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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1:1-5 내가 인자와 공의를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지명하심에 따라 왕으로 임명은 받았으나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을 때부터 가장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훈련을 쌓아 앞일을 준비했습니다.
다윗은 왕의 직분에 대한 주제를 깊이 묵상함으로서 그 직분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스스로 분발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속히 나라를 주시도록 엄숙한 맹세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될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노래하는 일에 관하여 말하는 바가 본 시편이 그의 묵상의 요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언젠가 약속된 통치권을 받아 왕위에 오를 때 자기가 어떤 유의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는 말은 엄숙히 다윗이 의롭고 정직한 왕이 될 것을 선언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말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엄한 징벌을 내리시거나 아니면 저희에게 인자를 베푸시거나 항상 찬양을 받으실 분이신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이와 같은 해석은 지나치게 다듬어져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위로 그의 직임을 이루어 나갈 그 나라의 합당한 통치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게 찬양하리이다” 라고 말할 때 다윗이 그처럼 구별되고 명예로운 직분에 임명된 것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단순히 자기 자신의 충동에 따라 그 직분에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주제넘고 경솔한 행동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적절히 “인자와 공의”라는 이 두 마디 밑에 왕의 모든 덕성을 포함시킵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개인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 왕의 임무이므로 다윗도 역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갖을 것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바로 말하기를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잠16:12).
시편 101 편
2. 본문 2절은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될 때 얼마나 무거운 책임이 지워질 것인가 신중히 생각했습니다.
거의 모든 왕들이 왕권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옛적에 ‘왕은 왕으로 태어났든가 아니면 바보로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는 격언이 근거 없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왕들이 바보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하나의 잘못입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하기에 이른 것은 나라와 제국들의 통치권을 부여받은 자들이 바보 천치였던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맹수들과 인간의 부류에 속할 수도 없는 기타의 것들도 흔히 최고 권세를 잡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의 두드러진 실예입니다.
그러나 비록 바보로 태어난 왕은 아닐지라도 자기의 위엄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의 신하들에게 전혀 은혜를 입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오만무례한 태도를 취하며 분별없이 쾌락에 도취하다가 끝내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마는 왕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주의 깊게 나 자신을 살피겠나이다’ 의 뜻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무슨 악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삼가 절제하기를 기뻐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덕성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권좌에 올라 자기 권력을 최대로 이용하여 악을 행하는 대신에 자제와 극기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야말로 참 지각이 있는 자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위엄에 빠져 버리는 다른 왕들과 같이 되지 않으리라고 단언합니다.
또 다윗은 그에게 부과된 막중한 책임에 따라 그의 의무를 지혜롭게 수행하기 위해서 힘쓰리라고 다짐합니다.
그가 “완전한 길” , “완전한 마음”에 지혜가 있다고 생각함에 먼저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재능을 악한 생각을 짜내는 데 사용하고 날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고 저희를 압제할 새로운 묘안을 짜내는 일에 골몰하는 오직 악을 행하는 데만 소질이 있는 폭군들은 하나님께 대해 지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간악한 폭군들을 싫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왕들이 자기 나라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에 골몰하고 그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기발한 정책을 노련하게 꾸며낸다면 이것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지혜로 여겨질 것이고 그와 같은 지혜를 가진 왕들은 극구 칭송을 받으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시편 101 편
그런데 다윗은 그와 달리 완전한 지혜를 몹시 갈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임하실 때까지’ 는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께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도록 촉구하는 듯이 그 말을 의문문으로 하여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로 번역합니다.
실로 다윗은 그처럼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리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처량하게 쫓겨 다니는 자신을 생각할 때 신음하고 탄식할만한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기 위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불명예와 증오 가운데서 사느니 차라리 목자로서의 그의 이전 직업에 따라 그의 아버지의 오두막집에서 이름 없이 묻혀 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의문문이 아닌 ‘주께서 내게 임하실 때’ , ‘때까지’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번역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다윗이 아직 평민의 위치에서 지내고 그에게 약속된 왕권을 누리지 못해도 다윗은 그 동안에도 그침 없이 정직을 따라 행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궁전 혹은 관공서와 대조되는 “내 집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다윗은 내 집, 혹 내 가족 가운데서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3. 본문 3절은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사생활에서도 덕과 의를 실천에 옮기리라고 굳게 다짐한 다윗은 이제 그가 왕의 직무를 수행할 때는 모든 불공평과 사악함의 원수가 되리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사실 사생활부터 그와 같은 결심으로 시작하는 자가 훌륭한 왕이 되기 마련입니다.
‘눈 앞에 사악한 일을 둔다는 것’ 은 사악한 어떤 일을 행할 뜻을 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가 모든 사악에서 떠나리라고 선언합니다.
전심으로 악을 미워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잘못을 편견없이 공평하게 처벌하는 자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왕들이 직무 수행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일체의 악에 가담치 말아야만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행위”로 번역한 히브리어 עשוה (아소)를 첫 문장에 연결시키고 거기에 ל (라멧)을 덧붙여서 마치 ‘나는 내 눈앞에 그것을 행하기 위해 어떤 사악도 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혹은 악한 것은 아무것도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 나에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할 것이니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해석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 곧 다윗이 그의 눈앞에 어떤 죄악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다음에 바로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가 모든 부정에 대해 원수가 되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는 의미가 더 원뜻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편 101 편
만일 하반절이 빗나간 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면 숫자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그가 정도에서 사악하게 벗어나는 일은 결코 추호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본문 4절은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특한 마음”을 배도자들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지나치게 강한 의미의 해석으로 보아 반대합니다.
더우기 그 해석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반절에서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을 설명으로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틀림없이 상반절에서 모든 불의와 악에서 떠나리라고 단언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모든 잘못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그의 이웃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않으리라고 다짐합니다.
5. 본문 5절은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악행 자들을 제지할 목적으로 검으로 무장한 왕의 의무를 더 분명히 말합니다.
비방과 교만과 온갖 악들은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불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와 같이 교만한 자들이나 중상 혹은 비방하는 자들을 끊을 힘이나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는 저희가 그와 같은 일을 행할 공적인 권세를 부여받지 않아서 그들의 손으로는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용의 범위 안에 자신을 지켜야 하고 아무도 자기 소명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 하겠습니다.
다윗이 사회의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고 있는 한 그는 감히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 아니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왕의 보좌에 즉위한 후에는 그가 하나님의 손에서 검을 받았고 그 검을 악한 행위들을 처벌하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악들을 한 가지 대표적인 악으로 종합하여 나타내는데 그는 이 말을 통해 온갖 종류의 악을 다 멸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을 뜻하고 있을 것입니다.
몰래 남의 평판에 손상을 입히는 중상, 비방 행위는 치명적인 전염병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숨어 있다가 갑자기 자기 동료를 죽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시편 101 편
혹은 중상모략 하는 자가 마치 전혀 의심치 아니하는 희생자에게 독약을 마시게 하는 사람과 같이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죽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갖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훌륭한 명성에 손상을 입히는 사악하고 배신적인 성격의 한 증표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에나 지나치게 만연되어 있는 이 악을 징벌할 의무를 다윗이 맡겠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다윗은 두 가지 표현을 빌어 교만한 자들을 특징짓습니다.
다윗은 교만한 자들을 ‘눈이 높은 자들’로 서술합니다. 이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거만한 태도로 쳐다보기 때문이 아니라 저희가 일반적으로 저희의 교만한 마음을 저희의 거만한 태도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더 나아가 저희를 마음이 넓은 자들로 서술합니다.
그 이유는 큰 것들을 열망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득의 양양해하고 마음이 부풀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저희가 온 세계를 집어 삼키기 전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들이 교만을 억누르기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하지 않는 한 올바른 사회 질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만은 포학과 잔인과 경멸과 강탈과 온갖 학대를 야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들의 권세가 보다 힘이 있는 자들의 무례함을 제지하기 위하여 중간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신분이 낮고 온순한 사람들은 보다 힘이 있는 자들의 손에 방치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선하고 신실한 왕들은 교만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이 악은 물어볼 것도 없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자기 지위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의 공공연한 원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01 편
시101:6-8 내 눈이
다윗은 악인을 징계함에 있어서는 사정을 보지 않았습니다(5-8절).
특별히 이 부분에 관설된 죄악은 세 가지입니다.
곧 은밀히 남들을 해롭게 하는 혀의 죄악, 교만의 죄악, 거짓의 죄악입니다.
이 세 가지는 큰 죄악인고로 다윗은 여기서 그것들만 들어 말합니다.
특별히 이 세 가지는 관리들에게 있어서 금물(禁物)입니다.
남을 허는 자는 남들과 합심하지 못하며 권문(權門)에 아부하는 자가 되는고로 나라 를 망치고 교만한 자는 자기의 영광만 취하느라고 백성을 돌보지 않습니다.
또 거짓된 자는 백성까지 거짓되게 만들어 나라를 망칩니다.
1. 본문 6절은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지혜로운 왕 또 다른 덕을 서술합니다.
다윗은 ‘땅의 모든 충성된 자들’을 그의 친밀한 친구로 삼을 것이고 그들에게 선한 직분들을 맡길 것이며 개인의 소질과 특성에 따라 가정의 종들로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희가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해석합니다.
‘나는 선한 자들과 악의가 없는 자들을 소홀히 하지도 않을 것이고 저희가 부당히 괴롭힘을 받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 내가 나의 통치하에서 저희가 평안과 안정된 상태에서 살도록 보장하여 줄 것이라’
그러나 다윗의 의미는 오히려 그가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택하여 그의 일을 돕게 하는 대신에 각 사람의 특성을 지혜롭게 살펴서 아주 완전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는 자들로 그의 가장 친밀한 친구들을 삼아 저희에게 그의 나라의 직책들을 맡기도록 신중을 기하리라는 것으로 봄이 나을 것입니다.
다윗은 상반절에서 “충성된 자” 를 언급합니다.
