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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지역 작전
제 1절 작전 개요
1. 개 요
동부지역 작전은 국군이 철수작전을 통해 낙동강 연안에 방어선을 형성한 '50. 8. 1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으로 전환하기 직전인 9월 14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전선인 영덕, 포항, 기계, 안강 등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육국본부 직할 제3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과 제12사단, 독립유격대대인 제766부대와 최후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개한 방어작전이다.
개전초기 주도권을 잡은 북한군은 7월 말에는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잇는 선의 북쪽까지 진출했다. 적은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을 위해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계획해서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50. 8. 5일부터 개시된 8월 공세에서 주공방향을 대구로 지향하고 김천북방에서 영덕까지 공격을 담당해 대구와 영천, 포항 점령을 시도하였다.
특히 동부지역에서 적 제2군단은 예하 제12사단과 제5사단을 청송-현동-죽장-기계 축선 및 영덕-포항을 연하는 동해안 축선에 각각 투입해 경주-울산-부산 축선으로 진격할 발판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보현산 일대에 전개한 적 제766부대는 그들의 침투기도를 은폐하기 위해 의성-구산-자천 축선에서 양동작전을 실시하였다.
한편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육본직할 제3사단으로 낙동강 남안의 상아동-구수동-진보-영덕을 연결하는 주저항선을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철수작전의 실패로 낙동강 남안의 방어선 대신 양호한 남북으로 이어진 안동-의성 축선과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 방어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길안과 청송 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한 수도사단이 부대간격으로 침투한 적 12사단의 포위공격에 의성으로 철수함에 따라 의성-영덕간 방어정면 중 주저항선이 형성된 지역은 의성 북방 제8사단의 약 10km와 영덕 및 강구 일대 제3사단의 약 10km에 불과 하였다.
적 제12사단은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침투하여 8월 9일 경주 방어의 요충지인 기계를 점령한데 이어 11일에는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강구부근의 제3사단이 고립되고 경주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국군 제1군단은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함께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안강으로 급파해 적의 진출을 저지 하였다. 또한 8월 14일 수도사단 주력을 현동-죽장-기계 축선에 투입해 포항일대에 전대한 적을 북쪽에서 협공함으로써 8월 18일 기계와 포항을 탈환한다. 그리고 8월 22일 제1군단은 보현산ㄴ-침곡산-도음산-93고지를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반격준비에 착수한다.
한편 기계. 포항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 제12사단은 비학산에서 제766부대를 흡수해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그리고 8월 24일 야간 공격으로 수도사단 주저항선을 공격해 8월 27일 기계를 재점령하였다. 이날을 전후하여 총공세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 적 제5사단과 제12사단은 9월 2일 공격을 재개하여 5일에는 안강과 포항을 점령한 후 일부 병력을 경주 북서쪽 4~5km지점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9월 5일 무릉산-곤제봉-형산강 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해 11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의 기상이 극심한 무더위가 9월 중순까지 계속되고 강우량이 8월에는 극심한 가뭄이 9월 초순에 110.4밀리 내려 형산가이 범람할 정도였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 북한군 전투 편성
동부방면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5사단과 제12사단, 그리고 독립 유격대인 제766부대(3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주요 지휘관은 군단장이 김무정('50. 9. 10이후 최인), 제5사단장이 김창덕 소장, 제12사단장이 최춘국('50. 8월 말 최인), 제766부대장이 오진우 총좌였다
(2)공격준비태세
북한군은 국군 및 유엔군의 방어선을 종심 깊이 침투해 남동해안으로 시속하게 진출한 후 포항과 울산, 그리고 부산을 점령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공세에 앞서 기존의 정면 견제 후 일부 또는 주력으로 배후를 공격한다는 전법을 포기하고 모든 접근로로 공격을 개시해 성공하면 돌파구를 확장해 전과를 확대하는 전술을 택했다.
(3) 전투력 수준
북한군은 계속 남진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제5사단은 병력은 50%수준이고 포병화력도 122밀리 곡사포 4문, 76밀리 포 12문, 45밀리 대전차 포 12문, 120밀리 박격포 12문으로 50%이하로 화력운용에 문제점이 있었다.
같은 시기에 적 12사단은 막대한 인원손실에도 불구하고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의용군을 지원받아 10,000명 선을 유지하였고 화력은 122밀리 곡사포 20문, 76밀리가 22문, 45밀리 대전차포가 44문, 각종 박격포가 100여문, 전차 및 장갑차가 각각 10여대씩 보유하였다.
(4) 인접부대 상황
적 제2군단은 우측에 제5사단, 좌측에 제12사단 순으로 배치하고 제12사단 우측에 안동-의성-영천 방면으로 공격하는 제8사단이 있었다.
나. 국군 상황
(1) 국군의 일반현황
북한군이 낙동강 외곾선까지 진출하자, 육군본부는 제1군단 및 제2군단에 낙동강-반변천 연변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 명령한다. 이때 육본 직할의 제3사단은 오십천 연변 영덕~강구지구의 방어임무를 계속 수행토록 하였다.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안동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길안-청송 방면으로 이동해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미동-청송간 24km를, 제3사단이 영덕 방면의 16km를 형성하였다. 그러다 다시 방어정면으 축소하여 왜관-포남동-수암산-유학산-보현산을 연결하는 수정된 방어선으로 이동토록 한다.
