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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m.wikipedia.org/wiki/%EC%B6%A4
춤은 몸(신체)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의 한 종류이다.
춤은 동사 '추다'에서 파생된 동족목적어이며 비슷한 단어로는 꿈, 잠 등이 있다.
춤은 모든 예술장르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탄생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춤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일부 동굴에는 인류 최초의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춤의 테크닉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다.
교회는 춤을 금지하려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https://www.thema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6
무용하는 사람의 모습은 세계 최고(最古)의 예술이라고 하는 구석기시대의 서사하라벽화 등에 이미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용은 원시종교의식에서 발생했다고 하는데 자연의 재해·죽음이나 기아 등과 같은 재앙과 액운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기원의식에서 생겨났다는 것인데 그 발달과정을 보면 의학의 기원과 상통되는 점이 많다.
chum'이라고 부르며, 유목민의 게르처럼 추운 곳에서 동물 가죽(순록)으로 만든 텐트의 일종이다. 우랄계 원주민 및 퉁구스 제족, 네네츠인, 케트족 등 시베리아 원주민이 이 집에서 생활한다. 주로 서시베리아 평원 등 시베리아 서부에 많이 있지만 몽골 북부, 중국 내몽골과 만주 북부에도 있으며 몽골어로는 '우르츠(Урц)'라고 부른다.
칠리 소스
춤 또는 무용(舞踊)은 몸(신체)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의 한 종류이다. 사회적 상호작용 또는 표현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영적인 의식 또는 공연 등에도 춤이 이용된다. 예술의 관점에서는 미적(美的) 정서를 리듬에 맞춰 신체로 표현하는 공연예술이다. 음악 또는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예술적 행위이지만, 춤에 음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음악이 꼭 있어야 리듬에 맞추거나 리듬을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춤은 또한 사람이나 동물 사이(예: 벌의 춤)의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방식을 말하는 데에도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춤과 무용을 혼용해서 쓰기도 하지만 엄연히 춤과 무용은 다르다. dance를 무용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춤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무용은 춤의 한 종류로써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말이다. 말하자면 무용은 한자 말 그대로 뜀이 있는 춤이나 또한 뜀의 이미지가 있는 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 무용과나 무용학과나 무용학회나 무용축제나 무용관련 행사에 영문표기 할 때 무용을 dance로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한자어로는 무용이지만, 한국에서는 무용이라는 단어가 다소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무용이라고 하면 클래식하고 예술적인 춤들을 가리킨다.
춤의 영어 낱말인 댄스(dance)는 산스크리트 원어(原語, ZendicSanskrit)의 Tanha(탄하)가 어원(語源)이며 Tanha는 '생명의 욕구'를 뜻한다고 한다. 중세 영어는 Daunce(Dawnce)로서, 옛 독일어 Danson(단손)과 연결된다. 유럽 각국의 무용을 뜻하는 언어는 모두 이것과 결부되며[1], 생활의 경험이나 환희 속에서의 운동이라든가 활동의 요구, 생명에의 욕구같은 뜻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어: Tenein은 라틴어로부터 기원되며, '긴장, 온몸이나 수족을 충분히 뻗친다, 지탱한다, 지속한다' 등 신체의 주요한 움직임과 연결되는 말과 어원적으로 맺어지고 있다고 보겠다.
초기 춤의 고고학적 증거는 Rock Shelters of Bhimbetka의 인도의 9,000년 된 회화와, 춤추는 사람을 그린 이집트의 무덤 벽화를 포함하며, 이는 기원전 3,3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춤은 세대 간에 이야기의 구전과 공연의 중요한 일부가 된 것으로 제안되었다.[2]
춤에 대한 참고 문헌은 초기의 기록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의 춤(Horos)은 플라토, 아리스토텔레스, 플루타르코스, 루키아노스에 의해 참조된다.[3] 성경과 탈무드는 서른 가지의 다른 춤 용어를 포함하여 춤에 관한 수많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4]
춤의 소재
춤의 소재(素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 바로 그것이다. 인적 구성(人的構成)은 작품내용을 기본적으로 방향지어주는 것이다. 남성 또는 다수 인원의 구성에는 자체의 역량감(力量感)이 다르며, 여성에게는 유연(柔軟)한 느낌, 혹은 섬세한 느낌이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는 표현 이전에 본래의 사랑스러움이 넘쳐 흐른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소재가 지니는 성질을 각각의 특성과 동시에 그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어, 소재를 살려 개성적인 표현성을 발휘시킨다는 점에 무용의 묘미와 기법이 있다.
