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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찰 소 식 스크랩 남양 혜충국사[南陽 慧忠國師] 반야심경주[般若心經註]
송림(김선중) 추천 0 조회 21 12.12.10 06:1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남양 혜충국사[南陽 慧忠國師]

반야심경주[般若心經註]



남양 혜충국사[南陽 慧忠國師, ?~775]

 당나라 때 스님으로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 제기현諸?縣 출신이며 속성은 염?씨이다. 어려서 육조六祖 혜능조사惠能祖師를 따라 배우고 그의 법을 이었다.

육조가 입멸한 후에 여러 산에 두루 머물렀는데, 오령五領 나부산羅浮山, 사명四明 천목산天目山을 거쳐서 남양南陽의 백애산白崖山 당자곡黨子谷에 들어가 40년을 산문 밖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상원上元 2년(761년)숙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칙을 내려 서울로 불러 스승의 예로 맞이하였다. 현종玄宗, 숙종肅宗, 대종代宗의 두터운 귀의를 받았으나 항상 담박한 본성 그대로 천진 자연을 즐겼다. 항상 남악혜사南岳慧思의 종풍을 사모하고 조정에 진정하여 균주均州 무당산武當산에 태일太一 연창사延昌寺를 당자곡에 향엄사香嚴寺 장수사長壽寺를 창건하고 대장경 일부를 모셨다. 혜충은 행사行思, 회양懷讓, 신회神會, 현각玄覺 등과 함께 혜능 문하의 5대 종장宗匠으로서 선풍禪風을 날렸는데, 당시 교계에 광채를 발하여 신회와 함께 북방 선풍을 이끌며 마조의 남방 선풍을 비판하였다. 그의 선풍은 심신일여身心一如,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종지로 하고 또 무정설밥無情說法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더욱이 남방의 선객들이 경전을 가벼이 여기고 수의설법隨意說法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 삼장三藏을 연구하고 교학을 중시하며 스승의 설법에 의거하여 말하였다. 대력大歷 10년(775년)에 시적시적하니 조칙으로 당자곡 향엄사에 모시게 되었다. 대종이 대증국사大證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사리자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사리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불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故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故得阿?多羅三?三菩提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密多

고지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卽說呪曰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바라밀다심경서(般若波羅蜜多心經序)

       당唐나라 남양국사南陽國師  혜충慧忠 지음著



법성法性은 끝이 없는데 어찌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겠으며, 진여는 상相이 아닌데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생은 많고 많아 다함이 없고, 법해法海는 넓고 넓어 끝이 없다.

만약 널리 문자로써 뜻을 찾으려 하면 오히려 거울 속에서 형상을 구하는 것과 같고, 또 생각을 쉬고 공空을 관觀하려 하면 흡사 한낮에 그림자로 부터 달아나는 것과 같다.


이  경經은 대지와 같으니 무슨 물건인들 대지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것이 있겠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직 일심一心을 가리켰으니 어떤 법인들 마음에서 생겨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다만 마음을 요달해야 총지總持라고 하고, 법이 남이 없음을 깨쳐야 묘각妙覺이라고 한다.

한 생각에 모든 것을 초월하니, 어찌 번거로운 이론이 있겠는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경의 제목을 모두 다섯 구절로 해석하여 중생의 본래마음을 밝혔다.


첫째, ‘마하’摩訶는 범어梵語인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크다〔大〕’이다. 범부가 망령되어 육진 경계〔塵境〕에 집작하여 미음이 세간에 집착하기 때문에 막히고 장애되는 것을 소小라고 하는데, 이를 타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망념을 거두어들여 세간에 물들지 않고 마음과 경게가 공空함을 깨쳐서 훤칠하게 시방세계를 머금어 수용하게 하므로 “마하”라고 한 것이다.


둘째, ‘반야般若’는 범어인데, 한문으로는 ‘지혜智慧’이다. 범부가 마음을 등지고 경계를 취하여 나〔我〕라는 견해에 굳게 집착하여 어리석음에 떨어져 있는데, 이를 타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를 등지고 마음을 관조觀照하여 본래 나가 없음을 깨치게 하므로 “반야”라고 한다.