한편 이무렵 동부지역의 북하눈 제2군단은 포항을 목표로한 제5사단이 영덕을 점령후에 장사동의 국군 제3사단을 압박하고 기계에 출현한 적 제12사단의 일부 병력은 포항에 침입하였다. 유격 독립 연대인 적 제766부대도 영덕에서 안강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육본은 적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포항지구사령부를 8월 10일부로 편성해 안강지구에 투입하고, 수도사단도 급파하였다. 포항이 피탈되고 영일비행장과 경주가 위협을 받는 등 동부지역이 위급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브래들리. 잭슨, 처치 특수임무부대를 차례로 편성해 포항과 경주지역에서 적의 남침을 저지토록 했다
(2) 전투준비태세와 전투력 수준
동부지역의 국군 제1군단은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는 부대기동이 제한되고 보급로가 취약하여 북한군이 청송ㅇ-현동-죽장-기계 축선으로는 사단 단위 전투부대를 투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안동-의성 축선과 영일비행장이 있는 포항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개전 이전부터 공비들이 준동한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에 적 제766부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독립 유격 제1대대와 제1201 건설공병단을 투입해 소탕작전에 착수하였다.
병력 수준은 병력이 보충되면서 수도사단이 5,780명, 제3사단이 6,470명 수준으로 올라갔다.
(3) 인접부대 상황
제3사단은 영덕-포항 축선을, 수도사단은 청송-기계-안강 축선을 중심으로 산악지대 방어를 담당하였다.
군단 예하 제8사단이 안동-0의성- 영천 축선의 의성과 보현산, 영천 일대에서 북한군 제8사단 및 제15사단과 대치하였다.
제2절 기계-안강 전투
1. 전투 개요
기계-안강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허고 있던 1950. 8. 9부터 9. 14까지 기계와 안강, 포항 및 경주 북부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766유격 연대로 증강된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다.
국군 제1군단은 적의 주력이 안동-의성-영천 접근로에 투입될 것으로 판단하여 제8사단을 의성일대에, 수도사단을 길안 일대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수도사단이 8월 5일부터 개시된 적의 공격으로 와해되어 제1연대는 의성일대로, 퇴로가 차단된 제18연대와 독립 기갑연대는 구수동을 경유 의성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청송-기계 축선은 무방비상태가 되고, 적 제12사단이 이 공백지대를 통해 저항없이 남하하여 8월 9일 기계를 점령한 후 포항으로 진출했다. 위기를 느낀 육본은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하여 제25연대와 함께 기계로 투입하고 제17연대와 민부대, 그리고 신편부대인 제26연대를 배속하였다. 아울러 의성에 집결한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이동 시키고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현동으로 진출시켜 기계일대의 적을 남북 양쪽에서 포위하였다.
8월 13일 제1군단의 명령에 따라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안강지구로 이동시키고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로 구산동에서 동남진 하였다. 8월 16일 제17연대가 기계 남쪽 고지를 탈환 후 기계로 전진하고 기계 북쪽에서는 용기동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여 측방을 위협하자 적은 비학산 일대로 퇴각함으로써 18일 오후에 기계를 탈환한다.
하지만 적은 비학산 일대에서 제766부대를 흡수하여 재편성한 후에 새벽 무렵에 공격을 개시하여 기계를 재점령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의해 제8군사령부는 잭슨특수임무대를 편성하고, 수도사단과 기계를 점령하기 위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사단이 기계 남쪽 고지에 제18, 제17, 제1연대 순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는 가운데 적의 9월 2일 공세로 곤제봉-호명리 일대로 철수하였은나 다시 무릉산-곤제봉선이 무너진다.
사단은 즉시 기갑연대 3대대와 제17연대로 역습을 전개하게 되고 이로부터 반격작전이 진행되는 때가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형산강을ㄹ 사이에 두고 서쪽의 곤제봉과 무릉산 일대에서, 형산강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적 제12사단은 우군의 공군 폭격이 폭우로 중단된 틈을 이용하여 형산강을 도하 동쪽으로 운제산까지 진출하여 영일비행장을 위협하게 된다. 이에 제8군 사령관 워커중장의명령에 따라 제18연대와 제26연대가 운제봉을 공격하게 되고 제18연대가 탈환하며 제17연대가 9월 12일 곤제봉을 탈환함으로써 공세로 전환하고 적은 이후에 후퇴하게 된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950. 8. 3일 청송을 출발한 적 제12사단은 도평동을 경유하여 입암리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적 제66부대는 향로봉과 비학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타고 나하하여 기계와 안강부근에 출현하고 있었다.
적 제12사단과 제766유격 부대는 동쪽위 적 제5사단과 호응하여 안강,포항 등을 점령 후에 부산을 점령하려 했으며 그들의 전투력은 그동안의 피해를 제 때에 극복하지 못하고 50%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요 지휘관은 군단장이 김무정('50. 9. 10이후 최인), 제12사단장이 최춘국('50. 8월 말 최인), 제766부대장이 오진우 총좌였다
같은 시기에 적 12사단은 막대한 인원손실에도 불구하고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의용군을 지원받아 10,000명 선을 유지하였고 화력은 122밀리 곡사포 20문, 76밀리가 22문, 45밀리 대전차포가 44문, 각종 박격포가 100여문, 전차 및 장갑차가 각각 10여대씩 보유하였다.
