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나들이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성수
사람들은 태어나면 움직이면서 자라기 시작한다. 누가 더 값지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는 태어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추억이 많은 인생 후반전에 와 있다.
이번에는 진해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 그것도 묘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다. 2004년 여름, 청주교원대학교 연수원에서 교장강습 때 한 방에서 지냈던 6명의 동료들이다. 그때부터 1년에 두 번 전국 각 지역을 돌며 부부모임을 이어오는데 작년에는 외국에도 다녀왔다. 아침 첫차를 타니 전주에서 진주까지 3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1차로 진주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목적지 진해 군항제까지는 1시간이 더 걸린다.
전주에서 진주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4번뿐이다. 아침 7시 10분에 출발했는데 오늘따라 운전기사는 40년 넘게 왕복하다가 젊은 후계자에게 인계하려고 설명해 주는 날이었다. 직통이 아니라 일반 버스나 다름없어 가는 도중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기사는 경북 청송사람으로 <남원-운봉-인월-함양-산청-원지-진주-마산-부산>을 한결같이 40년 넘게 다녔으니 기사생활 반평생은 참으로 대단한 여정이었다.
남원을 지나 해발 400미터가 넘는 운봉으로 오르는데 벚꽃, 이팝나무 등이 우거져 산세가 좋았다. 인월을 지나면서 역사 이야기를 한 토막 들을 수 있었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토발했다는 황산전투 현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직선도로인데 이곳에서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농담으로 그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 주지 않아 그 앙갚음을 하는 것이라며 진혼제를 지내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성계 장군은 이곳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경으로 가기 전 전주 오목대에서 승전잔치를 벌였다고 했다. 함양을 지나며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금수강산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 역시 작년에 서유럽을 다녀왔지만 프랑스, 영국처럼 들판을 달리기만 했지 산천은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낮은 구릉지는 포크레인으로 개간하여 목초와 젖소, 유실수재배, 전원주택 등을 만들 수 있으니, 정말 공기 좋고 물 좋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좋은 지역에는 조선 말기 세도가 안동김씨, 안동권씨 등이 살고 있다고 했다. 6‧25 때 낙동강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잘 싸워서 적화통일이 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더욱이 산청은 산세가 좋고 약초재배가 잘되어 야생초연구소가 있다고 했다. 산청시장에서 고추를 팔고 원지로 가는 할머니 한 분이 탑승하여 살아 온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객지에 나간 3남 1녀가 돌아가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위해 연중 1주간씩 어머니와 함께 생활한다는 말은 너무 쉽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시골생활에 만족하며 자연을 벗삼아 살아 온 끈끈한 정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시간에 쫓겨 승차표 없이 탔으니 기사는 빨리 표를 끊어 오라고 했지만 할머니가 그냥 가자고 하니 못마땅해 했다. 그건 차표 없이 타는 것을 처리하려면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옛날처럼 기사의 용돈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 차속에는 CCTV가 있어 기사가 그 뒤처리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시골길에서만 겪을 수 있는 소박한 삽화였다. 어느 사이 버스가 진주에 도착했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는 아내의 재촉 때문에 빨리 출발했더니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터미널 주변 송원사 벚꽃을 구경했다.
남녘의 꽃향기는 더 진한 것 같았다. 시간이 되자 도착한 친구들은 시내 한정식 집에서 깔끔하게 차린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일행 중 한 부부가 광주에서 늦게 출발하여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고 여유가 생겨서 촉석루를 찾게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한 곳인 진주는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명으로 왜군 2만 명과 싸워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1593년 6월 재침한 왜군 10만과 진주의 7만 군관민이 최후까지 싸우다 전원 장렬하게 죽었다. 이 진주성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 남강은, 의기 주논개가 촉석루에서 승리축하잔치를 하는 도중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곳이기도 하다. 의로운 바위를 만져보니 그때의 장면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참으로 대단한 여자임을 실감했다. 주논개의 애국심을 기억하는지 지금도 남강의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일행과 합류하여 봉고차를 타고 목적지인 군항제가 열리는 진해로 달렸다. 가랑비에 벚꽃 잎이 휘날리니 마치 벚꽃이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육해공군군악대의 연주와 해병대의 사열 그리고 염광여상 악대 등 7개 단체의 다채로운 묘기가 많은 관광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어둡기 전「해양솔라파크」에 도착했다. 국내 최고인 136m의 해상타워, 태양관 집열판 2,000여 개, 태양광발전 600kw를 생산하는 곳으로 전망대가 120m 높이에 있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멀미를 하는 아내의 간호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모텔로 가게 되었다. 모텔까지 가면서 야광에 비치는 도로의 벚꽃을 보니 화려했다. 도랑물이 흐르는 골목거리를 꼭 들러야 한다기에 차를 세웠다. 벚꽃 잎이 비바람과 함께 떨어졌다. 차량과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아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으로 일관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더 이상 일행들과 함께 할 수 없어서, 물 한 모금만 마시고 택시를 타고 진주로 돌아왔다.
이제 3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야 한다. 터미널 근처 공원에서 1~2시간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자며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 나는 공원을 돌면서 1박2일 동안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평소 체력단련도 중요했지만 지난 1년 동안 농작물을 가꾸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뜨거운 햇빛 아래서 과로를 한 아내가 안쓰러웠다. 그 뒤 전북대학교 병원에서 한 달가량 입원했다. 몸이 허약해져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희생하면서 산 탓이다.
‘조금 늦게, 빠르게 처리하는 차이뿐인데’왜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쉽게 가는 길을 알면서도 사람의 도리와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자기 심신이 지쳐도 꼭 그 길을 택하려고 한다. 아내는 가끔 미련하다고 핀잔을 들을 정도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한다. 이제부터는 아내도 자기 몸을 돌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2015.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