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熱) / 이현주
가늘고 기다란 먼지 한 올이 뺨에 내려앉았다. 무수히 많은 먼지의 촉수들이 살아서 꼼지락 대며 내 살갗을 찌르고 성가시게 했다. 먼지가 가득 떠도는 방안에서 내 몸을 숨길 방도가 없다. 온 몸에 빈틈없이 비닐 랩을 감을 수도 없고 이불을 뒤집어쓴대도 이불이야 말로 먼지의 본거지가 아니던가. 괴롭다, 이 먼지가. 아니면 피할 수 없거나 아주 작아 일상으로 흘려야 하는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는 내가. 눈을 감아도 만져지지 않아도 내게 들러붙은 먼지의 길이와 굵기가 가늠되고 어쩌면 그 색깔마저도 알 수 있을 만큼 곤두선 감각이 괴롭다.
며칠간의 고열 끝에 37도를 넘는 미열이 반복되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열이 자주 나서 해열제를 끼고 살았지만 열이 고통스럽다는 건 몰랐다. 열감은 일단 몹시 불쾌했다. 정신이 혼미하고 신체는 무기력한데 통증은 날카롭고 생생했다. 입술에 닿는 물조차 아프고 딸애가 멀찍이 틀어놓은 선풍기바람에도 살점이 쓸리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무심하게 닿았다 흩어지던 물과 바람이 이토록 무섭게 돌변할 줄은 몰랐다. 나는 육신의 고통 앞에서 한없이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또 무언가에 아프고 쓰라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창문에 커튼까지 닫고 지냈다.
한 달이 넘도록 감기약만 지어주던 내과 원장님은 혼자서 병원도 못 갈만큼 심각한 상태가 되어서야 대상포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인터넷에서 얼핏 주워들은 성병이름인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의심을 토로했더니 의사가 웃었다. 성병이 아니라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 혼자 역학 조사를 시작했다. 내 코 점막과 목구멍을 훑던 이비인후과 기계에 바이러스가 있었나. 그리고 며칠 뒤에는 내과를 갔었다. 감기를 독감으로 키워주는 처방이라고 소문난 동네 내과와, 암환자가 많은데도 청결치 못하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원장님은 늘 부재중인 또 다른 내과. 그도 아니면 식당인가. 마켓의 손수레 손잡이인가. 집나온 친구와 하룻밤을 보낸 찜질방인가.
그러고 보니 나의 일상은 온통 바이러스와 세균과의 만남 혹은 동거였다. 스치는 모든 것이 날 병들게 할 수도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동안 무사했던 것이 오히려 행운이고 기적이었다. 평생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수많은 승리를 하면서 살아 왔던 것이다. 내가 아직 살아 있고 여적 이만큼 아파본 적이 없다는 자체가 승리의 역사였다. 그것은 면역력의 역사이기도 했다.
다시 거슬러서 승리만을 거듭하던 견고한 성벽이 왜 뚫렸을까를 생각했다. 지난해 말, 딸아이 입시준비를 위해 분당과 서울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했고 그 끝에 이사를 두 번이나 했다. 과로 상태가 지속되는 걸 간신히 의지로 버티고 있는데 거의 매일 밤 전화벨이 울려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릴 적 친구인 H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이면 내게 전화를 해서 낮은 목소리에 한숨을 섞어가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와 나는 돈암 시장의 떡볶이 집과 길음동의 롤러스케이트장을 누비며 함께 자랐다. 커서는 미팅도 같이 하고 머리를 자르거나 옷을 살 때도 같이 다녔다.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는데, 친구는 손위 시누이 다섯 명과 홀시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시집을 가서 아침드라마의 며느리처럼 마음고생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건 젊은 시절 이야기고 지금쯤이면 서열에서 비롯되는 고통에서 해방되거나 체념하게 되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잠이 달아나는 것 보다 그녀의 하소연에 공감이 되지 않아서 더욱 힘들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는 참치세트를 주고 딸에게는 와인세트를 주었다든가 동서가 자기에게 언질도 없이 혼자 시어머니에게 비싼 선물을 했다든가. 그럴 때마다 친구는 심장이 벌렁거려서 약을 먹었다고 했다. 아프고 싶어서 작정했거나 어떤 일에 얼마만큼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기준이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친구는 2년 째 공황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가 필요할 만큼 마음에 병이 든 상태임을 미리 고백하지 않았다면 나는 진즉에 화를 냈을 것이다.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들은 터라 억지로 들어주다 보면 창밖이 훤하게 밝아오는 날도 있었다. 수면부족에 스트레스가 겹치며 내 면역력이 바닥났던 모양이다.
한동안 통화를 하지 못한 친구는 죽이라도 끓여주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열은 그리 높지 않네.”
체온계를 들여다보며 안심한 듯 한마디 했다. 생각보다 내 상태가 심각한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식은 보리차 잔을 내밀며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시어머니 전화가 없다 했더니 큰집 식구들이랑 태국을 다녀오셨더라. 어떻게 생각해? 진짜 어이가 없지 않니?”
“넌 같이 안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같이 갔으면 또 그래서 힘들다고 했을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쇠약해진 나는 37.2의 미열에도 손이 떨리고 오한이 나는데 친구는 미열의 증세는 약간의 무력감 정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30년 가까이 가족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상처를 받는 친구가 별스럽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어릴 적에 누가 새치기를 해도 바쁜 모양이라며 뒤로 물러나주는 태평한 성격이었다. 여유롭고 느긋하던 그녀의 성벽은 무엇에 허물어진 걸까. 선풍기 바람에 뼛골이 쑤시고 양칫물에 두들겨 맞는 것처럼 아파보니 고통은 폭력의 강도가 아니라 통증을 느끼는 감각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픔은 당사자에게만 절박할 뿐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본인 아니면 모르는 것이다. 앓는 소리로 가득 찬 방안에서 친구와 나는 각자 제 몸을 싸안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