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수필가 인수/ 정 용하 -
문학인이 글을 쓰다 보면 어떤 대상에 관하여 무언가 느낌은 분명히 있으나 언어로써 그것을 형상화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사유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인 노천명께서 1938년도에 지은 ⌜사슴⌟ 이란 시에서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 시인의 ⌜사슴⌟ 전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사슴이 생각해 낸 ‘잃었던 전설’이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암호 풀기다. 그 비밀을 밝혀낸다면, 앞의 시 전반에 숨어있는 참뜻을 스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천명 시인하면 고독과 애수, 향수와 자화상 등의 시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시제(詩題)들은 작가의 속성을 대변해 줄 것이다. 모든 시가 그러하듯 시 속에 담겨있는 정확한 뜻은 작가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가 나름대로 시적인 감각으로 감상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를 감상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자 베이컨이 주장한 이른바 우상론, 바꾸어 말하면 편견과 선입관이라는 속성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예부터 사슴을 가리켜 '하느님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어 왔다. 사슴은 본디 신선들이 사는 하늘나라에서 옥황상제의 수레를 끄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옥황상제를 지척에서 모셨다는 것은 학문과 인품이 고상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종의 과오로 인하여 옥황상제로부터 인간 세상으로 추방된 것이 사슴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사슴이 주로 서식하는 곳은 숲과 호숫가이며, 고상하고 영험한 학문을 지닌 인물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께서는 숲과 호수가 있는 중국 복건성에 위치한 무이산에서 학문을 하였으며, 강학하던 서원의 명칭을 흰 사슴을 의미하는 “백록동 서원”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학문을 하는 유학자들이 롤모델로 삼는 절대적인 주인공은 공자와 주자이다. 그들은 성인의 학문뿐만 아니라 생활방식까지 닮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에 어느 문인 학자께서는 산속 호숫가에 서당을 지은 후 ⌜오록서당잡영⌟ 이란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슴 가죽 혁대를 풀고 귀향하여 분수에 의지하며 지식에 대하여 욕심을 구하지 않고, 밭을 갈고 흙을 파니 이 세상이 저절로 산림지계(山林之計)인지라, 이익은 있었으나 얻지 않고, 학문이 깊지 않음에 닦은 후 고쳐 따랐도다.”라고 묘사하였다. 위 구절에서 사슴 가죽 혁대를 풀고 귀향하였다는 것은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는 뜻이며, 밭을 갈고 흙을 팠다는 것은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농사일에 비유한 것이다. 중간 부분에서 이 세상이 저절로 산림지계란 구절에서 여기서 산림지계란 자연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의미로 보여 진다.
본론으로 돌아와 노천명의 시 ⌜사슴⌟ 에서 관(冠)이 향기롭다는 것은 머리에 쓰고 있는 갓이나 관모가 향기롭다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공경스러워 앙모하는 대상이 된다는 뜻이며, 무척 높은 족속이란 출신성분이 고상한 귀족이라는 의미로 보여진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맑은 마음의 눈으로써 자신의 자화상을 성찰해 본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며, 마지막 구절에서 먼 데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잃어버린 전설이 있는 다시 말해, 산은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하늘나라와 거리상 가장 가깝기 때문이며, 그곳을 자주 바라보는 관계로 인하여 진화론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근거하여 첫 구절에서 모가지가 길어졌다고 묘사하였는바 이는 애타는 향수(인간의 본성을 향한 동경)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외견상 바라본 사슴의 세 가지 특징은 뿔이 나뭇가지 또는 불로초처럼 영험하게 보이고, 두 번째는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써 놓은 글씨처럼 몸통에 흰 점들이 질서정연하게 무늬를 이루고 있으며, 세 번째는 꼬리가 짧다는 것인데, 사슴은 꼬리가 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생물학적으로 꼬리가 퇴화된 인간과 가깝다는 의미와 더불어 꼬리가 짧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의사소통을 쉽게 그리고 원활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사슴은 영험한 피가 흐르는 출신성분으로서 관이 향기롭고 또한 학문이 고상하며, 소통을 중요시하는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사슴의 울음소리는 음식을 먹을 때 함께 취식하기 위해 동료들을 부르는 소리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향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천박한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어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길 위에 서 있는 사슴의 모습에서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면, 사슴의 존재가치는 3차원의 시각을 가졌다는 영악한 사마귀와 다르고, 변덕이 심한 염소와도 다르며, 더욱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모험을 즐기는 원숭이와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고대와 중세 그리고 현대가 망라된 세상에다 꿈속의 세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보태어 고대 벽화 속에서 잠자고 있는 사슴을 깨워볼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여덟 마리 사슴이 산타클로스의 눈썰매를 끌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에서 노천명 시인의 ‘잃어버린 전설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책의 노래(2022년 발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