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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83)
【冶父】
兎角杖龜毛拂이로다
토각장구모불
<번역>
토끼뿔로 만든 지팡이요 거북이 털로 만든 拂子(털이개)이다.
<해설> - 무각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이는 털이 없으니 공하다는 것입니다.
공하다는 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이랬다저랬다 고정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항상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토끼뿔과 같고 거북이 털과 같음을 아는 것이 공한 이치를 아는 것이지만 체험을 통해서 확연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을 하셨지만 한 말씀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그것이 無相하기 때문입니다.
무상을 받아들이면 무아를 체험하게 됩니다. 죽음은 무상의 궁극적인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나라는 게 없게 됩니다. 나라는 게 없는 것은 항상 밝다는 것이기에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밝게 다가옵니다. 즉 내가 없으면 세상이 나아님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밝게 다가오고 바르게 압니다.
선에서는 나라는 게 없으면 자유롭고 생동감 있고 활발발하다고 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것(가족․권력․명예․재물)이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것이 전부 공하기에 我空 法空이라 하여 我도 공하고 法(나와 관계된 것)도 공하다고 합니다.
죽음에 이르르면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놓고 갈 수밖에 없기에 실체가 없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면 무상과 무아가 되어 모든 것이 밝게 다가오고 바르게 알게 됩니다. 이건 체험해봐야 실감 나게 알 수 있지만 이치라도 알면 고집하다가도 쓸데없는 고집은 놓고 가게 됩니다.
그러면 바보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가족을 잃거나 재물을 잃으면 큰 고통에 빠지는데, 그것을 그대로 거기에 놓으면(청정한 자리에 들어가면) 밝은 지혜가 나온다는 것을 믿고 알아야 하기에 “토끼뿔로 만든 지팡이요 거북이 털로 만든 拂子(털이개)”라는, 끝없이 공한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說誼】
古人이 道호대 四十九年積累功이여 龜毛兎角이 滿虛空이라 一冬臘雪이 垂垂下하야
고인 도 사십구년적루공 구모토각 만허공 일동납설 수수하
落在烘爐烈焰中이라하시니 則許多年을 露胸跣足하고 拖泥帶水하사 拔濟沈淪하신
낙재홍노열염중 즉허다년 노흉선족 타니대수 발제침륜
如是功能이 如夢相似하야 無一毫許可與相許로다 雖然如是나 畢竟作麽生道오
여시공능 여몽상사 무일호허가여상허 수연여시 필경작마생도
拈起兎角杖하야 拈開一路涅槃門이요 竪起龜毛拂하야 拂盡三千空假中이로다
염기토각장 염개일로열반문 수기구모불 불진삼천공가중
<번역.
옛사람이 이르되 四十九년간 많은 功을 쌓음이여, 거북이 털과 토끼 뿔이 허공에 가득함이라. 한겨울 섣달 눈이 계속 내려서 붉은 화로의 불꽃 속으로 떨어진다 하시니라. 곧 허다한 세월을 가슴 드러내고 맨발로 진흙을 묻히고 물에 젖으며 고해에 빠져있는 중생을 건져 제도하신 이와 같은 功能이 꿈과 같이 相似하여 한 터럭만큼도 가히 더불어 허락할 게 없도다. 비록 이와 같으나 필경 어떻게 말할 것인가. 토끼뿔 지팡이를 잡아 일으켜서 한 길의 열반문을 열어주고 거북털의 털이게를 일으켜 세워서 三千大千세계의 空, 假, 中을 다 털어 없애버렸다.
<해설> - 무각
“옛사람이 이르되 四十九년간 많은 功을 쌓음이여, 거북이 털과 토끼 뿔이 허공에 가득함이라.”
부처님은 四十九년간 설법을 하여 많은 功德을 쌓았지만 이것은 거북이 털과 토끼 뿔이 허공에 가득하듯이 공하여 실체가 없기에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셨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맑은 거울과 같아서 중생들이 오는 대로 비춰서 드러낼 뿐이기에 팔만대장경은 부처님 마음이 아니고 중생의 마음입니다. 즉 중생의 마음을 부처라는 거울에 비춰서 드러낸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없는 분이기에 텅비어 고요한 가운데 밝고 밝게 비추어 낼 뿐입니다.
