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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영원한 표징
31: 12-18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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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그 나라를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마치 대한민국이 1948년에 나라를 시작한 것과 같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언약을 맺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불러 올리셔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할 여호와의 집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집을 지으면 그 나라의 도성이 세워지는 것이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거하시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앞에 나아가 경배하며 함께 교제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4:12-31:18절까지 여호와의 집을 짓는 식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집을 회막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고 교제하는 장소임을 나타냅니다. 이 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의 집을 짓는 건축자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과 여호와께서 친히 기록하신 돌판을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대해서 본문이 말하는 바를 따라서 살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따라서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려고 하는 주제에 따라 강조점이 다른데 이를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교리신학이 가져다 준 영향 때문입니다. 주제와 제목을 따라 설교하는 것도 이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만 해도 안식일에 대한 본문이 12장과 16장에 이미 나왔습니다. 12장에서는 유월절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절을 7일 동안 성회로 지킬 것을 말했고, 16장에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 안식일 지킴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같은 안식일을 말해도, 또한 같은 출애굽기 안에서 안식일을 말해도 그 문맥에 따라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 본문도 안식일을 말하기는 하지만 다른 본문과 차이점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셔야 할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표징’이라는 말입니다. 이 ‘표징’이라는 단어는 안식일을 말하는 다른 본문에서 여간해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안식일은 이 ‘표징’이라는 말과 떼어놓고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
오늘 본문 13절과 17절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대대의 표징’이다, ‘영원한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안식일을 표징이라고 하는가? 표징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하면 Sign이라고 하며, 비슷한 말로는 표적, 징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Sign이라고 하면 야구경기에서 포수가 투수에게 보내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또 야구 감독도 선수들에게 이 Sign을 내면 그 Sign을 보고 선수들은 작전을 수행합니다.
이보다 더 쉬운 예를 든다면 결혼한 사람들이 손가락에 끼는 반지를 생각하면 좋습니다. 반지를 낀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어떤 누구와 언약을 맺은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합니다. 이와 같이 본문 16절에서도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안식일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구나!’라고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는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왜 안식일 지킴을 말하며, 이 안식일 지킴이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친히 기록하신 증거판 둘을 주시는 것을 기록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징’이라는 말에 대하여 이해를 했으니 이제는 본문을 자세히 차례대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문 12-13절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여호와이 명령이 주어지고, 14-15절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것인지를 말합니다. 그런 후에 16-17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고, 18절은 여호와께서 친히 쓰신 증거판을 주심을 말합니다.
오늘은 17절까지 말씀을 드리되 만약 시간이 된다면 18절까지 마저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2-13절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이 말씀을 그대로 풀면 안식일을 지켜라고 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대대의
표징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표징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줄 알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이방인 중에서 구별되어 여호와께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반지를 손가락에 끼게 되면 다른 사람이 이를 보고서 ‘아! 저 사람은 누구의 남편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아내에게 속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반지를 보고 다른 남자들 중에서 구별되어 누구의 남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지가 바로 표징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럼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14절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어떻게 안식일을 더럽혔습니까?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더럽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죽인다는 의미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 속한 언약의 표징
인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음으로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부터 제외시킨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14절에 말한 다음에 15절에 비로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상세히 기술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엿새 동안은 일을 하지만 일곱째 날은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곱 째 날은 여호와께 거룩한 큰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16-17절에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안식일을 지킴으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 됩니다. 어떠한 표징인가?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쉬었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번에도 이 성막을 ‘언약의 거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배경은 출애굽기 24:12절 이하에 돌판을 주시려고 모세를 여호와께서 부르신 것과 이제 31:18절에 증거판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성막을 지으라는 말씀 안에 이 안식일 지킴이 들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창세기의 창조 기사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창세기 1:1-2:3절까지 엿새 동안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일을 마치신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창세기 2:4절 이하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그 후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까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다시 창세기 1장과 2장의 전체적 흐름을 말하자면 엿새 동안의 창조, 일곱째 날 안식, 그리고 에덴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을 창설하셨다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언약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에덴은 쉽게 말하면 성소와 같습니다.