그리고 춤에서 도구가 되는 것은 신체인 몸 뿐만 아니라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도 존재한다. 정신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정신인 혼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춤에서 몸을 통해 그리고 정신을 통해 표현을 할 수가 있다. 몸과는 달리 정신은 느낌, 인식 등으로 감응되고 전달이 된다. 정신을 통한 표현은 사람에게 감응하며 전달이 되는 것이다. 정신은 실체이기도 하다. 춤에서 정신이라는 실체를 통해 표현을 하며 감응을 통해 표현에 대해 느끼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춤의 특징
리듬(rhythm)이란 생명의 규칙적인 숨결이며, 영혼의 파동(波動)이라고 할 수 있다. 리듬은 비단 시간적인 존재만도 아니고, 공간적인 존재 즉 시각적인 것도 있다. 한편, 무용은 창조의 수단이 어디까지나 인간의 신체이므로 건전한 육체를 소유하지 않으면 좋은 무용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다른 예술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신체가 굳기 전인, 젊었을 때부터 시작해야 무용의 여러 가지 요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련이 되고 신체가 굳어져 성숙해지고 경험이 많게되면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 가능해진다. 신체를 창작의 소재(素材)로 하기 때문에 무용의 예술작품은 무용가 자신이기도 하므로, 창조자 자신이 자기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다른 부문의 예술과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무용은 하나의 작품에 있어서 동일인의 향수(享受)와 표현, 감상과 창작은 불가능하다. 무용은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가진 신체로 형상화(形象化)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대에서 상연하는 공연물이므로 상연 당시에 감상하지 못하면 영원히 다시 볼 수가 없다. 요컨대, 무용은 리듬을 방법으로 하고 인간의 신체를 수단으로 하면서, 연령의 제약을 받는 순간적 향수의 무대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움직임의 상징
춤의 특성은 인간의 신체를 소재(素材)로 하고, 그 살아 있는 움직임을 매체(媒體)로 하여 율동적인 조직으로 상징화된 형식을 지닌다는 점에 있다. 무용이 본질적으로 생명의 약동감, 도취촉합감(觸合感)을 가져다주는 것은 이 매체의 특질에 말미암은 바가 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신체의 움직임은 언어를 대변하고 보완하는 몸짓으로서 또한 감정의 고양(高揚)에 수반되는 신체 표정으로서 이미 일상생활 속에 있으며, 예술 이전에 무언(無言)의 자기 표현적인 임무를 다하고 있다. 또 신체동작의 율동화는 발달 과정 면에서 살펴보면 유아(幼兒)의 유희에서도 나타나 있으며, 사적(史的)으로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소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제사(祭事) 등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친화(親和)와 연대감(連帶感)을 가져다주는 유대(紐帶)의 작용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용은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인간의 표현수단이며, 인간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모든 예술의 원형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다. 무용은 각 연대와 생활을 반영하며, 다양한 표현으로서 분화·발전하고 있다.
무용에 대한 정의(定義)의 변천은 그 일단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 무용은 조화적(調和的)인 아름다운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우아하고 규칙적인 움직임이다." ”
— 1721년, [출처 필요]
“ 음악적인 악기나 목소리의 반주에 맞춘 도약 또는 율동적인 스텝 같은, 질서가 갖춰진 신체의 움직임이다. ”
— 1772년, [출처 필요]
“ 일정한 상태로 조화(調和)하여, 어떤 표현을 운동으로 바꾸어 놓는 신체의 움직임에 의한 연기이다. ”
— 1895년, [출처 필요]
“ 일정한 리듬과 의식적(意識的)인 기법(技法)에 따라서 예정된 공간을 나아가는 신체의 연속적인 움직임이다. ”
— 1934년, [출처 필요]
오늘날 춤은 시간적·청각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음악과 관련되며, 또한 공간적·시각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조형(造形)과도 접근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체를 소재(素材)·매체(媒體)로 하는 점에서는 연극과도 친근성이 있는 시공성(時空性)이 있는 예술이라고 보고 있다. 예술로서의 무용은 언어나 문자의 게재 없이, 작자의 내적인 이미지를 직접 운동적인 심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것의 표출(表出)·형성과 전달을 꾀하는 데에 독자적인 영역을 갖는 것이다.