(나) 국군 상황
청송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18연대와 기갑연대는 '50. 8. 5일 의성으로 철수주에 있었고, 동해안의 제3사단은 강구에서 적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육본은 즉각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고 수도사단을 이 지역으로 기동시켜 적 제12사단의 남진과 포항지구 침투 적을 격퇴하도록 한다.
한편 수도사단의 병력은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포함하여 약10,000명 수준이고 105밀리 유탄포 10문, 81밀리 박격포 64문, 60밀리 박격포 92문, 3.5인치 로켓포 105문을 보유하였다.
수도사단의 주요지휘관은 사단장 백인엽(9.2일부터 송요찬), 제1연대장 한신 중령, 기갑연대장 백남권 대령, 제17연대장 김희준 대령,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8.11이후 이기건 대령), 제26연대장 이백우 중령(9.2이후 이치업 대령), 해군육전대장 강기천 소령이었다.
3. 전투 경과
가. 기계방어전(8.9~12일)
(1) 길안~청송 방어전과 구수동 철수작전
8월 1일 안동을 점령한 적 제12사단은 다음날 야간에 안동 동쪽 송천동에서 반변천을 도하하였다. 일부 병력을 산악지대로 산개시켜 수도사단의 관심을 산악지대로 유인하는 양동 작전을 실시하면서 청송-현동-기계 축선으로 남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려하는 계책을 수립했다.
따라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는 제766유격부대와 함께 동서 양쪽에서 포위하려 했으며 당시 제766부대는 진보 및 청송 일대는 물론 일부는 구산동과 구암산, 보현산 등지에서 준동하였다.
한편 육본은 영양-청송 축선에서 준동하는 적 제766부대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영동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던 독립 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하여 진보를 진출시켰다. 7월 26일 기갑연대장은 이 지구에 배치된 강원경찰 제5대대장 김인호총경으로부터 적의 동정을 확인 후에 진보-영덕-강구간 도로의 소통작전을 계획했다.
기갑연대는 전투경찰대를 편성, 8월 1일부터 4차례에 걸쳐 도로 소통을 개시했으나 실패하고 반변천과 서시천 연변의 261-월전동-273고지에 방어선을 형성, 적 제766부대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진보 정면에 위치한 적이 8월 2일 비봉산 동쪽으로 우회를 시도하자 이에 연대장은 적 제766부대가 청송을 포위하려는 시도로 판단하고 송강리 375-비봉산(670)-666고지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지만 산악지대로써 협조된 방어선이 어려워 그 간격으로 적이 침투하여 기습함으로써 8월 5일 방어선이 무너지자 청송 북방 방광산(519m)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던중에 구수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기갑연대는 경찰대대와 구수동 송토산 마을로 철수해 합류(제1장갑대대, 제2기병대대,제3도보대대)하게 된다.
한편 수도사단은 제1군단의 명령으로 8월 2일 길안으로 진출해 좌전방 제1연대는 11번도로 이천천 추목리에서 금소리 고곡교 새터가지, 우전방 제18연대는 오대리 전방 390고지에서 와룡산-대곡리 426고지 선을 점령하고 사단은 길안초등학교에 전술지휘소를 편성했다.
이어서 수도사단은 기갑연대를 배속받고 이어 호림부대를 길안 북쪽 1km지점에 배치하여 길안을 경계토록 하였다. 그러나 중앙에 대한 방어력이 미흡하였는바 8월 5일 수미상의 적이 제1연대 후방과 측방으로 침투 공격함으로써 사단 좌측방이 무너지고 제1연대는 신계리 성황고개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사단전술지휘소가 있는 길안이 공격으로 와해되어 사단은 914번도로를 따라 의성 단촌 우측방 윤암리로 철수해 모든 연대와 통신이 두절된다.
한편 우익의 제18연대는 구수동에 있는 연대지휘소를 기습한 적을 격퇴하고 사단과의 연락유지 및 적정 파악을 위해 연대 수색대를 양곡재로 급파하였으나 적이 이미 양곡재와 구수동 동쪽의 가산재마저 점령하여 제18연대와 기갑연대는 퇴로가 차단 되었다.
※양곡재의 비명소리, 그리고 불타는 차량들!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구수동에 포위된 2개 연대의 퇴로를 타개하기 위해 제1연대를 성황고개에서 투입토록 했으나 이미 적이 진출하고 있어 기동이 불가했다. 따라서 양개 연대는 양곡재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사단 명에 따라 각자 철수를 개시, 모든 중장비와 탄약, 보급품을 파괴하거나 소각한 후 야간에 구수동과 송토산 마을에서 철수를 개시 계명산(537m)-고란리-송제-구산동(현서면)으로 철수하여 8월 6일 야간에 의성에 도착한다. 이로써 청송-기계축선에는 국군 병력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다.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성황고개-460고지-만음동을 연하는 선에서 적의 측방공격을 대비히면서 제18연대도 의성으로 보내 기갑연대와 부대정비를 하게 되며 이때 기갑연대는 보병연대로 개편되고 , 8월 9일 군단명령으로 수도사단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구산동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8월 12일 육본 계획에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수도사단은 제8사단의 엄호하에 사단 주력은 안강 지구로, 제18연대는 구산동으로 각각 이동하여 포항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부대와 기계. 안강 일대에서 적 제12사단을 역포위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2) 기계피탈과 포항지구전투사령부의 편성
북한군은 7월 중순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로 침투한 제766부대의 정찰활동으로 청송-기계 축선이 무방비 상태임을 파악하여 적 제12사단이 아무런 저항없이 기계축선으로 남진하고, 제766유격부대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의성-구산동-자천 축서에서 양공작전을 단행했다.