이러한 그림을 다시 설명하면 천지가 창조된 모든 만물과 세계 가운데 에덴동산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을 축소시켜 우리 나라로 설명하면 대한민국 전 영토가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고 그 안에 서울이라는 도성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서울이라는 도성에 왕이 삽니다. 이 왕의 통치가 서울에서 나옵니다. 이와 같이 에덴은 사람을 하나님의 대리왕으로 지으시고 거기에 두사 생육하고 땅을 정복하는 통치를 행하도록 한 도성인 셈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거닐고 계셨으니 성전 혹은 성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쉼은 여호와께서 만물을 지으신 영광의 일에 사람이 참여하여 즐거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8.15 광복절 같은 날에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많은 시민이 함께 참여하여 즐거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지음 받은 사람이 에덴 성소에서 여호와의 언약을 지켜 교제합니다. 그 교제는 에덴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시내산에서 성소를 지으심은 모든 세계를 이 성소를 통해 다스리는 왕궁과 도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인들은 이 성소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내산의 성소는 창조 시의 에덴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자기 자신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그리고 창조하신 여호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킴은 가나안 땅 예루살렘 도성이 모든 세계 중에 으뜸이요, 열방 중에 우두머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성전으로부터 율법이 나옵니다. 그 율법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립니다. 그리하여 창조된 전 세계가 여호와의 나라의 통치를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시내산의 성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솔로몬 성전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 국가와 왕들이 이 성전에 와서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킴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임을 나타내고 곧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나라를 잃어버리고 쫓겨날 때에도 안식일을 더럽힌 것이 원인이 됩니다.
에스겔 20:19-21절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 땅에 흩어질 것입니다. 그 때 여호와의 성전은 아래에 바퀴를 달고 또 날개를 달아 예루살렘에서 떠오를 것입니다. 마치 헬리콥터가 이륙하는 것처럼 에스겔은 그 성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버린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한양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던 모습과 한양이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였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이름과 언약에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 멸하지 아니하시고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들에게 다시 돌아올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을 통하여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던 것입니다.
이 재건된 성전에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다윗의 자손이 오실 것임을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이 이 성전에 임하시면 이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성이 될 것임을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더 이상 애굽에서 돌아와 짓는 성전이 아니며 전혀 새로운 도성이 될 것임을 약속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돌아와 지었던 성전으로 함께 했던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이제 다시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와 짓는 성전은 다시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전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는 열방이 함께 참여할 것입니다. 그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바로 이 나라와 성전의 시작을 마가복음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한 대로 복음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을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나라가 건국되었음을 알린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 이사야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 아들이 오셨는데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의 강도의 굴혈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지 못하자 그 나무를 저주하여 말라버리게 하신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멸망하게 될 것임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옛 도성인 예루살렘 성전을 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성전을 지을 것입니다. 이 새 성
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11장부터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천하 만민의 죄를 용서해야 그들이 들어올 수가 있기 때문에 죄를 사하시는 용서의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예전에 종이 주인을 섬겼던 곳과 다르게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 새롭게 지어지는 새 성전은 어떤 표징을 갖고 있을까요? 애굽에서 나온 구원의 표징인가요? 첫 창조의 표징을 나타내고 있을까요? 마가복음 13장을 보시겠습니다. 내용이 많으니까 제가 빠른 속도로 낭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가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고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 ”
출애굽기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대대의 표징이다,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새 성전을 건축하는 자에 대하여 다윗의 주로 오신 이 주님의 성전의 건축자들은 서기관들이 아니라 부자도 아니라 두 렙돈을 바친 과부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마가복음 13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출애굽기 본문을 말씀드릴 때도 ‘표징’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자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13장에서도 표징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징조’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직접적인 단어로는 쓰이지 않았지만 징조와 더불어 29절에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도 여러분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가복음 13장이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가르치는 말씀인 줄 알기 쉽습니다. 그래서 종말론자들은, 특히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마가복음 13장을 많이 인용할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666이라든가, 쓰나미나 일본의 지진으로 말미암은 원자력발전소의 참사를 제시하며 종말의 징조가 나타난 것으로 사람들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3장은 그런 내용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의 성소는 안식일 지킴을 통해서 표징을 나타냈습니다. 그와 같이 이제 주님이 새롭게 짓는 성전은 어떤 표징을 갖고 있는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마가복음 13장의 주된 내용입니다. 