S.K. 랭거는
① 동적인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만 존재하는
② 율동적인 작용으로 결합되며,
③ 유기적으로 구성된
④ 성장과 쇠퇴의 변증법인 것이라고 하였으며,
살아 있는 형식인 '역동적(力動的)인 힘의 가상(假象)'으로서 그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춤의 미(춤의 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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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작품의 감상은 임시적인 출현[5] 이 누적되는 과정 속에서 성립되는 작자(作者)와 감상자의 미적 상호교섭(美的相互交涉)으로서의 특색을 지닌다. 주제에 의하여 강하게 성격지어진 일련의 움직임은, 감상하는 자로 하여금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되며, 그 생성발전 과정 속에서 작품의 경성(傾性)이 점차로 밝혀짐으로써 한 개의 통합된 사상과 감정의 미적(美的) 출현으로서의 그 성격이 형성되고 전달된다. 사라져가는 가상(假象)인 작품의 감상(鑑賞)에는 작품의 표현성 위에서 또한 감상자의 개성이라든가 자세가 작용하며, 보는 측의 가소성(可塑性)의 율도 상당히 커지는 특성이 출현된다. 감상의 메커니즘에 관해서 살펴본다면, 작품은 감정의 질과 감정의 형(型)이 상호 접근함으로써 포착된다. 감정의 질이란, 결국 우리가 기쁨과 괴로움을 직접 느끼게 되는 감정의 성질이며, 감정의 형이란 그 근저에 있어서 지주(支柱)를 이루는 원형적(原型的)인 작용이다. 예컨대 벅찬 환희, 격렬한 고뇌라고 불리듯이 환희와 고뇌는 쾌(快)·불쾌의 양극적 감정이면서도 또한 동일하게 '격렬하다'라고 하는 표현방법의 원형(原型)을 공유(共有)하는 수가 있다. 무용 작품은 이처럼 격렬함, 부드러움, 딱딱함, 유동(流動), 단속(斷續) 등의 원형, 즉 '감정의 형(型)'을 지니는 움직임으로서 내부적으로 생명이 부여되며, 외부적으로는 '감정의 질'을 달리하는 움직임으로서 살붙임된 새로운 출현으로 볼 수 있겠다. 작품은 또한, 개개의 작품의 독자성을 초월해서 민족으로서의 경향과 성격을 지니며, 오늘날의 다채로운 무용문화를 탄생시키고 있다.
발레가 지니는 발의 완전한 외전(外轉)이나 그 섬세한 율동은 외연적(外延的)·원심적(遠心的)인 기법(技法)으로서 비상적(飛翔的)·환상적인 미를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무용의 우아한 율동미적 유려(流麗)함이라든가 에스파냐 무용의 내연적(內燃的)인 격렬성 등 각각 그 민족적인 특성미가 있는데, 특히 기법의 고정화(固定化)에 저항하여 현대적인 스피드와 다이내믹스를 지니는 불협화(不協和)한 미를 개척하는 현대 무용이라든가 재즈 댄스의 신선성(新鮮性)도 경시할 수는 없다.
춤 작품은 오늘날 구상적(具象的)·비구상적인 작풍과 의미적·감정적인 것에서부터 개념적·기계적인 것에 걸치며, 또한 의도적(意圖的)인 것에서부터 우연적·현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접근을 포함하여 내용상·형식상에 있어서 굉장한 폭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욕구'에 연출되는 미의 표현은, 민족성과 그 전승문화(傳承文化), 생활계층과 세대(世代), 또한 인간 개개의 개성에 따라서 다르며, 또한 유동성을 가지고 생성 발전하며 승화 혹은 소멸(消滅)하는 것이다.