8월 5일 청송-현동 축선으로 남하를 개시한 적 12사단은 예하의 1개 연대는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청송과 입암을 거쳐 8월 7일 오후 도평동에 도착해 제766부대와 합세한 후 남진을 계속해 다음날 죽장을 점령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된 국군과 미 제8군사령부는 적의 돌파구 형성을 저지 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위기를 직감한 육본은 8월 8일 대구에서 새로 편성된 제25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해 급파하였다.
8월 9일 기계북쪽까지 남하한 적은 부근에 배치된 아군을 격파하고 진출을 잠시 중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선발대로 도착한 제25-1대대가 노당리 445고지에 능선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해군 육전대 포항지구대 약 300명이 기계북쪽에서 적과 지연전을 전개하고 후퇴해 안강 북쪽 5km 지점의 지금의 강동면 다산동 145고지 일대를 점령, 이곳에 도착한 제25연대와 협조하여 포항으로 통하는 제31번도로를 차단하고 다음날 포항지구전투사령부에 편성되었다.
육본은 제25연대의 급파에 이어 8월 9일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 기계.포항지구의 방어임무를 부여하였다. 포항지구전투사령부는 제17, 제25, 제26연대와 육본직할의 독립 제1유격대대와 제2유격대대, 그리고 해군육전대 포항지구대, 및 제18야전포병대대 C포대로 편성했다.
(3) 제17연대의 반격과 445고지 탈환전
8월 7일 미 제8군의 예비로 마산 전선으오 행군하던 중 수도사단에 배속된 제17연대는 8월 9일 구산동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기계지역의 상황 긴박으로 8월 10일을 기해 포항지구전투사령부로 배속시켜 열차를 이용하여 8월 11일 아침 안강에 도착한 제17연대장은 해군육전대와 협조하여 우선적으로 양동일대의 적을 격퇴하고 이어서 31번도로를 감제하는 145고지와 236고지를 탈환하였다. 이어서 제3대대가 터널고지로 진입하여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적 1개 대대를 격멸하고 236고지로 복귀했다.
한편 아군 제17연대의 신속한 전개로 31번도로가 차단되고, 아군 증가이전에 적 제5사단과 연겨개 남하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아울러 적은 의성과 구산동 일대에 위치한 수도사단이 자신들의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불안감에 쌓여 먼저 기계를 확보하려 노당동의 445고지 일대 탈취에 주력하였다.
"노당재의 비밀"
8월 12일 적은 445고지일대의 제25연대를 공격하였고 치열한 백병전까지 수행하면서 연대는 밀려나게 된다. 이에 제17연대가 8월 13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45고지마저 제3대대가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고 안강일대로 집결하여 12일 열차편으로 의성에서 경주로 진출, 행군으로 안강에 진출한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이에 제1군단은 수도사단에 제17연대를 배속시켜 수도사단이 안강.기계지구작전을 관장하도록 했다.
안강에서 부대정비를 완료한 제3대대는 어래산을 공격해 탈환하고 제26연대에 인계후 안강에 집결했다.
나. 기계탈환전(8. 13~18일)
(1) 역포위 작전과 제18연대의 남진
적 제12사단의 도평동 출현을 보고받은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즉시 독립 기갑연대를 구산동에 투입,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도록 조치하였다. 적은 8월 8일 죽장으로 남하해 기계로 진출하고있었다.
육본은 이런 상황에서 제1.2군단의 작전지역과 부대를 일부 조정해서 제2군단이 화산 동쪽까지 제8사단으로 통제하고 동쪽의 제3사단을 제1군단에 배속하였다. 하지만 잘못하면 경주로의 적의 진출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역포위 작전을 구상하여 의성의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이동시키고, 제17연대를 수도사단장이 통합 지휘토록 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수도사단 예하의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구산동-현동에 전개시켜 적 제12사단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면서 북에서 남으로 진격토록 하여 기계지구의 적을 포위 공격하는 역포위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역포위작전의 승패는 수도사단 2개 연대의 배후에 대한 적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있는바 군단은 제8사단으로 하여금 보현산 지구 구산동-도평동 선에 임시방어선을 편성하여 엄호 지원토록 하였다.
군단의 명령으로 안강에 도착한 제1연대는 8월13일 제17연대 제3대대와 진지를 교대한 후 양동과 유금동 제산에 이른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반면에 적 제12사단은 8월 13일을 전후에 도음산(383m)-양동-227고지 방향에 주공을 , 기계-445고지-무릉산 방향으로 조공을 투입해 2개 접근로에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8월 14일부터 북에서의 포위공격이 시작되어 양 연대는 거의 교전이 없이 31번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20km를 남진, 죽장은 물론 봉화봉과 538고지도 탈환하여 기계 및 운주산 방향으로 남진할 공격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죽장에 있던 적 제12사단 예하 2개 대대와 후방지원부대는 급히 비학산(762m)으로 철수하였다.
