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문화원 마곡사와 무령왕릉 유적지답사[2](2024.6.12.)
얼핏 보면 마곡사는 동서를 가로지르고 있는 계곡을 중심으로 양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아니하고 남쪽 부분의 사천왕문과 해탈문은 계곡의 북쪽 가람에 미묘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자연적인 계곡을 잘 이용하여 가람의 배치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 마곡사 가람의 특징인 것 같다.
이를 정리해보면 마곡사 가람은
해탈문(解脫門)-사천왕문(四天王門)-세심교(洗心橋)-5층석탑-대광보전(大光寶殿)-대웅보전(大雄寶殿)은 敎化伽藍이고
영산전지역(靈山殿地域)=수행가람(修行伽藍)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천왕문과 해탈문은 그것이 위치한 방향애서 보아 영산전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광보전과 대웅전 쪽을 향하고 있어 계곡의 북쪽 가람에 구조를 맞춘 것임을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위치를 계곡 건너서 북쪽 가람 쪽에 세울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되는데도 멀리 계곡 밖에다 세웠다는 것은 계곡을 경계로 하여 속게(俗界)와 불계(佛界)를 구분짓게 함으로써 가람배치상의 의미를 교화에 응용하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계곡을 건너는 다리의 이름을 세심교(洗心橋)라 하고 있음에서 그 같은 의미는 한층 더 고조되어 불사(佛寺)로서의 마곡사의 의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해탈문 사천왕문이 일직선상에 세심교가 연결되고, 같은 일직선상에 5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불교적 세계관을 여기에 나타내려 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나머지 영산전 지역은 영산전을 중심한 흥성루(興聖樓), 매화당(梅花堂), 요사(寮舍) 등의 건물들은 상호 관련을 갖고 구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들 건물군을 별도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가람구조로 보게 되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살펴볼 때 마곡사의 가람은 교화가람과 수행가람의 2대요소에 의하여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화가람지역(敎化伽藍地域)
교화가람지역으로 위에서 해탈문과 천왕문을 이미 설명하였다. 천왕문을 지나고 나면 넓은 공간에 5층석탑이 나타나고 석탑 뒤에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등이 장엄하게 서있고 탑에서 대광보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승방, 요사 및 기타 건물 등이 있다.
5층석탑
2층기단(基壇)의 5층 석탑이다. 석탑은 탑신(塔身)이 좁아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으로 상륜부(上輪部)가 라마교 형식을 지니고 있다. 라마교 형식은 고려말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왔으며 밀교적 요소의 성격이 짙다.
석탑의 상륜부는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단의 기단과 복발(覆鉢), 평두(平頭), 산개(傘蓋)의 4부분을 된 인도양식 탑을 방불케 하고 있다. 기단형식의 갑석 상ㆍ하 부분은 앙련(仰蓮), 복련(覆蓮)을 조각하였고, 갑석면(甲石面)에도 금강저(金剛杵)를 연속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탑의 금강저와 코끼리, 사자형의 조각 등은 밀교적 의미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2층 탑신부의 사면에 조성된 사면불(四面佛)의 조각이다. 사면불이란 사방사면불(四方四面佛)을 말하는 것으로 동방의 아축불(阿閦佛), 남방의 보상불(寶相佛), 서바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의 미묘성불(微妙聲佛)이다. 사면불은 일명 “사방불‘이라고도 하는데, 동ㆍ서ㆍ남ㆍ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 정토에 군림하는 신앙의 대상인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불, 미륵불을 뜻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적인 불탑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본래 불탑은 고대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음역하여 솔도파(率堵婆)ㆍ솔탑파(率塔婆)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이 차츰 줄여져 탑파(塔婆)ㆍ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을 쌓아올린,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입멸하시자 제자들은 세존의 유해를 다비(화장)하였다. 그때 다비식에 참석한 당시 인도의 여덟 나라 왕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무력까지 동원할 태세를 취하였다. 이때 석가세존의 제자 도로나의 중재로 불타의 사리를 여덟 나라에 골고루 분배하였는데,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한다. 여덟 나라 왕은 나누어 가진 사리로 각기 탑을 세우고 생전의 부처님처럼 모셨다고 한다. 이것을 근본 8탑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사리신앙과 더불어 불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약 100년이 지난 뒤 인도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이, 이전에 세운 8개의 탑을 해체한 뒤 사리를 다시 8만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8만4천 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불교가 유입된 후에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불탑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수량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차츰 불사리 대신 불경이나 불상 등의 법신사리를 봉안한 탑도 건립하게 되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사찰 당우(堂宇) 가운데 하나.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중대,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등이다.
