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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강. 시 세계의 단계(상상력, 영감, 감성과 지성)
1. 상상력의 창조성
예술에 있어서 상상력이란 상상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변용시켜 미적으로 형상화해 내는, 혹은
미적으로 창조해 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상상은 이지(理知)이 법칙에 따르는 것이지만, 공상은 사고를 형성한다든가
창조하는 힘이 없는 열등한 기능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콜리지의 ‘상상은 이성을 감각적인 심상과 합체케 한다’라는 말로
보충해 보면 어떨까 한다.
가령 미당의 「밀어」라는 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예로 해서 생각해 보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
이 대목에서의 <뺨>과 <꽃봉오리>는 어떤 관념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뺨>과 <꽃봉오리>는 심상(image)이다.
이미지는 그러니까 <언어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는 심적 형상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이때 <뺨>과 <꽃봉오리>라는 두 개의 심상은 이지의 힘으로 서로 결합되어 통일된 하나의 정경
을 빚어내면서 관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또한 연상작용이라 할 수 있다. 연상이란 그러니까 매우 이지적인 기능이다.
그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빌려 오는 것인데, 이때에 빌려 온 것이 효과를 한층 더 낼 수 있
어야 한다.
<꽃봉오리>를 말하기 위해서(실은 <꽃봉오리>를 통해서 어떤 관념을 말하려는 것이지만)<뺨>을 빌려
왔다면, <뺨>이 <꽃봉오리>를 한층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과연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없을까, 다른 것을 빌려 보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등의 비교와
검토를 거친 끝에 <뺨>을 빌려 오게 된 것이니까 이지의 힘이 거기에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러스킨은 또 ‘관념들의 무한한 집단 속에서 두 개의 관념(서로 떨어지면 부적당하지만 결합되면 정당
해질 수 있는 두 개의 관념)이 선택된다’라고 했다.
<뺨>과 <꽃봉오리>는 두 개의 관념의 구체화라 할 것이니까 이것들이 서로 결합되어 보다 통일된
효과를 나타냈다면 이 시의 이 대목은 정당해질 것이지만, 만약 이것들이 서로 떨어져 결합이 되지 못
했다면, 그리고 결합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효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면, 이 시의 이 대목은 통일이
파괴되고 부적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상상은 시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면서 시에 통일을 주는 힘이라 하겠다.
이상적인 짝을 찾아 주는 것이 상상이라고도 하겠다.
즉 관녀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적절한 심상을 찾고, 또 심상과 심상을 적절히 결합시켜 가는 힘이 상상이
라고 할 수 있으니 상상이란 결국 어떤 작용의 결과가 아니라 작용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상상력을 통해 나타난 결과는 심상이고, 또 여러 심상들의 질서다.
상상력이 시에서 필요한 정도는 사람에게 심장이 필요한 그만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이 약한 시는 그것만으로 이미 시를 태반은 죽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깊은 산곡
외딴 초가집
사뭇 외롭다
김태오의 「산가(山家)」라는 시의 첫머리다. ‘산곡’과 ‘초가’ 위에 각각 ‘깊은’과 ‘외딴’ 이란 형용사를
얹어 ‘외롭다’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뿐이지, ‘산곡’이니 ‘초가’니 하는 심상들은 상식적이고 따분해서 통속적
인 느낌을 주고 있을 뿐 시로서는 호소력을 거의 잃고 있다.
상상력이 약했기 때문이다.(김춘수, 『시의 이해와 작법』, 자유지성사, 79~80면)
윈체스터는 상상의 종류를 3가지로 구분한다. 연상적 상상, 해석적 상상, 창조적 상상이다.
① 연상적 상상이란 물체, 관념 또는 정서에 정서적으로 친근한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김소월, 「금잔디」 전문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디, 그 중에서도 금잔디를 통해 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금잔디와 색깔과 불의 색깔은 완전 다르다.
그러면서 봄에 만발한 금잔디가 가신 님 무덤가에 피어있다고 한다.
이렇게 ‘낯설게 하기’기법이 도입된 가운데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잔디를 통해 봄(생)의
기운을 노래하면서도 님이 간 뒤의 허전함, 혹은 허무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주위의 잔디를 연상함으로써 가능해졌다.
② 해석적 상상은 정신적 가치 혹은 의미를 깨달아서 그러한 정신적 가치가 들어 있는 부분 또는 성질을
가지고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앞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다른 꽃이 다 진 뒤에 서리를 맞으며 피는 국화꽃과 젊은 날의 온갖 시련을 겪
고 나서 조용히 거울 앞에 앉아 있는 40대의 여인 사이에서 ‘원숙한 아름다움’이라는 공통적인 미를
시인은 발견해내었다.
따라서 작가는 시를 통해 국화에 대한 원숙한 아름다움, ‘생의 원숙경’이라는 정신적 가치 혹은 의미를
해석적 상상을 통해 부여한 것이다.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화를 통하여 꽃의 내면과 생명의 본질적 모습을 읽어낸 것이다.
③ 창조적 상상은 경험에 의해 주어진 여러 요소들, 여러 이미지들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의 통일체
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부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가지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정현종, 「사물의 꿈1-나무의 꿈」 전문
나무를 중심으로 상상력의 힘을 발휘하는 시이다.
나무를 관찰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친 끝에, 햇빛으로 힘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비로 인해 피를 꿈꾸고
바람으로 생의 소리를 듣는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시인의 창조적 상상력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이 창조적 상상은 여러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시가 탄생되는 것이다.
2. 시와 영감
1) 영감은 하늘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뿌린 시의 결과다
고대 그리스 시인은 특별한 영감(inspiration)을 받은 사람이라고 치부되었다.
보통 때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생각을 가졌지만 어떤 경우에는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아주 영묘한 생각을 품게 되며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창작한 시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탁인 양 사람들은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와 시인을 따로 떼어 놓고 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시의 작자는 무슨 신들린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되는데, 그런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영감은 시인의 오랜 노력과 시 창작에 대한 의지의 산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무슨 하늘의 뜻도 아니고
타고난 천재성으로 인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영감의 원인은 시인 자신에게 있다.
우리의 감각적 체험 및 정서적, 정신적 체험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영감을 위한 씨가 된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득한 추억의 세계, 그 어두운 미명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유년 시절에 갖가지 체험을 했다. 그 시절의 체험들은 대개가 감각적인 것이다.