단기간내에 기계를 탈환하라는 군단의 명령에 제18연대가 죽장-기계방향으로 공격을 8월 15일 감행하자 적 제12사단은 남쪽에서는 제1연대와 제17연대, 북쪽에서는 제18연대와 기갑연대의 공격으로 보급로가 차단되고 배후로부터 위협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2) 253고지- 288고지 전투와 기계 탈환
지동-정자동-침곡리 516고지선에서 공격을 개시한 제18연대는 우익의 제1대대가 감곡 677고지- 기북 용기리 340고지로 진격중 340고지일대에서 격전끝에 점령하였다.
연대 우전방인 제2대대는 31번도로 좌측으로 진출해 기안리 북쪽 350고지를 점령하고 기갑연대가 정자동에 진입했다.
제18연대는 8월 16일 공격을 재개해 253고지-288고지 선상에서 적 1개연대와 육박전을 치르며 탈환에 실패한 반면 적 제12사단은 북쪽에 주력을 운용함으로써 남쪽 어래산 동쪽 445고지와 유금리 북방 236고지를 국군 제17연대에 내주어야 했다.
"288고지와 253고지의 실체?" 전사에는 주 전투지역, 발굴은 바로 그 남쪽능선
"대곡리 380고지의 중대장, 그 이름은 고, 고희경 대위" '09년도 28구, '13년도 27구
"신광 마현리 바같재내미 : "저기 올라가 파면 다 뼈요" '08년도 29구
"현내리 두봉산의 권소위" 1구
제18연대는 8월 17일에도 혈전을 반복하며 288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며 적은 비학산으로 지휘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철수하게 된다. 이어서 전과확대로 바로 기계로 공격하여 기계북방 238고지(두봉산)를 확보하면서 8월 18일 기계로 진입했다.
이와 동시에 기계남쪽의 445고지와 190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7연대는 남쪽에서 협공하여 기계의 적은 대부분 격멸되고 일부만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기계를 탈환하게 되는데 사살 1,245명, 포로 17명이고 아군 피해는 전사 92명, 부상 171명, 실종이 500여명이었다.
(3) 제1연대의 반격과 운주산 포위작전
제18연대와 제17연대가 협공으로 적을 비학산으로 격퇴하던 시기에 제1연대도 31번 도로 남쪽 고지군에서 적 1개연대를 맞이하여 격파하고 양동과 유금리 고지군에서 능선을 따라 북으로 진출하여 31번도로 북방 고지군으로 진출했다. 이후 제26연대에 인계하게 되며 터널고지(유금동)를 점령한 제3대대는 민부대에 인계하였다.
한편 제18연대가 253~288고지군에서 격전시 적의 일부가 운주산으로 철수함에 따라 8월 17일 제8사단 제10연대와 배속된 제1 및 제2유격대대가 운주산 포위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이 먼저 비학산방향으로 빠져나가 작전이 취소되고 보현산 일대의 전황이 긴박하여 제10연대는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독립 제1유격대대는 제8사단에 배속되고 제2유격대대는 제8-16연대를 지원하였다. 또 8워루19일 기갑연대는 제6사단에 배속되고 포항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됨으로서 해군육전대도 원대복귀하였다.
다. 비학산 전투(8월 18~26일)
(1) 전과 확대와 주저항선의 형성
적 제12사다는 8월 14일부터 감행된 국군 제1군단의 기계탈환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8월 17일 비학산 지역으로 총퇴각을 시작하였다. 8월 19일 지휘부를 영천에서 경주로 이동한 제1군단장은 전과확대를 위한 반격명령을 하달 하였다.
구지동에서 오덕리에 이르는 921번도로를 전투지경선으로 좌측에서 제18연대가 우측에서 비학산을 목표로 제17연대가 진출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도중에 돈좌 된다.
8월 21일에는 제1연대로 우측방 도음산을 공격토록 하였으나 역시 돈좌되고 제3-26연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예비가 되었다.
(2) 적의 재편성과 주저항선의 붕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 제12사단은 비학산 일대에서 아군의 판단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전투력을 복원하였다. 적 제2군단은제766부대를 해체하여 사단에 편입하고 신병 2,000명을 보충받아 5,000명으로 전투부대를 개편하고 좌인접인 제5사단으로부터 일부 장비를 지원받아 8월 24일 수세에서 국지적인 공세로 전환하였다.
제17연대의 계속적인 비학산 탈환작전은 실패를 거듭하고, 좌측의 제18연대는 제3대대장이 적의 기습(638고지? 봉화봉인지?)으로 납치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몇번의 역습으로 재탈환을 반복하며 결국 방어선이 무너져 침곡산-638고지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게 된다. 우측의 제26연대는 도음산 공격에 실패하면서 8부능선에 저항선을 형성하였으며 제3사단에서 수도사단에 배속된다.
이와 같이 수도사단의 비학산 탈환이 실패하면서 적이 8월 24일 기해 수세에서 국부적인 공세로 전환하였다.