셋째, ‘바라波羅’는 범어인데, 한문으로 ‘청정淸淨’이다. 범부가 자기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육근六根(눈?귀?코?혀?몸?뜻)의 감각을 잘못 알아 오직 육진六塵(색?소리?향기?맛?촉각?법)을 보아 그 육진의 어지러움을 따라서 깨끗하지 못한 데 떨어져 있는데, 이를 타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를 등지고 깨달음에 계합하여 본래 청정함을 깨치게 하므로 “바라”라고 한 것이다.


넷째, ‘밀다蜜多’는 범어인데 또한 화다和多라고 하니, 한문으로는 ‘모든 법〔諸法〕’이다. 범부가 망령된 마음으로 법을 구하고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여 차별이 있으며 같지 않다고 여기는데, 이를 타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이 본래 만법을 포함하고 화합하여 둘이 없으며 본래 구족하여 모자람이 없을 반조返照하도록 하므로 “밀다”라고 한 것이다.


다섯째, ‘심경心經’은 범어인데, 한문으로는 ‘대도大道’이다. 범부가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직 많이 듣고 배우기만 하여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며 마음이 경계를 따라 변하여 육도六道를 윤회하여 삿된 견해에 떨어지는데, 이를 타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의 근원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실로 얻을 수 있는 법이 조금도 없으며 분별할 것도 없음을 돌이켜 비추어보아 곧 큰 도〔大道〕로 돌아가게 하므로 “심경心經”이라고 한 것이다.


이상 경의 제목의 본 뜻은 다만 마음의 근원이 광대하고 지혜가 청정하여 화합하고 둘이 없으며 본래 구족하여 분별할 것이 없음을 스스로 깨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이觀自在菩薩 

  이것은 범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마음을 등지고 모든 법을 ‘관觀’하였으나 오히려 법에 얽매여 자유자재하지 못함을 타파하는 것이다. 큰 뜻〔大意〕은 다만 중생으로 하여금 경계를 등지고 마음을 비추어 보아 마음에서 얻을 법이 없을 깨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법色法은 마음에서 일어나니 일어난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보면 일어난 곳이 없어서 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도 오히려 본래 없는데 색법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이니 생각도 하지 않고 집착도 하지 않으면 비로소 색법에 자재할 수 있고 나아가 일체법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일체법에도 구애되지 않아서 어디에서나 자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깨쳐도 깨친 마음이 없고 경계를 요달해도 요달한 경계가 없어서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 요달하여도 요달할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 툭 트여 걸림이 없으므로 “자재自在”라고 한 것이다.

 ‘보菩’는 요달함〔了〕을 말하고, ‘살 薩’은 봄〔見〕을 말한다. 모든 법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함을 요달하여 보기 때문에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行深般若波羅蜜多時

  여기에서 거듭 경의 제목을 거론한 뜻은 소승小乘이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함을 타파하려는 것이다. 소승의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본래 갖추고 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망령되어 말과 글을 구하여 지혜로 삼아 ‘반야般若’라고 한다. 모든 망념을 쉬는 것을 청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바라波羅’라고 하고, 보는 것이 본래 공空하여서 합하여 일체를 이루는 것을 ‘밀蜜’이라고 하며, 모든 법을 통달하여 마음속에 기억하고 지는 것을 ‘다多’라고 하니, 이것은 마음을 등지고 법을 구하여 망령되이 닦아 증득함이 있어 성문에 떨어졌기 때문에 ‘얕은 반야〔淺般若〕’라고 한다. 이제 다시 ‘깊은 반야를 행함〔行深般若〕’을 거론하여 대승大乘을 밝혀서 앞의 병을 상대하여 타파하고자 한다.


  보살은 모든 법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진실로 나고 멸함이 없음을 요달하여 보기 때문에 ‘깊은 반야〔深般若〕’라고 한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안과 밖이 뚜렷이 밝기 때문에 ‘바라波羅’라고 하고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어서 마음과 법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밀蜜’이라고 하며, 성품이 만법을 포함하여 닦아 증득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다多’라고 한다. 이와 같이 깨치는 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行深般若波羅蜜多〕라고 한 것이다.