⇒ 어느 때(봄날의 잘 개인 대낮이라고 하자) 조용한 주택가를 걷는다. 귀를 세워 봐도 물론 다른 행인은
없다. 이상하다. 분명 누가 부르는 것 같다.
한쪽 귓전에 쟁쟁하게 울린다.
그쪽으로 고개를 젖혔더니 어느 집 대문이 빼쭈룩이 열려 있는데 그 틈으로 들여다뵈는 그 집 뜰에 무슨
꽃인지 진홍의 탐스러운 꽃송이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지 않은가.
순간 ‘저 놈이군, 나를 부르는 것은’ 하는 생각이 솟는다.
이런 체험도 퍽 인상적인 체험이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간다.
하나 하나의 감각적 체험은 우리의 내부 깊이 잠겼다가 어느 때인가 슬픔이나 기쁨으로 재생한다.
즐거운 체험이 많은 민족은 즐거운 내용을 담은 서정시를 많이 남겼고, 불쾌하고 괴로운 체험을 많이 한
민족은 또한 슬픈 내용을 담은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무수한 감각적 체험이 정서를 빚고, 정서는 독 안의 술처럼 우리의 속으로 깃든다.
이것이 어느 때 갑자기 한 뭉치의 힘으로 분출될 때 우리는 영감이라고 한다.
영감은 그러니까 잠재의식의 세계로부터 온다.
이것이 바로 시를 낳게 하는 발상의 동기가 된다.
영감은 우리가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에게 애련한 사랑의 영감이 솟아나기는 힘들다.(김춘수, 앞의 책, 87~88면)
그대는 그리움, 나는 기다림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을 가져간 그대,
바람결에 그리움을 뿌려놓고
내가 다다를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어요
그대 나를 잊을까 바
곱디고운 얼굴 그리움으로 화장하고
마음 한 켠, 외로움으로 세월을 삼켜요
기약 없는 기다림이 허공에 매달려
잊혀져가는 그리움을 달래어 줄 때
먼 길을 떠났던 그대,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나,
그림자가 없는 그대가 오던 날,
그 날은 외로운 날....
외로움은 한없는 슬픔을 토해내고
더 이상 기다림이 없는 나는
나를 잃어버렸답니다
순간, 청춘의 기다림은 백발의 회환이 되어
마지막으로 그대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말없이 돌아선 나의 울음 우는 영혼
차마 한 걸음도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또 다시, 다시는 오지 못할 그대를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의 끝은 무엇으로 채울까요
또 다른 기다림의 시작은 어디서 해야 하나요
그대는 그리움, 나는 기다림
-방정민, 「그대와 나」 전문
어렸을 적 첫 사랑의 기억과 그때의 슬픔, 그리고 시를 썼던 당시 사랑하고 있던 감정을 오버랩시켜 완성한 시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왜 사랑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고민할 때 사랑이라는 근본적 질문을 스스로 해
가면서 본인이 경험한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고 취해가면서, 즉 영감을 받으면서 쓴 시이다.
따라서 영감이라는 것은 시인이 집중하면서 감정을 잘 발휘하면 충분히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영감이 그대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감을 낮게 말하면 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흥에 따라 절로 이루어진 시를 즉흥시라고 한다면,
시인의 체험이나 인격이나 감수성이 훌륭하지 못할 때 그 즉흥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어렵다.
흥이나 영감은 시인이 아닌 사람도 가질 수가 있으나 시는 시인만이 만들 수 있다.
이 말은 보통의 경우 시인은 영감에만 너무 기대지 말고 영감에 빛을 내 주는 기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감을 풍부히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시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폴 발레리는 영감을 중시하지 않은 시인으로 유명하다.
“시를 만드는데 제일 단순한 방법이 영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에게 시적 생산이라는 것은 전연 우연의 결과가 아니면 일종의 초자연적인 전달
에서 생기는,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도 수동적인 시인이 돼버린다.
이리하여 불쌍한 작자는 이미 작자가 아니라 단지 서명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라고 하여 영감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
시를 정신의 노작이라 생각한 발레리(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자)는 지성을 중시한 사람이기 때문에
영감만을 믿는 태도를 배척하는 것이다.
1930년대 한국에서도 모더니스트라고 불리어지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의 주지주의를 완고하게 고집한
일이 있었다.
시를 너무 안이하게 자연발생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반발로 하나의 역사적인 의의는 충분히 있
었다.
백철의 『신문학사조사』에서 “종래의 우리 시단이란 백조파 이후 그 모두가 자연발생적인 경향이었다
는 것, 즉 시는 되어지는 것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해 온데 대하여 모더니즘은 시는 만드는 것이요,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 시작의 태도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연히 이 파의 시인이 시작에 있어 기교를 중시하게 되어 시인은 요술쟁이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시인이 요술쟁이라는 것은 더욱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
화
수
목
금
토
하낫 둘
하낫 둘
일요일로 가는 <엇둘> 소리......
자연의 학대에서
너를 놓아라
역사의 여백
영혼의 위생데이......
일요일의 들로
바다로......
우리들의
유쾌한
하늘과 하루
일요일
일요일
-김기림, 「일요일 행진곡」 전문
김기림의 「일요일 행진곡」이다. 제 1연에서 형태주의를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안목으로는 신기한 느낌이었을지 모르나 현재 시단의 안목으로는 아무런 암시나
자극도 주지 못한다.
기교가 너무 경박하게 표면에 드러나 버렸다는 느낌이다.
같은 때에 시를 쓴 김광균은 특별한 기교를 부렸다는 흔적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자연발생적으로 시를
쓰지는 않았다고 보아진다.
찻잔-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에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 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김광균, 「와사등」 일부
도시의 우수랄까, 그런 정경이 그려져 있다. ‘
고층건물’을 ‘묘석’에 걸리게 하고, ‘야경’을 ‘잡초’에 걸리게 한 것은 도시의 밤의 우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백조』나 『폐허』무렵의 시인들이 심한 감상에 흘렀거나 과장된 포즈를 취했거나 했는데 비하면
가라앉은 리듬과 함께 매우 시각적인 처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심상들이 견고하고 적합하다.
무라노 시로오는 “영감 그 자체에서는 아무런 시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정신적 노력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하고 있다.
