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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
1963년 11월 23일 금요일 낮 12시 30분경 미국 달라스 시 한 복판에서 오픈 카 퍼레이드를 하며 달라스 광장 서적 회사 코너를 지나는 미국 대통령 차를 향해 3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인기와 존경을 누리던 뉴 프런티어의 상징이었던 존 F.케네디가 쓰러졌습니다. 그날 대통령의 호주머니에는 그가 잠시 후 연설하기로 되었던 연설문(Trade Mart Speech)카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연설문의 마지막 문단은 “범사에는 때가 있다”는 전도서의 말씀, 지금은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파수꾼의 사명을 위해 국력신장을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그리고 이어서 “주께서 성을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헛되다”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쳐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연설은 발표되지 못한 연설이 되었고 그의 한 나라의 파수꾼의 사명도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케네디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국가 조찬 기도회에 참여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원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회 후에 그는 빌리 목사님에게 잠시 백악관에 가서 설교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를 할수 있느냐는 청을 합니다. 그때 빌리 목사님은 감기중이어서 제가 대통령 각하에게 감기 균을 옮기고 싶지 않다고 다음에 말씀드리면 좋겠다고 사양을 했다고 합니다. 케네디가 쓰러지던 그 날 11월 23일 이 뉴스를 접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순간적으로 몇 달 전 워싱톤에서 자기에게 백악관에 가서 좀 더 이야기 할 수 없느냐고 간청하던 대통령의 애절한 얼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은 그날 감기를 구실로 케네디와 더불어 영원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것을 일생 최대의 후회로 생각한다고 그의 전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 3:11에서 성경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 대통령에게도 그리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왜 인간은 모두 영원을 사모하게 되었을까요?
1. 시간은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때에는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일년 사 계절이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음과 같습니다. 겨울잠을 깨고 다시 기지개를 펴는 새 싹들의 아름다움이 봄의 아름다움이라면 여름은 푸르른 신록으로 자연을 단장하고 우리를 우거진 녹음으로 초대하는 아름다움의 매력을 갖지 않습니까? 낙엽이 떨어지고 쌓이는 가을의 거리에서 우리는 사색의 깊은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다면, 겨울은 온 천하의 대지를 순백의 눈발로 덮는 아름다움을 선물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유년기가 꿈으로 가득찬 동화속의 왕자와 공주의 계절 곧 봄의 계절이라면 사춘기와 청년기는 열정과 갈등을 함께 겪는 치열한 여름의 계절이라고 할만 합니다. 무르익어가는 인생의 꿈과 좌절을 함께 수확하는 장년기가 우리의 가을이라면, 인생의 노년기는 안식의 겨울잠을 준비하는 준비여하에 따라 포근할 수도 한없이 외로울 수도 있는 겨울의 체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계절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불만스러워하고 무엇인가의 부족함에 허우적거립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성공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기자가 저 유명한 성공한 부호 록펠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소유한 모든 부요함으로 만족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아니오”였습니다. 기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소유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의 유명한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조금만 더요”(Just a little more)입니다. 인생은 결코 시간이 흐르고 돈과 지위가 생긴다고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든 인간 존재 안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 이 세상의 시간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내세와 영원에 대한 욕망을 갖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배고픔의 욕망은 먹을 것에 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목마름은 마실 것에 대한 존재를 가정합니다. 이성에 대한 욕구는 사랑할수 있는 이성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세에 대한 동경은 내세와 영원한 세상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국 서안에 가셔서 저 유명한 진시황의 진시황능이나 병마용을 구경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세에 가서도 자신의 권력과 목숨을 지키기 위한 그 치열한 내세의 갈망의 흔적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 세상만으로 끝날 수 없는 저 세상에 대한 동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 유명한 철학자 칸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내세는 있어야만 하는 당위(ought to be)의 세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영원을 사모하도록 되어 있습니까?