자식이 오면 밝게 비춰서 자식임을 알고 부모로서 작용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처(텅비어 고요한 마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자식인지 뭔지 알지 못하지만 바로 비춰서 알기에 부처라는 것입니다.
텅비어 고요한 가운데 밝고 밝게 빛나는 참마음의 본체와 당체를 가지고 밝게 작용하지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분별을 일으키므로 이것만 놓으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본래부처입니다. 즉 부처는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놓는 것입니다.
四十九년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설한 법문도 허공에 가득하게 밝게 비추어진 실체 없는 그림자이기에 “거북이털과 토끼 뿔”이라 했습니다.
“한겨울 섣달 눈이 계속 내려서 붉은 화로의 불꽃 속으로 떨어진다 하시니라.”
“한겨울 섣달”이란 꽁꽁 얼어있는 업식(고정관념)으로 이것이 눈이라는 경계가 되어 끝없이 내리지만, 눈이 붉은 화로의 불꽃 속으로 들어가면 흔적이 없습니다. 이 공부를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본래 그런 것인데 거기에 취착(取著)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봄이 돼서 봄바람이 불면 꽁꽁 얼었던 얼음도 녹지만 “한겨울 섣달” 얼어있는 물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중생심이기에 뭘 봐도 부딪칩니다. 얼어있기에 경계가 닥치면 부딪치면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어있는 물(마음)이 부처님 법문을 듣고 녹아서 큰 그릇에 들어가면 크게 되고,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네모가 되고, 세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세모가 되어 모든 것에 응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참다운 지혜입니다.
이처럼 지혜는 딱딱하지 않고 말랑말랑합니다. 머리는 말랑말랑해야지 딱딱하면 가는 곳마다 부딪칩니다. 경계가 닥치면 끝없이 탓하고 화내는 탐(貪)․진(嗔)․치(痴)로 인해서 고통과 악이 재창출됩니다.
한겨울 섣달 끝없이 눈이 내려도(경계가 안팎에서 끝없이 일어나도) 붉은 화로에 눈 한 방울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즉 본래 청정하므로 거기에 맡겨 놓으면 더 이상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잘하려고 하는 것도 망상이고 못하려고 하는 것도 망상입니다. 선업도 업이기에 결국은 망상입니다.
선업도 업인데 항차 악업을 해서는 되겠는가? 라는 것이고, 선업도 놓아야 하거늘 악업은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경계가 닥치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과 같음을 믿고 자성에 맡겨 놓아야 합니다.
세속에서 말할 때는 어려움이 닥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려 놓으면 지나갑니다. 그 인연이 다하면 스러지기에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기에 고통이 오래가는 사람도 있고 빨리 스러지는 사람도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렇게 마음을 내서 놓고 가면 눈이 불꽃 속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곧 허다한 세월을 가슴 드러내고 맨발로 진흙을 묻히고 물에 젖으며 고해에 빠져있는 중생을 건져 제도하신 이와 같은 功能이 꿈과 같이 相似하여 한 터럭만큼도 가히 더불어 허락할 게 없도다.”
허다한 세월을 가슴 드러내고 맨발로 진흙을 묻히고 물에 젖는다 함은 고해의 바다에 빠져있는 중생을 건지고자 무르팍이 깨지도록 절하고 잠안자고 일종식(一種食)하고 손바닥이 종잇장이 되도록 비는 공능(功能)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면 꿈속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분상에서는 다 부질없는 짓이므로 전부 꿈을 깨는 그 자리에 맡겨놓고 작용해야 합니다.
“비록 이와 같으나 필경 어떻게 말할 것인가. 토끼뿔 지팡이를 잡아 일으켜서 한 길의 열반문을 열어주고 거북털의 털이게를 일으켜 세워서 三千大千세계의 空, 假, 中을 다 털어 없애버렸다.”
‘홍로일점설’이라 했듯이 자성에 맡기면 됩니다.