때〔時〕는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모두 얻을 수 없으므로 “때 〔時〕”라고 한 것이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났느니라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五蘊’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다. 매우 깨끗하고 밝음을 등지고 항상 경계를 바라보므로 ‘색色’이라고 한다. 모든 법을 탐하여 구하고 닦아 증득함을 바라므로 ‘수受’라고 한다. 모든 법을 반연하여 흘러나옴이 그치지 않으므로 ‘상想’이라고 한다. 금지하는 계戒를 잘 지켜서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므로 ‘행行’이라고 한다. 갖가지 분별로 법을 따라 윤회함〔流轉〕을 ‘식識’이라고 한다. 범부는 이 다섯 가지 법에 장애되어 본래 마음을 깨치지 못하므로 ‘어둡다〔陰=蘊〕’라고 한다. 삼계三界를 벗어나지 못하여 윤회가 멈추지 않으므로 ‘괴로움〔苦厄〕’이라고 한다.


보살은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자기 마음의 근원이 본래 청정함을 요달하여 앞의 다섯 가지 법이 모두 생겨나는 곳이 없고 본래 비고 고요하여 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얻을 만한 것이 없음을 비추어보므로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낫느니라〔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고 한 것이다.



사리자舍利子

이것은 몸과 마음의 두 가지 모습이니, 또한 괴로움이 있다. 헛된 마음이 곧 법신인데, 어찌 두 가지 모습이 있겠는가. 역시 오음五陰(=五蘊)의 법을 거듭 밝힌 것이다.

‘사舍’는 색色이요. ‘리자 利子’는 마음의 수受?상想?행行?식識이니, 이것이 오온五蘊이다. 또한 ‘사舍’는 사람이요. ‘리자利子’는 또한 법이다.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모습에는 많은 뜻이 있어서 말로 다할 수는 없지만, 요약해서 말한다면, 이것이 모두 만법의 근본이다. 이제 만법이 몸과 마음과 떨어지지 않음을 밝히고자 “사리자舍利子”라고 한 것이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色不異空

범부는 망령되이 자기 마음에 집착하여 또 마음 밖에서 색色을 보며 색이 마음으로 인하여 있음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추구해 보면 보낼 없는 것인데, 색色이 무엇으로 인하여 서겠는가. 그러므로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色不異空〕”라고 한 것이다.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空不異色

범부는 마음을 등지고 법을 취하여 마음 밖에 공空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공이 마음으로 인하여 생겨남을 알지 못한다. 다만 자기 마음이 공하여 얻을 만한 것이 없음을 깨치면 공과 색이 다르지 않으므로 “공과 색과 다르지 않다.〔色不異空〕”라고 한 것이다.



색이 곧 공이요 色卽是空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색色이요,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곧 공空이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다〔色卽是空〕”라고 한 것이다.



공이 곧 색이며 空卽是色

앞에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곧 색이요,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곧 공이다”하고 한 것이 마치 공과 색이 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마음이 바로 있을 때가 곧 공이요, 마음이 바로 없을 때가 곧 이음[유]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이 바로 생길 때에는 실로 생긴 곳이 없으니 이것이 곧 색이고 곧 공이며, 마음이 바로 없을 때에는 응용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고이고 곧 색이다. 먼저 몸과 마음을 거론하였으나 일체만법의 예예가 모두 이러하다. 그러므로 “공이 곧 색이다”라고 한 것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오음五陰뿐만 아니라 다만 마음이 공한 줄 요달하면 모든 법이 저절로 공해진다. 그러므로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是諸法空相〕”이라고 한 것이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모든 법은 마음이자만 마음에는 실체가 없는데, 어찌 “나고 없어지고, 더럽고 깨끗하고, 늘고 줄어듦”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법성法性은 본래 공하므로 “공한 가운데〔空中〕”라고 하였다. 색色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므로 “색이 없다〔無色〕”라고 하였다.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 없으므로 “수?상?행?식도 없다〔無受想行識〕”라고 한 것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無眼耳鼻舌身意

 이것은 육근六根(눈?귀?코?혀?몸?뜻)을 말한다. 범부가 망령된 얽매임을 사실로 굳게 집착하여 갖가지 악업이 이로 인하여 생기므로 ‘뿌리〔根〕’라고 한 것이다. 하나하나의 뿌리 가운데 업이 쌓이고 태어남을 도와서〔潤生〕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죄업이 쉴 사이가 없다.


