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와서 왜(?) 지난 1988년 6.6일, 82세의 연세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이 부쩍 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생전에 1년에 한,두번 가족예배를 드릴 때 항상 이렇게 기도함으로 나를 참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 하나님 아버지,제가 죽기전에 아들에게 빚진 돈을 반드시 갚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형님네들은 의아하고 궁금스런 표정으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목숨걸고 바다에서 번 돈 전부를 한동안 맡았다가 다 갚지못한 미안함을 그렇게 표시하셨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77년 결혼할 때,부산에서 합가를 해서 우리들을 데리고 함께 사시고 싶은 마음을 가지셨다.
그러나 형님들이 세분이나 있는데 왜(?) 내가 모셔야 하는냐는 강한 반발로 속내를 끝까지 숨기고만 계셨다.
그 대신에 사시던 3층집을 팔아서 나의 돈이 일부 포함된 전재산을 가지고 서울에 있는 형님댁에 가셨다.
그런데 10년후에 후한 이자를 붙여서 돌려 받은 그 돈으로 사업상의 큰 위기를 벗어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마 내가 처음부터 그 돈을 가지고 시작했다면 경험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사업이 재귀불능한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매출은 많이 올렸지만 관리능력의 미숙으로 항상 고전하던 자금의 가뭄상태를 일시에 거두어간 단비로 나타났다.
동경주재원으로 떠난 K선배의 호의로 부모님과 함께 살게된 언덕위의 하얀 이층양옥집은 많은 행운을 불러왔다.
그러나 아버지가 80평의 저택에서 손자,손녀에게 그지없는 사랑을 베풀고 행복하게 사신 것은 겨우 2년 남짓이다.
82세가 되시도록 복덕방을 하시며 돈을 버셨던 아버지는 마지막 선물로 아파트를 사주시고 6개월뒤에 돌아가셨다.
88년,부동산시세가 바닥일 때 1900만원에 사둔 아파트가 1년만에 5000만원으로 폭등하는 기적을 희귀하게 경험했다.
25평아파트로 이사가면 누으실 방이 없음을 염려한 아버지의 아픈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듯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그때 아버지가 처한 입장을 비슷하게 당할 우리는 "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다 "는 말로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도움없이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자식들의 공부도 마쳤는데 아직 남은 과제가 있다는 것이 당혹스럽다.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가정을 이루지 못한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우리보다 국민학교만을 졸업한 아버지가 우리에게 하신일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우리 아버지는 대구 S교회 안수집사로 있을 때 고추집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강직하고 불같은 성정을 가진 분이다.
불의를 참고 보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격으로 솔직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만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은 부족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식자랑이 심하다고 어머니에게 늘 타박을 많이 들으시면서도 우리 형제들을 끔찍히 사랑하셨다
현숙하고 조용한 성품의 어머니를 일방적으로 편든 아들들에게 느꼈을 아버지의 서운한 감정을 지금은 알 것같다.
아버지는 무지하고 완고한 할아버지의 꾸지람과 학대속에도 강한 학구열과 의지로 소학교를 졸업하신 분이다.
일제시대때 어린 나이에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 공무원이 되고 영주에서 안동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다고 한다.
해방전 대구 원대동에서 근무하실 때 우리나라 부자의 대명사인 L씨에게 큰 덕을 입힌 적이 있음을 자랑하시곤 했다.
형이 R.O.T.C제대후,J모직에 입사할 때 서울에 가서 직접 L 회장님을 만나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우리는 혼이 났다.
할아버지의 매와 욕설을 감수하시면서 이웃집의 불들이 다 꺼지기까지 호롱불을 켜고 공부하시던 우리 아버지.
6남 2녀를 키우면서 당신은 먹고 싶은 것,하고 싶은 것들 다 참으시고 우리 맛있는 것들만 애써 먹이시던 아버지.
그 많은 자식들 중에서 44살에 얻은 막내아들을 제일 사랑하시어 항상 웃는 얼굴로 지긋이 지켜 보시던 우리 아버지.
4시 새벽기도 예배시간 마다 자식들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시던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우리는 자라왔다.
아버지는 유독 생선을 먹을 때는 대가리를,닭 한마리를 잡으면 먹을 것없는 울대와 고깃살이 빈약한 계륵을 드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 생선대가리를 먹어야 우두머리가 되고, 울대를 먹으면 목청이 좋아진다 "고 하셨다.
새벽마다 냉수마찰을 하실 정도로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의 눈에 띄었다.
중앙동에 있는 형님의 약국을 겨우 찾게 된 아버지가 " 여기가 오진용약국입니까? "물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미 그 때부터 경미한 뇌경색의 증세가 왔음에도 아버지는 우리에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보훈병원에 막내며느리와 함꼐 가서 마지막 진단을 받고 오신 후에 병원에 가시기를 거부하고 방에 들어누으셨다.
깍두기 김치를 으적으적 씹어잡수시며 맛있게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말문을 닫고 곡기를 끊으셨다.
신경통이나 두통등으로 잔병이 심하시던 어머니는 워낙 건강하신 아버지가 오래 사실 것을 항상 염려하셨다.
" 당신이 먼저 가야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지요. 아무 걱정말고 퍼뜩 가소 " 매정하고 야박하게 정을 끊으셨다.
이런 어머니를 서운하게 생각하셨는지 아버지는 소액이 예금되어 있던 통장을 막내며느리에게 주고 가셨다.
마지막 2년을 우리와 함께 보내면서 마음껏 베풀고 가신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며온다.
무엇보다도 조부,모의 깊은 사랑과 보살핌의 덕분으로 잘 커온 딸과 아들의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지공세대를 눈앞에 둔 우리가 그때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볼 아이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한번 상상해 본다.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달려갈 미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이루어나갈 일들을 기대해 본다.
가끔 아버지만한 자식은 없다고 불평을 하다가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면 민망스러워진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만큼 하지 못하고, 되지 못하는 만큼 아마 그들의 아이들도 자기들만큼 마음에 차지않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 육신의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보고싶을 때, 그 대신 부르면서 찾는 이름이 있다.
하늘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시고,능력이 광대하시고,무소부재하시고,영원하시며,사랑과 자비가 한없이 충만하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 하옵시고,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옵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대개 주의 나라,주의 권세,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이다.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할 때,괜히 내일의 일들이 걱정이 되고 절망의 어두운 구름이 몰려들듯이 두려움이 닥칠 때,
아버지,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부르면, 마음이 평온해 지고 든든해지고 힘과 용기가 생겨난다.
어차피 인생은 하늘나라로 가는 순례자의 여정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하늘의 아버지의 앞에서 육신의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또 소망한다.
http://cafe.daum.net/60.30 60년을 나누며 30년을 준비하자
첫댓글 곧 어버이날이 옵니다. 저역시 아버지가 많이 그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