온건하면서도 영감과 정신적 노력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발상의 동기가 되는 영감은 있는 법이니까, 영감 그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감만으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영감, 그것이 곧 시가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시라고 하는 형식을 만들어 가는 정신적 노력, 즉 지성 및 기교가 필요해지는 것은 당연
하다.
(김춘수, 앞의 책, 88~92면)
3. 감성과 지성
감성과 지성은 원래 철학적 욕구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먼저 감성(sensitive faculty)의 철학적 견해로는,
① 오성과 이성에 대립하는 능력.
② 지식의 재료를 제공하는 감각ㆍ지각 등의 총칭.
③ 도덕상으로는 인간의 자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능이라든가 충동과 같은 주로 육체와 관계를 가진
것.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시에서 감성이라 할 때, 우리는 감정과 정서, 감상 등의 어휘와 함께 혼동하여 쓰고 있다.
이 셋을 정확히 나누는 것은 순수학문(철학이나 문학이론 등)에서나 가능할 뿐 시 창작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어휘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의미부여를 해서 어떻게 그 의미를 실지로 활용
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성을 ‘느끼는 능력’이라 할 수 있는데, 느낌이란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응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은 다분히 체험과 상관된다고 할 것이다.
더 좁게, 일반적으로 말 하면, 우리의 일상생활과 상관된다 할 것이다.
즉 정리해서 말하면, 감성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느끼느냐 하는 능력’이라 하겠다.
다음 지성(intellect)은,
① 사고하는 능력.
② 잡다한 현실을 정리, 정돈하는 힘.
③ 지성이 궁극적ㆍ통일적으로 활동하는 때에는 이성이라고 하고, 비교ㆍ대조 등의 작용을 할 때에는
오성이라고 함.
등으로 철학에서 해석하고 있다.
시를 두고 말할 때 주로 ③의 후반에서 말하고 있는 것, 즉 오성을 염두에 두게 되는 것 같다.
시를 두고 지성을 말할 때, ‘art’ 즉 기술에 치중하는 경우가 있다.
즉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데에 주로 지성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비교ㆍ대조 등의 작용’이 기술에만 국한되어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다.
①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며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나 하지.
-김소월, 「개여울의 노래」 일부
②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김소월, 「원앙침」 일부
①은 7.5조를 한 행으로 내고, ②는 같은 7.5조를 두 행으로 끊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행 구분을 시험하고 있는 소월의 지성, 즉 기술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런 식의 행 구분을 통해서 작자의 감성의 뉘앙스를 알게 된다.
이들 시에 감성만 있고 지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지성을 기술과의 관계에서 말할 수 있다면, 7.5조 정형의 새로운 시험을 행 구분을 통해서 하고 있는
거기에서 깨어 있는 소월의 지성을 보게 된다.
무라노 시로오는 “원래 서정시의 본질을 감정의 이상적인 자연적 유로에 있으니까 흥이 일어남에 따라
생리적으로 노래하는 형식을 취해서, 여기에 서정시라고 하는 한 양식이 생겨난 것 같다.
그러니까 노래하지 않으면 배길 수 없는 감정의 생리적 상태가 제일 좋은 동기가 된다.
이러한 마음 상태의 제일 통속적인 것은 감상이라고 하는 망아의 상태다.
그리고 이런 시에 있어서는 성질상 그 세계는 개인적인 감회에 그쳐, 그 위에 황홀한 넋 빠진 상태가
이상적이라고 하겠으나 각성한 주지의 존재는 금물이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감정의 이상적ㆍ자연적 유로’라는 부분이 그 다음의 ‘흥이 일어남에 따라 생리적으로 노래하는
형식을 취해서’라고 계속되는 것을 보면, 흥을 그대로 노래로 버리는 즉흥시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듯
한데, 소월의 시들은 즉흥적으로 보일 뿐이지, 실은 상당한 기교를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적 유로’의 시들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개인적인 감회에 그쳐’, ‘각성한 주지의 존재’가 아니라
는 것도 또한 쉽게 짐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각성한 주지의 존재’가 내용의 면에 관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감회’에 그치지 않고 좀 더 객관 세계에 눈을 뜨고, 현실 또는 역사의 추이에 관심을 기울여
그것을 비판하는 태도가 지성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란 것을 알게 된다.
‘개인적인 감회’에 그치지 말고 인간의 내부를 깊이 파고들어 분석하면 반성하는 태도도 물론 지성적이
라고 할 수 있다.
순전한 감성으로만 된 시란, 생각보다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
민요 같은 것은 처음 발생 당시는 비교적 감성만으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여기서 상당한 양의 알레고리가 설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민족이 오랜 생활을 통해서 절로
습득하게 된 것일 것이고 특별한 지성의 힘이 작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거의 자연적으로 유로되어 나왔다고 봐야 한다.
생활에서 뭔가를 느끼면 그것이 그대로 곧 ‘감회’로서 토로될 때 우리는 이런 것을 순감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해서 된 시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면 그 시의 작자가 시의 길에 통달해서 일거일동이 시가
될 수 있는 사람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런 시가 우리의 눈에는 좋은 시로 비춰질 리가
없다.
요약하면 우리는 감성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감의 경우처럼 우리의 생활(체험)을 등한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시가 생생한 생명력을 잃게 될는지도 모른다.
지성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 기술 쪽에만 너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시가 내용이 없는 백지 상태에 떨어
지게 된다.
월
화
수
목
금
토
하낫 둘
하낫 둘
일요일로 가는 <엇둘> 소리......
-김광균, 「일요일 행진곡」 일부
이런 시가 그 부려진 기교에 비해서 얼마나 무의미한가?
지성은 그 다른 한 부분인 현실과 역사를 비판하고, 인간의 내부를 분석해서 반성하는 방향으로도 움직여
져야 할 것인데, 이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기술을 등한시할 때 또한 무슨 논문이나 수필 비슷한 것이 되기
도 한다.
지성의 여러 속성이 고루 갖추어졌더라도 지성만으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성의 쪽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감성의 쪽에 치우치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는 온전한 것이
못 될는지도 모른다.(김춘수, 앞의 책, 93~98면)
제 4강. 대상의 인식과정과 시적 거리
1. 대상에 대한 시각
시 창작은 사물과 세계를 통한 구체적인 인식에 있다.