이러한 여섯가지 앎의 뿌리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으니 마음을 굴복시키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함께 공空해져서 자연히 밝게 사무치므로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다〔無眼耳鼻舌身意〕”라고 한 것이다.



색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과 법도 없으며

無色聲香味觸法

 이것은 육진六塵(=六境)을 말한다. 육근六根의 작용으로 인하여 이끌려 일어나서 수고롭게 되고 참된 지혜를 더럽히기 때문에 ‘티끌〔塵〕’이라고 한다. 다만 한 가지 근根이라도 돌이켜 살펴보면 주재하는 것이 없다. 육근에 주인이 없으면 육진의 경계가 저절로 없어지므로 “색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과 법도 없다〔無色聲香味觸法〕”라고 한 것이다.



눈의 경계가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것은 십팔계十八界를 말한다. 경에서는 간략하게 안계眼界만 거론하였지만 나머지 모든 계界도 알 수 있다. 육근六根으로 인하여 육진六塵이 생기고, 육진六塵으로 인하여 육식六識이 생겨서 삼육三六은 십팔十八이므로 십팔계十八界라고 한다. 분별을 내는 것이 각각 다름을 ‘계界’라고 한다. 무량겁으로부터 망령되이 헤아려 업을 짓고 색과 소리를 따르며,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 생각을 따라 윤회하며, 중생의 성품이 원래 달라짐을 없을 깨치지 못한다. 다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진塵?근根?식識의 마음이 때맞추어 소멸하므로 “의식의 경계까지 도 없다〔乃至 無意識界〕”라고 한 것이다.



무명도 없고 無無明

 어리석은 사람은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가 있다고 집착하여 본래 성품을 가리고 덮어서 광명을 보지 못하므로 ‘무명 無明’이라고 한다. 본래 마음을 깨치면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이 본래 공하고 의식은 작업이 없는데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명도 없다〔無無明〕”라고 한 것이다.



또한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亦無無明盡

 육진의 경계塵境가 있다면 다함이 있겠지만 본래 없으니 무슨 다함이 있겠는가.


늙고 죽음도 없고 乃至無老死

 무명無明으로부터 늙고 죽음〔老死〕까지가 모두 십이인연十二因緣이다. 지금은 다만 한 가지 인연을 거론하고 그것으로 모든 예例에 적용하였다. 만약 무명이 있는 것이라면 늙음과 죽음도 곧 허망하지 않겠지만 무명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라고 한 것이다.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亦無老死盡

 ‘다함〔盡〕’은 없어짐〔滅〕이다. 십이인연이 만약 생기는 것이라면 늙고 죽음〔老死〕도 없앨 수 있겠지만 인연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無老死盡〕”라고 한 것이다.

   


고?집?멸?도 도 없고 無苦集滅道

 여기에서는 사제四諦를 밝혔다. 마음에 구하는 바가 있으면 법에 얽매이므로 ‘제諦’라고 한다. 닦아 증득함을 부지런히 하여 마음에 쉴 틈이 없음을 ‘고제苦諦’라고 하고, 경론經論을 널리 찾아서 오묘한 이치를 탐하여 구함을 ‘집제集諦’라고 하며, 모든 망념을 끊고 항상 고요함을 지극히 구함을 ‘멸제滅諦’라고 하고, 번거롭고 산란함을 멀리 여의어 이치를 정미롭게 연구함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이제 다시 사성제四聖諦를 밝히니 약으로 삼아 앞의 병을 상대하여 타파한다.


마음은 본래 맑고 신령스러워서 닦아 증득함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고제苦諦’라고 하고, 성품이 모든 법을 포함하였으니 어찌 찾고 구함을 의지하겠는가 하는 것은 ‘집제集諦’라고 하며, 망념을 생기는 일이 없어 본래 스스로 항상 고요한 것을 ‘멸제滅諦’라고 하고, 고요함과 항상함이 둘이 아니고 삿됨과 올바름에 어둡지 않는 것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이것은 병을 상대한 설명이니. 만약 무심을 요달하면 사제四諦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집?멸?도도 없다〔無苦集滅道〕”라고 한 것이다.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느니라. 無智亦無得

 모든 법을 헤아리고 비추어보아 얻을 바가 없다고 요달함을 ‘지혜’라고 한다. 모든 법이 본래 공空한데 어찌 헤아리고 비추어봄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혜도 없다〔無智〕”라고 한 것이다. 자성이 맑고 신령하여 실로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또한 얻음도 없느니라〔亦無得〕”라고 한 것이다.



