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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외형 키운 한국교회, 내적 · 사상적 성숙에 관심 절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의 실제에 대해서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는 지적이 많다. 2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경이로운 성장을 이뤄낸 한국교회 모습에 전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경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의 여러 통계 결과들을 살펴봤을 때 외적인 성장만큼 내적인 성숙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차제에 가톨릭신문은 창간 86주년을 맞아 ‘현대 가톨릭 신학 사상’의 흐름을 소개하는 특별 학술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지금 세계 가톨릭교회를 관통하는 신학 사상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이러한 우리 한국교회 현실에서 질적인 교회 발전 및 정신적 · 사상적 발전을 위해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는 맥락에서다.
이를 위해 ‘신학’, ‘영성’, ‘철학’, ‘성서’ 등 분야에 걸쳐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의신학 교수), 전영준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영성신학 교수), 박승찬 교수(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의신학 교수), 안소근 수녀(대전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가 기획 및 주요 집필위원으로 위촉됐다. 이밖에도 백운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신학 교수), 용진선 수녀(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간호대학 교수) 등이 필진으로 참여한다.
앞으로 특별 학술 기획에서는 현대 신학의 전체적인 맥락을 다루면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 아시아 신학과 토착화 신학 등 교의신학 분야, 그리고 성서 영성신학, 가톨릭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상적 흐름과 최근 동향이 쉽고도 체계적으로 제시될 예정이다.
[기고] (1) 아시아의 토양에서 움트는 신학의 씨앗
- 아시아에 복음의 씨앗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 온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2012년 12월 10~16일 열린 제10차 정기총회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가 1999년 권고 ‘아시아교회’를 통해 지적하는 것처럼, 아시아는 다른 대륙들과 구별되는 매우 뚜렷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고, 세계 인구의 3분의 2 가량이 거주하고 있는 광활한 땅이다.
그러나 아시아 인구의 위압적인 광대함 외에도 ‘이 대륙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고대 문화와 종교 그리고 고대 전통의 계승자인 그 민족들의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류 가족의 유산과 역사의 본질적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 언어, 믿음과 전통들의 서로 혼합되고 어우러진 복합성’(6항)이야말로 아시아 대륙의 특성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실재이다.
이러한 종교-문화적 특성 외에 경제-사회적 현실에 있어서도 아시아 대륙은 매우 다양한 복합성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동북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처럼 고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나라들 혹은 그러한 발전을 향한 과정 중에 있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절망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무는 나라들도 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나 아시아 전체적으로 볼 때나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를 통한 인간 소외 현상이 발견된다. ‘가난과 대중 착취의 지속적인 존재는 가장 절박한 관심의 대상입니다. 아시아에는 수백만 명의 억압받는 개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경제·문화·정치적으로 소외된 채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어 왔습니다’(7항f).
나아가, 이러한 경제 발전 과정 중에 발생하는 정신문화적 황폐화 역시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개발 과정에서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확산되고 있는데, 특히 도시 지역들에서 그러합니다. 전통적·사회적·종교적 가치들을 손상시키는 이러한 이념 체계들은 아시아의 문화를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손해를 끼치며 위협하고 있습니다’(7항a).
이렇듯 다양하고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매우 진지하고도 섬세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동시에, 그 씨앗이 자라나는 토양 또한 잘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나게 될 아시아적 토양에 대한 주의와 관심이 다른 대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시아의 민족들 안에 담겨 있는 꿈과 희망은 무엇인지, 아시아인들의 고통과 절망, 그 비구원의 현실은 또한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을 통한 구원에로 인도하고 연결시킬 수 있는가를 찾기 위해 고민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모든 아시아 그리스도인들, 특히 아시아교회의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사명이며, 바로 그런 맥락에서 2012년 교황청 인준 40주년을 맞이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Federation of Asian Bishops’ Conferences)의 가장 주된 역할이자 과제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FABC는 지난 40년간 아시아의 상황 속에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게 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다방면에서 지속적으로 기울여왔다.
필자는 지난 몇 년 간 FABC 신학위원회의 신학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여러 지역 교회들의 현장을 체험하고 FABC의 기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과 교류를 바탕으로 아시아 각국의 신학자들, 사목자들과 회의를 통해 만나 아시아교회의 당면 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아시아교회에서의 신앙 체험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고민하면서 FABC의 공식 신학 문헌들을 작성하는 일에 계속 참여해 왔다.