이러한 인식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영국의 시인인 흄은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사물의 외형에만 우리의 시각과 사고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이며, 특히 피상적 인식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을 벗겨내고 그 참모습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시의 진정한
의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이 지닌 그 고유의 모습과 본질에 접근하고 그것들을 정확하게 보아내기 위해서는 일상적
으로 해왔던 자동화되고 관습화된 인식태도에서 벗어나 사물을 새롭고도 넓고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시 쓰기가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사물은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주요한 문제이며 시의 발상 차원에도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일본의 시인인 이토 케이치는 한 그루 나무를 통해서 나타나는 인식의 과정을
8가지 단계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예를 들었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이파리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속에 승화된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생각해 본다.
(8)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위에서 예시한 (1)의 단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사물에 대한 시각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자동화된 인식으로 사물을 지각한다.
(2)의 단계는 (1)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태도이지만 지극히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태도의 수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3)과 (4)의 단계에서는 나무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갖고 의도적인 관찰을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시가 눈에 보이는 형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의미까지 발견하는 일이라고 할 때 우선적으로
사물을 주의 깊게 살피는 자세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5)에서 (6)의 단계부터는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의 태도가 나타난다.
마음의 눈으로 나무의 내면세계까지 들여다보기 때문에 상식이나 관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이다.
(7)의 단계에서는 상상력을 통해서 인식의 놀라운 비약을 이루게 된다.
나무를 통해서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4단계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단계(1-4)
둘째, 눈에 안 보이는 부분까지 생각하는 단계(5-6)
셋째, 관계 맺고 있는 다른 대상에 까지 인식을 확대하는 단계(7)
넷째, 다른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창조하는 단계(8)
이와 같이 볼 때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얼마나 독특하게 자기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꿈으로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김현승, 「플라타너스」 전문
위의 시에서 플라타너스의 모습은 그냥 단순한 나무라는 일상적인 인식차원에서 벗어나 인간의 모습
으로 변용, 의인화되어 있다.
이는 삶을 고독한 단독자의 길로 인식한 시인이 플라타너스 역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1연에서 플라타너스는 머리 위에 파아란 하늘을 두고 있는 꿈을 지닌 사람으로, 제 2연에서는
자기가 갖고 있는 그늘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우는 사랑의 모습으로, 제 3연에서는 외롭고 고단한 시인과
함께 인생의 길을 가는 동반자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이런 플라타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고 싶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신의 권한이므로 유한한 존재
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인은 물론 플라타너스도 이 사실을 깨닫기에 서로 이웃하여 인생의 길을 끝까지 걸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 바탕에는 인간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끝나게 되는 유한한 존재들이라는
깨달음이 깔려 있다.(이광수, 앞의 책, 27~30면)
2. 시적 대상과 심리적 거리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무엇에 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시로 쓴다’는 뜻이다.
무엇에 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는 그 무엇에 관한 개개인의 정서이다.
이 정서는 그 무엇에 관한 정서라는 점에서 인식을 포함하는 정서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물론 시적 대상이다.
올드리치는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국면으로부터 구별되는 시적 인식과 같은 미적 지각을 감지(prehension)
라고 부른다.
시적 대상은 실천적, 실용적 국면에서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다.
이런 미적 지각을 어떤 사람은 대상에 대한 심리적 거리로부터 추출한 근거를 가지고 미적 태도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적 주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미적 지각을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감지라고 부르든, 실용적ㆍ실천적 국면과는 구별되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그리고 대상을 실용적, 실천적 국면에서 벗어나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상태에서 바라볼 수 없는
미적 지각의 두 양상을 벌로프는 부족한 거리 조정, 초과한 거리 조정이라고 부른다.
시적 대상을 앞에 둔 작가의 거리 조정도 이와 같은 초과와 부족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1) 부족한 거리 조정
외치고 싶다.
바다를 향해
바그너의 악보처럼, 고호의 붓끝처럼
봄으로 채색된 나의 필통 속에
이십 년을 잠자는 오직 하나의 펜으로
호반 아래 앙금처럼 가라앉은
우리의 오색 언어들이
땀과 눈물과 마지막 피 한 방울에 섞여
하늘에 파도칠 때까지
막차 떠난 플랫폼에서
첫 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노래하고 싶다.
-「時作」*
부족한 거리 조정의 보기이다. 위의 보기는 대상이 욕망에 가리어지고 감정에 휩싸인 형태이다.
그러니까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바그너의 악보처럼, 고호의 붓끝처럼” 외치고 싶다는 것은 욕망의 감정적 표현이다.
그 욕망의 감정을 “오색 언어”나 “땀과 눈물과 마지막 피 한 방울”로 노래할 때, 그 노래가 어떤 양상을
보여줄지를 생각해보라.
그 노래는 욕망과 감정의 극치일 뿐이 아니겠는가.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을 경우는 위와 같이 피상적인 인식의 세계만
보여주는 게 통례이다.
2) 초과한 거리 조정
그녀가
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고부터는
파문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따가운 햇살이 어색하다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녀가 물 속에서 얼마나 있다가
나오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젠가는 물 속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위」*
앞의 작품과는 반대로, 초과한 거리 조정의 한 보기이다.
외견상으로 이 작품은 대상(그녀의 자맥질)을 담담하게 그려놓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따가운 햇살이 어색하다”면서 물 속으로 들어간 핵심적 정황에 대해 아무런 명시적ㆍ암시적
표현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는 이 시구가 유일하게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에 정서적 교감이 정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그런 결과 “얼마나 있다가/나오는지”알 수 없지만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당연한 말만 옮겨
놓고 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인식 태도와, 「자위」와 같은 대상에 대한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관찰
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적 인식 태도는 배제를 통한, 선택을 통한 대상을 지각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이지만, 형식적 관찰은
정서의 결핍에 의한 대상과 작가 사이의 이완 현상이다.
