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문 월평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삶에 대한 깊은 의식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고수
인간 생존에 관한 문제와 가치 규명, 보다 보편적 의미의 획득이 문학이 지향하는 바이고, 수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면, 수필적 관심과 창작적 발상은 모든 존재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신뢰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때로는 합일된 모습으로 때로는 갈등의 양상으로 보여지더라도 그 근본은 삶의 허상이 아닌 삶의 실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누리는 고급행위가 문학일 때, 문학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문학의 본령에 값하는 것이다.
박석구는 <그리운 이>를 통해 문학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과된 진실이고, 삶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수필가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는 우리의 삶을 부당하게 하는 모든 비인간적인 기제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고교시절 문예반 활동을 통해 알게 된 ‘형’이 술값 시비로 종업원에게 두들겨 맞아 길바닥에서 동사했다는 사건을 현미경적 눈으로 투시하며 그 어두웠던 시절의 풍경을 인간의 욕망 위에 수채화를 그리듯 뿌려놓는다. 이 수필의 주요 소재와 테마가 되는 것은 ‘형’뿐만 아니라 한때 자신의 마음을 빼앗았던 여인도 있다. 죽은 형이 쓴 시의 한 구절을 마지막 주제 의미화 문장, ‘어두운 밤, 어느 골목길에서, 가로등 불빛에 드러나 창백한 초승달처럼 미끄러지던 그 여자의 목. 소리 없이 다가가 확 깨물고 싶은’이란 문구와 결부시켜 풀어낸 탄탄한 구성력이 돋보였다. 그는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것을, 아니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도 한 욕망을 드러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원천인 그리움의 귀착지가 여인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당당하다. 이 수필은 한마디로 작가의 자전적 기록인 동시에 작가가 살아온 격동의 시대를 조망한 글이기에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권동진의 <불편한 그림>은 하버드대 쿠퍼랜드 교수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다. 그는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요, 세계시민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수필의 정서적 원천도 ‘그리움’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는 없어서는 안 될 정서가 ‘외로움’과 ‘그리움’이다. 작가는 어디엔가 어깨를 기대고 피곤한 육신과 영혼을 위로해 줄 대상을 갈망한다. 이 접점에서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화가 친구다. 이 수필의 정서적 영토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소통의 길을 외면한 화가 친구의 비뚤어진 삶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데서 이 수필은 인간의 냄새를 풍긴다. 작가는 익명의 사이버 블로그를 통해 친구의 그림을 보면서 하루 빨리 친구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열린 세계로 나오고, 세계시민적인 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그 소망을 ‘단순미와 단색을 고집하더라도 다양한 색상과 단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캔버스 안이나 바깥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세상도 그림도 다양한 색깔로 풍경을 이룬다.’는 비유로 잘 형상화했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친구의 불통 행위를 통하여 무엇이 삶의 진실인가를 묻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미해결적인 의문과 갈구가 절절한 물음으로 형상화되는 지점에서 수필적 멋이 빛나는 것이다.
임정화의 <다나에>에 주목한다. 수필적 관심과 창작적 발상이 인간 존재,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신뢰에 있다는 데서 이 수필은 작가정신의 한 축이 빛난다. 수필의 창작적 발상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 나아가 사회의 목소리, 역사의 목소리를 따갑게 듣고자 하는 데 있다. 작가는 클림트의 ‘다나에’라는 작품 감상을 통해서 성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적 삶의 어두움을 조명하고자 한다. 작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무분별한 권력자의 욕망 확대다. 그는 이러한 권력자의 욕망 확대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어두움의 그림자라는 것을 제우스의 폭력적 성 취향에 맞춰 분석하면서 성폭력의 근절을 촉구한다. 다소 논조가 직절적인 것이 부담스럽지만, ‘욕망 자체는 근본적으로 거짓 없는 순수라 할지라도, 이성이 마비되고 윤리를 망각한 탐욕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진술에서 드러나듯, 작가는 사랑이 용납되고 허용되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가 동등한 인격체임을 인정하는 데서 성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녀는 클림트의 다나에가 섹스의 환희에 사로잡힌 관능적인 여인으로 보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녀가 주제의식으로 놓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가치다. 사랑이 남발되는 시대에 진실한 사랑의 모형을 찾아 나선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순수하지 않는 사랑은 한낱 향락적 행위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욕망의 본질을 정조준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짦음에 아름다운 휴식이 있다는‘짦음’에 대한 재해석, 그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손봉호 교수의 책,《잠깐 쉬었다가》 글머리를 인용한 박윤정의 <짧아서 아름다운 또 한 가지>, 커피의 역사를 인류 문명의 역사와 견주어 풀어내어 대상에 대한 예리한 안목을 보여준, 오정주의 <유혹하는 아라비카>, ‘미련 없이 꽃잎을 던져 산화散花하고 잎눈을 틔우는 벚꽃에 대한 관조가 돋보이는, 김영환 <벚꽃봉오리를 보노라면>도 일독을 권할 만한 수필이다. 이들 작품들은 하나같이 독자의 기대가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내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의식을 갖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고뇌하며, 나름의 해석을 도출하는가에 있다는 걸 잘 보여주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