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15-17
엘리사의 사역 - 4 / 최승윤 목사
열왕기상 6:24절부터 몇 절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읽은 말씀은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일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람의 전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를 했습니다. 포위를 한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성 안이 기근으로 인해서 물가가 폭등을 하고, 자기 자식들을 삶아 먹을 정도가 되었다면 시간도 그만큼 많이 지났을 것입니다. 그로인해서 사마리아는 거의 멸절될 형편에 놓였습니다. 열왕기하 6:31절의 말씀을 보면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아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라고 이스라엘 왕이 공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내뱉었을까요? 아람 군대의 포위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백성들이 자식들을 삶아 먹는 것을 보고 나몰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은 그런 형편을 보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표시입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면 그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왕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6:27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향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여인에게 왕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여러분, 왕의 이 말을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그 말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이 처참한 상황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말 아닙니까? 지금 형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인데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아니하시니 낸들 어찌하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6:33절에 가보면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처참한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재앙이라는 것을 왕이 알았습니다.
재앙이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람의 포위로 말미암아 생긴 처참한 재난에 대한 이스라엘 왕이 갖고 있는 생각은 분명합니다.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째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목놓아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 그로 말미암아 이렇게 처참한 현실을 경험하게 된 것에 대해서 통회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와 달라고,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애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6:3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십시오.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왕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처참한 재난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면 무엇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재앙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희망은 없지 않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이렇게 내팽개친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께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찌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인 엘리사라도 잡아 죽여야 답답한 속이라도 풀리지 않겠는가?
여러분, 이스라엘 왕이 단지 화풀이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삼 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것처럼, 엘리사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재앙을 내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아람 군대를 포위했다가 죽이지 않고 떡과 물을 주어서 살려 보낸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살려보내지를 말고 몰살을 시켰어야 했는데 엘리사의 말을 듣고 살려보냈더니 도리어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이런 처참한 상황이 오래 계속되고 있는데 엘리사라는 작자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빨리 이 재난을 끝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들을 삶아 먹는 지경까지 갔는데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서 숨어 있는가? 엘리사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분노로 변하여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왕이 보여준 그와 같은 모습은 저와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요, 동시에 저와 여러분들도 양태는 다르겠지만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나누어서 점점 신앙의 높은 경지로 올라가서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고 선포하며 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창과 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떡과 고기와 물을 주었을 때 그것을 먹고서도 사람들은 우리를 물려고 다시 덤벼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미워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깔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형편이 조금만 나빠지면 금방 돌아서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나선 것처럼 그런 경우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도대체 교회는 뭐하고 있는거냐고, 이런 때에 교회가 나서지 않고 도대체 뭐하고 있길래 침묵하고 있느냐고 아우성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교회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냥 하는 소리라고 흘려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독단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왜 멸망했습니까?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의인 열 사람이 그 성에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 열 명,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능력과 은혜를 나누어주는 일정한 규모의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가 있었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은 그 사람들로 인해서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갖고 있는 놀라운 축복임과 동시에 커다란 책임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 답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작동원리로 교회가 움직이고, 세상과는 다른 문화를 교회가 만들어내고, 세상과는 다른 정신과 품성과 모습을 교회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들이 뭔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 때문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춤을 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욕한다고 우리까지 그들을 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깔본다고 우리까지 그들에게 등을 돌릴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구원의 통로로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을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다른 곳은 교회 말고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두시지 않았습니다. 자만심을 갖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왜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이 커보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 앞에 주눅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커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진실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면 세상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밀려드는 거대한 세상의 세력 앞에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구원의 통로는 고사하고 세상의 세력에 묻혀서 허우적거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엘리사의 사환이 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도단 성을 둘러 쌓고 있는 아람의 군대였습니다. 아람 군대의 말과 병거와 수많은 군사를 보았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아람 군대의 말과 병거와 수많은 군사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의 사환의 입에서 나온 절망적인 소리는 당연한 것입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내 주여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저 수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를 보십시오.
우리는 죽었습니다. 살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이 절망적인 소리는 세상이 거대한 세력 앞에 주눅들어 서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의 통로로 살 수 있는가?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도전은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거대한 세력으로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과연 어찌 해야 하는가?
그러나 동일한 상황 안에 있는 엘리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담대합니까? 무엇이 두 사람을 그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한 사람은 사환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두 사람을 그렇게 다르게 만든 것은 본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만을 보았습니다. 도단 성을 둘러 쌓고 있는 수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도 보았지만 그들보다 월등이 많고 강한 하나님의 군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본 것에 있습니다.
“본다”라는 단어는 진실, 진리를 안다는 것과 통하는 말입니다. 겉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감추인 것까지, 실상과 실체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을 눈을 감는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모르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것을 모르면 거짓 것에 휘둘려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세상이 크게 보이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모르면 세상 앞에 주눅들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면, 우리들의 두 눈이 떠져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을 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권능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안해 하거나 흔들리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앞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과 지혜와 능력을 보고 있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수 있는 눈을 가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7장 초두에 나오는 왕의 시종무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한들 어떻게 폭등한 물가가 하루 아침에, 문자 그대로 다음 날 아침에 폭락해서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싼 값에 매매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제 밀가루 한 자루에 백 불을 하던 것이 오늘 십 불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근으로 인해서 물자가 희귀했던 것이 하루 아침에 물자가 풍성하게 되어서 물가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셔서 물자를 쏟아 붓는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왕의 시종무관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과 이스라엘 왕과 그의 부하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둘러쌓고 있는 어려운 현실만 보았지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어려운 문제만 보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안절부절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고 의지함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통로로 살 생각은 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망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한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망말을 하는 사람의 종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눈으로는 보았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열왕기하 7:16절-20절 봉독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이름 아래, 통계자료와 이성적인 판단에 갇혀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와 구원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머리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자신과 땅에 것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갖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이 단지 교양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되게 하고, 마음의 위로와 상처를 싸매어주는 정도의 효과만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기적만을 기대하고 바라자는 말이 아닙니다. 기적만이 전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기적이냐 상칙이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신앙의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믿고 의지하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모든 것에 자유로우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적도 일어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 어떤 제한과 어떤 한계 안에도 하나님을 가두지 않고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실패처럼 보이는 것이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데 그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크신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이 예수님을 높은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너를 다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실 것이다”라고 한 줄 아십니까?
그것이 왜 예수님께 시험되었는 줄 이해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신다고 하여도, 성전 꼭대기가 아니라 저 먼 우주에서 떨어지신다고 하여도 사뿐히, 전혀 다치지 않고 내려오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일은 식은죽 먹기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이 갖고 계신 신적 능력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사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뭔가 놀라운 일을 도모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과 기적의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무시하고 십자가에만 달려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 위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사는 것이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정점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서 살아가지 아니하면 기적 자체도 우리의 우리 됨을 자랑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단은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유혹하고 시험할 것입니다. 사단의 이와 같은 유혹과 시험을 이기려면 우리들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과 역사하심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실제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길, 주어진 사명을 따라서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에서 이탈하면 세상이 크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세상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 거대한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초라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이런 모든 언사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령의 상태요, 입술의 고백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시겠습니까? 경험하게 한다고 한들 어떻게 그것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세상을 향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닫힌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갖지 못하는 우리들의 단단하게 무뎌진 마음을 열어달라고, 우리들의 어두운 마음에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춰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지혜를 의지해서 세상을 향한, 세상을 위한 구원의 통로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주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앞에 크고 놀라운 일을 펼쳐 주실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며 살게 되실 것입니다. 죽은 것과 같은 우리들의 영혼이 날마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들음으로 살아나서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세상을 향한 구원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이요, 세상을 향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