이런 대상과의 이완 현상을 논리적 경사가 심한 작품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깜박이며 승강하고
어쩌면 하강하기도 하는
익명의 오늘은
교각을 마저 삼키며 밤새 자란
모호한 안개처럼 엄습해
거듭 승하강의 편대에 둥둥 매달려
언제나 수직으로만 맞춘 키로
타협의 뿌리를 내리고
어느덧 선진 도시형으로 단련된
연약한 서정의 자취로
견고한 철문에 유폐되어
땡, 땡, 땡,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린
금속성의 완공되지 못할 추억을 조립식으로 잉태할 때
우리들의 눈빛과 이웃의 꿈들은
충무로에서 종로에서
자동화 문명의 마그네틱 선에 검게 가려
새벽의 창을 열고 별조차 볼 수 없는
청맹과니로 숙련되어 간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오늘도 화알짝 열린 채.
-「모년 모일의 엘리베이터」*
이 시는 ‘오늘’은 승하강만 되풀이하는 엘리베이터와 같고, 그 속의 우리도 그런 속성의 청맹과니로
되어간다는 문명 비판적 의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오늘, 또는 우리의 의식이 일정한 곳까지 기계적인 승하강만 되풀이하는 엘리베이터와 같다는
유추는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문제는 그런 유추가 현학적ㆍ논리적 구조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깜박이며 승강하고/어쩌면 하강하기도 하는” 오늘은 “교각을 마저 삼키며 밤새 자란/모호한”
안개처럼 엄습해 온 존재이다.
그런 오늘의 우리는 “거듭 승하강의 편대에 둥둥 매달려/언제나 수직으로만 맞춘 키로/타협의 뿌리를
내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덧 선진 도시형으로 단련된/연약한 서정의 자취로/견고한 철문에
유폐”되었다.
그런 결과의 하나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린/금속성의
완공되지 못할 추억을”조립식으로 잉태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꿈들은 “자동화 문명의 마그네틱 선에
검게 가려”져 있으며, 우리의 별조차 볼 수 없는 청맹과니로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시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마치 문학취를 풍기는 서툰 논설문을 대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현학적, 장식적인 논리는 오늘을 추상적으로 개괄하고 있으므로, 오늘의 실체가 논리 뒤로 밀려
나고, 논리 뒤에 숨겨지고 가려져 오히려 모호해진다.
이 논리적 사고가 대상을 너무 멀리 두게 하고 개괄하는 위치까지 밀어내어 초과한 거리조정이 되도록
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시에도 물론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내재적 요소의 어울림에 의한 긴장”이나 시점이 드러내는
일관성 뒤에 숨어 있는 구조적 기반일 뿐이다.
시는 감지한 사실의 형상화이지 감지한 사실을 논리화하는 공간은 아니다.
이 현학적, 논리적 수사는 감지한 사실을 정서적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대상을 논리적 탐구의 대상
으로 바꾸어놓는다.
논리는 대상과 심리적 거리가 가장 먼 표현이다.
유추적 논리를, 현학적 용어를 동원해 줄기차게 펼친다는 사실은 시적 대상과의 거리조정이 초과해
있다는 증거가 된다.(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40~44면)
3. 국면과 관점
일정한 시각을 가진 한 사람 앞에 존재하는 시적 대상은 우선 하나이다.
그 하나인 대상은 동시에 하나의 세계로서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물이든 관념이든 그 대상은 각각 의미의 세계, 의미의 우주인 까닭이다.
특정한 대상, 즉 특정한 시적 대상이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은 그 대상이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
많은 국면으로 어우러진 하나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고도 극심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적 대상을 보다 바로 이해하기 위해 그 다양성을 축소하여 도식화해보자.
W |
w
1 | 3 | 5 | 7 |
2 | 4 | 6 | 8 |
W라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다양성을 축소하여 도식화해보자. W라는 대상을 공원이라고 해보자.
그럴 때, 일차적으로 공원은 하나이다.
그러나 개념상으로 하나인 공원은 넓은 땅을 공원이게 하는 수많은 공원적 사물로 가득차 있으며,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공원은 수많은 다른 공원적 요소와 분위기로 가득찬 부분부분(w의 1~8)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적 대상을 개념상으로 볼 때는 하나(W)이지만 하나의 세계로 볼 대는 많은 것을 포함한 하나(1~8을
포함한 W)인 것을 알 수 있다.
일차적으로 공원(W)은 개념적인 존재이다.
그 공원(W)을 누군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인 것(w)으로 그 실상을 드러낸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큰 공원이라면 지구는 그 큰 공원(W)의 한 장소(w1~
8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지구를 큰 공원으로 본다면 서울, 뉴욕, 동경, 북경 등등은 그 큰 공원(W)의 제각기 다른 한 장소
(w1~8)일 것이다.
어떻든 그 세계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 세계는 우리가 지각해야 할 국면으로 다가온다(이때
지각은 미적 지각이다).
그 국면 앞에 선 인식 주체는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양분된다.
하나는 관념적 관점, 다른 하나는 실제적 관점이 그것이다.
관념적 관점은 구체적 현상을 사상시키고 개괄적인 입장에서 대상을 나름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이고,
실재적 관점은 구체적 현상을 통해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도표를 예를 든다면, w의 1~8이라는 부분 또는 사실을 사상하고 W의 세계를 추론의 형태로 파악하는 것
이 관념적 관점이며, w의 1~8가운데 어느 부분 또는 1~8의 개별적, 구체적 현상을 극대화함으로써 W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실재적 관점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전문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셋 외롭구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뚝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렸다.
-박남수, 「밤길」 전문
두 작품 가운데 「깃발」이 관념적 관점, 「밤길」이 실재적 관점이다.
「깃발」은 작품을 보아 알 수 있듯, 그 깃발이 어떤 종류의 것이며, 어떤 장소에 꽂혀 있으며,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인가 등등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사상하고 깃발이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를 밝히려
하고 있다.
이와 달리 「밤길」은 밤길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어느 특정한 날(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의 현상적 사실을 선택적으로 가시화하여 밤길에 대한 우리의 정서를
증폭시킨다.
4. 대상에 대한 미적 지각과 구체적 인식
1) 미적 지각의 유형들
(1) 피상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공원은 모두의 안식처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어린 아이도
누구나 찾아와
때묻은 영혼을 맑은 공기에
씻는다.
끝없이 무거운 나날의 짐을 내려놓고
고통을 잊으며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다가올 내일을 위해.
-「공원 1」*
공원 1은 공원은 모두의 안식처라는 식의 관념적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식의 나열과 설명이라는 점
에서 피상적 지각이다.