이는 비록 사람이 특출한 재능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가 만일 충성과 정직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재판하는 자의 직분을 바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특별히 고찰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비록 왕이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의 종복들과 관원들이 그 왕의 성품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왕의 백성들이 그들의 훌륭한 왕의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성품으로 인하여 아무 은혜를 입을 것으로는 거의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101 편
신하들은 왕의 팔이요 손들입니다.
만일 그 신하들이 탐욕에 눈이 어둡거나 거짓된 자들이라면 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제아무리 훌륭한 정책들을 결정한다 할지라도 저희가 사악하게 그것들을 집어던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사실입니다.
보다 많은 수의 왕들이 실로 선하고 정직한 자들을 지나쳐 버리거나 아니면 더욱 심하게 그러한 자들을 내쫓아 버리고 자기들과 같은 신하들을 골라서 가까이하여 저희의 폭정에 알맞은 도구들로 삼습니다.
선하고 훌륭한 뜻을 가진 왕조차도 자주 나태하고 결단력이 없어서 극악한 자문들에 못이겨 경솔히 나라의 관직들을 합당치 않은 자들에게 매도해 버리는 우를 범합니다.
2. 본문 7절은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입니다.
본 절은 집안의 종들과 공적 재판을 수행할 임무를 띤 행정관에 관한 설명도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제 막 일반적인 모든 관직자들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마땅히 왕의 측근 인물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주요 고문들과 그밖에 측근의 조언자들이 거짓되고 교활할 경우에는 이것이 모든 타락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저희의 본보기로 다른 자들까지 오염되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희는 방자함의 기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집을 선히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온 나라의 통치권을 잡기에 적합한 인물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한 가정의 지붕 아래서 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는 권세는 나라의 일에서도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3. 본문 8절은 “아침마다(일찍 - 칼빈)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입니다.
다윗은 마침내 그의 권력이 미치는 한, 땅에서 증오할 악인들을 숙청하는 일에 진력하리라 다짐함으로서 본 시편의 결론을 맺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 일을 ‘일찍’ 행하리라고 확언합니다.
시편 101 편
이는 만일 왕들이 지체하고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저희가 결코 제때에 현존하는 악을 몰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그러므로 악을 그 시초부터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분노에 의해서 일이 좌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하며 또한 황급히 그리고 분별없이 행동을 취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일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복수로 되어 있으며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하는데 “아침마다”로 번역함이 적절할 것입니다.
재판장이 악을 한 두번만 예리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재판장은 계속 그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왕들의 태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담대하게 죄악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서도 두려워서이든 아니면 다른 악의에서이든 차일피일 미루고 저들을 처벌하지 않는 왕들은 정죄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왕들과 관원들로 저희가 신속히 그리고 단호히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서 검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가 아무리 분발하여 자기의 직무에 충실한다 할지라도 땅에서 모든 악을 다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가 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다만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든 악인들을 끊음으로서 자신이 하나의 공평무사한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심한 성품은 자주 재판장들이 의기양양해하는 악인들을 충분한 힘을 가지고 완전히 제압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재판장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저희가 부여받은 직분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불굴의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더우기 불순한 야심과 편벽된 호의는 때때로 재판장들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할 곳에서 치우친 판단을 내리게 만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격한 판단이 하나님을 아주 기쁘게 해드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엄격한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편 악인들에게 고삐를 늦추어 주는 친절을 베풀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죄악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기는 것보다 죄를 짓는 일에 더 큰 격려가 되는 것은 실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17:15)는 솔로몬의 잠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101 편
하반절에 다윗이 덧붙이는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라고 한 말도 강조입니다.
만일 이방나라의 왕들이 죄악을 징벌하도록 요구받고 있을진대 다윗은 하나님의 교회가 자기에게 맡기워 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더욱 더 그리할 거룩한 의무가 지워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처럼 명예로운 지위에 앉아 있는 자들이 그들의 권세를 십분 발휘하여 악을 제거하는 일에 진력하지 않는다면 저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까지도 더럽히는 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백성들의 복지를 저버림으로서 백성들에게만 불충성하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대한 세미한 상징에 지나지 않으므로 크게 거역하는 죄를 당할 것입니다.
다윗의 왕국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왕국에 비견됨으로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야를 좌정시켜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많은 위선자들을 참고 지켜보시지만 끝 날에는 이 세상의 심판주가 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끝내는 모든 영혼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자리에다 불러 모으시고 양과 염소를 따로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가 너무나 오래 지체하시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온갖 불결한 것들이 말끔히 치워지고 참 정결한 것들이 빛을 발하도록 하기 위해서 갑자기 동이 틀 그 아침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시102:1-2 여호와여 내 기도를
이 기도는 바벨론 포로생활의 괴로운 나날을 신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슬픔에 잠긴 채 겸손한 자세로 저희는 먼저 자신들이 처한 역경을 몹시 탄식합니다.
다음에 저희는 하나님께 거룩한 성과 그 성전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탄원합니다.
보다 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도록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저희는 나라와 제사장 직분의 복된 회복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냅니다.
또 저희는 포로생활에서 풀려날 것을 확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하나님께 왕들과 나라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저희의 비참하고 곤고한 처지에 관하여 간단한 불평을 털어놓은 다음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에서 위안을 찾아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다 나은 소망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 저희를 일반 사람들의 운명과 처지에서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1. 주제는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 입니다.
본 시편 저작자가 선지자 중 누구든 간에 그가 신자들에게 성전과 그 성의 재건을 위한 기도의 한 형식으로 본 시편을 그대로 받아 기록하게 하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어떤 이들은 본 시편을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 성전의 재건이 이웃나라에 의해 방해받고 있던 때에 제한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본 시편이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기 전, 저희에게 약속된 구원의 때가 바로 눈앞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지어졌다는 견해를 취합니다.
이는 그 당시의 선지자들이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따라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보다 진지하게 고무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시편의 목적은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데에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저희에게 교회의 복지에 대하여 보다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있었습니다.
본 시편의 표제는 본 시편이 의도하는 목표와 목적을 지적해 줍니다.
동사들을 과거 시제로 해석하여 ‘곤고한 자가 마음이 처하여 그의 묵상을 쏟아 놓았을 때 드린 기도’ 로 번역하는 이들은 선지자의 생각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제시합니다.
시인은 그가 보았던 마음이 억눌린 자들의 슬픔을 덜어주고자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시인은 마치 비록 ‘너희가 고뇌와 절망에 처하여 있을는지 모르나 그 일로 인하여 너희가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102 편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동사 עטף (아타프)를 ‘그가 자기를 숨길 때’로 번역하고 이것을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에 의하면 이것은 기도하는 자가 자기의 당한 슬픔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자기를 숨기고 그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파묻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곤고한 자가 한편으로 ‘입을 다물고’ 다른 한편으로 기도를 ‘쏟아놓는다’고 할 때 그 말에는 아주 세련된 익살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우리가 슬픔으로 입을 다물고 사람들이 있는 밝은 곳을 피하게 될 때 우리 기도의 문은 활짝 열려지므로 사실 그것은 기도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마음껏 쏟아 놓을 기회를 가질 때 우리의 슬픔이 놀랍게 가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שוח (슈아흐)는 자주 ‘기도하다’를 뜻하나 ‘묵상하다’를 뜻하기도 하므로 그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는 여기서 정확히 묵상을 뜻합니다.
더우기 이 말로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본 시편을 기도의 형식으로 사용하도록 훈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인은 마치 그가 교회의 외로운 처지로 인하여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만 본 시편을 권하는 것으로 말하는 듯합니다.
2.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입니다.
이 진지함은 본 시편이 부주의하고 가벼운 자들이 낭송할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만일 그러한 자들이 이 기도를 드렸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림으로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은 저희가 견뎌내고 있던 혹독하고 쓰라린 고통을 증언하였고, 또 어떤 위안을 얻고자 하는 저희의 열망을 표시하였습니다.
만일 신실하고 진지한 마음의 열심을 가지고 이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입술로 이 기도를 발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앞서 언급한 상황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교회 공통 복지를 위해 기도할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각기 자기 이익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나 교회의 불행을 자기의 것으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하나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가 여기서 힘쓰고 있는 사실을 보는 바대로 우리의 냉담하고 태만한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하여 간절한 말로 더욱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마땅히 혀를 움직여서 기도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시편 102 편
마음이 자주 그 의무를 태만하게 행하므로 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편으로 마음이 말보다 앞서 행해야만 하고 그 말을 주도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혀는 마음을 도와서 냉담하고 무감각한 증세를 고쳐 주어야 합니다.
참 신자들은 실로 입에서 한 마디의 말도 내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뿐만 아니라 열렬하게 기도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부르짖음” 라는 말로서 슬픔이 우리로 발하게 하는바 뜨거운 기도의 말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3. 본문 2절은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입니다.
1) 본문 2절 상반은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숨기지 마실 것을 구하는 기도는 꼭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70년이나 되는 동안 포로생활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저희에게서 그의 은총을 거두신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저희 열심을 다하여 저희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기도에 힘쓰도록 분부를 받습니다.
저희는 “나의 괴로운 날에” 부르짖고 있다고 확언합니다.
이는 위선자들이 떠들썩하게 저희 불평을 털어놓는 것처럼 습관에 젖은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신 것으로 생각하기에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2) 본문 2절 끝부분은 “내게 응답하소서” 입니다.
이 표현형식에 관하여는 다른 곳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어리석음에 대하여 오래 참으실 때에 그는 아주 온유하신 방법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가 철부지 어린 아이들 모양으로 우리의 불평 등을 그의 앞에 쏟아놓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자유를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아무런 경외심도 없이 그의 위엄을 대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연약한 자들이 친밀감과 자신을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는 일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온유하신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예화를 사용하는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예화를 사용하였습니다.
시편 102 편
시102:3-11 대저 내 날이
시인은 포로생활 중에 당한 고통을 진술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3-11).