한편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지금 여기에서 발견되는 시대의 표징과 과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복합적 현실과 그 안에서 교회의 실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복음적 식별 작업이 요구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며 마침내 완성시키는 복음의 역동적인 힘이 아시아 대륙의 비구원적 현실 안에서 지금 어떻게 침투하고 관통하며 활동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고 체험하면서 이를 언어화, 신학화하는 작업이 또한 필요하다.
결국 2012년 12월 베트남에서 개최된 제10차 FABC 총회의 최종 메시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아시아의 복잡·다양한 현실에 대응, 효과적으로 식별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고자 진지하게 노력하며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FABC의 가장 주된 관심사이자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FABC 신학위원회에서는 정기회의와 비정기모임 등을 통해 작업한 것을 바탕으로, 지난 1987년부터 2007년까지 발표한 공식 문헌들을 모아 「아시아의 토양에서 움트는 신학의 씨앗」(Sprouts of Theology from the Asian Soil)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신학 방법론에서부터 삼위일체론, 성령론, 교회론, 신학적 생명론, 그리고 종교 자유와 종교간 대화 등의 여러 신학 주제에 관한 아시아신학적 관점에서의 조명과 성찰들이 담겨 있다.
사실, 아시아신학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아시아의 땅, 그 아픈 현실 속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면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게 인도하고 촉구하시는지를 성찰하고 깨달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그러므로 아시아신학 역시 아시아의 토양에서 지금 간신히 싹을 틔우며 발아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서 지금 막 자라난 싹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희망찬 것인가?
이는 FABC 신학위원회 주관으로 2004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그리스도론 주제의 신학 심포지엄의 주제, 즉 ‘그리스도의 아시아적 얼굴들’(Asian Faces of Christ)을 찾는 것과도 연결된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당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신다는 신비를 아시아의 여러 지역 교회들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과연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그들의 그리스도론적 고백은 무엇이며, 그들의 부활 체험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체험과 성찰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언어화하는가? 바로 이것이 아시아신학이 묻고 찾아야 할 질문이며 과제들인 것이다.
지금 아시아교회는 여러 심각한 도전과 위협들에 직면해 있다. 우선, 서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마주하며 매우 어렵게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해야만 한다. 2010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 대회’에 참가하였던 파키스탄 대표단은 그들이 얼마나 큰 위협 속에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를 생생하게 증언한 바 있다.
그리고 FABC 신학위원회 주관으로 2012년 4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주교들의 신학 심포지엄에서는,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 대도시를 거점으로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흥 그리스도교 단체들이 가톨릭교회에 파고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빼앗아가는 현상이 보고되었다.
동북아시아는 어떠한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 무신론적 성향의 과학적 근본주의, 혹은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신봉되어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가치를 상실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또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이 만연하고, 그로 인해 세속주의적·물신주의적 사회 풍조가 널리 퍼져 많은 젊은이들이 정신적 방황과 혼란에 빠져 신앙을 잃고 교회를 등지게 된다.
아시아신학의 과제는 참으로 방대하다. 이러한 위기들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 신앙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며 새로운 복음화에 임할 것인가, 그리고 아시아적 유산과 가치를 재조명하면서 어떻게 이를 그리스도교 신학화 할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아시아교회 전체적 차원에서의 복음화 사업이나 신학화 작업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보람인지를 말하고 싶다. 지금 한국교회가 아시아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면으로 중요한 위상을 보여 주고 있는 만큼, 이제 아시아교회 전체를 위한 도움과 기여를 위해서도 보다 더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신앙체험으로, 하느님께서는 고난의 현실 속에 있는 아시아 백성들을 참 많이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내미심을 느낀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아시아교회를 위해 투신할 구원의 역군이 되라고 지금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신다.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 ‘숨어 계신 하느님’을 향한 신학적 추구
긍정 · 부정의 두 가지 신학 흐름, 상호보완 이뤄야
신학은 인간의 신앙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성적 작업이다. 즉, 신학은 교회가 신앙으로써 보편적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적 계시에 대한 학문적 성찰이다.
하지만 신학적 탐구 여정에는 반드시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 안에서 크게 두 가지 범주의 신학적 흐름이 있는데, ‘긍정의 길’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긍정신학’과 ‘부정의 길’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부정신학’(否定神學)이다.