얻을 바가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以無所得故 菩提薩?

 모든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깨치므로 ‘보리菩提’이고, 모든 법을 얻을 수 없음을 요달하므로 ‘살타薩?’라고 한다. 마음과 법이 한결같이 여여하여 모두 얻을 바가 없으므로 “보리살타菩提薩?”라고 한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以無所得故 菩提薩?

 이것은 범어인데, 경의 제목에서 구체적으로 해석하였다. 다만 중생의 지혜는 청정하지만 또한 청정함을 얻을 수도 없다. 자기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보아서 모든 번뇌 망상을 떠나므로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다〔依般若波羅蜜多〕”라고 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작은 법이 있으면 곧 걸림이 있다.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 空하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툭 트여 아무 일도 없으니 어찌 걸림이 있겠는가.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 없고

無??故 無有恐怖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없는데 무슨 구할 것이 있으며, 마음을 얻을 수 없는데 누가 두려움을 내겠는가.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다〔無有恐怖〕”라고 한 것이다.



일체의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遠離一切顚倒夢想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함을 ‘엎어진다〔顚〕’라고 하고, 마음 안에서 공空을 관함을 ‘거꾸러진다〔倒〕’라고 한다. 없는 가운데 있음을 헤아림을 ‘꿈〔夢〕’이라고 하고, 마음이 반연됨을 ‘생각〔想〕’이라고 한다. 홀연히 마음의 근원을 깨쳐서 얻을 바 없음을 요달하였으므로, “일체의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났다〔遠離一切顚倒夢想〕”라고 한 것이다.



마침내 열반을 이루며 究竟涅槃

 마음에 생겨남이 있으면 없어질 것이 있겠지만 마음에 본래 생겨남이 없으므로 실로 없어질 것도 없다.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을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구究’는 궁극〔窮〕이요. ‘경竟’은 다함〔盡〕이니 과거?현재?미래의 번뇌 망념이 본래 생겨나고 없어짐이 없으므로 “마침내 열반을 이루었다〔究竟涅槃〕”라고 한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多羅三?三菩提

 과거?현재?미래의 번뇌 무명과 번뇌 망념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三世諸佛〕”이라고 한 것이다. 스스로 본래의 지혜〔本智〕를 요달하여 물들고 집착함이 없으므로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다〔依般若波羅蜜多〕”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故得阿?多羅三?三菩提〕”라고 한 것은 범어인데, 한문으로 ‘아阿’는 없다〔無〕는 말이고, ‘뇩다라?多羅’는 위〔上〕이며, ‘삼먁三?’은 올바름〔正〕이고, ‘삼보리三菩提’는 참됨〔眞〕이다. 한문으로는 ‘위없는 참되고 올바른 도道’라는 뜻이다. 만약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믿으면 “아뇩다라삼먁보리를 얻는다〔得阿?多羅三?三菩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크고 신비한 주이며, 크고 밝은 주이며, 위없는 주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이니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주呪’는 계합契合이니, 여래의 밀인密印이 마음과 행동에 모두 계합하므로 주呪라고 한다. 또 ‘주呪’는 정定을 말함이니, 스스로 본래 마음을 요달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는 서이다. 또한 ‘주呪’는 없음〔無〕이니, 무심無心으로 마음을 보기 때문에 주呪라고 한다. 여기에는 많은 뜻이 있으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중생의 본래 마음은 끝이 없고 가고 옴에 걸림이 없어서 실로 동요하지 않으므로 “크고 신비로운 주〔大神呪 〕”라고 한 것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맑고 고요하여 항상 머무르며 법계法界를 뚜렷이 비추어 응하여 나타냄이 다함이 없으므로 “크고 밝은 주〔大明呪〕”라고 한다. 일체 만법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위 없는 주〔無上呪〕”라고 한 것이다. 마음이라는 한 글자는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으며 끝을 헤아릴 수 없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無等等呪〕”라고 한 것이다.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모든 부처님이 이 주 呪라는 마음에 의지하여 홀로 삼계를 초월하여 윤회를 받지 않기 때문에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앤다〔能除一切苦〕”라고 한 것이다. 본래 마음을 바로 가리킨 것이 바로 부처이니, 닦아 증득함을 의지하지 않으므로 “진실眞實”이라고 한 것이다. 마음에 변하는 체가 없으며 미치거나 미혹함을 모두 떠나서 평탄하게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다〔不虛〕”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를 말하나니

故說般若波羅蜜多呪

주呪는 중생의 본래 마음일 뿐이니, 말로써 마음을 가르키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般若波羅蜜多呪〕”라고 한 것이다.