하나님은 극히 불쌍한 자를 보시고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시인의 고통은 점점 더해갑니다. (1) 시인의 몸도 쇠잔해 갑니다(3-5).
(2) 시인은 심히 고독한 처지입니다(6-9).
(3) 시인은 모든 고통이 주의 진노에서 온 것인 줄로 인식합니다(10).
고통이 주의 진노로 인한 줄 알면서도 기도를 계속한 것이 신앙입니다(욥5:17, 18).
1. 본문 3절은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입니다
본 절에 있는 이 표현은 과장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황폐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자신을 신중히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모든 염려의 대상들보다 교회를 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인의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 형식을 대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그 말씀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교회에 대한 열성을 갖지 않은 우리의 태만을 꾸짖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시편 기자는 ‘그의 날들을 연기에, 그의 뼈들을 마음의 돌들에’ 비교합니다.
시인은 그러한 것들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불에 소멸된 것으로 말합니다.
‘뼈들’이라는 말로 시인은 사람의 힘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만일 감정이 없었다면 그처럼 우울한 하나님의 진노의 광경이 확실히 저희의 뼈들을 말리고 저희의 모든 체력을 다 소모시켰을 것입니다.
2. 본문 4-5절은 “(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입니다.
시인은 세번째 비유로 그의 마음이 시들어 베어놓은 풀같이 완전히 말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의 마음이 시들었고 그의 뼈들이 마른 상태가 되었다는 것 이상의 무엇을 뜻하고자 합니다. 시인의 말은 풀이 베임을 당할 때 더 이상 땅에서 양분을 흡수할 수도 없고, 그 뿌리로부터 생명과 생기를 계속 공급받을 수도 없듯이 그의 마음도 그 뿌리로부터 베임을 당해서 그 자연적인 양분을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내가 나의 떡 먹기를 잊었다’ 는 말은 ‘나의 슬픔이 너무 커서 내가 나의 일상적인 식사를 소홀히 하였다’ 는 뜻입니다.
시편 102 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 동안에 저희의 음식을 먹은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저희가 굶어 죽었더라면 그것은 저희가 죄악된 절망에 빠졌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말이 뜻하는 바는 그가 모든 기쁨을 거절하고 심지어 식음까지도 전폐할 정도로 슬픔에 젖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금식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그의 진노를 거두어 주시기를 간구할 때 얼마동안 그의 일상적인 식사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서 그와 같은 유의 금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지금 음식 맛을 잃고 만사가 다 귀찮아질 정도로 극한 상황에 이른 정신적인 고통의 결과를 말합니다. 시인은 5절에서 그의 몸이 쇠잔해져서 그의 뼈들이 그의 가죽에 붙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3. 본문 6-7절은 “(6)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펠리컨으로 번역하는 대신 어떤 이들은 그 말을 ‘해오라기’로, 또 어떤 이들은 ‘뻐꾸기’로 번역합니다.
여기에 ‘부엉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칠십인역에 νυκτικοραξ 로 되어 있는데 그 말은 ‘박쥐’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조차도 여기에 지적된 새들의 종류에 대해서 확신을 못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단지 본 절에 어떤 우울한 새들, 곧 산들의 구멍과 광야에 거처를 삼고 듣기에 맑고 즐거운 소리로 우는 대신에 듣는 이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새들이 지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시인은 마치 ‘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멀리 떠나 있으며 거의 숲의 들짐승들과 같이 되었다’ 고 말하는 듯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명히 발달되고 비옥한 지역에 거하기는 했을지라도 저희 마음이 저희가 추방된 성전과 고국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연모의 줄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대아와 앗수르의 온 땅이 저희에게는 마치 광야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참새”에게서 빌어온 세 번째 비유는 극심한 불안을 초래하는 슬픔을 뜻합니다.
히브리어 צפור (치포르)는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새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여기서는 참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새는 ‘고독한’ 혹은 “외로운” 새로 서술됩니다.
이는 그 새가 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새들은 짝을 잃을 때 너무나 깊은 영향을 받게 되므로 저희의 고통은 거의 모든 슬픔을 능가합니다.
시편 102 편
4. 본문 8절은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입니다.
신자들은 저희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을 사기 위해 하나님께 저희가 원수들에게 조롱의 대상일 뿐 아니라 또한 저희 원수들이 저희로 맹세한다는 말을 고합니다.
여기서 한탄은 불신자들이 치욕적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모욕을 퍼붓고 심지어 저희가 당하는 재난들로부터 맹세와 저주 거리를 끌어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의 말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하나의 예표적인 모형으로 간주하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신자들이 그와 같이 방자하게 우리에게 오만무례한 말을 할 때 우리도 아무리 날카로운 시험이라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는 이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성령께서는 이 기도의 형식을 신자들에게 주실 때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욕설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그의 백성을 구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37장 23절에서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하는 말씀을 대합니다.
바로 앞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에 대해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게 거만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우리를 도우실 준비를 갖추신다는 사실은 확실히 헤아릴 수 없는 위안이 됩니다.
하반절에서 영감을 받은 시편 기자가 “내게 대하여 광포한 자들이 나로 맹세하였다”고 말할 때 그는 그의 원수들의 잔인성을 더욱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광포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הלל (할랄)이 일반적으로 ‘찬양하다’를 뜻하므로 여기서는 그 말이 반용법(反用法)으로 정반대의 의미, 곧 ‘나를 헐뜯은’ 혹은 ‘나를 비난한 자들’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따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희가 ‘미치광이들’ 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저희가 취한 행동에서 저희 자신이 무가치한 자들임을 입증함으로서 저희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의미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는 해석입니다.
보다 만족할 만한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이 저희를 욕하는 원수들의 잔인성 혹은 광포한 증오를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2 편
5. 본문 9절은 “나는 재를 양식(떡 - 칼빈)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순서가 뒤바뀌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곧 ‘떡’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לחם (레헴) 앞에 있는 “같이”를 뜻하는 כ (카프)가 마땅히 ‘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אפר (에페르) 앞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마치 ‘내가 재를 맛보는 것이나 다름없이 나의 떡에 대해서도 아무 맛을 찾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마음의 슬픔이 음식의 맛을 모르게 하기 때문이니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보다 단순한 의미는 저희가 땅바닥에 엎드러져 있어서 흙을 핥았고 “그리하여 떡 대신 재를 먹었다” 는 것입니다.
애곡하는 자들이 몸을 쭉 펴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관습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다른 뜻, 곧 그가 식사할 때 그의 앞에 식탁이 없었고, 그의 떡이 불쾌하기 이를 데 없고 구역질이 나는 태도로 그의 앞 땅바닥에 던져졌다는 뜻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신자들을 대변하여 그가 땅바닥에 너무나 굳게 엎드러져 있어서 일어나 그의 떡을 받을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동일한 의미가 하반절 “나의 마실 것에 울음을 섞었사오니” 라는 말에도 나타납니다.
이는 애곡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잠시 음식을 먹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동안에도 계속 눈물을 흘려서 그의 애곡이 한순간도 그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상반절에서 ‘떡같이’ 대신 ‘떡 안에’ 로 읽습니다.
히브리어 כ (카프)와 ב (베트)가 서로 거의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떡 안에’ 로 된 본문을 더 좋게 봅니다. 이는 그것이 하반절의 의미와 더 잘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6. 본문 10절은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입니다.
1) 시인은 이제 그의 큰 슬픔이 외부적인 고통과 재난에서 연유되었을 뿐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리신 징벌에서 연유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고 계심을 생각할 때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깊이 상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주여 내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일에는 유념치 아니하나이다. 오히려 나는 주의 진노에 나의 생각을 돌리나이다.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기업을 아직 즐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 될 것입니다.
시편 102 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우리를 치실 때 우리는 단순히 우리에게 떨어지는 채찍 아래서 보통 어리석은 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신음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주로 우리가 참으로 겸손해지기 위해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서 크게 유익한 교훈입니다.
2) 하반의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는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다 세차게 땅에 집어던지고자 할 때 그것을 위로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이 이 구절이 강력히 집어던지는 한 방법을 가리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께서는 내가 단순히 있던 그 위치에서 떨어진 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나를 집어 던지심으로서 나를 엄하게 뭉그러뜨리셨나이다’ 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슬픔에 대한 또 하나의 부연인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복된 처지에서 극도로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쓰라린 것은 없으므로 선지자는 택한 백성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신 뛰어난 유익들을 박탈당하였으므로 이전에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 저희에게 위로를 가져다 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희의 슬픔을 한층 더 깊게 만들고 있다고 애처롭게 하소연합니다.
저희가 이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슬픔을 유발시키게 된 것은 저희가 은혜를 감사할 줄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저희가 그처럼 비참하고 천한 상태에 떨어지게 된 것이 저희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서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의 선하심의 일면을 맛보게 하신 후에 그것을 우리에게서 다시 빼앗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다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도 역시 우리의 죄가 그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침없이 우리에게 흘러 넘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일이 마땅히 우리의 슬픔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나 높이 들렸다가 떨어져서 우리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기에 그가 우리에게서 그의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손을 거두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는 우리의 재난이 한층 더 심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을 구별해 준 하나님의 형상이 하늘 영광의 밝은 빛이었던 것을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의 증표로 우리에게 당하게 하신 치욕과 비천한 상태를 바라볼 때 이 대조적인 상황은 확실히 우리로 우리 처지의 비참함을 더욱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복들을 거두어 가신 후에 우리로 치욕을 당하게 하실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빛을 어두움으로 바꾸어 놓았기에 우리가 통곡해야 할 훨씬 더 큰 이유를 가지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 102 편
4. 본문11절은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입니다
태양이 곧바로 우리의 머리 위에 있을 때, 한낮에는 우리가 태양의 빛을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그처럼 갑자기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양이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거의 매순간 그림자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시편 기자가 특별히 “기울어지는 그림자” 를 언급한 이유입니다.