중세 이래 주류를 이루었던,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을 명시적인 언어로써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서구 전통의 지성주의적 신학은 현대 세계의 비극적 사건들과 다원적 흐름들을 겪으며 도전을 받는다.
즉, 모든 것을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긍정신학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부정신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부정신학, 인간 지성의 한계 인정
부정신학은 신학이나 하느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신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감각과 유보이다.
즉 이성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신학적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인간이 결코 알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의 영역을 남겨 두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의 길’이란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지성적 접근을 폄하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접근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성인이 말했듯이, 우리의 한계적 지성에 의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벌써 2천 년이 넘게 지났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조롱 섞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어둠과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금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마음 아파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세상 안에서는 수많은 불의가 자행되고 악의 실재가 번창하며,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기계적으로 혹은 자동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아직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시면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이 고통스러운 구원의 신비를 우리는 신앙적 직관으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학은 경우와 필요에 따라 매우 정당하게 부정신학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현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자리한 부정신학적 흐름에 대한 성찰과 재발견이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탐구 여정과 그 고귀한 신학적 작업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드러낼 수 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최근에는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사적 성찰에 있어, 일견(一見) 서방신학의 전통 안에서는 주로 긍정신학의 흐름이 우세하였고 동방신학의 전통 안에서는 주로 부정신학의 흐름이 우세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쉽게 규정될 수는 없다. 사실, 서방신학과 동방신학 모두에서 두 가지 흐름은 각기 명맥을 유지해왔다.
서방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전통 안에서 부정신학적 방법론은 분명히 그 맥을 이어 왔다. 동방과의 대분열이 일어난 11세기 이후 조직신학적 측면에서는 부정신학적 흐름이 거의 차단됐지만, 영성신학적 측면에서는 명맥을 이어왔다. 영성신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신비체험과 부정신학은 긴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완덕을 향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성성(聖性)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있어, 피조물인 인간이 한계를 넘어서 성성의 최종 목표이자 원형인 하느님을 이해하고 인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신비사상에서는 하느님 인식을 위한 부정신학적 방법론을 적극 차용하게 된다.
비록 인간 영혼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다가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만 알아도 인간 영혼은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비유나 시의 형태로 하느님을 향한 신비적 지혜가 표출되기도 한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치 새가 두 날개로 날아가고 인간이 두 다리로 걸어가듯이, 하느님을 향한 인식의 여정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신학적 흐름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긴장 속에서도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은 결코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직접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하시는 하느님’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숨어 계신 하느님’, ‘이해될 수 없는 하느님’,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그리고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 안에서 이 흐름의 근원을 살펴본다면, 우선 카파도키아의 교부들 중 특히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40~394 이후)가 전개한 신비신학에서 부정신학적 경향이 발견된다. 물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이러한 부정신학적 신비사상을 아주 독창적으로 창출해 낸 것은 아니고, 300여 년 이전의 유다교 사상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기원전 20~기원후 42 이후)의 접근법으로부터 어느 정도 방법론적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사에 있어 부정신학의 흐름을 본격적으로 정립시켜 중세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바로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500년 경 사망)이다.
국제신학위원회의 2012년 문헌인 ‘오늘의 신학:전망, 원칙, 기준’에서는 본문 마지막 부분(86~99항)을 통해 이러한 부정신학적 흐름의 정당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선 ‘오늘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참된 지혜를 설명함에 있어,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철학의 순전히 인간적인 지혜를 초월하는 이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의 지혜는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라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것이지만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91항)
하지만 이 두 지혜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임을 강조한다.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는 형상적으로 구별되며, 이들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신비적 지혜는 결코 신학적 지혜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 개인 안에서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나 그리스도교 지혜의 이 두 가지 형태 사이에 긴밀한 연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92항)
긍정신학적 맥락에서 강조되는 ‘신학적 지혜’란 무엇인가? 신학적 지혜란 한마디로 “신학자의 이성적 작업에서 나오는 지적 관조”를 의미한다.
“신학적 지혜는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신앙의 선물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습득된 지혜이다.”(91항).
-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주례한 국제신학위원회 회원을 위한 2009년 미사 모습. 국제신학위원회는 2012년 문헌 ‘오늘의 신학…’에서 부정신학적 흐름의 정당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부정신학적 맥락에서 강조되는 ‘신비적 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개념적인 지식으로서의 ‘신비적 지혜’는 ‘성인들의 지혜’라고도 불리며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에서 도출되는 성령의 선물을 뜻한다.