춤의 현대적인 의의(意義)는 무엇일까. 급속한 근대화의 기구(機構)를 지닌 현대사회에 있어서, 참으로 생명을 발현(發現)시킬 수 있는 터전은 계속 상실되어 가고 있다. 잃어가는 인간성의 회복,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영혼적인 대화를 생생하게 부활시키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서의 춤은 참으로 귀중한 존재라고 하겠다.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type=OUT&div=03&zom_idx=481&page=2&field=&keyword=
<춤:in>에서는 2019년 한 해 동안 춤과 과학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한다. 춤과 과학이 공유하고 있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춤과 과학 그 사이를 탐험한다. 과학 전문가와 과학을 그 소재로 다루는 예술가들의 글을 통해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전달하고자 한다.
[춤과 과학]
춤의 기원 - 도대체 왜 추는 걸까?
김남식_카오스과학문화재단 사무국장
ⓒ이철민
우리보다 지적으로는 더 발달했지만 ‘춤’이 무엇인지 모르는 안드로메다은하의 어느 외계문명이 비밀리에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고 하자. 그 문명에서 파견된 한 외계생명체가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어느 날 자료 수집을 위해 BTS의 공연장을 찾았다고 하자. (또는 발레 공연장이나 탈춤놀이 마당이라도 좋다.) 그는 숨을 죽이고 공연을 지켜본다. 그 빠르고 현란한 몸짓을 신기해하면서도 당연히 머릿속으로는 궁금증이 커진다. ‘저들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왜 저런 동작을 취하는 걸까? 왜 관객들은 이렇게 열광하는 거지?’ 그는 계속 지켜보았지만, 공연은 그것으로 끝이다. 춤은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춤 자체가 목적인 것 같았다. 외계인은 그날 밤 안드로메다 본부에 타전한다. “그들은 ‘춤’으로 뭔가를 소통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뭘 전달하려는 건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왜 춤을 추는 걸까? 또 왜 그렇게 춤에 열광하는 걸까? 춤의 기원과 본질을 추적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똑똑한 외계인이라면 어디서부터 시작했을까? 앞에 나왔던 ‘소통’이나 ‘열광’과 같은 단어에 주목해보자. 이런 일들이 우리 몸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인가를 생각해보자. 그렇다, 출발점은 바로 우리의 ‘뇌’다. 춤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뇌를 알아야 한다. 뇌는 왜 생긴 걸까?
식물은 뇌가 없다. 움직이는 동물에게만 뇌가 있다. 그래서 많은 뇌과학자들은 움직이기 위해서 뇌가 생겼다는 데 동의한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먹이를 찾기 위해 또는 포식자에게서 도망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축적한 유용한 정보를 소환하고 현재의 감각 정보들과 통합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순간순간 미래를 예측하여 미래를 현재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 컨트롤센터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뇌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훌륭한 예가 우렁쉥이(멍게)다. 우렁쉥이는 유충일 때는 물속을 헤엄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뇌가 있다. 하지만 성체가 되어 바위에 고착하여 생활하면서 뇌를 소화시켜 버린다. 움직이지 않으니 뇌가 필요 없어진 거다. 우리는 보통 뇌가 사고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애당초 그러한 사고가 필요했던 이유는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산책처럼 가벼운 운동이나 화투 같은 간단한 게임도 치매 예방에 도움을 준다는 얘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움직이면 뇌가 건강해진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움직일 動’자를 써서 동물(動物)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Scientific American》의 2019년 1월호에 <Evolved to Exercise>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듀크대학의 진화인류학 교수 허맨 폰쳐(Herman Pontzer)가 쓴 글이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를 오늘날의 인간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진화적 혁명은 직립보행으로, 인간의 몸은 ‘Built to Move’, 즉 움직이는 것에 최적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친척인 다른 유인원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무를 오르내리는 수직의 동선에서 초원을 누비는 수평의 동선으로 활동 영역이 확장되면서 인간의 운동능력은 극대화되었다. 운동능력을 나타내는 수치인 최대산소섭취량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유인원에 비해 4배나 많다고 한다. 결국, 장구한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몸과 마음(뇌) 모두 움직임을 갈망한다. ‘움직임’은 인류의 숙명이다.