용광로에 어떤 것을 집어넣어도 다 새로운 물건(지혜광명)으로 나온다는 뜻입니다. 지금 할 일은 잘되든 못되든 거기에 다 털어 넣고 작용하면 십신문(十信門)과 십주문(十住門)을 체험하게 되고 실천하면 공부가 깊어집니다.
【冶父】
多年石馬가 放毫光하니 鐵牛哮吼入長江이로다 虛空一喝이 無蹤迹하야
다년석마 방호광 철우효후입장강 허공일할 무종적
不覺潛身北斗藏이로다 且道하라 是說法가 不是說法가
불각잠신북두장 차도 시설법 불시설법
<번역>
나이 많은 石馬가 백호광명을 놓으니
鐵牛가 포효하며 長江으로 들어간다.
허공의 一喝 종적이 없이
몰란결에 몸을 숨겨 北斗에 감추도다.
또 일러라. 이것이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해설> - 무각
“나이 많은 石馬가 백호광명을 놓으니
철우(鐵牛)가 포효하며 長江으로 들어간다.
허공의 일할(一喝) 종적이 없이
몰란결에 몸을 숨겨 北斗에 감추도다.”
나이 많은 석마(石馬)가 백호광명을 놓으니 철우(鐵牛)가 포효하며 長江으로 들어간다.
허공에 할(喝)하는 큰 소리가 종적이 없고 몰란결에(알지 못하는 사이에) 몸을 숨겨 북두칠성에 감추도다.
율전리에 가서 도반들과 옥상에 누워서 별을 보려고 하는데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40분 정도 좌선이나 와선(臥禪)을 택해서 했는데, 같이 온 아이들도 어른들을 따라 하고 싶어서 좀이 쑤셔 꿈틀거리면서도 40분 동안 있었습니다. 그게 참는 겁니다. 일부러는 못하니까요.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눈감고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별이 보일 것이다. 별은 네 마음에 있으니까 그 별을 잘 봐라! 이렇게 말해주고.
그렇게 좌선하고 죽비를 치니까 북두칠성이 한쪽만 조금 보여주는 겁니다.
북두칠성은 삼천대천세계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에, 일체가 북두칠성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로 “몰란결에 몸을 숨겨 北斗에 감추도다.”라고 했습니다.
야부스님은 앞에서도 “북두(北斗)를 면남간(面南看)이어다.”라고 하여 북두칠성을 남쪽을 향해서 보라고 했습니다.
북두칠성은 북쪽에 있는데 왜 남쪽을 향해서 보라고 했을까요? 답은 연기법에 있습니다. 근원은 원래 남쪽 북쪽이 없습니다. 단지 이름으로 네가 있으니까 내가 있고․남쪽이 있으니까 북쪽이 있고․옳은 게 있으니까 그른 게 있다고 할 뿐입니다.
북두칠성은 모든 존재의 중심이기에 ‘面南看’이라 하면 남쪽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說誼】
寂滅場中에 不曾擡步하고 生死海裏에 橫身而入하사 許多年을 以石馬而放毫光하사
적멸장중 부증대보 생사해이 횡신이입 허다년 이석마이방호광
致令盲者로 得見하며 以鐵牛而作哮吼하사 致令聾者로 得聞케하시고 且喝得虛空하사
치령망자 득견 이철우이작효후 치령농자 득문 차할득허공
令北斗裏藏身케하시니 且道하라 是說法가 不是說法가 若道是說인댄
영북두이철신 차도 시설법 불시설법 약도시설
爭奈石馬鐵牛어니 有甚閑情이며 有甚閑氣리오 若道不說인댄 爭奈放光哮吼하야
쟁나석마철우 유심한정 유심한기 약도불설 쟁내방광효후
解喝虛空가 又須信四十九年說이 石馬放光鐵牛吼니 石馬鐵牛가 竟無力이요
해할허공 우수신사십구년설 석마방광철우후 석마철 우 경무력
虛空一喝이 便無蹤이라 伊麽則虛空一喝이 大烘焰裏요 放光哮吼가 一冬片雪이로다
허공일할 편무종 이마즉허공일할 대홍염리 방광효후 일동편설
<번역>
적멸한 도량 가운데 일찍이 걸음을 옮기지 않고, 생사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들어가서 허다한 세월 동안 石馬로서 백호광명을 놓아서 눈 어두운 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鐵牛로서 사자후(哮吼)를 하여서 귀먹은 자로 하여금 다 듣게 하시며, 또한 허공에 할(喝)을 얻어서 北斗로 하여금 몸을 감추게 하시니 또 일러라. 이는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만약 설법이라 하면 이는 石馬와 철우와 같거니 무슨 부질없는 생각을 할 것이며 무슨 부질없는 氣가 있으리오. 만약 설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방광하고 포효하여 허공이 할(喝)을 얻어서 어찌할 줄 알겠는가. 또한 모름지기 四十九年 설함은 석마가 방광하고 철우가 부르짖음인 줄 믿을지니 석마와 철우가 마침내 힘이 없음이요, 허공의 一喝이 문득 자취가 없음이로다. 이런즉 허공의 一喝이 큰 불구덩이 속이요, 방광과 포효가 한 겨울의 조각눈이로다.