“이 지혜는 관상으로, 그리고 평화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로 인도한다”(91항).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차적 실재는 하느님의 계시이기에, 창조와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적 경청의 결과로 가능해지는 긍정신학은 신학의 우선적인 출발점과 방법론이 된다.
하지만 신학의 여정 안에서 결국 부정의 길과 언어의 부재를 또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삼위일체의 구원적 신비 앞에서 느끼는 표현 불가능한 경외감 때문이다. 언어로 온전히 말하고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믿는 이들은 사랑으로 이미 그 신비에 참여하여 그 신비를 느끼고 그 신비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98항 참조).
“신학은 마땅히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참되게 말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식이 참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하느님의 실재와 관련해서는 부적합한 것임을 안다.”(97항).
결국, 신학의 본질적 과제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를 향한 우리의 전적인 투신이요 겸허한 추구를 의미한다.
“하느님 신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참된 지혜를 찾으려 노력함에 있어, 신학은 하느님의 전적인 우선성을 인정한다. 신학은 하느님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소유됨을 추구한다. 신학은 거룩함을 향한, 그리고 하느님 신비의 초월성에 대해 점점 더 깊어지는 의식을 향한 노력을 내포한다.”(99항)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3) 돌봄과 치유의 신학
‘주님 사랑 · 치유’ 이웃에 전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참 과제
몇년 전 캄보디아의 가톨릭교회에서 온 소년소녀들의 전통춤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축복 춤’이었다. 그것은 휠체어에 탄 다섯 명의 장애우 어린이들 뒤에서 다섯 명의 정상 어린이들이 함께 춤을 추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뒤에 있는 어린이들이 휠체어를 끌고 당기고 이리저리 돌리며 춤을 추는 동안,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애우 어린이들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 꽃잎들을 객석을 향해 뿌려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곁에 앉아 있던, 그들의 인솔자였던 캄보디아 현지 주교님의 설명을 들었다. 알고 보니, 이 춤에는 캄보디아 교회 특유의 신학적 해석이 담겨 있었다.
캄보디아는 오랜 내전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한 비극의 땅이다. 그 ‘킬링 필드’에서의 참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전 기간 동안 설치된 수많은 대인지뢰들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논밭에서 뛰어놀다가 팔다리가 잘려나간 어린이들 중 다섯 명이 지금 그 휠체어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을 탓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비극적 전쟁의 희생자인 장애우들을 하느님께서 특별히 더 많이 사랑하시고 더 많은 자비를 베푸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신들을 깊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축복을 받았기에, 넘쳐나는 축복을 자신들만 간직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이 바로 ‘축복 춤’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휠체어에 앉은 장애우 어린이들이 관객들을 향해 뿌리는 꽃잎들은 바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강의하는 필자는 그 순간 바로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신학적 비전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상실의 연속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그러하다. 노화의 상 실감과 절망감을 얼마나 피하고 싶기에, 오늘날 그렇게 많은 노화 방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노화나 병고 혹은 사고를 통한 우리 몸과 마음의 깨어짐과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깨어지고 부수어져버린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렇듯 고통 받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손길이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2-34).
필자는 몇 년 전 왼쪽 무릎 관절을 크게 다쳐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이 구절을 묵상한 적이 있다. 등산을 유일한 취미로 하던 내가 이제는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는 상태,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읽었던 이 구절은 평상시에 읽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적 역동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예수님 앞에 모여든 수많은 아픈 사람들의 상실감과 절망감, 고통 받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길, 마침내 이들을 돌보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적….
나 역시 거기에 함께 있고 싶었다. 예수님의 손길이 와 닿기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수많은 아픈 사람들 속에 함께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녕 내 몸이 직접 아파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정녕 내 몸이 정말 아파봐야 비로소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인가?
예수님께 치유받는 사람들은 몸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유 받게 된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 사화는 그저 물리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자동적, 기계적인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를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권능이 이 땅 위에 실현되고 이루어짐을 뜻한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기적 사화들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란 공간적이고 지역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 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진정한 기적의 핵심은 물리적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결국 예수님의 돌봄과 치유는 육체만을 낫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 한 인간의 전인적 차원을 관통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영육이원론을 극복한 차원에서의 전인적 치유 개념이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성경은 통합적 인간을 말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는 병을 곧 죄의 결과라고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몸이 아픈 사람들은 모두 큰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내 윤리적 죄와 병은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병고를 단지 육체적 차원에만 국한시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죄’라는 게 무엇인가? 악한 결과를 자아내는 매우 탐욕스러운 죄악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가 생겨나기도 한다.
