昌)과 합쳐서 온창(溫昌)이라 일컫다가 병신년에 그전 이름을 회복했고, 세종 임술년에 온양군으로 고쳤다. ○ 온천(溫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대흥(大興) :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이니 금주(今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대흥으로 고쳐서 현을 만들었다. 숙종 신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3리이다.
○ 홍산 : 백제 때의 대산현(大山縣)이니, 신라 때 한산(翰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홍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2리이다.
○ 덕산(德山) 덕풍현(德?縣) : 백제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신라 때 금무(今武)로 고쳤고, 고려 때 덕풍(德?)으로 고쳤다. 이산현(伊山縣)은 백제 때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伊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으로 만들었다.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이산의 인물(人物)이 쇠잔하다 하여 두 현을 합쳐서 덕산을 만들었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평택 : 고하팔현(古河八縣)이니, 고려 때 평택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이속시키더니 중종이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팽택(彭澤) 《여지승람》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은 선조 병신년에 혁파하였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3리이다.
○ 정산(定山) : 백제 때의 열기현(悅己縣)이니,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열성(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정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9리이다.
○ 청양 : 백제 때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청무(靑武)로 고쳤고, 고려 때 청양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은진(恩津) : 덕은군(德恩郡)이니, 백제 때의 덕근군(德近郡)이며, 신라 때 덕은(德殷)으로 고쳤고, 고려 때 덕은(德恩)으로 고쳤다. 시진현(市津縣)은 백제 때 가지내현(加知奈縣)이니, 또는 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하고, 또는 신포(薪浦)라고도 한다. 신라 때 시진(市津)으로 고쳤는데, 고려 때 모두 공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정축년에 두 현을 합해서 덕은으로 하였다. 세종이 은진으로 고쳤더니, 인조 병술년에 이성(尼城)ㆍ연산을 합쳐서 은산(恩山)을 만들었고, 효종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전 이름을 회복했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 회덕 : 백제 때의 우술군(雨述郡)이니, 오천(汚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풍(比?)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회덕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1리이다.
○ 진잠(鎭岑) : 백제 때의 진현현(眞峴縣)이니 정현(貞峴)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진령(鎭嶺)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진잠으로 고쳤다. ○ 기성(杞城)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1리이다.
○ 연산 : 백제 때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니, 신라 때 황산(黃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연산현으로 고쳤다.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리이다.
○ 이성(尼城) : 백제 때의 열야산군(熱也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尼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석성(石城)과 합쳐서 이산성이라 일컫다가 다시 나누었다. ○ 노산(魯山)ㆍ노성(魯城)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이다.
○ 부여 : 백제 때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이니, 사비(泗?)라고도 한다. 성왕(聖王)이 이곳에 와서 도읍하고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는데, 신라 때 부여군으로 고쳤다. ○ 반월(半月)ㆍ여주(餘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 석성(石城) : 백제 때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니, 신라 때 석산(石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석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이산(尼山)과 합쳐서 이성(尼城)을 만들었더니, 얼마 후에 고다진(古多津)이 왕래하는 요충지라 해서 다시 나누어서 현을 만들었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비인(庇仁)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비중현(比衆縣)이니, 신라 때 비인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3리이다.
○ 남포(藍浦)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사포현(寺浦縣)이니, 신라 때 남포로 고쳤고 공양왕이 진(鎭)을 두었는데, 세조가 진을 없애고 현을 두었다. ○ 마산(馬山)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결성(結城)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결기현(結己縣)이니,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또 결성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 보령(保寧)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신촌현(新村縣)이니, 사촌(沙村)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신읍(新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으로 고쳤으며, 효종 임진년(1652 효종 3)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을미년에 도로 강등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3리이다.
○ 해미(海美) : 정해현(貞海縣)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 때, 몽웅역(夢熊驛) 역리(驛吏) 한씨 성을 가진 자가 큰 공이 있어서 대광(大匡)이라고 공호를 하사하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나누어 정해현(貞海縣)을 만들었다.” 하였다. ㆍ여미현(餘美縣)은 백제 때의 여촌현(餘村縣)이니, 신라 때 여읍(餘邑)으로 고쳤다. 태종 정해년에 두 현을 합쳐서 해미를 만들었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3리이다. ○ 여미고현(餘美古縣)이라고도 한다.
○ 당진 : 백제 때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니, 부지나(夫只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당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신창(新昌) : 백제 때의 굴직현(屈直縣)이니, 신라 때 기량(祈梁)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신창으로 고쳤으며, 공양왕이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 이웃 주ㆍ현의 조세를 거두어 비로소 만호(萬戶) 겸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 무신년에 만호를 없앴다. ○ 온창(溫昌)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예산 : 백제 때의 오산현(烏山縣)이니, 신라 때 고산(孤山)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예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63리이다.
○ 전의(全義) : 백제 때의 구지현(仇知縣)이니, 신라 때 금지(金池) 혹은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로 고쳤고, 고려 때 전의(全義)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현을 두었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연기와 합쳐서 이름을 전기(全岐)라 하였다가 병신년에 이전 이름으로 회복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연기(燕岐) : 백제 때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니, 신라 때 연기로 고쳤고, 고려 때 목주(木州)를 여기에 합쳤다. 태종 병술년(1406, 태종 6)에 다시 나누었으며, 갑오년(1414)에 전의(全義)와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대로 하였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아산 : 백제 때의 아술현(牙述縣)이니, 신라 때 음봉(陰峯)으로 고쳤는데, 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ㆍ아주(牙州)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아산현(牙山縣)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 5)에 군(郡)을 줄여서 온양(溫陽)ㆍ평택(平澤)ㆍ신창(新昌) 세 읍(邑)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을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영인(寧仁)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譯: 민족문화추진회. 원문의 내용이 길어 편의상 글을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