시편 기자가 곤고를 당한 교회에게 돌리는 바는 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망명생활의 재난을 당하는 교회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노년에 접어들면 곧 쇠잔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소연은 이 같은 일이 한창 꽃다운 나이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들이닥쳤다는 것입니다.
‘날들’ 이라는 말은 저희 생애의 전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곧 포로생활이 신자들에게는 해가 기울어지는 것과도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희가 속히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반절에서는 바로 앞에서 사용된(4절)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라는 비유가 다시 반복되는데 그것은 포로기간 중 저희의 생활이 삶의 활력소를 바싹 말려 버리는 온갖 슬픔으로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처지에서 산다는 것은 저희가 만일 장차의 해방에 대한 소망을 붙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백번 죽는 것만 못하였을 것이므로 이 말은 놀랄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비록 저희가 시험에 아주 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큰 고통에 빠져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시편 102 편
시102:12-14 여호와여 주는
성도의 간곡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에 대한 신념을 얻는 법입니다.
이런 성도는 이스라엘이 그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어 이런 성도는 장차 임할 세계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 본문 12절은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입니다.
선지자가 스스로 용기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 자신을 놓았을 때 첫눈에 그것은 하나의 억지 위안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덧없이 쇠잔해 가는 상태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현재 그대로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 요지부동으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더우기 하나님께서 누리고 계신 바 이 복된 평안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더 잘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나 영감을 받은 시인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의 특별한 돌보심의 대상으로 삼으시리라고 선언하신 약속들과 특히 그중에도 두드러진 언약, 곧 “내가 너희 중에 거하리라”(출25:8) 는 말씀을 상기하고 그 신성하고 확고한 약속들을 굳게 믿었으므로 고난당한 신자들이 비록 곤고와 비참한 상태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저희를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이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자들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기념” 이라는 말도 역시 그와 동일한 빛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와 우리 사이의 상호교제에서 일어나는 확신을 낳게 하는 그를 아는 이 지식을 우리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과 불변성에서 우리가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의미는 ‘우리는 마른풀과 같고 우리는 순간순간 쇠잔해 가며, 우리는 죽음에서 멀지 않나이다. 아니 우리는 이미 무덤에 거하고 있나이다.
하지만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으로 주께서 주의 친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리라 약속하셨으며, 우리와 은혜로운 관계를 맺으셨고, 우리에게 주께서 항상 우리 중에 계실 것을 확실히 보증하여 주심으로서 우리가 낙심하는 대신에 크게 용기를 얻도록 하셨나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한다면 절망할 것밖에 없사오나 우리의 마음을 들어 하늘 보좌를 향하오니 거기로서 주께서 마침내 주의 손을 펼치사 우리를 도우시리리이다’ 입니다.
시편 102 편
성경 말씀을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지 간에 중요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무를 지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은 우리에게 그의 기념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기념에는 신성하고 확고부동한 교제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본문 13절은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앞 절에 진술되어 있는 사실로부터 이글어 낸 결론을 대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온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그의 기념 혹은 말씀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기념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지를 유지시켜 줄 의무를 지셨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권능이 없는 분이 아니시고,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하신 바를 제때에 성취하지 못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추호도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동사 ‘일어나다’가 시각적으로 의미를 확실케 하기 위한 말이라는 점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비록 항상 불변하시는 상태로 계실지라도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때에는 앞서 이른 바와 같이 외적인 행동으로 그의 위엄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교회의 회복을 언급할 때 그 회복의 동기를 하나님의 자비로 밝힙니다.
선지자는 이 자비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서로 다른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 현재 고려중인 문제에서 사람의 훌륭한 공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외부의 어떤 동기에 의해 좌우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교회 회복의 동기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자유한 선하심에 돌립니다.
둘째로 선지자는 이 자비를 하나님의 약속에 연관시켜서 생각합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한편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함에 있어서 시인의 목적은 신실한 신자들에게 저희의 안전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시편 102 편
그러나 우리는 이제 어느 때가 언급되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מועד (메오드)는 모든 유의 고정된 혹은 정해진 때나 날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본 절에 예레미야 29장 10절에 기록된 그 선지자의 예언과 역대하 마지막 장 21절에 반복되는 말씀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들이 계속되는 오랜 고난 가운데서도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저희의 포로생활이 끝날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 두셨으며 저희의 포로생활의 기간은 70년을 넘지 않으리라는 소망으로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할 때”(단9:2, 3) 바로 이 주제, 곧 교회의 재건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 기자가 의도한 목적은 하나님께 이 분명한 예언을 생각나게 해드림으로서 저희의 우울한 포로생활을 끝나게 해주시기를 촉구하여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만일 기도할 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열망들을 연기처럼 허공에 사라지게 하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된 구원의 때가 가까이 혹은 이미 이르렀다 할지라도 시편 기자는 기도하기를 쉬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끝까지 기도하도록 촉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비록 때가 정해져 있었을지라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그와 같이 그의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절대 자유한 선하심에 따라서만 그의 언약을 이루시기 간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무를 지신 약속들은 조금이라도 그의 은혜를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4절은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입니다.
이것을 고레스와 다리오 왕에게 제한시키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못한 일입니다.
유대인 박사들이 과도한 열심을 가지고 하찮은 것들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주석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그처럼 빈약한 해석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몇몇 곳에서 불신자와 악인들이 예레미야 25장 9절에서처럼 하나님의 종들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 102 편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레스 왕이 하나님의 택하신 종의 명칭으로 불린 것은 인정합니다(사44:28).
그러나 성령께서 어떤 제한이 없이 고레스나 다리오왕에게 그처럼 명예로운 명칭을 주셨을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본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저희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 왕의 칙서가 내려지기 전에 저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그의 종들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는 저희의 평생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저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일반적으로 교회 전체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소망이 아니라 온 교회 전체가 다 함께 나눈 소망이었음을 뜻합니다.
보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도록 시인은 당시 세계에 있던 모든 신자들에게 자기와 합심하여 그 동일한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도가 선언하는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는 말씀에 의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다 합심하여 마치 한 사람같이 되어 간구할 때는 훨씬 더 기도의 응답을 성공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폐허에 남아있던 잔해들이 강조적으로 “시온의 돌들”로 불려질 때, 이 명칭은 과거 시대의 신자들이 성전의 외적인 광채에 매료되어 있었다는 사실, 곧 그 성전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 뿐 아니라 저희의 온 정신을 사로잡아 감탄해 마지 않게 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 아니라, 비록 그 성전이 파괴되어 그 성전이 서 있던 곳에서 무시무시한 폐허밖에는 찾아볼 수 없었을지라도 그 성전에 대한 저희의 애착심은 변할 수 없었으며 저희가 그 무너져 흩어진 돌과 퇴색한 잔해들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였다는 사실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된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라 지어졌고 그가 그 성전의 복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 성전에 애착심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한편 용기를 잃게 하는 이방인들의 조롱의 영향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저희는 저희의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의무성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전터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졌고 성전이 동일한 터 위에 재건될 것을 알았기에 이전 성전이 무너져 그 돌들이 훼손되고 깨어져 있고 쓸데없는 잔해더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을지라도 저희는 그침없이 그것을 존중하였습니다.
시편 102 편
교회의 황폐함이 심할수록 교회에 대한 우리의 애착심은 더욱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때에 신자들이 품었던 이 동정심은 분명히 우리에게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게 할 것입니다.
사실 본 절에 서술된 우울한 상황이 우리의 시대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 곳들에 세워진 교회들을 갖고 계시며 그 교회들에서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게 경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의 눈을 온 세계로 돌린다면 그의 말씀이 도처에서 발 밑에 짓밟히고 있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가증한 것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전은 확실히 도처에서 파괴되어 비참한 폐허의 상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이들 작은 교회들은 찢겨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 초라한 건물들이 이사야와 에스겔과 및 스가랴가 서술한 광채 나는 영광스런 성전과 비교될 때 그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떤 폐허의 모습도 우리가 교회의 돌들과 그 티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저희의 제단들과 저희의 거대한 건축물들과 또한 그밖의 휘황찬란한 전시품들을 자랑하게 내버려 둡시다.
이는 이교적인 웅잠함은 하나님과 그이 천사들 보시기에 다 가증한 것들일 뿐이나 한편으로 참 성전의 폐허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2 편
시102:15-22 이에 열방이
이 시인은 자기 백성이 그 포로된 처지에서 해방될 날이 가까운 것을 내다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포로기간 70년이 끝나게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2-21).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길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는 확신을 표시합니다.
시인은 유대인의 해방을 내다 보면서 겸하여 세계 모든 민족에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임할 것을 내다봅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의 해방은 세계 만민 중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 22절은 특별히 구원의 세계성(世界性)을 보여줍니다.
1. 본문 15-16절은 “(15)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옛 지파들의 구원에서 비롯될 열매를 서술합니다.
저들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민족들과 왕들 중에 분명히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교회가 압박받을 때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시기에는 이방인, 곧 불신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마치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능력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면 그것은 그의 권능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를 제공해 줌으로서 이방인들로 저희가 조롱했던 그를 두려워하게 할 것입니다.
16절 하반절의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는 말씀은 그가 사망의 어두움 속에서 그의 교회를 이끌어 내실 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교회의 최초 구원에 관하여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시14:2)라고 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현 구절에서도 하나님이 뿔불이 흩어진 그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다시 모으시고 그의 교회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실 때 그가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무한히 커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서 그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실로 보통 위안이 아닙니다.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희 고난의 한 가운데 처하여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의 사역이 저희에게서 숨겨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믿음의 눈을 통해, 또 하나님의 약속들의 거울로 항상 그것을 봅니다.
시편 102 편
2. 본문 17절은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입니다.