고해성사에서 “사는 게 다 죄지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많은 부족함과 한계 속에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죄’란 법적이고 윤리적 차원에서의 능동적 죄악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 즉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적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이 죄 많은 한계적 인간에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그분의 권능이 내 온 존재를 관통하여 나를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 바로 기적의 참다운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어느 집에 계실 때, 군중이 너무 많아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집 지붕을 벗기고 내려진 들것에 실려 들어온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실 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하고 먼저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0-1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순히 외적이고 육체적인 차원만을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 준다. 그 사람의 내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던 존재론적 상처, 죄와 고통의 뿌리가 되었던 모든 상처로부터 근원적으로 치유하심으로써 그 외적인 병고와 장애까지도 낫게 하시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용서를 통한 내적 화해가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육신의 병이 낫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을 전인적 차원에서 돌보심의 결과이다.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어 자유롭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구마 기적 사화는 더욱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이는 여태껏 그 사람을 지배하던 모든 부정적 힘과 세력으로부터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함이다. 죄와 상처, 미움과 분노 등 나를 사로잡아 억누르며 부자유스럽게 하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선사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구마 기적은 돌봄과 치유의 전인적 차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 다양한 연령대의 신자들이 모여 성체조배를 하고 있는 모습.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체험하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체조배의 참의미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치유의 기적이든 혹은 구마의 기적이든 간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바로 아픈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고 가엾이 여기시는 그 자비롭고 온유한 마음 때문이라는 점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인가? 이러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바로 돌봄과 치유의 원천이다. 이 온유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 성심의 아름다운 실체이다. 성체조배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체험함을 뜻한다.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대신 피 흘리고 상처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지치고 상처 받은 마음을 쉬게 하고 위로와 치유를 받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근본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는 결국 이것이다.
그분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고 치유받은 우리가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비와 사랑의 돌봄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4) 오늘의 신학, 그 전망과 원칙과 기준들
신학, 다양한 흐름 속에서도 보편 · 단일성 유지해야
-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모습. 공의회 개최 50주년과 새로운 제3천년기를 맞이하면서 국제신학위원회는 오늘날 신학의 위기와 전망을 제시한 문헌 ‘오늘의 신학:전망, 원칙, 기준’을 발표했다.
현대 신학의 특징적인 흐름과 동향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 2012년에 출간되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산하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준비하여 발표한 최신 역작 ‘오늘의 신학:전망, 원칙,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헌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아마도 새로운 제3천년기를 맞이하면서 신학의 위치와 전망, 기준과 원칙에 대해 새로이 점검할 시대적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개최 50주년을 맞이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공의회 이후의 신학에서 그 전반에 걸친 방법론적 성찰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연재의 두 번째 순서였던 지지난주에,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흐름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미 이 문헌의 해당 부분을 인용한 바 있다.
‘오늘의 신학’은 가톨릭 신학의 전망과 원칙 그리고 기준에 대하여 상세하고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신학사적인 통시적 성찰과 신학 분야별 공시적 성찰이 교차되어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매우 균형 잡힌 통합적 시각에서 오늘날 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위기를 분석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망을 잘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는 가톨릭 신학 방법론에 관한 현대적인 교과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이 문헌의 출판이 신앙의 해를 의도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앙의 해를 시작하는 2012년에 이런 표준 교과서와도 같은 신학 방법론에 관한 문헌이 나오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이는 오늘날 가톨릭 신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값진 나침반이고 지도이며 등불이라 할 수 있겠다.
국내에서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소속의 전문 신학자들 3명에 의해 이 문헌이 완역되어 2012년 10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문헌의 번역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필자는 금년 가을학기에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이 문헌을 중심 교재로 하여 신학 방법론에 관한 과목을 개설할 예정이다.
‘오늘의 신학’에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논점은 바로 신학의 단일성과 다수성에 관한 성찰이다.