출애굽의 시내산 성소는 안식일 지킴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3:1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창조 이후로 이런 환난은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창조의 세계가 다 끝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 11장 이후에 모든 말씀은 다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을 거니시며 등으로 말씀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1절에서도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라고 말하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관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성전을 마주 대하고 감란 산에 앉으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4제자가 조용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4절입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의 때와 징조에 대하여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예수님의 답변은 징조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파가 전도집회 때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것처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종말의 징조들을 사진으로나 동영상으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징조에 대한 답변을 중심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본문이 강조하는 말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최고 관심사이겠습니까? 당연히 징조이지요. 그러니까 징조에 관한 것으로만 마가복음 13장을 읽으려고 했고, 그런 점 때문에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중심은 놓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도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을 읽으려고 하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허다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헛되게 믿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욕심에 맞으면 은혜가 되지만 자기 욕심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진리여도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신이 되는 셈인데 그것을 몰라요. 진리의 말씀이 자기에게 기쁨이 되고 은혜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서는 은혜가 없답니다, 감동이 없답니다, 허참! 적어도 성경말씀이 상식적으로 풀어지는 것만이라도 확인을 해야 할 터인데 전부 자기 마음에 묻고 있으니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13장이 말하는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징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9절 처음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또한 23절에 “너희는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주의하라, 삼가라 이런 말들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 다음에 33절 이하를 보면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34절에 “깨어 있으라”, 35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마지막 37절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러면 마가복음 13장에 비슷한 말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고 있는지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러니까 징조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마가복음 13장에서 우리는 ‘주의하라’, ‘삼가라’, ‘깨어 있
으라’는 말씀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말씀하는 마가복음 13장의 중요한 내용은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마가복음 13:5절 이하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5-8절까지 첫 부분으로 보는데 그 중심은 5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9-27절까지 볼 수 있는데 그 중심은 9절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28-37절인데 그 중심은 33절의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럼 그 첫 부분을 보십시다. 5-8절입니다. “ ...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미혹입니까? 많은 사람이 와서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할 것이니까 미혹을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 난리 소문을 들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난리의 소문을 가지고 그들은 무엇이라고 미혹하겠습니까? 세상의 끝이 왔다고, 종말이 왔다고 미혹할 것입니다. 그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을 보십시다.
핍박과 박해가 일어날 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핍박이 일어날 것입니까? 국가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핍박을 당하며 만국에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14절 이하에 역사적인 환난이 올 것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러한 환난은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게 한 일을 역사적 배경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과 자기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돼지를 제단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박해는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멸망은 창조 이후로 없었던 환난의 날이 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즉 안티오쿠스의 박해를 배경으로 로마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A.D.70년에 멸망하는 일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러한 큰 환난의 날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미혹할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로마군대는 나중에 황제가 된 티투스장군이 지휘하여 예루살렘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로마에 정변이 일어나 잠시 예루살렘 공략을 멈추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알고 있었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의 날에 대하여 24-27절은 ‘그 때’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그 때’ 역시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니까 딱 종말의 때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29절의 말씀이 맞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런 일은 언제 일어난 일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모두 예루살렘의 멸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군대에게 멸망을 당한 일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말을 하는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가? 이것은 재림을 할 때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아주 암울한 상황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창조된 질서가 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에덴을 창설하신 것은 창조된 세계의 도성으로 에덴을 세우신 것입니다. 에덴에 무너지면 곧 창조가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에덴의 도성과 같은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후로 모든 세계의 머리 곧 도성은 예루살렘입니다. 이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면 창조된 세계가 흔들리고 끝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임진왜란 때 함경도까지 다 점령해야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양 도성만 망하면 그 나라는 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때를 당하면 아마도 하늘이 흔들리고 설 곳이 없는 암울한 상황이라고 누구든지 말할 것입니다.