<해설> - 무각
앞에 야부스님의 송(頌)을 해결해 놓은 것입니다.
“적멸한 도량 가운데 일찍이 걸음을 옮기지 않고, 생사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들어가서 허다한 세월 동안 石馬로서 백호광명을 놓아서 눈 어두운 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鐵牛로서 사자후(哮吼)를 하여서 귀먹은 자로 하여금 다 듣게 하시며,”
石馬로서 백호광명을 놓아서 눈 어두운 자로 하여금 보게 한다는 것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 했듯이 자성(성품 자리)이 항상 백호광명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나름대로 다 보고 듣고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최고의 동물이 되었습니다. 모든 중생의 과정을 다 거쳐서 지금의 자기가 된 것이므로 지옥․아귀․축생․인간․수라․천상이 이 몸과 마음속에 다 있습니다. 지금은 이 몸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대표성을 띠고 있을 뿐 항상 전체와 더불어 존재합니다. 그 중생들과 지금도 끝없이 인연을 짓고 있습니다.
어제 돼지고기를 먹었다면 돼지가 곧 내가 됐습니다. 자신과 인연을 지었으니 돼지의 업식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러면 내가 돼지일까요? 사람일까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돼지의 업식 속에도 석마가 백호광명을 놓기에 좋고 나쁜 것을 알고, 옳고 그른 것을 알고,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 못 해주는 사람을 알기에 악업과 선업이 나누어집니다.
돼지를 쳐서 죽이면 악업이 되지만 내가 한생각 돌려서 둘이 아니게 감사히 받아들이면 악업이 선업으로 바뀝니다. 그 한순간에 이 공부하는 사람이 됐으니까 엄청난 행운입니다.
돼지가 사람 되기가 쉬운 일입니까? 더군다나 공부하는 사람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에 뒤집어서 생각하면 서로 은인입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너를 죽여서 먹으면 원수지간이 되므로 너도 언젠가는 한번 죽어봐라!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악업이 서로 뭉칩니다. 악업은 악업끼리 뭉치고 선업은 선업끼리 뭉치므로, 그 한생각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철우(鐵牛 쇠로된 소)로서 사자후(哮吼)를 하여서 귀먹은 자로 하여금 다 듣게 하시며,”라고 했는데, 다 듣는게 아니라 인간 세상의 소리만을 듣습니다. 저 미물들의 말을 다 들을까요? 그런데 알고 보면 다 듣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지나가다 뱀 한 마리를 봐도 여기 있지 말고 저기 가서 살아라! 쫓아내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연이 됐으니까 나중에 언젠가는 너도 이 공부를 해야지. 하고 그를 위해서 마음을 냈던 겁니다.
귀찮아서 쫓아버리려고, 저리 가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한세상 사는 고통이 심하고 천수를 다 누리고 살지 못합니다.