불탑은 조성에 사용된 재료에 따라 목탑, 전탑, 모전석탑, 금동ㆍ청동ㆍ철탑 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 문화가족은 탑의 층수를 어떻게 헤아리는지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설명해본다. 탑의 층수만 헤아릴 줄 알아도 탑을 보는 눈이 한층 달라지며 어디서나 탑을 보면 층수부터 헤아려볼 것이다.
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뉜다. 탑의 층수를 헤아릴 수 없는 밑 부분을 기단부(基壇部)라 하고, 탑의 층수로 셀 수 있는 부분이 탑신부이며, 층수로 헤아릴 수 없는 윗부분을 상륜부라 한다.
탑에는 옥개석(지붕돌)과 옥신석(몸돌)이 있다. 옥개석 밑에는 반드시 옥개 받침(층급받침: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층급받침이 있는 것만 탑의 층수로 세어야 한다. 옥개석 밑의 층급받침은 탑이라면 어느 탑이든지 다 있다. 다만 탑마다 층급받침의 줄의 숫자만 틀릴 따름입니다. 줄이 쳐있지 않는 것을 층수로 세어서는 안 된다. 기단부 첫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없다. 층급받침이 없는 것을 층수로 세면 헛 층수가 나온다. 그럼 이제 어떤 탑이든지 층수를 셀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탑이 본래 쌓을 때 형태 그대로 유지된 제 탑인가 제 탑이 아닌가를 알아보자. 탑이 본래 제 탑이기 위해서는 맨 밑층의 층급받침의 숫자나 맨 위층의 층급받침의 숫자나 중간 어느 층이든 숫자가 같아야 한다. 마곡사 5층석탑의 층급받침은 옥개석마다 두 줄로 탐을 쌓은 후 변동이 없는 제 탑이다. 그러나 선운사의 6층 석탑을 보면, 1, 2층은 층급받침이 넉 줄, 3, 4층은 석 줄, 5층은 두 줄, 6층은 한 줄 그어져 있다. 이렇게 각각 층급받침의 줄 수가 틀리다는 것은 제 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침입하여 어실각(御室閣)을 제외한 선운사의 모든 전각들을 다 불 질러 초토화시켜버리고, 9층 석탑도 무너뜨려 버렸다. 무너져 있는 것을 근방에 사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돌로 깨서 써버린 것이다. 무너진 탑은 광해군 때 다시 세우면서, 기단부에서 2층까지는 제 탑을 세웠고, 없어진 3, 4층은 다른 탑에서 떼어다 맞춘 것이며, 5. 6층은 당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2층까지는 고려 중엽, 3,4층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5,6층은 광해군 이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 층수를 셀 수 없는 탑이 있다. 김해에 있는 인도에서 허황후가 가지고 왔다는 파사탑이다. 김해 지방의 풍습에 의하면 층급받침이나 부처님의 코를 긁어 그 돌가루를 먹으면 아들 난다는 설을 믿고 층급받침을 어찌나 많이 긁어댔던지 층급받침이 달아졌거나 마모되어 층수를 셀 수 없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불교미술 : (재)대한불교진흥원 출판부
한국의 가람 : 홍윤식 동국대, 교토불교대학 교수 역임.
불교성전 :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