라. 제2차 기계~ 안강 방어전(8월 27일~9월 4일)
(1) 제2차 기계 피탈과 작전지휘체계의 일원화
적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종 목표인 부산으로 진출하기 의해 9월 공세를 계획하고 적 제5사단은 흥해-포항 축선을 따라 남진해 포항을 점령후 경우에 따라 경주로 진출하고, 제12사단은 기계-445고지-안강-곤제봉-261고지를 딸 남하하여 경주로 진출토록 계획하였다. 그들은 9월 2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8월 24일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적 제12사단의 야간 기습 작전으로 수도사단 주저항선 여러 곳에 돌파구가 생기고 8월 27일 드디어 기계가 피탈 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즉시 "잭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미 제24사단제21연대와 영일 비행장을 경계중인 미 제29사단 제9연대 3대대 및 미 제73전차대대(-)로 제8-16연대가 방어중인 죽장과 포항 북쪽 19km 지점의 월포동까지 연결하는 선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군 제1군단은 현재 각 사단의 전투손실이 커서 반격작전은 곤란하다는 의견으로 일단 계획은 보류되고 안강 북쪽의 445고지마저 5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다시 피탈된다.
(2) 적의 침투기도와 아군의 반격
8월 27일 밤 적 제12사단과 제5사단은 일부 병력으로 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차기 작전에 유리한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도음산에 배치된 제1연대는 제26연대의 방어지역을 인수해 진지를 구축하고 우측의 제3-22연대는 128고지- 우현동 선에서 강력한 적의 공격를 가신히 저지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3km의 간격이 발생되어 있었으며 적은 이 틈을 이용해 학전동 송학마을로 침투해 남하태세를 갖추웠다.
이러한 사실을 항공관찰로 확인한 제1군단장은 잭슨부대장 콜터 소장에게미 제73전차부대를 7번도로상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군 제17연대는 적의 공격에 앞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8월 29일 새벽에 미 잭슨특수임무부대의 전차와 포병의 지원으로 기계를 공격해 탈환하고 몇차례의 역습을 물리쳤다. 우측의 제3사단도 유엔 해.공군과 제73전차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냉천동과 93고지를 공격했으나 적 제5사단의 저항으로 실패한다.
사단 좌전방 부대인 제18연대는 운주산 서쪽 기슭에 방어진지를 편성중 적 제15사단 일부병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고전하고 있었다.
전 전선에서 적의 압력이 가중 됨에 따라 다시 기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8월 31일 적이 공격을 재개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군단 에비인 제8-10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해 효자동으로 진출시키고 제26연대는 효자동 남쪽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토록 조치하였다.
"개장의 비극"
9월 1일 04시를 기해 도음산-효자동-포항에 전개한 국군 4개연대(제1,제10,제22, 제23)는 미 잭슨 특수임무부대의 근접지원아래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으나 특히 93고지를 공격하던 제23연대는 많은 사상자만 발생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9월 1일 인사이동으로 제1군단장에 김백일 준장, 수도사단장에 헌병사령관인 송요찬 대령, 제3사단장에 이종찬 대령을 임명하였다.
수도사단으로 부임한 송요찬 대령은 제17연대장에게 445고지 사수를 지시한다.
(3) 9월 공세와 수도사단의 철수
9월 2일 03시를 기해 적이 총공격, 이른바 9월 공세를 개시 하였다. 총공격을 개시한 적 제12사단의 목표는 안강을 경유 경주로 진출하는 것이다.
운주산 기슭에 배칟된 제18연대는 8월 30일 야간에 기계남쪽으로 철수한 제17연대의 방어지역에 적이 진출함으로써 주보급로인 31번도로가 차단 되었다.
하지만 9월 1일 적 제15사단 일부 병력이 제8사단 제16연대 방어선을 돌파해 운주산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제18연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측방으로 침투한 적의 기습에 연대는 주저항선을 물러나 금대동-영천-건천을 거쳐 9월 5일 아침 경주에 도착한다.
마찬가지로 9월 2일 03시 제17연대도 445고지선에서 기습을 받고 격전을 벌이다 적전차 4대의 기습을 로켓포로 격파한다. 그러나 국군 복장을 한 1개 중대의 병력이 전면에 나타나자 제18연대 병력으로 오인하여 진지 전방 300m까지 진출시킴으로써 적의 불의의 기습으로 진지가 와해되고 계속적인 적의 파상공격으로 445고지선이 무너진다. 이러한 상황에 예비대로 다시 역습을 감행 445고지선을 확보하였다.
한편 9월 2일 새벽에 운주산을 돌파한 적 제15사단 에하의 증강된 1개 중대는 천장산-도덕산-자옥산으로 연결된 능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이를 항공 관측으로 확인한 제1군단장은 재편중인 제26연대를 안강 옥산동으로 보내 28번도로를 확보토록 자옥산을 점령토록 했으나 적보다 늦게 일대로 도착함에 따라 문제점이 현실로 나타났다. 따라서 연대장을 이백우 중령에서 이치업 대령으로 교체한다.
밤사이에 병력을 증강한 적은 9월 3일 새벽에 28번 도로를 차단하여 육본은 안강지구의 위급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군 예비인 제7-3연대(1)를 수도사단에 배속시켜으나 이 무렵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가 445고지 서쪽 어래산을 점령함으로써 안강은 위기를 맞았다.
이로써 군단은 안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선을 재조정하여 9월 4일 10시를 기해 우측의 제1연대를 형산강 이남의 호명리 선으로, 중앙의 제17연대를 갑산리(곤제봉) 선으로, 좌측 부대인 제26연대를 경주로 이동토록 하였으나 연락을 받지못하고 낮에 철수를 감행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16시경 경주 동부리에 도착하였다.
아군의 철수로 적 제12사단은 증강된 1개 연대로 구련봉을 점령한 다음 능선을 따라 남진 태세를 갖추었다. 일부 병력은 경주 북서 5km지점의 안태봉, 소현동, 구미산까지 침투해 경주를 위협 하였다.