난리의 소문이 나고 지진과 기근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땅은 이제 살 곳이 못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면 인자가 방문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임하심을 꼭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알려고 해요. 그게 아니라 확실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문 앞에 이른 것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8절 이하에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배울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러한 상식처럼 29절에 ‘이와 같이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아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문 앞에 이른 줄 알아야 합니다.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로마로부터 박해를 당할 때도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함을 당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천하 만민을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으로 사방으로부터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성령이 예루살렘에 임하고 박해를 당하여 믿는 자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함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은 첫 창조된 세계의 도성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여호와의 안식일에 함께 하는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표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의 안식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예루살렘은 자기 열매를 맺지 아니함으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세계의 안식에 참여했던 모든 질서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끝난 것입니다.
주님의 죽고 부활하심을 따라 세움을 입은 교회는 더 이상 창조된 세계의 질서에 속하지 않습니다. 죽음
을 이기시고 새 창조를 이루신 새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루살렘 도성이 주었던 안식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로 말미암아 나타난 새 생명의 나라에 속한 도성으로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짐을 받은 표징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새 창조의 질서를 나타내는 표징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창조의 안식을 완성한, 가나안 땅의 안식을 성취한 하늘의 안식을 나타내는 표징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로 새 성전입니다. 이 새 성전은 새로운 표징을 갖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나타낸 표징입니다.
첫 창조된 세계의 안식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언약으로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의 풍성한 곡식과 장구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새 창조로 말미암은 안식은 죽음을 이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을 얻고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주님의 날에 성찬상에 모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들이 새로운 생명을 나타내는 표징은 바로 이 주일에 주님의 성전을 이루어 성찬을 먹고 마심으로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새 언약으로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가 바로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표징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에 친구들 보면 결혼반지를 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반지의 문양이 있는 곳을 감추려고 반지를 살짝 돌립니다. 결혼 반지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직 총각이라고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결혼 반지가 아니라 무슨 졸업 기념 반지라고 꾸며댑니다. 결혼의 언약을 새긴 반지와 같은 표징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결혼반지를 숨기려고 하지는 않는 것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어떻게 숨길까요? 주일에 예배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먹고 마심에 매여 사는 것입니다. 교묘하게 반지를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척 하다가 밖에 나가면 아닌 척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에 출석하는 정도로 자기 구원을 만족시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져온 역사적 증거를 모르는지, 받지 아니하려는지 제가 전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문 앞에 이르렀다는 확실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세상이 안식을 주고, 창조된 세계가 자기의 피난처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마실 것을,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엿새 동안은 자기 일을 위하여 죽어라고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주일에 교회에 와서는 졸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일은 지켰다고 스스로 안위합니다. 전부 자기 반지, 주님과 결혼한 반지를 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 직업을 빼앗아갈까봐, 내 생명을 빼앗아갈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 주일이 바로 새 언약 백성인 교회가 갖고 있는 표징입니다. 이 날에 교회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몸을 이루며 그 몸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천당간다는 것만 붙들고 있지 말고, 제발 이 생명의 식탁이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붙들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이 예배에 늦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이 예배를 소홀히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예배하러 교회에 오는 도중에 보니까 관악산에 등산객들이 떼를 지어 올라갑니다. 그들은 이 땅의 생명을 위하여, 건강하기 위하여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이 역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모릅니다. 옛 세계와 옛 시대와 옛 성전의 멸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새 성전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어갈 것입니다. 흙으로부터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이 날에 새 성전된 주님의 몸을 이루어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참여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교제를 누립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언약의 표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질서에서 주님과 누리는 생명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들임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