택한 족속들의 구원이 신자들의 기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가 이 복을 그의 교회에 은혜롭게 약속하심에 따라 그의 교회를 구하시게 된 유일한 참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참 신자들이 보다 진지하게 기도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가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행하기로 의도하신 바를 그의 교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허락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거저주시는 자비를 인하여 그의 교회를 보전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인하여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교회를 보전하신다는 사실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점도 없습니다.
이는 저희의 기도가 하나님의 거저 주신 약속들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기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빈궁한(의로운 - 칼빈) 자의 기도” 가 응답되었다고 할 때, 그 말이 한 사람의 기도가 응답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복수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희가 고국에서 추방되어 타국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한 “외로운 자”로 불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비록 앗수르와 갈대아 땅들이 아주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들이긴 하나 우리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포로생활은 마치 광야에서의 생활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외로운 백성들은 탄식으로 인하여 동정을 샀고, 또 지금은 신자들이 흩어져 있어서 정규적인 모임을 가질 수 없는 때였으므로 주님께서는 저희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굽힐 줄 모르는 믿음으로 진지하게 교회의 복구를 위하여 간구하기만 한다면 이처럼 외롭게 흩어져 있는 저희의 신음소리를 들으실 것이었습니다.
3. 본문 18절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백성의 구원의 열매를 더욱 더 찬양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 기도의 목적이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이 하나의 기념비적인 하나님의 사역, 곧 이어서 나오는 세대에 길이 전해질 찬양거리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많은 일들이 찬양할 가치가 있으나 이내 잊혀지고 맙니다.
시편 102 편
그러나 선지자는 그가 탄원하는 교회의 구원과 공동의 이익사이를 구분 짓습니다.
“기록하다” 라는 말로 선지자는 이 구원의 역사가 미래의 세대들에게 전해지도록 공적인 기록에 남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백성의 새 창조와 현재의 파멸 사이에는 아름다운 대조가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 관하여 주석가들은 부당하게 아무런 언급도 없이 지나쳐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희 고국에서 추방될 때 어떤 의미로 교회는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들 사이에 섞여지게 되었을 때 교회의 이름 자체가 죽은 것처럼 보였고 더 이상 구별되고 연합된 단체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따라서 저희의 귀환은 말하자면 제 2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정당하게 새 창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가 망하였을지라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그의 교회를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항상 외형적으로 살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도록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일 경우에라도 언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순식간에 새로 지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황폐한 처지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한때 무에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으므로 그의 교회를 사망의 흑암 가운데서 불러내시는 것 또한 그의 합당한 사역이 되리라는 소망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본문 19절은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그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나서 그것이 마치 성취된 것처럼 고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의가 그와 같은 하늘의 표적적인 복을 흐리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선지자는 공공연히 그리고 분명한 말로 하나님께 정당한 찬양을 돌릴 것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해야만 하였습니다.
저희가 포로로 끌려오기 오래 전에 이 재난이 예언되었습니다.
이는 그 예언이 성취될 때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저희의 구원도 미리 저희에게 약속됐고, 구원의 시기는 70년 후로 내정됐습니다.
그러므로 저희의 배은망덕한 처사가 저희 귀환에 영향을 줄 어떤 동기나 원인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고, 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히 하늘에서 임한 저희의 구원을 고레스왕의 호의와 은총 덕으로 돌리지 않도록 시인은 “하나님이 하늘에 땅을 감찰하셨다” 고 말합니다.
시편 102 편
“그의 거룩함” 혹은 “성소의 높은 곳”은 여기서 하늘을 뜻합니다.
성경 말씀의 몇몇 곳에서 성전이 “하나님의 처소”(시28:8, 76:2)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어떤 세상적인 요소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하늘의 처소를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늘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 위에서 그를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5.본문 20절은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다시 한번 그가 앞서 기도에 관하여 다룬 바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저희가 그와 같이 기도에 열심을 내도록 다시금 저희 마음을 독려하기 위함이며 저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저희 구원이 저희 믿음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의지하고 저희가 신음소리를 하늘에 상달케 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를 “갇힌 자”로 부릅니다.
이는 비록 저희가 사슬에 매여 있지는 않았을지라도 저희의 포로생활은 가장 가혹한 감금생활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시편 기자는 바로 뒤에서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저희에게 저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능으로 죽음에서 구원함을 받지 않았더라면 저희의 생명과 안전이 전혀 소망이 없었을 것이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6. 본문 21-22절은 “(21)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22)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입니다.
여기서는 앞서 언급되었던 것보다도 더 풍성하고 부요한 이 구원의 열매가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부요한 열매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일에 하나가 될 뿐 아니라 저희가 저희의 고국에 돌아갈 때에는 또한 왕들과 나라들을 동일한 믿음 안에서 연합시키고 저들로 동일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리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것 또한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옛적에 불타서 완전히 무너진 바로 그 성전에서 짧은 시기 안에 다시 울려 퍼져야만 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마치 썩은 시체와도 같았던 이방 나라들이 사방에서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02 편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희가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소망을 심어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택하신 처소가 영구히 황폐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민족들에 의해 경배를 받을 것이고, 또 그의 교회는 단지 한 민족으로 이루어 질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와 같은 일이 있기 전에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새 주제가 생기게 되리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일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가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 라고 한 거룩한 족장의 예언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구원을 찬양할 때 늘 그것을 그리스도의 오심에 연관시켰으므로 영감을 받은 시인(앞서 선지자로 언급한 시편기자를 가리키는 말, 칼빈은 이처럼 성경의 예언에 비중을 두어 성경기자를 선지자로 부르고 있음에 유의하라 - 편집자 주)은 여기서 단순히 그 주제의 일부만을 붙잡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곧 그 은혜의 절정에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 돌아온 모든 신자들이 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필요는 없었을지라도 선지자들의 통상적인 표현을 빌어 쓴다면 시편 기자는 참 경건의 표로서 율법 아래 정해진 하나님 예배의 준행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본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참 종교가 널리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을 거듭하여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사61:3) 일컬음을 받게 될 때보다 더 높이 찬송을 받으실 수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편 102 편
시102:23-28 저가 내 힘을
시인은 고생 중에서 생명이 단축해짐을 탄식하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여 그의 생명도 존속(存續) 되기를 청원합니다(23-28).
시인은 인간의 단명(短命)을 주의 영생으로 고침 받을 소망을 표합니다(시90:1-3).
1. 본문 23-24절은 “(23)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악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년대는 대 대에 무궁하니이다” 입니다.
1) 어떤 이들은 부당하게 이 하소연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희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은 후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 때에 제한시킵니다.
우리는 중도, 곧 ‘여행’ 혹은 ‘길’ 이라는 말을 은유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하나님의 옛 백성들이 경주하고 있던 경주의 푯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당연히 저희 달려갈 길의 중도에 쇠약해졌다고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 앞에 그의 약속을 제시하면서 저희가 아무렇게 달리지 않고 그의 보호하심을 의뢰하였을지라도 저희 여행의 중도에 그의 손에 의해 좌절케 되었다고 합니다 저희는 하나님이 저희 소망을 좌절시킨 것처럼 주에게서 잘못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하소연으로 유리한 문제에 대한 소망을 굳게 가짐으로써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속임수로 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시키십니다.
2) 그와 동일한 의미로 저희는 “저희 날들이 단축되었다” 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할 그때의 충만에 저희 생각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24) 라는 간구가 나오게 됩니다
저희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의 기간을 중년에 비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시대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이 재난은 미리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옛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이 저희를 그의 보호아래 두고 저희를 지켜 줄 것에 관계되었습니다.
시편 102 편
그러므로 포로생활은 하나의 심한 불화 상태로 그 때문에 저희가 저희의 여행 도중에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데려감을 당하지 않도록 보다 큰 확신을 갖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말하자면 저희는 저희 생애의 어떤 기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저희를 택하실 때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때까지 저희를 보존하시리라는 것을 보증하심으로써 저희 생애를 시작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정당하게 이 약속을 제시하고 그와 같은 탄원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주여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루 이틀이나, 한 두 달이나, 일이년의 생애를 약속하지 않으시고 주께서 온 세계를 새롭게 하시고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통치 아래 만민들 다 모으실 때까지 이르는 생애를 약속하셨나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3) 그러면 선지자가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로 다음에 진술되어 있는 이유, 곧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라는 말씀은 현 경우에 매우 적합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므로 사람도 따라서 영원하단 말입니까?
그러나 시편 90편2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당연히 하나님의 영원성을 우리의 구원에 관한 확신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가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신비하고 불가해 한 본체에 있어서만 아니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6-8)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언에 의하면 그의 말씀에 있어서도 역시 영원하신 분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말씀의 방편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연결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연약한 처지가 주께서 계시는 하늘 영광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비참한 모습을 하감 하시는 그 복된 상태를 꿰뚫어보아야만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와 사람의 덧없는 일생 사이의 대조가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일생이 순간에 다 지나고 속히 소멸되는 것을 보실 때 이제 곧 길게 선언될 말씀 같이 하나님이 감동하여 우리를 동정하게 되실 것을 뜻합니다.
2. 본문 25-27절은 “(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입니다.
시편 102 편
1) 여기서 거룩한 시편 기자는 앞서 말한 바에 부연하여 하나님께 비하면 온 세계는 속히 소멸되는 하나의 형체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조금 뒤에 시편 기자는 교회가 이와 같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동 운명에서 제외될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 안전이 바로 그 동일한 말씀에 의해서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 가지 주제입니다.
첫째는 하늘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내 사라져 버리는 연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의 덧없는 생애는 하나님의 동정을 사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록 하늘과 땅에는 아무 견고함이 없을지라도 교회만큼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굳게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히 굳게 서리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명제들 가운데 첫 번째 것에서 참 신자들은 저희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때 지극히 겸손하게 저희의 처지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것인가를 생각하고 아무것도 없이 빈 마음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처럼 자기 자신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첫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 비참한 처지를 보실 때 감동이 되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고 확언하고 계십니다.