사자로 태어나도 새끼가 어른이 될 확률은 30% 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다 죽습니다. 산다는 게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인간이라는 최상의 동물이 되었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최고의 지위에 왔습니다. 도인이 되는 것을 떠나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왔지만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감나게 알면 철이 든 사람이고 공부가 조금 익은 사람입니다.
“허공이 할을 얻어서”
무심(허공)을 바탕으로 한생각 내면(喝을 얻어서) 즉 자신의 근본(자성)에 맡기고 한생각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늘에 별이 없네요! 하길래, 아니야! 별은 네 마음에 있으니까 마음으로 봐라! 그럼 다 보일 것이다. 바로 이 말입니다.
허공이 마음(자성)입니다. 이 허공도 자성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자성(무심자리)에 놓고 한생각 냈다(一喝)는 것입니다.
거기다 맡기고 저 사람이 잘되야지! 이렇게 마음을 내면 종적이 없는 무위법으로 잘 돌아갑니다. 이것이 야부스님이 말한 “허공이 일할(一喝) 종적이 없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무위법으로 돌아가 흔적이 없기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몰란결에) 몸을 숨겨 北斗에 감추도다(본질 자리와 하나로 돌아갔다).”라고 했습니다.
“또 일러라. 이것이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설한바 없는 이것이 진정한 설법이라는 것입니다.
“北斗로 하여금 몸을 감추게 하시니 또 일러라. 이는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만약 설법이라 하면 이는 石馬(돌 말)와 철우(쇠로된 소)와 같거니 무슨 부질없는 생각을 할 것이며 무슨 부질없는 氣가 있으리오. 만약 설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방광하고 포효하여 허공이 할(喝)을 얻어서 어찌할 줄 알겠는가.
설법이 아니라고 하면 지금 방광하고 포효(근원에 맡겨놓고 한생각 내서 작용하는 것)하는 것은 설법이 아니고 무엇이며 허공이 할을 얻을 줄 어찌 알겠느냐? 이것입니다.
또한 모름지기 四十九年 설함은 석마가 방광하고 철우가 부르짖음인 줄 믿을지니 석마와 철우가 마침내 힘이 없음이요, 허공의 一喝이 문득 자취가 없음이로다. 이런즉 허공의 一喝이 큰 불구덩이 속이요, 방광과 포효가 한 겨울의 조각눈이로다.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 말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맡고 놓으면 더 깊은 맛은 가슴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금강경】 유명선사속가(幽冥禪師續加)
爾時에 慧命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고
이시 해명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어미래세 문설시법
生信心不잇가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요 須菩提야
생신심부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하이고 수보리
衆生衆生者는 如來가 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중생중생자 여래 설비중생 시명중생
<번역>
그때에 해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해설> - 무각
고정되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생이라고 해서 중생도 아니고 중생 아니라고 해도 중생입니다. 중생 속에는 항상 부처가 있고 부처는 중생을 의지해서 존재하므로 둘이 아닙니다.
【說誼】
空生이 以後世信與不信으로 發問이어시늘 佛이 以是生非生으로 答者는 以是生故로
공생 이후세신여불신 발문 불 이시생비생 답자 이시생고
困於生死하야 以求出要니 應有信之之理요 以非生故로 本來是佛이라
곤어생사 이구출요 응유신지지리 이비생고 본래시불
不應以佛求佛이니 應有不信之理로다 不信佛法이 是眞生信이니 以無法相故也니라
불응이불구불 응유불신지리 불신불법 시진생신 이무법상고야
<번역>
空生이 ‘후세에 믿음과 믿지 않음’으로 물음을 발하심에 부처님이 ‘이 중생은 중생이 아님’으로 답한 것은 중생인 연고로 생사에 빠져서 벗어날 것을 구하니 응당 믿을만한 이치가 있음이요, 중생이 아닌 고로 본래 이 부처인 것이라. 응당 부처로써 부처를 구하지 못하리니, 응당 믿지 못할 만한 이치가 있음이로다. 佛法을 믿지 않는 이것이 참으로 믿음을 내는 것이니 法의 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해설> - 무각
“空生이 ‘후세에 믿음과 믿지 않음’으로 물음을 발하심에 부처님이 ‘이 중생은 중생이 아님’으로 답한 것은 중생인 연고로 생사에 빠져서 벗어날 것을 구하니 응당 믿을만한 이치가 있음이요, 중생이 아닌 고로 본래 이 부처인 것이라. 응당 부처로써 부처를 구하지 못하리니, 응당 믿지 못할 만한 이치가 있음이로다.”