2. 시간은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며 더 나은 삶,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인생의 조건을 기대하며 삽니다. 그러나 시간은 잔인하게도 흘러가며 우리에게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가져가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오늘의 본문인 전도서 3장에 보면 때가 모두 28개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28개의 때는 다 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14개의 짝으로 되어 있는데 14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14개는 부정적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낙관할 것도 비관할 것도 아닙니다.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을 반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인생을 관찰하면 결국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고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이 인생의 진실이 아닌가요?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1:2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철학자 키엘케골은 인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자, 우리가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 인생의 긍정적인 모든 것이 부정에 의해 삼키운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생명은 죽음에 삼키우고, 심은 것은 뽑히웁니다. 치료받다가 결국은 죽고, 세운 것은 결국 헐리우고 맙니다. 웃다가 울고, 춤추다가 주저앉아 웁니다. 거둔 돌을 다시 던지고, 안았던 사람들을 버리고 떠납니다. 찾은 것을 다시 잃고, 지키던 것을 다시 버립니다. 꿰매었던 것은 다시 찢어집니다. 말하다가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합니다.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고, 평화는 전쟁으로 깨어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가수 최희준은 유명한 하숙생에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2절)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가”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인생은 정말 허무하지 않습니까? 만일 내세가, 영원한 세상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내세와 천국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14:2-3)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을 사모합니다. 이 세상에서 잃어가며 사모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3. 시간은 불공평한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인생의 흔적은 우리에게 주름살을 남깁니다. 물론 이것은 성형으로 많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여인의 인생의 4단계가 소녀, 처녀, 아줌마, 할머니였는데 요즈음은 소녀, 처녀, 아줌마, 보톡스 아줌마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없어지셨습니다. 그러나 얼굴의 주름살은 없애도 없앨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마음의 주름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상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온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상처를 간직하고 삽니다. 억울한 일, 배신당한 일, 사기 당한 일, 빼앗긴 일, 짓밟힌 일, 학대당한 일, 매 맞은 일-이 모든 상처가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이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전부라면 인생은 얼마나 불공평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을 넘어 영원이 존재한다면 천국이 존재한다면 인생의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특별히 장애인 주일입니다.
장애인 형제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선진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런 약자들이 보호받고 사랑받는 통합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장애인들이 치유받고 위로받고 회복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 가서 제일 먼저 경험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치유와 회복입니다. 계21:4에 의하면 그는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사망과 애통을 폐하십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고 다시는 아픈 것이 있지 아니 할 세상으로 새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천국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천국의 소망을 소유하고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난 장애 시인 송명희 자매는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본래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의사가 태아의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신체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소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일생을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일곱 살 되기까지 너무 가난해서 우유 한 병 먹지 못하고 누워 지내며 열 살이 넘어서야 겨우 밥 숟가락을 잡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절망스러워 사춘기 시절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나이 17살 죽더라도 어려서부터 부모 따라 교회를 나갔기에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하루에 몇 시간을 목숨 걸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에 가득하게 비쳐오는 빛을 경험합니다. 거듭난 인생을 살기 시작한 그녀의 마음에 시가 탄생하고 노래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한 그녀는 온몸을 비틀며 하나님이 마음에 불러 주시는 시를 받아쓰기 시작합니다. 이래서 탄생한 시가 바로 [나]라는 시였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그녀는 공산품 제조기처럼 다들 똑 같이 살아야 공평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우리가 각자 받을 영광이 다를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웃는게 다 기쁨이 아니며/
우는게 다 슬픔이 아니다./
하나님은 슬픔으로도 기쁨을 만드시며/
하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전도서의 기자도 동일한 약속을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분,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는 분, 우리가 잃은 것을 찾게 하시는 분, 우리의 미움을 사랑으로 변케 하시는 분, 우리의 전쟁을 평화로 만드시는 분, 우리의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시는 분--그분이 바로 치유자 하나님(여호와 라파)이십니다. 그분의 온전하신 치유가 완성되는 나라가 바로 영원한 나라 곧 천국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나라, 그 영원한 천국이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그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신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그 영원으로 가는 길의 징검다리이십니다. 그는 오늘도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14:6)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