하늘에서 이끌어 온 비교는 하나의 매우 기쁜 예증이라 하겠습니다.
그처럼 빨리 지나가 버리는 인간의 덧없는 생애와 비교할 때 하늘은 얼마나 오래도록 존재하고 있단 말입니까?
이처럼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서도 하늘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나 창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세대들이 지나가 버렸습니까?
또 그 배열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 구조가 너무나 뛰어나서 그 전체의 조화가 하나님의 솜씨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늘이 존재해 온 그 오랜 기간도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장관도 그것들을 소멸하지 못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낳기가 무섭게 죽어 없어지는 우리 가련한 인생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에는 속히 죽음을 재촉하지 않는 요소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2) 주석가들이 다 ‘하늘들이 망하리라’ 는 말을 한 가지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단지 하늘이 겪게 될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그것은 멸망의 한 종류가 될 것입니다.
시편 102 편
그 이유는 비록 하늘이 서로 붙어 버리지는 않을지라도 이 같은 본질적인 변화는 그 가운데 있는 죽을 것과 썩을 것들이 멸망하게 되어 어떤 면에서 전혀 다른 새 하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말을 “만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이라는 조건을 덧붙여서 설명하고 하늘이 부패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는 이 같은 조건절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 둡니다.
그 같은 조건절은 본문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해주는 대신 보다 애매하게 만듭니다.
둘째로 이 같은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은 부당하게 불멸의 상태를 하늘에 돌립니다.
하늘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그것들이 땅과 그밖에 다른 피조물들처럼 구속의 날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롬8:22) 고 선언합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타락 상태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로 피조물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거나 본래 그러한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온 세계를 그 동일한 타락의 상태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늘이 인간의 타락으로 실제로 타락한 상태에 처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 하늘이 새로워져서 선지자가 ‘그것들이 망하리라’ 고 한 말을 보증해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 같은 하늘의 갱신이 너무나 완전히 이루어져서 그것들이 이전 것들과 동일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합하면 우리가 우리 눈을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전에는 절망할 이유들 밖에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부패하고 타락한 것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죽음의 본보기 외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세계의 온 구조가 그 끝장을 보게 될진대 인류는 어찌되겠습니까?
만일 모든 민족들이 망하게 될진대 사람들 안에 개별적으로 무슨 견고한 것이 남아있게 될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것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본문 28절은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입니다.
1) 먼저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02 편
이 말로 선지자는 그가 교회의 보전을 요청하는 것은 교회가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 변화 위에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실 때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그의 품에 안으시고자 하는 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휩쓸어 버릴 수 없는 폭풍우 가운데서도 교회만큼은 영구히 존속하리라는 소망을 가진 영감을 받은 시편 기자의 결론은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과오로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 우리는 또한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자마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복을 다시 부어 주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들은 저희가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났으므로 죽음 후에도 계속 살아 남게 된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있고” 라는 말은 영구한 유업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의 종들의 씨가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라는 말씀이 주는 의미는 참 신자들의 구원이 굳게 서는 것은 세상의 방식을 따라서나 하늘과 땅이 굳게 서는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희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거룩한 연합으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씨’와 ‘자손들’ 이라는 말은 저희의 모든 자손들을 예외 없이 다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희 조상들이 가졌던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경건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육체를 따라 저희에게서 태어난 많은 자손들이 타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세대들이 분명히 지적되는데 이는 우리가 다음에 나오는 시편에서 다시 발견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이 미래의 세대에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에게 맡겨진 생명의 보화를 굳게 지키려 한다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우리 복지의 견고함이 하나님 안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믿음의 닻을 하늘에 던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103: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인은 각 신자들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를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가르칩니다.
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로 양자가 되도록 주신 율법 안에서 저희로 구원을 위한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저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도록 가르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 대해 길이 참으신 중에 베푸신 자비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은 저희 어떤 공로 때문이거나 저희가 은혜를 입을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이 저희 연약을 동정하심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다만 엄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 시편은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일반적인 찬양을 돌림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입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에게 여호와께 감사할 것을 촉구함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신 모든사람에게 감사야말로 각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태만은 계속적인 자극을 필요하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렬하고 뜨거운 열심에 불탔던 선지자조차도 이 병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러한 자극이 필요하겠습니까?
시인은 자기 자신을 촉구하는 진지한 태도는 그도 역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에 태만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던 체험을 풍부하게 가집니다.
성령 하나님은 시인의 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에 보다 부지런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각사람이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태한 것을 고치도록 해결책을 지적하십니다.
자기 “영혼” 곧 지각과 감정의 좌소에까지 하나님을 송축할 것을 요구하는 일로 만족하지 않는 선지자는 그의 “속에 있는 것들”까지 추가시킵니다.
“속에 있는 것들” 이란 그의 생각과 마음 및 그것들이 갖는 모든 기능을 가리킵니다.
시편 103 편
선지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할 때 선지자는 마치 사람들 앞을 떠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두고 살피는 것과도 같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반복됨으로써 더욱 강조됩니다.
선지자는 반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나태했다는 사실을 책망하는 듯합니다.
2. 본문 2절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찬양할 충분한 주제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일에 결코 부족함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 찬양에 방해는 우리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배은망덕한 마음입니다.
먼저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관대하게 대하시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찬송을 부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로 이내 돌아서 버리게 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정죄하십니다.
우리의 파렴치하고 사악한 건망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택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묻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참종교 행사에서 주된 요소인 이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일에 그처럼 열의가 없고 그처럼 태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택이 공공연히 하늘과 땅에 나타나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고 있기만 하다면 우리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게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린 유일한 금령은 곧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어느 하나도 ‘잊지 말라’ 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은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잊기를 잘하고 의무에 너무 태만하다고 말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하나님의 은택을 하나하나 나열해 나갑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총으로 더불어 시작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된 것은 그밖의 모든 복들이 흘러나오는 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불신자들에게까지도 미칩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선하심을 즐기기는 커녕 맛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즐기는 모든 복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용서하사 우리 죄악들을 씻으시고 우리를 그분이 베푸시는 은총 가운데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실로 사죄의 은총이 첫 번째 복입니다.
시편 103 편
그 은총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어야 할 교제가 회복되는 복이 수반됩니다.
사죄의 은총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선한 것들은 무엇이나 다 거룩하게 해서 그것들이 우리 복지에 기여하도록 해줍니다.
2) 하반절은 동일한 의미를 반복한 것이거나 상반절에 대한 보다 폭넓은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사죄 은총의 결과가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시며 우리의 부패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또 우리를 경건하고 정직한 삶의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라는 말씀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질병들을 고치시는 일이 그분께서 우리 죄책들을 제거하시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둘째로 그 일이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부패로부터 우리를 치료해 주시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또 세 번째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한 때 우리를 대하여 만족하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은 형벌대로 내리신다는 사실을 포함시킨다면, 반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의원이 우리를 구하시기 전에는 우리가 우리 안에 수많은 질병들과 많은 죽음들까지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4. 본문 4-5절은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입니다.
1)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 질병을 치료하시기 이전 상태를 보다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 이전 상태는 우리가 죽어 있으며 무덤에 들어가도록 판결을 받은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 점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무덤에서 영혼의 부활이 영적 삶의 첫 단계라면 인간에게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선지자는 다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길 데 없는 은혜는 우리 구원 전 과정에서만 아니라 그 시작에서도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이 은혜를 더욱 찬양하도록 고무시키려고 “긍휼로” 라는 말을 복수로 덧붙입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지자는 마치 ‘전후와, 좌우와, 상하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성하게 나타나 있어서 도무지 그 은혜를 피할 수 없다’ 고 말하는 듯합니다.
시편 103 편
2)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라는 말로 같은 진리를 더 합니다(5절상).
이 은유로 선지자는 입맛에 아주 잘 맞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잘 차려진 식탁을 대할 때 입맛에 따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음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반도 만족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사람들이 크게 풍족할 때면 언제나 고삐를 늦추어 무절제에 빠지듯이 하나님의 은택들을 게겔스럽게 탐하는 포식을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우리 마음이 바랄 수 있는 선한 것들은 무엇이나 다 우리가 완전히 만족하기까지 하나님의 부요함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람들의 일반 관습으로부터 이 표현을 인용했습니다.
עדי(아디)를 ‘장신구’로 해석한 자들은 독단에 빠져 본 절을 망가뜨려 놓습니다.
또한 저자는 단순히 어리석은 것들을 제시하기 위해 자기 현명함을 보여주고자 할 때 사람들이 흔히 호기심을 가지고 무엇을 캐고 드는 것처럼 저희가 그와 같은 해석을 제안한 것으로 설명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서 저희 마음 속에 그처럼 근거없는 생각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3) 시편 기자는 다음에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에게 새 활기를 불어넣어 주시므로 그의 힘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채로 유지된다는 말을 덧붙입니다(5절 하).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교회 복구를 논하는 중에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사65:20) 라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 표현으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들을 아주 풍성히 공급해 주심과 아울러 그에게 내적인 활기도 공급해 주셔서 그것들을 즐기게 하신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와 같이 그의 힘은 계속하여 새로워졌습니다.
독수리와 비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설명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화를 냈습니다.
저희가 과학의 기본 요소들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을지라도 무슨 문제를 다루든지 대담하게 파고들었으므로 저희는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설명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저희가 마치 하나님 말씀인양 지어 낸 이야기처럼 어리석은 허구(虛構)는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는 본 구절을 해석하기 위하여 독수리들이 매 십 년마다 깃털을 태우기 위하여 자연의 불을 향해서 올라갔다가 바다에 곤두박질했는데 그 즉시 새 깃털이 몸에 돋아났다는 이야기를 꾸며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자들이 서술하고 있고 또한 관찰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는 바 독수리의 본성에서 선지자의 단순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새는 아주 노쇠하기까지 젊음과 활기를 유지하며 나이가 들어도 힘이 약해지지 않고 끝내 굶어 죽을 때까지는 질병에도 잘 걸리지 않습니다.