부처님께서 중생인 연고로는 “믿을 만한 이치가 있음이요,” 라고 하셨고, 중생이 아닌 까닭에는 우리가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이 부처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응당 부처로써 부처를 구하지 못하리니, 응당 믿지 못할 만한 이치가 있음이로다. 佛法을 믿지 않는 이것이 참으로 믿음을 내는 것이니 法의 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금으로 금을 살 수 없고 물로 물을 씻을 수 없듯이 부처가 부처를 구할 수 없기에 믿지 못할 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이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알고 보면 무신지신(無信之信) 믿음 없는 믿음이 참믿음이라 했듯이, 불법을 믿지 않는 이것이 참으로 믿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것은 法相(법의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본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 했습니다.
“믿는 마음을 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없다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묘하게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라.”하고 대답하셨다. 무슨 까닭인가?
본래 깨달음의 분상에서 보면 일체 존재가 그대로 완전한 부처의 나툼이나 지금 한생각이 미혹한 까닭에 또한 중생이라 이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도 다만 이름이고 관세음도 다만 이름이며 중생도 다만 이름일 뿐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부처나 관세음이나 중생은 없다.
부처의 작용, 관세음의 작용, 중생의 작용이 있을 뿐이다.
고정된 생각으로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이 바로 중생이다.
머무르지 않는 무주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
【冶父】
火熱風動이요 水濕地堅이로다
화열풍동 수습지견
<번역>
불은 뜨겁고 바람은 움직이며 물은 습하고 땅은 견고하도다.
【說誼】
孺子入井見皆憐하니 可稱人天調御師요 毁聲이 入耳聞皆怒하니 是則難當聖人名이로다
유자입정견개련 가칭인천조어사 훼성 입이문개노 시즉난당성인명
伊麽則面前驢脚이요 背後龍鱗이니 是凡가 是聖가 定當不得이로다 然雖如是나
이마즉면전려각 배후용린 시범 시성 정당부득 연수여시
凡住凡位하고 聖住聖位하니 凡聖路別이라 不可得而混也니라
범주범위 성주성위 범성로별 불가득이혼야
<번역>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면 모두 불쌍히 여기니 가히 人天의 조어사라고 일컬음이요, 헐뜯는 소리를 귀로 들으면 다 화를 내니 이는 곧 성인이라 이름하기 어렵다. 그러한즉 앞에는 당나귀요 뒤는 용의 비늘이로다. 이는 범부인가, 성현인가. 결정코 알 수 없도다. 비록 그러하나 범부는 범부의 위치에 머물고 성인은 성현의 위치에 머무르니 범부와 성현의 길이 다름이라. 가히 혼동하지 말지니라.
<해설> - 무각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면 모두 불쌍히 여기니 가히 人天의 조어사라고 일컬음이요,”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면 누구나 다 부리나케 가서 아이를 건지듯이 그럴 때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인천의 조어사(調御士 부처님)입니다.
“헐뜯는 소리를 귀로 들으면 다 화를 내니 이는 곧 성인이라 이름하기 어렵다. 그러한즉 앞에는 당나귀요 뒤는 용의 비늘이로다. 이는 범부인가, 성현인가. 결정코 알 수 없도다. 비록 그러하나 범부는 범부의 위치에 머물고 성인은 성현의 위치에 머무르니 범부와 성현의 길이 다름이라. 가히 혼동하지 말지니라.”
범부와 성인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초기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바라문은 태어나는 것으로 인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이니라!” 고 했습니다. 즉 그 행위(마음작용)에 의해서 바라문이라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성인은 성인으로서 마음을 쓰고 범부는 범부로서 마음을 쓰므로 범부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대승에서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佛)이라는 십법계(十法界)로 구분합니다.