상식이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상식은 거죽 지식에 불과하고, 그 거죽 지식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피상적인
것이다.
피상이란 낱말의 뜻이 거죽ㆍ겉모양ㆍ겉면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상식과 사실은 전혀 다르다.
특수한 경우(예를 들면 반어법)를 제외하고는, 작품 속의 상식은 작품 박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거죽
지식이지만, 사실은 느낌을 구체화하는 존재이다.
때문에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미적 지각의 등가물이다.
다음을 보자.
a) 꽃은 아름답고 예술은 영원하다.
b) 꽃이 피어 있다.
두어 송이
a)는 상식, 즉 거죽 지식의 나열이다. b)는 그런 피상적 지식 대신 사실적으로 사물 현상을 가시화한다.
그 형상화된 사물 현상은 개개의 작품 공간에 어울리는 각각 다른 정서와 의미를 구성한다.
b-1) 해가 지는 선산
새들의 그림자가 설핏 기운다.
그곳에도
꽃이 피고 있다
두어 송이.
b-2) 꽃이 피고 있다.
두어 송이
새들이 날고 있다
서넛
봄 아지랑이 속.
b-1)의 꽃은, 닥쳐오는 어둠의 세계(해가 지는 서산, 기우는 새들의 그림자)와 대립하는 밝음의 세계(꽃)를 암시하는 존재이다.
그 꽃이 b-2)에서는 단순히 봄의 활기(날으는 새, 아지랑이)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나 현상은, 그것들이 이미 허구인 예술 작품 속으로 공간 이동을 한 만큼,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적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런 형상, 이런 형상화를 통해 말한다.
상식의 나열과 부연 설명은 사고의 피상성과 상투성의 본보기이다.
혼자서 공원에 갔다.
나무들은 바람 따라 잎을 흔들고
잔디는 파란색으로
넓게 깔려 있었다.
사진사가 큰 소리로
‘사진 한 장 찍으시오’ 했지만
모른 척했다.
벤치에는 가끔 누워서
잠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울 때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공원 5」*
관념적 관점의 「공원1」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작품이 실재적 관점의 「공원5」이다.
「공원5」는 기계적 지각의 좋은 보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대상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사고의 흔적이 없다.
실재하는 풍경을 작품에 표현해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탐구나 의도적 선택이 아닌 기계적인 옮겨놓기
이다.
아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점이 더 분명해진다.
땅 위에 내려
조알을 세고 있는 새
손바닥만한 땅 위
조알을 하나씩
부리고 세고 있다
몇 개 조알의 힘으로
새는 하늘로 떠오르고
새를 따라 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권혁진, 「원경」
이 시는 짧지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땅’과 그 땅 위에서 날기 위한 조알 몇 개를
쪼고 있는 새와, 새가 날 때 흩어져버리는 조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몇 개 조알의 힘으로/새는 하늘로“ 떠오른다는 표현은 얼마나 놀라운가!
또 조알의 힘으로 새가 날 때, 나는 새들과 달리 남은 조알들이 허공에 흩어진다는 사실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릴 것이 아니다.
좁은 땅, 조알, 이 셋은 무작위적 옮겨놓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의 흔적이다.
그러나 「공원5」는 거죽지식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옮겨놓은, 죽은 사고이다.
(2) 추상적 지각과 장식적 지각
잔디 위 곳곳에 뿌리박고
물결치는 영혼의 잎들이
넓은 우주를 유영하고
바람을 가르는 비상의 존재들
다투어 여기저기
꽃으로 날린다
꿈을 쫒는 발자국들은
그늘 속에서 하늘과 눈맞추고
싱그러운 향기는
그들을 감싼다
-「공원 2」*
「공원2」는 추상적이다. 사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잔디 위 곳곳에 뿌리박”은 것은 나무들이다.
그 나무들은 영혼으로, 또 새들을 “비상의 존재”로,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꿈을 쫒는 발자국”으로
추상화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사실적 지각에서 고쳐놓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잔디 위 곳곳에 뿌리박고
물결치는 나무의 잎들이
넓은 하늘을 떠다니고
바람을 가르는 새들은
다투어 여기저기
꽃으로 날린다
꽃을 쫒는 사람들은
그늘에서 하늘과 눈맞추고
싱그러운 향기는
그들을 감싼다
작품으로 따진다면 이 사실적 지각의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추상화시킨다고 해서 결코 깊이 있는 작품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말 바꾸기, 즉 나무→영혼, 하늘→우주, 비상의 존재→새 등과 같은 추상화란 일종의 현학적
말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유사한 것이 「공원 6」이다.
초록빛 물든 잎들이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고
꿈처럼 싱그러운 바람이
벤치에 앉은 사람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날린다.
잔디는 파도처럼
햇빛 속에 물결치고
나란히 걷는 연인들의 발걸음이
정답다.
-「공원 6」*
「공원 2」가 아는 체하는 말놀이라면, 「공원 6」은 장식적 말놀이이다.
그러니까 장식적 지각의 산물이다.
초록빛 물든- 잎들
꿈처럼 싱그러운- 바람
부드러운- 머리칼
파도처럼 물결치는- 잔디
발걸음이 정다운- 연인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정한 사물 앞에 현상을 드러내는 수식어ㆍ수식구가 붙어 있지만, 모두가
상투화된 표현들이다.
이런 낡은 표현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공원 2」가 구체적 현상을 아는 체하고 추상화한 까닭으로 사실적인 측면조차 모호해지고 있다면,
「공원 6」은 구체적 사실을 단순히 장식한 까닭으로 공허해져 있다.
시적 언술, 즉 시적 표현은 장식하는 데 있지 않고, 가려져 있거나 벗어나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란 바로 관습과 왜곡을 벗겨내기 위한 시각 확보와 다르지
않다.
정식적 지각이란 대상에 또 하나의 외피를 덧씌우거나 화장을 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3) 감각적 지각과 사실적 지각
나무들 사이로
한 무리의 비둘기가 외출에서 돌아와
새로 돋은 풀 냄새를 쫓는다.
겨우 걸음마를 배운 아이 하나
나비 따라 길을 혼자 아장거리고
공원 사진사가 스냅사진 한 장처럼
나무 아래 서 있다.
-「공원 7」*
「공원 7」은 감각적 지각에 입각해 있다.