첫 머리에서, 이 문헌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시기에 여러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이 생겨났음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 관점에서 잘 설명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시기는 가톨릭 신학을 위해 지극히 풍요로운 기간이었다. 새로운 신학의 목소리들이 특히 평신도들과 여성들에게서도 나타났고, 새로운 문화적 맥락들로부터, 구체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신학들이 등장했으며, 평화, 정의, 해방, 생태학과 생명윤리와 같은 새로운 고찰 주제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성서학, 전례학, 교부학, 중세 연구의 부흥으로 기존의 주제들이 더 깊이 있게 연구되었으며, 교회 일치 대화, 종교 간 대화, 문화 간 대화 등 새로운 숙고의 장들이 열리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발전들이다. 가톨릭 신학은 인류 가족 전체와 대화하고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그 창립자에게서 받은 구원의 힘’을 제공함으로써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어 놓은 길을 따르려고 노력했다.”(1항)
하지만 이 문헌은 세상의 여러 계층과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적 흐름의 다양화가 마냥 긍정적인 결과만을 산출하지는 않았음을 또한 지적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바로 신학의 단편화와 그로 말미암은 가톨릭 신학의 정체성 위기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신학에서는 일종의 단편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신학은 바로 위에 언급된 대화에서 언제나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도전에 항상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학을 특징짓고 또한 신학의 다양한 형태들 안에서 그 신학에게 오늘의 세계와 대면하는 데에 있어서 분명한 정체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른다.”(1항)
이러한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신학의 여러 다양한 흐름 속에서도 그 단일성이 반드시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메시지를 세상에 전달할 때 신학적, 사목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는 공통된 담화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일성을 획일성이나 그저 단일한 방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신학의 단일성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학의 단일성은 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회의 단일성과 마찬가지로, 보편성의 개념과 긴밀히 상호 연관되고 또한 거룩함과 사도 전래성의 개념과도 상호 연관되어야 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온 세상과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에페 1,3-10 1티모 2,3-6 참조). 구세주가 단 한 분이라는 사실은 보편성과 단일성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을 보여 준다.”(2항)
그렇다면 왜 신학의 다수성이 생겨나는가? 그 이유는, 보편적 구원의 진리로 드러나는 신적 계시가 지니는 충만함과 풍요로움이 너무나도 방대하여 이를 단 하나의 신학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단일하고 보편적인 구원의 진리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체험되기에 다수의 신학들이 생겨나게 된다.
즉, 하느님의 구원 진리에 대한 인간 체험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동일한 하느님 신비에 대한 체험이지만, 이는 인간이 처한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역동적이고 극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 체험이 매우 일상적이고 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그것이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 진리에 대한 유일무이한 체험 방식은 아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체험을 신학적으로 언어화할 때, 상이하고 다양한 형태의 신학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언제나 동일한 실체의 보석이 그것을 보는 사람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또 그것을 비추는 조명의 차이에 따라 경우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빛나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하느님 신비의 무한성,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다양한 맥락들 안에서 구원을 위해 작용하는 수없이 많은 방법들을 탐구하는 신학은 마땅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2항)
신학들의 다수성과 다양성은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 진리 자체의 풍요로움에서 나오는 귀결이기에 매우 정당한 것이다.
“인간은 그 진리의 특정한 면들만을 파악할 뿐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더욱이 최종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그 진리를 항상 새로운 눈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학이 숙고하고 해석하는 대상들의 다양성과 인간 질문의 다양성 자체로 인하여, 신학은 연구되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불가피하게 다양한 분야들과 방법들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들의 다수성은 실상 모든 장소와 모든 종류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단일한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의 보편성을 반영한다.”(77항)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신학은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에 봉사하는 데에서 일치되어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를, 그리고 유일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유일한 구원 계획을 연구함에 있어 이 다수성은 그들을 특징짓는 유사한 특징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2항)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적 다수성은 결코 신학의 단편화나 불일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구원 진리를 수많은 방법들로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의 단일성은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단일한 초점을 맞추는 것을 요구하며, 그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에 대한 신학들의 여러 가지 설명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5항)
결론적으로, 문헌 ‘오늘의 신학’이 가장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어떻게 다수의 신학들 속에서도 진정한 가톨릭 신학의 단일성을 찾아낼 수 있는가, 즉 진정한 가톨릭 신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준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과제이다.
그런데 이처럼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통일된 계획 안에 다수의 연구와 방법들을 통합하려 시도하며, 진리의 단일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신학 자체의 근본적인 단일성을 주장한다는 것”(85항) 자체가 바로 가톨릭 신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한 가지 주요 기준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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