시편 103 편
그 새가 장수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새의 부리가 너무나 크게 자라서 먹이를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피를 빨아먹거나 아니면 마심으로써 영양을 섭취할 수 밖에는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 잠언에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미음이나 부드러운 액체 음식을 마시면서 연명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독수리의 노년기’ 라 하였습니다.
노년기에 이른 독수리는 어쩔 수 없이 많이 마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시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부지하기에 불충분하므로 그 새들은 자연적으로 힘이 쇠약해져서라기보다는 굶어 죽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꾸며낸 이야기의 도움이 없이도 선지자의 순수한 의미가 독수리들이 항상 저희의 활기를 유지하고 저희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저희 청춘을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이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은밀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항상 약해지지 않는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항상 육체적인 활기가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적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바가 어떤 의미에서 저희에게 적용이 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되는 사실입니다.
이는 저희 모두가 무덤에서 구속함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저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4) 저희 각자가 하나님께 얼마나 은택을 입고 있는가를 바로 살펴보았다면 저희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라고 고백할 충분한 이유를 찾아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윗이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바다의 모래보다 많아서”(시40:5, 139:18)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혜택을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완악한 마음이 우리 지각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그의 선하심을 여러 가지로 풍성하게 보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와 같이 음식을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 힘을 새롭게 한다는 뜻은 곧 우리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우리가 보다 나은 삶으로 새로워지므로 우리는 특히 하나님이 우리 썩어질 육신의 연약함과 노쇠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보전하실 때, 우리 힘이 쇠약해져 가는 것에 대하여 근심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시편 103 편
시103:6-12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편의 저작자는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 저작 시기와 저작 동기는 불확실합니다.
1. 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 하시는도다” 입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헤아려 봅니다.
다음에 이제 개인적인 고찰을 지나 그 주제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고찰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압박 당하는 모든 자”의 구원자로 선언할 때 그 압박 당하는 자들의 수 가운데 자기 자신도 포함시킵니다.
이는 그가 수많은 압박 중에서도 하나님에게서 도우심을 직접 받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체험에서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에 익숙하신 특수한 상황을 서술합니다.
신자들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항상 이리들 가운데 살아감으로 복수를 사용합니다.
또 구원의 다양성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이 자기 종들이 부당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보실 때면 언제나 저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상의 일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잘못들을 따라 보응하실 때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가 부당하게 압박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 의의 방패로 우리를 보호하시거나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검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인내하는 법을 배웁니다.
2. 본문 7절은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입니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백성에게 주신 이름으로 말합니다.
다윗이 “모세” 와 “이스라엘” 을 말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택들을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으므로 매우 적절한 일입니다.
다윗이 그처럼 많은 복을 풍족히 누리게 되었던 것은 오직 교회의 일원으로서였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즉시 그의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과 맺어진 공동 언약으로 돌립니다.
시편 103 편
그러나 다윗은 앞 절에서와 동일한 사상의 흐름을 계속 이어 나갑니다.
이는 그가 모세에게 알려진 것으로 말하고 있는 이 “길들”이 다름 아닌 구원,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저희에게 베풀어진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압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항상 자신을 의롭게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의와 심판의 한 본보기로서 이 사실을 선정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보기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틀림없이 주로 그 사실에 주안점을 두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맞아들이시고 언약 안에 들어오게 하셨던 택한 백성의 역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보여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들을 먼저 그의 종이요 사신이었던 모세에게 보여주셨다고 말합니다.
또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말합니다.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직분을 맡은 자로 서술됩니다.
이는 구별된 사람의 손과 행사로 백성들에게 알려진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위”와 “행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놀라우신 권능을 베푸신 일과 저희를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일과 표적과 이적을 통해서 저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신 일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거저 주신 언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저희를 택하여 그의 특별한 백성을 삼으신 일과 저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진리들로 깨우쳐 주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도록 권면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베푸신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신 그 지식은 비길 데 없는 완전한 복의 보화라 하겠습니다.
3. 본문 8절은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 하시도다” 입니다.
다윗은 출애굽기 34장 6절에 기록된 모세의 말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본성이 특이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시편 103 편
모세가 다른 때 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허락받았을 때 모세는 그것을 보는 순간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그 구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 알아야 할 모든 중요한 사실들을 총괄적으로 포함시키고 있기에 다윗도 기쁘게 하나님이 서술되고 있는 이 말씀들을 그의 현재 목적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자기 완악으로 말미암아 간간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으로서 그 교제를 계속 유지해 온 사실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돌리고자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 믿음이 발견하는 바와 일치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한계 안에서 특별히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요점을 제외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밀한 본질을 캐내려 드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의 생각이 사악하게 냉랭한 사색에 빠지고 저희에게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는 것을 봅니다.
저희가 쓸데없는 일에는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우리 눈에 띄고,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생생하게 반영시켜 주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계시들은 소홀히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주제에 마음을 쏟든지 간에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의와 자비에 관하여 계속적으로 묵상하는 것에서 보다 더 큰 유익을 얻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은 우리 믿음을 굳게 세워 줄 뿐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리게 해줍니다.
따라서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 19)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모세의 구절을 빌어 다양한 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한 이유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그에게 합당한 찬양을 강탈하는 극악한 오만보다 더 악한 결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오만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그것을 쉽사리 제거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두려운 줄을 모르고 덤비는 육체의 오만을 꺾으시기 위하여 일어나사 고상한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본 성품, 곧 자비를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자비로 말미암아서만 설 수 있습니다.
시편 103 편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때, 우리 마음은 두려워 떨게 되며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이 마음의 의심쩍은 상태를 극복하고 만족시키기 위하여 모세의 예를 따라서 이들 유사한 용어들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셋째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에 대해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동정을 베푸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자와 선하심이 풍부하시다” 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우리의 경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기도와 찬송이며 감사와 순종과 헌신이 열매처럼 매달립니다.
4. 본문 9절은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입니다.
1) 다윗은 앞 절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노하셨을 때 그분께서 취하시는 본성상 항상 용서하시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시는 분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화해하지 않으실 수 없으시리라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이 말이 덧붙여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게 할 어떤 방법이 없었다면 우리 죄악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로막는 문이 계속 닫혀져 있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도면밀하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죄악에 대한 진정한 죄책감으로 그들이 겸손해지게 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시나 언제든지 저희가 겸손히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시기만 하면 그 조처를 거두신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신이 더 이상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라” 라 하셨습니다(창6:3).
그것은 사람들의 사악이 충분히 입증됐기에 이미 저희를 정죄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꾸짖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쉽게 화목하고자 하시고 또한 용서하고자 하시므로 우리에게서 엄밀한 공의가 요구하는 바를 가차없이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2) 하반절에서 “그가 그의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라는 말씀도 역시 그와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덧붙여진 말입니다.
‘노를 영원히 품는다’ 는 표현은 프랑스어의 Je Iuia grade, IJ me I`a grade 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자기가 받은 손상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마음 속에 은밀한 복수를 계획하고 그 기회를 기다릴 때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이 취하는 실예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입은 손상을 인하여 분노를 품으신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시편 103 편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사 죄인들과 화목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차별이 없이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 모아두신 교회의 두드러진 특권을 시사합니다.
이는 모세에 의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에게까지 갚으시는 두려운 보복자”(신5:9)로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취소될 수 없는 영원한 진노가 임하게 될 불신자들을 제쳐놓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용서해 주시는지를 가르칩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친히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곧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사54:7, 8).
5. 본문 10절은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체험과 결과로부터 그가 하나님 성품에 관해 진술한 바를 입증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까지 계속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내의 덕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마치 우리 각자가 자기 삶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행위를 저질렀는지 스스로 반문하여 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생활을 해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일을 미루실 뿐 아니라 마땅히 멸해야 할 자들을 너그럽게 살려두고 계십니다.
6. 본문 11-12절은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 하심이 크심이로다.
⑫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입니다.
다윗은 한 가지 비교를 통해 하나님은 신자들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징벌치 않으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인해 저희 죄악에 대해 다투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확증합니다.
그 표현 형식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것과 맞먹습니다.
시편 103 편
히브리어 גבר(가바르)에 관하여는 그것이 중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타동사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방주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든지 하나님의 자비의 무한성이 세계의 광대함에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책의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주의 자비가 우리에게 못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곧 이어 다윗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2절)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주의 자비가 세계의 광대함에 따라 널리, 또 멀리 신자들에게 베풀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장애들을 제거하기 위해 저희 죄악들이 완전히 도말 되었다 합니다.
다윗은 방금 언급한 바 곧 그가 하나님이 전 세계를 향해 품고 계신 바를 총괄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신자들을 향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특징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둡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여기서 애당초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목 시키신 바 그 자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버지와 같으신 사랑으로 품으신 자들을 계속적으로 지키시는 자비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께 대해 낯선 자들이었을 때 우리를 사망에서 구속하신 그의 자비가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구속함을 받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 자비를 확증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 복을 당장에 잃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죄의 자유사면이 단 일회에 그치고, 후로는 선행의 공적에 의해 의가 얻어지며 우리의 지은 죄는 무엇이나 다 자기 속죄에 의해 제거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얼마나 터무니없이 허튼 소리를 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이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화목 시키시는 그의 자비를 어느 특정한 시기에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본 구절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저희가 완전한 의를 얻었으므로 더 이상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는 헛된 생각에 빠져 있는 광신자들에 대한 논박의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주장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편 103 편
시103:13-16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첫째로 다윗은 자신이 총체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였습니다(1-5)
둘째로 다윗은 모든 성도들이 공통으로 받은 사죄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6-18).
셋째로 다윗은 천사들과 천군들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 찬송을 권고합니다.
1. 본문 13절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입니다.