제1연대는 호명리에서 다시 모서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지형분석결과 형산강이 흐르고 낙산의 복호산(153m)과 국당리의 형산(257m)등 중요지형을 이용한 방어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이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접근하는 적을 격멸하였다. 퇴로 차단의 위협에 철수를 명하였지만 끝까지 낙산을 사수하여 적 제12사단은 큰 차질이 초래되고 국군은 무릉산-곤제봉-형산강 선을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마. 경주 북방 전투(9월 4일~9월 9일)
(1) 제1군단의 방어배치와 곤제봉 전투
수도사단이 무릉산-곤제봉-호명리 선으로 철수한 9월 4일 적 제12사단은 주력을 안강에 주력을 집결시키고 적 제5사단과 협조하 경주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이에 다라 적 제12사단은 445고지-곤제봉-경주 및 성주봉-호명리-경주의 2개 축선에 증강된 1개 연대를 지향하고 일부 병려근 구미산을 점령하여 대구~영천 ~ 경주 도로와 동해 남부선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미 제24사단을 경주로 이동시켜 위급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경산에서 9월 5일 이동한 미 제24사단은 경주에 도착하였고 사단장 처치 소장은 잭슨 특수임무부대의 지휘권을 콜터 소장으로부터 받아 부대명칭을 "처치 특수임무부대"로 개칭하였다.
이와 함께 육본은 제7사단에 배속된 기갑연대를 9월 4일부로 제1군단으로 배속하고 다음날 제1군단 통제하의 제8사단을 제2군단을로 배속하였다.
수도사단은 경주방어의 성패가 달린 무릉산과 곤제봉간 약 5km 정면에 기갑연대와 제3연대, 제17연대의 3개 연대를 배치하였다. 글리고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곤제봉 남쪽 2km지점의 무명고지에 미 제17연대 제3대대를 배치했다.
결국 이 지역의 성패는 곤제봉의 확보에 달려 있게 되었고 제17연대(기갑연대 3대대)와 적 제12사단은 무려 15회의 공방전 끝에 9월 13일 국군 제17연대 제2대대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9월 12일 특공대 진격간 제10야포대대의 오폭으로 큰 피해 발생)
(2) 군단의 방어선 정리와 호명리 방어전(제1연대)
제1연대가 호명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에 그보다 5km후방의 모아리에 있던 사단 지휘소에 적 침투부대의 기습이 있음으로써 연대는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적이 이미 북쪽의 양동리로부터 동쪽의 홍계리, 그리고 서쪽의나원리 및 남쪽의 모아리까지 진출했다.
계속되는 군단의 철수명령에도 연대는 더이상 무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로 계속적으로 진지를 고수하였다.
이때 적 제12사단 주력은 9월 4일 안강에 집결, 무릉산으로 향하고 동측엔 적 제5사단의 1개 연대가 9월 5일 형산 앞 유금리에서 형산강을 도하하여 홍계리를 거쳐 운제산으로 향했다.
국군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 사령부가 경주로 이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9월 5일 경주에 도착한 기갑연대를 수도사단 제17연대 좌측방의 무릉산을 점령토록 하고 경주에 집결중인 제26연대를 구미산에 침입한 적을 격퇴토록 명령했다. 9월 3일 경주로 이동한 제18연대는 수도사단 우측방 홍계동에 197고지를 점령하고 이지역 일대의 적을 섬멸토록 했다.
'50. 9. 7일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가 제17-3대대의 방어정면을 공격하고 적의 주력은 제3연대 정면의 무릉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돌파되면서 제17연대 좌측후방이 우회공격을 받는다. 제3연대는 분산 철수하여 검단리일대에 배치되고 9월 8일에 제26연대는 구미산의 적을 격퇴하고 확보하였다.
상황이 일부 호전되어 제26연대는 9월 9일 포항지구로 제3사단에 배속되어 갔고 9월 5일 경주에 도착한 기갑연대는 제3연대의 점령지역인 검단리 부근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1연대는 현 진지를 고수하며 적의 계속되는 공격을 방어하고, 경주-안강 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적 제12사단이 동측에서는 적 제5사단이 공격을 감행했으나 호명리 사수전은 성공하였다.
결국 9월 5일부터 숟사단은 무릉산-곤제봉-형산강을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 11일간의 격전 끝에 지켜내면서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제17연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육본 직할로 예속을 변경해 9. 14~15일 야간에 부산으로 이동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은 자체 전투지대를 조정하여 좌전방 기갑연대는 무릉산-곤제봉, 중앙의 제1연대는 호명리 일대에, 우전방엔 제3연대로 형산-중단동까지 방어토록 하고 예비인 제18연대는 호명리 남쪽에 집결해 반격작전을 준비한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길안 양곡재의 비명소리, 그리고 불타는 차량들!
이곳은 '50. 8.5일~6일어간, 수도사단의 2개 연대, 제18연대와 기갑연대가 길안-구수리 중간 양곡재에서 적에게 914번도로 퇴로가 차단되어 제1연대로 성황고개에서 구출작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면서 양 연대들은 모든 무기와 장비를 유기한채로 각자 철수하여 의성으로 집결하게 되는 상황이다.