장식적 지각과 감각적 지각의 차이는, 전자가 대상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장식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지배적인 인상을 통한 대상의 파악이라는 점이다.
그런 감각적 인식은 “한 무리의 비둘기가 외출에서 돌아와/새로 돋은 풀 냄새를 쫓는다”든지 “공원 사진
사가 스냅사진 한 장처럼/나무 아래 서 있다”는 등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감각화된 인식은 우리의 정신 속에 ‘관념화된 감각으로 인각된다. 다음을 비교해 보자.
a-1) 한 무리의 비둘기가 내려와
풀밭을 거닌다
a-2) 한 무리의 비둘기가 외출에서 돌아와
새로 돋은 풀 냄새를 쫓는다
b-1) 공원 사진사가 나무 아래 서 있다
b-2) 공원 사진사가 스냅사진 한 장처럼
나무 아래 서 있다
a-1)과 a-2), b-1)과 b-2)의 차이는 단순히 축어적 묘사와 비유적 묘사라는 수사적 차이만이 아니다.
그 차이는 언어를 매개로 ‘관념화된 감각’인가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형식화된 감정’인가 아닌가, 하는
엄청난 차이이다.
그 ‘형식화된 감정’이란 무의식적 충동과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적 표현 속에 살아있는 객관화된
사고의 구체적 모습이다.
구겨진 신문지 한 장
벤치의 다리를 감고 있다.
바람도 아니 부는데
어디서 토사물의 냄새가
공원의 잔디 위로 몰려오고
껌팔이 아주머니의 굽은 등 뒤
길 잃은 아이의 울음 소리가
내 귀를 후려친다.
내 몸 위로 덮치는 나무들을
후려친다.
-「공원 8」*
「공원 8」은 물론 사실대로 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우리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세계관도 세계 속의 모든 것을 포괄할 만큼 그렇게 큰 폭을 지니고 있지 못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잘못 해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사실을 다 기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품 속의 사실은 그러므로 배제와 선택의 사실이며, 그것도 사실대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이다. 배제와 선택 그 자체가 인식인 것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 이다.
「공원 8」은 그런 의미에서의 사실적 지각이다.
「공원 8」의 선택된 사실들은 공원 속에서 드러나는 부정적 측면의 것들이다.
긍정적인 측면이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예증한다.
사실적 지각의 작가는 선택과 제시를 통해 그 사실적 국면이 직접 말하도록 한다.
(4) 풍자적 지각과 해석적 지각
공원의 잔디 위에는 집 나온
한 마리 개의 곤한 꿈이 자고
벤치 위에는 서울에서 돈 벌겠다고
시골에서 상경한
여관비가 떨어진 청년의 몸이 자고
발로 뛰다 지친 월부장수의
건수가 자고
뒷골목에서 쫓겨 나온
바람의 혼이 잔다
그 옆에서
아무도 숙박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공원 3」*
「공원 3」은 사실적 지각과 닮은 구석이 있다.
공원의 잔디 위에서 자는 개, 벤치에서 자는 시골 청년, 월부 장수, 그리고 바람, 이 모두가 사실적 존재들
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러한 사실적 존재들은 관념화되어 있다.
즉 한 마리 개는 “한 마리 개의 곤한 꿈”으로, 청년은 “청년의 몸(이때의 몸이란 표현 속에는 마음은 깨어
있다는 숨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으로, 월부 장수는 ”월부 장수의 건수“로, 바람은 ”바람의 혼“으로
각각 감각화된 형태로 바뀌어 있다. 그런 만큼 사실적 지각과는 다르다.
설령 이렇게 감각화된 관념들로 바뀌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고, 즉 그냥 그대로 ‘한 마리의 개’ 또는 월부
장수‘등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들은 「공원 8」의 그것과는 다르다.
사실화된 관념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표현은 “아무도 숙박비를 요구하지 않았다”이다.
이 구절은 금전 만능주의, 돈이 없으면 죽기도 겁이 나는 현실의 단면을 간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풍자는 사실적 지각의 의한 직접적인 제시의 세계가 아니라 기지ㆍ 반어ㆍ냉소ㆍ조롱의 방법적 수용에
의해 빗대어 공격하는 정신의 세계이다.
이 풍자의 세계에 들어온 사실적 존재들은 풍자를 구성하는 풍자적 또는 우화적 요소(사실적 요소가 아닌)
로 변모하여 사실적인 가면을 쓴 관념이 된다.
혼자 있는 자가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이
그림자를 환하게 밝히고
길과
벤치에
침묵이 솜사탕처럼 달콤할 때.
오라 혼자인 영혼이여
구하는 자는
혼자일 때
그림자도 넉넉하리니.
-「공원 4」*
공원 4는 처음부터 관념적으로 접근한다.
공원을 구체적 실체로 보지 않고 우리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탐구하게 한다.
같은 관념적 관점의 공원 1, 공원 2와 다르게, 즉 상식적이고 아는 체하는 현학취로 대상을 파악하여
불투명하게 하고 있지 않다.
이 작품 속의 공원은 구하는 자는 마땅히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반가워
해야 하며, 그러한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의 하나로 공원을 노래한다.
그런 점은 공원을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이/그림자를 환하게 밝히고/길과/벤치에/침묵이 솜사탕처럼
달콤”한 곳의 하나로 해석해놓은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공간은 본래 공원이 전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공원의 그러한 국면을 추출해
내고 해석한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a-1) 공원의 여기저기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
a-2) 혼자 있는 자가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b-1) 긴 그림자를 끌고 가는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
b-2)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이
그림자를 환하게 밝힌다
a-1), b-1)은 사실적 지각이며, a-2), b-2)는 해석적 지각이다.
사실적 지각은 사물과 현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지만, 해석적 지각은 사물과
현상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 두 지각의 극적 차이이다.(오규원, 앞의 책, 48~58면)
2) 구체적 인식
시적 진실이란 이성으로 판단하고 분별해서 얻은 과학적, 논리적 진실이 아니라 구체적 체험과 주관적인
감성에 의하여 새롭게 깨닫고 발견해 낸 의미이며 가치이며 세계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저마다 독특하게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얻는 인생의 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가 이러한 시적 진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선행되고 바탕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인식은 대상의 외형적인 관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훤하게
꿰뚫어 보는 통찰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래서 워즈워드는 시를 일러 “인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果木)은 뿌리 채 뽑고
그 뿌리를 썩인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킴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봉건, 「사랑」 전문
위의 시적 대상은 주관적 관념이라 할 ‘사랑’이며 그 시적 진실은 ‘생명을 가꾸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와 같은 시적 진실을 관념적으로 진술하기 않고 구체적인 사물을 비유로 들어 이야기
한다.