지옥의 중생은 지옥의 마음을 썼기에 지옥에 태어나고, 아귀는 아귀도의 마음을 썼기에 아귀도에 태어나고, 축생은 축생으로서 마음을 썼기에 축생도에 태어나고, 인간과 천상도 이와 같이 나누어집니다. 또 법으로 구분된 성인의 세계로 성문·연각·보살·불세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인간으로 살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많고 그 사람은 나중에 그 세계가 구체적으로 현전 됩니다.
인간이라는 이 몸과 마음속에도 육도 구류중생이 다 있지만 인간의 표가 한 표라도 더 많으므로 인간으로 드러나서 전체를 대변하고, 축생도 같은 이치입니다.
마음 씀에 따라서 이렇게 구분되기에 지금도 끝없이 표갈이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 쓰는 것이 개만도 못한 사람은 축생보다 못한 것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즉 하는 행위가 개만도 못하면 개만도 못한 세상이 눈앞에 현전하게 되니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씀에 따라서 이름이 주어지니 “범부와 성현의 길이 다름이라. 가히 혼동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冶父】
指鹿에 豈能成駿馬며 言烏에 誰謂是翔鸞이리오 雖然不許纖毫異나 馬字驢名이
지록 개능성준마 언오 수위시상란 수연불허섬호이 마자려명
幾百般고
기백반
<번역>
사슴을 가리켜 어찌 준마라 할 수 있으며
까마귀를 일러 누가 난새(희귀한 새)라 이르리오.
비록 그렇게 털끌만큼의 다름도 허락치 않건만
馬字가 든 나귀 이름들이 얼마나 많던가.
【說誼】
盜跖을 不應號文湯이니 誰喚波旬作牟尼리오 雖然理上에 融無二나 爭奈難齊聖凡名가
도척 불응호문탕 수환파순작모니 수연이상 융무이 쟁나난제성범명
<번역>
도척(盜跖)을 文王, 湯王(위대한 성군)이라 부르지 못함이니 누가 마왕 파순이를 석가모니라 부르리오.
비록 그렇게 이치상으론 융통하여 둘이 없으나 聖人과 凡夫 이름이 같지 않음은 어찌하리오.
<해설> - 무각
도척은 지혜가 많은 최고의 도둑이지만 문왕(文王), 탕왕(湯王)에 견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왕 파순이를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치상으로는 융통하여 둘이 없으나(둘이 아니지만) 聖人과 凡夫 이름이 같지 않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부처 노릇을 하니 부처라는 이름을 얻고, 관세음 노릇을 하니 관세음이라는 이름을 얻고, 마구니 노릇을 하니 마구니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 분명하고 분명한데 만 가지 노릇을 하게 하는 놈은 하나의 성품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음 씀에 따라서 도척이 되고 문왕, 탕왕이 되지만 한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경】
如來가 無所說이여 慈雲甘露가 洒濛濛이요 慧命이 未嘗聞이여 明月淸風이
여래 무소설 자운감로 쇄몽몽 혜명 미상문 명월청풍
空寂寂이로다 正恁麽時에 且道하라 是何境界오 欲得不招無間業인댄
공적적 정임마시 차도 시하경계 욕득불초무간업
莫謗如來正法輪이어다
막방여래정법륜
<번역>
여래가 설함이 없음이여, 자비스런 구름과 감로가 자욱히 젖음이요. 혜명수보리가 일찍이 듣지 못함이여, 明月과 淸風이 공하여 고요하도다. 정히 이러한 때에 일러보아라. 이 무슨 경계인가. 무간지옥의 업을 초래하지 않고자 하면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說誼】
如來無說說이여 出岫雲無心이요 慧命이 不聞聞이여 風月이 兩蕭然이로다
여래무설설 출수운무심 혜명 불문문 풍월 양소연
<번역>
여래가 설함 없이 설함이여, 산마루에 이는 구름같이 무심하고 혜명이 들음 없이 들음이여, 바람과 달이 둘 다 엄숙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