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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포커스
교회란 어떤 곳인가
장성민님의 글 광주개혁신앙공동체에서 퍼온글
서울의 하늘만큼 십자가로 가득한 도시를 만나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밤이면 교회 종탑의 빨간 십자가들이 한무리의 물결을 이룬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 수에 비해서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상당 부분이 교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교회란 과연 어떠한 곳인가?
성경은 교회를 가리키는 데, 다음 몇 가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 표현들을 통해서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에클레시아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희랍어 '에클레시아'이다. 이 말은 '안에서 밖으로(out of)'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to call)'를 의미하는 동사 칼레오가 합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밖으로 불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밖으로'는 '세상 밖으로', 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밖으로'를 뜻한다. 그리고 '부르다'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구원에로 불러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흔히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집합체라고 일컬어져 오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는 성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교통하는 곳(집합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의 교통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피차의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한 성도들 사이의 수평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배와 교제가 있는 것이 교회이다. 예배와 교제가 없으면, 또는 이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축복이나 나누어 가지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 수양원이 아니다. 교회는 사교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한 자선 단체가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어느 한 가정에 모인 사람들이나(고전 16:19, 골 4:15 등), 하나의 독립된 단체를 구성한 사람들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행 5:11, 11:26 등). 그리고 독립된 단체들이 연합하여 모여진 경우에도 사용되었다(행 9:31).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예배를 목적으로 모인 지상의 모든 집합체라면, 그 규모나 형태에 관계없이 교회가 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규모나 형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배와 교제가 있으면, 건물이 없이도 교회이다. 직분자가 없어도 교회이다. 십자가 상이 걸려 있지 않아도 교회이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자기 자신을 교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성경은 에클레시아 이외에도 교회를 가리킬 때, 다음과 같은 많은 비유적인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들 속에는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또는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주의깊게 살펴 볼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께서는 고전 12:27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의미한다. 사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래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2, 23)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명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설립자, 또는 특정인의 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주를 모시는 사이비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교회는 주님의 교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와 지체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서로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머리되신 주님과 하나이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생각이 같아야 한다. 감정도 같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탄식을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범사에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만일 교회는 즐거워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아파하시는 일이 있다면 , 그 교회는 심각한 병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교회가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이다.
머리는 한나이지만 지체는 많다. 많은 지체들은 각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체들은 한 머리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와통일을 이룬다. 교회의 성도는 하나 하나의 지체들이다. 서로의 분량과 역할이 각기 다른 지체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간에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피리를 부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춤을 추고, 애곡을 하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슬퍼하며 가슴아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체들끼리의 대립이나 견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와 교회들 간에도 지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진정한 몸된 교회들이라면, 교파나 교단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 간에 반목이나 질시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할로 머리되신 주님을 섬겨야 할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던 곳이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이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성전, 즉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은 교회를 가리킬 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나 하늘의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갈 4:26, 히 12:22, 계 21:2).
하나님은 무한하시어서 온 우주 어디에나 편재하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늘에 올라 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 가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시 139: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자신의 지정된 거처로 삼으셨다(합 2:20).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을 찾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에 성전을 찾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성전을 찾았다. 기도할 때도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을 찾아갔다. 교회를 예루살렘에 비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요 보좌이다. 모든 성도들이 마시도록 생수가 흘러나는 생명샘이다. 하나님의 은헤가 시작되는 시은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함께 모여서 세속적인 행사나 모임 또는 오락만을 즐기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의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마음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손쉽게 모여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언제든지 들러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과 비례한다.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한 주간에 한 번 정도나 힘들여 찾아가는 곳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복잡한 여건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좋다. 아니면 차라리 교회 옆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좋다.
성령의 전
교회는 개인 신자의 경우와 더불어서 성령의 전이나 집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고전 3:16, 엡 2:21-22, 벧전 2:5). 교회가 성령, 즉 거룩한 영의 전이라는 말은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세속과 구별이 된 곳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바쳐진 곳이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인쳐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의식들도 세상적인 일들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직 또는 성례라고 부른다. 읽는 책이나 부르는 노래도 세상 것둘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또는 성가라고 부른다. 건물이나 물건들이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것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세상 것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다. 그러기에 성전 또는 성물(성구)이라고 부른다.
한편, 교회는 불의나 죄와 구별되어진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거룩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말이나 행동이나 계획 등이 모두 다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많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이름에 합당하도록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어지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거룩한 새사람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는 개인차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잡음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잡음 때문에 교회를 오해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룩해져 가는 흔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최소하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근 우리 주변에는 세상과의 구별을 상실한 교회들이 없지 않다. 생각이나 언어, 행동이나 벌리고 있는 행사에서 세상과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일부 가사를 제외한다면, 동작이나 마음가짐이나 기교 등이 세상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 나누는 대화도 세상사 일색이다. 집안이나 직장에서 어른이면, 교회에서도 무조건 어른 행세를 하려 하기도 한다. 교회에서조차 계 모임이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성전이 세속 모임을 위해 대여되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 무리 속에 숨어 있는 염소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염소 무리 속에 끼어 있는 양을 구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주님으로 하여금 오늘의 예루살렘 보시고 눈물울 흘리시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눅 23:28).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구별된 곳이 되게 해야 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
사도 바울께서는 교회를 가리켜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하셨다(딤전 3:15). 교회를 기둥이나 터에 비유한 것은 교회의 기초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 함이었다.
교회의 터는 진리이다. 교회는 오직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교회가 혈연이나 사업이나 권력 등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진리되신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혹 성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진리나 교주를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는 아무리 십자가를 내다 붙이고, 그럴싸한 교회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형제로 보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여긴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기둥도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진리의 소호자이다. 교회는 진리만을 전하고, 진리만을 가르쳐야 한다. 진리는 타협이나 양보를 허락하지 않는다. 타협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로울 때가 많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할 때도 많다. 이것이 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졌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피를 지키기 위하여 수없이 피를 훌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고 독선적인 주장을 늘어 놓으면서 분쟁과 분리를 일삼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진리는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양보하면서까지 타협을 모색하시는 것 역시 옳은 일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금 촛대
사도 요한은 교회가 금 촛대로 나타나는 계시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내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교회가 밝히는 빛은 하나님과 진리이다. 하나님이 빛이시요(요일 1:5), 진리, 즉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바로 빛이기 때문이다(요 8:12). 이 빛은 흐려지거나 변하지 아니하는 빛이다. 그러기에 가장 고상한 빛이다. 따라서 교회는 금으로 만든 촛대에 비유가 되었다.
촛대에서 빛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심지가 타지고, 양초가 녹아져야 한다. 자기 희생이 우선하지 않으면 빛은 생겨나지 읺는다. 교회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나 산 위에 있는 동리처럼 높이 들려져야 한다.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의 수고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진리와 착한 행실로써 세상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교회는 만에 한나라도 허물과 실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소자 하나라도 실족치 않게 하려는 세심한 주의를 항상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사도 바울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유를 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엡 5:22-25).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가 되어진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과 같은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신부로서의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항상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오직 그리스도께만 복종을 해야 함과 동시에, 희생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밤 언제쯤 올 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도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둠과 함께 졸거나 잠이 들러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진다 해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진리에 대한 왜곡이 심할수록, 죄악이 관영할수록, 불평이나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귀가 바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재림에 대한 임박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수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참된 역할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나 행사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다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비유되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예루살렘, 성령의 전, 진리의 기둥과 터, 금 촛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