과목이 바로 그것인데, 인용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바로 ‘과목’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인용시는 시적 대상을 객관적 사물에서 취하지도 않았고, 관념적으로 서술하지도 않았다.
전봉건의 사랑에는 이렇듯 지배적인 이미지 과목이 제시됨으로써 시적 대상 ‘사랑’과 지배적인 이미지
‘과목’은 은유관계를 형성한다.
즉 시인에게 사랑이란 가꾸어야 될 어떤 과목의 묘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에서 시인이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과목’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즉, 전체 시의 내용은 과목에 대한 시인의 언급이 되어 버린다.
이렇듯 인용시의 시상 전개는 과목에서 시작하며, 과목과 연관된 여러 부차적인 이미저리의 조합과 체계
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즉 열매, 과목, 흙, 해충, 뿌리, 묘목, 땀, 비바람, 바위, 어둠, 새벽, 샘물,
햇살 등은 모두 과목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 중 열매ㆍ뿌리ㆍ묘목 등은 과목의 부분들이며, 해충은 과목에 기생하는 생명이며, 땀은 묘목을 돌
보는 노동을, 비바람ㆍ바위ㆍ새벽ㆍ샘물ㆍ어둠ㆍ햇살은 과목의 성장환경이다.
이 모두는 상호간의 유기성에 토대하여 시적 대상인 사랑의 의미와 일원화함으로써 하나의 시적 구조를
이룬다.(이광수, 앞의 책, 30~31면)
5. 알맞은 미적 거리
관념적 관점과 실제적 관점 사이에는 미적 지각의 차이만큼 다양한 세계의 작품이 보여진다.
몇 가지로 추출해 본 유형 가운데 피상적ㆍ추상적ㆍ기계적ㆍ장식적 지각의 작품은 인식 부족의 소산이고
또 그만큼 덜 형상화된 작품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적ㆍ감각적ㆍ풍자적ㆍ해석적 유형은 각각 그 나름의 아름다운 미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면, 그 유형이 어떤 것이건 그 유형으로부터 발생하는 우열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유형은 사고의 깊이와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관점과 실재적 관점을 통합한 작품을 보자.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남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에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 「가을의 향기」 전문
이 작품의 1, 2연은 실재적 관점의 사실적 묘사이고, 3, 4연은 1, 2에 근거한 관념적 관점의 해석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분석적 구조로 바꾸어보자.
가을의 향기- [과수원의 임금이 익는 냄새, 노을이 타는 냄새, 마른 풀의 향기, 장 미 시드는 향기]-
구체적인 현상
1차 해석(상대적 의미)- [당신: 떠나는 향기, 나: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관념적 2차 해석(본질적 의미)- [상하고 아름다운 것,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 관념적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 2연은 1차 해석과 2차 해석의 구체적 정황이 되고 있다.
그 두 번의 해석은 아름답다.
당신(가을 또는 시간, 또는 가을의 입장에서 향기를 보는 존재)에게는 떠나면서 남기는 내음이지만, 나에
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이다.
그냥 술의 향기가 아닌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이 표현 속에는 고통과 환희가 버무려진, 상하면서까지
아름다운 향기를 만드는 그 가을을 아는 사람의 영혼이 내장되어 있다.
그런 향기란 시인에게는 언제나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실재적(1, 2연)현상을 수용함으로써 관념적인 해석(3, 4연)을 더욱 효과적이게 하고
있다.
이 통합적 관점은, 다른 면에서 고찰해보면, 관점 상호간의 어울림, 지각 상호간의 넘나듦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시 창작에서 미적 거리 문제는 시인에 따라 시적 경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일률적
으로 규명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지만 어떤 경우이든 미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시는 결국 시적 형상
화의 실패로 귀결될 확률이 높다.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 하여
무식하다는 말을 듣고
컴퓨터를 만질 줄 모르면 컴맹이라 하여
왕따를 당할 수도 있지만
자연을 모르면 생태맹이라 하여
우리 모두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선관, 「우리 모두 알아야 합니다」 일부
위의 시는 환경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경험적 자아로서 시인이 느낀 환경문제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시인과 대상, 혹은 시인과 화자와의 거리가 너무 밀착되어 직설적 토로가 우세하다.
시는 현실과의 미적 거리에서 창조된다.
미적 거리 조정 없이 현실을 기술하면 그것은 역사는 될지 몰라도 시는 될 수 없다.
시는 하나의 관념, 하나의 정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관념과 정서는 시에 위험스런 제재하고 본다.
그것은 관념이 칠칠찮은 시인으로 하여금 일반 산문처럼 관념을 노출시켜 논리화하는 함정에 빠지게
하고, 정서는 그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절규하고 카타르시스 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경우는 생태 환경의 중요성이라는 관념을 노출시켜 논리화한다.
관념이나 정서는 양식화되어야 미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정서의 양식화는 이미지나, 비유, 상징 같은 수사나 퍼소나, 아니면 진술 방식의 ‘낯설게 하기’등을 활용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부족한 거리조정으로 말미암아 대상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너무 짧아서 시인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노출되거나 감정의 과잉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에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저녁의 피 묻은 동굴 속으로
아, 말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이상화, 「말세의 회탄」 전문
이 시는 시적 장치에 의해서 시인의 감정이 여과되지 않은 채 작품 전면에 생경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독자가 느끼는 것은 시적 감동이 아니라 시인의 질펀한 감정과 자기 넋두리뿐이다.
이처럼 시인이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쓴 시를 감상적인 시라
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감정을 알맞게 예술적 정서로 전이시키지 못했을 때의 경우이다.
서정시가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장르적 특징이며 본질이지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주관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예술적 정서로 환기시키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시를 가리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의 도피”라고 한 것은 시인의 감정이 시라는 양식을
통해 여과되고 다듬어져 심리적 거리를 유지시켜 ‘미적 정서’로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광수, 앞의 책, 32~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