직립보행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전에 게재된 글들을 읽게 되었다. 노정래 박사님의 <동물의 구애>를 읽어보니 공작이나 두루미 등 동물계의 춤의 대가들이 대부분 두 발로 구애의 춤을 춘다는 게 흥미로웠다. 가설이지만 직립보행은 상대에게 상체를 많이 드러냄으로써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움직임을 가장 정교하게 발전시킨 걸 꼽으라면 누구나 스포츠와 춤을 생각할 것이다. 스포츠는 진화적으로 수렵이나 전쟁을 시뮬레이션한 것으로 추측된다. 스포츠가 인간의 투쟁본능을 표출한 모의 전쟁이라면 춤은 아마도 짝짓기와 연관된 구애나 전희(前戱) 과정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통과 공감의 측면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춤에는 보다 복잡한 요소들이 내재하여 있다. 무엇보다 미적 요소인데 춤은 그 자체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대부분 음악과 병행된다. 이것도 진화적으로 손쉽게 추측할 수 있다. 움직임은 맥박이나 심장 박동 또는 호흡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거기에서 리듬이 생기고 그것이 움직임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다양한 미적 요소와 결합하면서 움직임은 ‘춤’이 된다. ‘아름다운 움직임’이 탄생한 거다.
종교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기록이 예전의 종교의식에 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아마도 신을 불러내고 상상 속의 신에게 용서와 사랑을 구하는 동작이 춤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종교와 관련하여 아주 재미있는 추측을 한다. 이러한 과정이 인간의 ‘유태성숙(Neoteny)’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유태성숙이란 유아 때 모습 그대로 성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유태성숙한 유인원이다. 그래서 보통 어린 유인원이 성체 유인원보다 인간을 더 닮았다. 인간이 신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이가 부모 앞에서 예를 갖추거나 용서를 구하는 모습과 흡사한데, 실제로 신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또 그런 식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보면 개는 유태성숙한 늑대이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Manwatching》 참조) 인간은 더욱 귀엽고 유아적인 개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개는 인간에게 평생 ‘강아지’이고, 그런 강아지에게는 인간이 곧 신이다. 그래서 늑대는 절대 춤추지 않지만 개는 때때로 인간(신) 앞에서 춤을 춘다. (유튜브에 재미있는 영상들이 많이 있다.) 인간이 신을 위해 춤추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움직임’은 ‘아름답고 숭고한 움직임’이 된다.
구글에서 춤의 어원을 살펴보니 ‘Dance’는 ‘생명의 욕구’를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Tanha’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한자어 ‘舞’도 잘못이나 사악함을 털어낸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 ‘춤’이라는 단어의 어원도 ‘노력’이나 ‘집중’과 관계된 말이라고 한다. 어원에서도 나타나듯이, 결국 춤이란 뇌와 관련하여 인간의 본원적인 움직임과 소통의 욕구가 표출된 것으로 미적이고 종교적인 활동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춤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이쯤으로도 과하다.
‘닥치고 춤!’
나는 과학문화운동을 하는 카오스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재단의 대표적 행사로 봄가을 각각 10번의 과학강연을 하는 데 올해의 주제가 ‘기원과 본질’이다. 봄학기의 주제가 ‘모든 것의 기원’이었고 가을학기의 주제는 ‘도대체 과학’이다. ‘도대체 시간이란 뭘까?’ ‘에너지란 뭘까?’ ‘무한은 뭘까?’ 등 ‘본질’을 주제로 10개의 강연을 열게 된다. 그래서 <춤과 과학>을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춤의 기원 - 도대체 왜 추는 걸까?’를 제목으로 뽑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면서 춤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카오스 과학문화재단의 가을 정기 강연은 <도대체 사이언스>을 주제로 최고의 과학자를 모시고 과학의 근원적인 질문을 함께 고민한다. 9월 25일(수)부터 10주간 매주 수요일에 무료로 진행되며, 신청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s://ikaos.org/kaos/apply/view.php?kc_idx=73
김남식_카오스과학문화재단 사무국장
서울대 물리학과를 중퇴하고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카오스과학문화재단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의 물리학자 Freeman Dyson의 다음 말을 좋아한다. “모든 문화의 압제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동맹, 그것이 과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