주는 곧 이러하니라.

卽說呪曰

말로 성품을 드러냈기 때문에 “주는 곧 이러하니라〔卽說呪曰〕”라고 한 것이다.



아제아제 ?諦?諦

얽매어 집착함을 ‘제諦’라고 한다. ‘아?’는 없앰〔除〕이다. 번뇌 망념을 지혜로써 씻어 없애므로 ‘아제?諦’라고 한 것이다. 또 ‘아제’라고 한 것은 마음이 공함으로 요달하고 몸이 공적空寂함을 깨쳐서 몸과 마음이 공적하여 두 법이 없음을 깨쳤기 때문에 “아제아제〔?諦?諦〕”라고 한 것이다.



바라아제 波羅?諦

마음이 이미 청정하니 무슨 없앨 망념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라아제〔波羅?諦〕”라고 한 것이다.



바라승아제 波羅僧?諦

청정은 번뇌를 상대하여 얻은 이름이다. 번뇌가 본래 없어서 청정도 세울 수 없으므로 “바라승아제〔波羅僧?諦〕”라고 한 것이다.



모지사바하 菩提娑婆訶

‘보리菩提(모지)'는 도道요, ‘사바하娑婆訶’는 행行이다. 본래 성품을 깨달아 요달하면 곧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보리’는 요달을 말하고, ‘사바하’는 본다〔見〕는 말이니, 본래 마음이 실로 생겨난 곳이 없음을 요달하여 보았기 때문에 ‘사바하’라고 한 것이다. ‘보리’는 마음이요, ‘사바하’는 법이니, 모든 법이 본래 마음이므로 “사바하”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신비로운 주呪는 본래 마음을 곧바로 가르킨다. 마음에는 움직이거나 고요함이 없으므로 마음을 일으켜 마음을 구할 수 없고, 마음에는 일어남도 없어짐도 없으므로 마음으로 마음을 없앨 수 없다. 마음은 안과 밖과 중간에도 없으니 마음을 구하되 마음은 일체처에 있지 않으며 일체처에서 마음을 구할 수 없다. 마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곧 일체의 마음이 없음을 안다. 일체의 마음이 없으므로 곧 일체의 마魔의 경계에 섭수하여 동요하지 못하게 하며, 동요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곧 일체의 마장을 없앤 것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도 “마가 항복하는 것이 도량道場이니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마음도 요달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려 하니, 마음 밖에서 법을 보아 마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난다. 자기의 마음이 마구니에 속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제하겠는가. 『유마경』에서도 “자기의 병도 고칠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설사 치유하여 낫게 하더라도 업에 묶인 허깨비 같은 몸이니 마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를 두려워하면서도 윤회를 면하지 못하여 지금 생을 버리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서 서로 원수로 만난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본래 마음을 깨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나, 이를 ‘신비한 주’라고 한 것이다.


망념을 일으키지 않음을 ‘수지受持’라고 하고, 본래 생겨나지 않음을 요달하는 것을 ‘지념持念’이라고 한다.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오묘한 가르침도 다만 반연을 쉬게 하려는 것이다. 한 생각도 생겨나지 않으면 모든 반연이 단박에 쉬니, 끝없는 병의 근본도 마음을 따라 없어지고 오랜 겁 동안의 죄罪의 산이 일시에 무너진다. 이러한 공덕은 불가사의하면서 미혹한 무리 속에서 벗어나 단박에 부처님의 지위를 뛰어넘어 이 법을 비밀히 전한다. 그러므로 ‘대비大悲’라고 한다.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외운다. 『반야심경』의 경문經文에 자세하게 담고 있어 이치가 분명하니 배우는 이들은 자세히 살펴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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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12.10 06:23

    첫댓글 대승의 뜻을 밝히는 좋은 해석이라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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