다윗은 비유를 통해서 그가 이미 언급한 바를 설명하는 동시에 또 하나님께서 그처럼 너그럽게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유를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곧 하나님께서 ‘한 아버지’ 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 죄악을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샘에서 사죄의 소망을 길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또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택하신 결과가 됩니다.
아무도 자기 공로로 택함을 입지 않았기에 죄는 값없이 용서받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하나님이 지상의 아버지들과 비교 되신 것은 그가 모든 면에서 저희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이 보다 훌륭하게 표현될 수 있는 지상 적인 상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와도 같은 선하심이 죄를 장려하는 요인으로 곡해되는 일이 없도록 다윗은 다시 하나님이 오직 자기를 신실하게 경외하는 자들에게만 은총을 베푸신다는 말을 되풀이 합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마5:45) 라는 사실도 하나님에게는 어지간한 인내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진 주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헤아림을 입는바 값없이 허락하시는 의의 전가(轉嫁) 입니다.
이제 이 의는 오직 그처럼 은혜로우신 한 아버지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제공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하는 경건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완전에서는 아주 거리가 멀기에 우리 구원이 안전하게 놓여질 수 있는 기둥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시편 103 편
2. 본문 14-16절은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 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입니다.
1) 다윗은 사람들이 억지로 자기 것으로 돌리려 하는 모든 가치를 폐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길이 참으심은 오직 우리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셔서 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육신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처지가 불쌍하고 처참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진흙이요 진토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실 충분한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2) 곧이어 나오는 사람의 모든 뛰어난 점들은 바람이 한 번 스쳐갈 때 시들어 버리는 꽃처럼 이내 시들어 버리고 만다는 비유(15절)도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번창한다’ 는 말은 적합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천부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구별된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앞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는 바 사람은 안개나 그림자 혹은 헛것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풀처럼 번창 혹은 무성해진다고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도하며 존재한다”(행17:28) 할지라도 우리가 다른 이의 뜻에 의존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 인생은 한낱 지나가 버리는 그림자나 환영에 불과합니다.
3) 그러므로 16절에서 다루어진 주제는 당연히 덧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시편에서 “그가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다”(시78:39) 는 말로 언급된 바와 같이 그처럼 우리를 자비롭게 용서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덧없는 인생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만일 누가 어찌하여 다윗이 사람의 주요 부분인 영혼에 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우리를 진흙과 먼지로 선언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덧없는 인생보다 뛰어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시는 것만으로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사 우리를 보존하시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비록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할지라도 그 영혼이 자기 어떤 본래적인 능력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면 육체가 진토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한 번 휙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같이 사람의 전 존재안에서는 헛것밖에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103 편
시103:17-1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어디까지나 그의 자비로우신 행위인 것을 여러 말로 표시합니다(8-18).
본문 17-18절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 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8)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입니다.
1) 다윗은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다윗은 다만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남겨둡니다.
자신들 안에서 신뢰의 근거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람이 전적으로 헛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나서 위로를 덧붙입니다.
곧 다윗은 저희가 연기로 사라지지 않는 저희 본래의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원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다함이 없는 생명의 샘이 되신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대조는 특히 주의를 요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가 이 같이 인간의 모든 뛰어난 장점들을 박탈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참 마음으로 그를 섬기는 신자들이 저희 소망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두도록 저희 자신들에게서 모든 장점들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영원하므로 신자들의 연약함은 저희 인생의 종말에, 또 죽음 자체에서조차도 저희의 영원한 구원을 자랑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저희의 소망을 시간의 한계 안에 제한시키지 않습니다.
소망의 기간이 소망의 기초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과 일치되는 것으로 봅니다.
“인자하심” 이라는 말에 “의” 라는 말이 덧붙여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보전해 주시는 그의 보호를 뜻합니다.
그가 의로우신 분으로 불린 것은 각 사람에게 공적에 따라 갚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도들에게 그의 보호 손길을 내미심으로써 저희를 신실하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적절하게 이 의를 하나님의 선하심 다음에 언급합니다.
이것은 그 의가 하나님의 선하심의 결과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다윗은 신명기 7장 9절의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그 인애를 베푸시리라” 는 말씀에 따라 그 의가 이스라엘 백성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미치리라고 주장합니다.
시편 103 편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개인적으로 그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또한 그 은총 안에서 우리 자손들, 곧 상속자의 권리로 동일한 은총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도록 저희에게 연결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특이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손과 그 자손에 자손을 그의 보호하심 안으로 받아들이심에 있어서 우리에게 저희 안에서 우리 구원이 그의 보시기에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가를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2) 더 나아가서 위선자 혹은 외식하는 자들이 거짓된 구실을 빙자하여 저희가 하나님 편에 있다고 우쭐해하거나 타락한 자손들이 근거도 없이 저희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저희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시금 예외로 18절에서 하나님은 오직 저희 편에서 “그의 언약을 지키는 자들” 에게 대해서만 자비로우시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불신자들은 저희 사악으로 인하여 그 언약을 하나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앞 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 는 말 대신 여기에 “언약을 지킨다” 혹은 “준수한다” 는 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그 말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천사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짐승들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저희 발아래 짓밟아 버림으로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 던진 교황주의자들은 이에서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람들의 경건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명하신 법도들을 지키는 것으로 바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언약이 은혜의 약속을 포함한 하나의 엄숙한 조항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믿음과 기도가 요구됩니다.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역시 불필요한 추가 구절이 아닙니다.
이는 비록 하나님이 계속 그 법도를 우리 마음 속에 깨우쳐 주실지라도 우리는 이내 세상 염려에 사로잡히고 잡다한 일들로 혼란에 빠지며 여러 가지 유혹들로 잠이 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분발하지 않는다면 건망증이 진리의 빛을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도를 기억하는 것이 그 법도를 지킬 때에 활기를 북돋아 주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적인 생활과 봉사에서 저희 발은 무척 느리고 저희 두 손은 거의 죽어 있으면서도 혀로는 하나님의 법도에 관해 너무나 많은 말들을 합니다.
시편 103 편
시103:19-22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건을 음미하다가(1-18), 아주 감개무량해져서 결론적으로 찬송을 재촉함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만유통치를 이유로 삼아 천사들과 자기 영혼더러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1. 본문 19-20절은 “(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 하시도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 를 송축하라” 입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베푸신 은혜와 그에게 의무를 지고 있는 전체 교회에게 베푸신 은총들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을 찬양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은 온 세계 위에 높이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이 하늘 위에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더 나아가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권능으로 모든나라들과 모든권세들을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2) 아무도 세상 피조물들만 여기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다윗은 주로 천사들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20절).
저희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가담할 것을 요구함에 있어서 다윗은 자기 자신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도 더 훌륭하거나 더 바람직한 예배는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천사들이 동석한 예배보다 더 뛰어난 예배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틀림없이 이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너무나 의욕적이고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어떤 자극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태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천사들을 권면 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시편 103 편
그러나 비록 이들 뛰어난 존재들이 우리 앞에서 빨리 달리고 우리가 어렵게 저희 뒤를 느릿느릿 따라간다 할지라도 다윗은 저희 모범을 통해 나태한 잠에서 우리를 깨우기 위해 저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가담시킵니다.
다윗이 품고 있는 목적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천사들에게 권면함으로써 저희가 꾀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끄는데 있습니다
한 문장에서 그가 저희를 ‘힘’ 이 강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다음 문장에서는 그가 저희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명령들을 기다리는 자들로 서술합니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명령)를 듣는 너희 천사여”
다윗은 “너희가 부여받은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일이 없는 줄 알라” 고 말합니다.
또 저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수행할 뿐 아니라 저희 순종의 민첩함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무엇이든 하나님이 저희에게 분부하시는 바를 수행하기 위해 저희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2. 본문 21절은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입니다.
“천군”이라는 말은 어떤이들이 녹명하는 바와 같이 별들로 이해될 것이 아닙니다.
앞 절의 주제가 아직 계속됩니다. 본 절은 불필요한 반복 구절도 아닙니다.
이는 “천군” 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의 모든 통고(通告)를 받들 준비를 갖추고 그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음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희는 ‘그의 기쁨을 행하는 그의 수종자들’(칼빈) 로 불리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저희가 그저 한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경하기 위해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저희가 우리의 수종자 혹은 보호자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항상 저희의 일을 수행할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여기서는 “말씀” 대신 “뜻”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각기 충분한 이유를 가집니다.
이는 비록 해와 달과 별들이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정해주신 법칙들을 준수한다 할지라도 저희가 지각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과 그의 음성에 순종한다는 말은 적합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한다’ 는 말은 실로 이따금씩 ‘창조세계’ 의 말 못하고 감각이 없는 부분들에게 대해서도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자연의 은밀한 본능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은유적인 의미에서 입니다.
시편 103 편
그러나 천사들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그 본래의 의미대로 적용됩니다.
천사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거룩한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습니다.
또 천사들은 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시키시는 바를 준행 합니다.
‘기쁨’ 이라는 말은 기쁘고 즐거운 순종을 보다 분명히 표현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시키는 바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의 통고를 받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3. 본문 22절은 “여호와의 지으심(솜씨들이여 - 칼빈)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입니다.
다윗은 결론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비록 그것들이 말을 못하고 지각은 없다 할지라도 어떤 의미로 저희 창조주께 돌리는 찬양을 되받아 메아리쳐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하늘이나 땅에 하나님이 찬양을 받지 않는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솜씨들이 저희 창조주를 찬양함으로 우리 나태를 인해 우리를 책망할 때 우리가 적어도 저희 모범을 따르지 않다면 우리는 핑계 댈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라는 분명한 언급은 신자들이 이 일에 더욱 열성을 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지역들조차 하나님을 찬송해야 된다고 하면 우리에게서 찬양을 기대하시고 그의 입을 여사 친히 그의 거룩한 음성을 들려주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입을 다문 채로 정당하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열거하고 하나님의 통치 범위를 넓힌 목적이 자신을 격려하여 하나님을 더욱 더 찬양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