우리는 구수리, 송토산일대에서 탐문활동으로 지역주민을 만나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이 일대는 수도사단 병력과 장비들이 꽉 들어차서 무슨 장터를 방불케하였다 한다.
"우린 북한군을 보지못했어요. 모두 같은 복장인데 누가누군지 모르는거라. 그런데 갑짜기 우당퉁탕하면서 군인들이 모두 길로 또는 산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럼 혹시 양곡재에서 전투가 있었다는데 목격하셨나요?"
"전투는 못보았어요. 본 것은 트럭들이 불타고 있고 이걸 빼내는 군인들을 보았는데 복장이 다 국군이라. 아마 그 놈들이 변복을 하고 왔나 봅니다. 그리고 다쳐서 도망치지 못한 군인들 중에 옷에 불이 붙어서 죽은 사람들 많았어요"
"북한군이든 아군이든 이 일대에 죽어서 있던 유해는 없었습니까?"
"저 양곡재라는 곳의 좌우측 산에 올라가면 없는게 없어요. 먹는 것부터 총, 탄알, 철모 등 군인 것은 다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가끔 올라가 주어다 엿을 바꿔 먹기도 했지요. 그런데 죽은 군인은 모두 여기저기 구덩이에 다 밀어넣어 묻었는데 이 곳이 길을 넓히면서 다 어디로 갔어요.
나. 노당재의 비밀( '07. 29구를 25개 호에서 발굴)
안강. 기계에 가면 바로 보이는 산이 북쪽에 어래산, 남쪽에 무릉산이다. 어래산 너머에는 비학산이 우뚝 솟아있다. 청송 길안지역에서 수도사단의 2개 연대가 적의 포위에 의성으로 빠지면서 청송-기계구간은 대규모 돌파구가 생겼다. 적 제12사단은 무혈로 기계를 8월 9일 점령했다.
이에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 이 지역에 대한 방어작전을 하게 되는데 미 제8군 예비로 마산 전선으로 행군하던 제17연대가 명령을 받고 11일 안강에 도착하여 해군육전대 포항지구대와 협조하 445고지(어래산 우단 능선)를 공격하게 된다. 노당재는 바로 445고지 우측 능선으로 68번도로와 31번도로를 감제관측하는 중요지형이다.
나는 '00년부터 이곳의 전쟁지역을 탐사하고 다녔는데 주로 어래산과 무릉산, 곤제봉일대에 치우쳤다. 사실 이곳에 대한 제보가 많았던게 사실이다. 그러던 '07년도에 노당리 거리마을을 지나는데 길가 어느 집에 나이드신 아저씨가 계셔 혹시나 하는생각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르신 혹시 6.25전쟁때 여기 사셨나요?"
"그럼요,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얼마간 서울 아들 집에 몇년 있다가 따분해서 다시 내려왔어요"
"할머니는 안계시는지요?'
"뭘 바쁘다고 먼저 떠났지요. 벌써 3년이 지났어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요즘 이 앞을 자주 지나던데 뭐하시는 분들입니까?"
"우린 유해발굴단이라고 6.25전쟁때 전사한 군인들의 유해를 찾으려 전쟁지역을 탐문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저 강건너 양동 뒷산에 가 보셨나요?"
"아니요. 이곳은 지금 바로 뒤산 445고지하고 어래산, 비학산등을 올랐고 저 안계리 지역은 안가봤습니다"
"우리가 10살 먹던 해에 전쟁인데 북한군이 갔다고 해서 저 산에 가보니 모두 시체만 있어요. 철모며 총도 많아"
"그렇습니까. 여기는 없었습니까?"
"여기는 달구지가 가는 길인데 거 뭐요 학도병들이 교복을 입은채로 죽어서 길가에 쭉 널려있는데 숫자는 셀 수도 없지. 길가로 늘러져 있는데 어쩌다 트럭이 와서 실어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요" 저기 노당재로 올라가면 성황당 자리가 있는데 그곳에 시체가 쌓여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서 동네 어른들이 경찰을 따라서 가 여기저기 묻었는데 그 산에 구덩이 하나에 한구씩 밀어 넣었다고 들었어요"
우린 곧바로 노당재로 가서 445고지 우단을로 올랐다. 멀지않은 곳에 개인호가 25개 있다. 그리고 발굴을 하는데 정말 한 호당 1구씩 발굴되고 어떤 호는 두분이 계셔셔 29구를 '07년도에 발굴했다.
이 지역 일대는 이미 '04년도에 바로 길 옆에서 3구를 발굴했었다. 그 때는 할아버지가 안계시던 때다. 우린 다시 기계천 넘어 안계리 일대를 탐사했다. 이곳도 이미 안계저수지 만들 때에 뼈가 있었다는 제보로 '03~'04년도에 5구를 발굴했는데 저수지 우측 236고지 일대에 200여개의 개인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09년도에 11구를 발굴하는 등 일대에서 30여 명의 전사자를 발굴했다.
다. "아저씨 밥좀 주세요(육통리 원당 : 북한군 학도 의용군의 눈물)"
2010년도에 제18연대 전기풍 참전용사, 왕선구 참전용사 두 분을 모시고 안강과 기계 일대를 탐사했다. 우리가 안강에서 기계로 가는 도중에 육통리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50. 8월 말 9월 초에 제18연대가 445고지일대에서 적과 일진일퇴의 전투를 하던 시기다
제18연대 왕선구용사 : 나는 445고지 공격간 취사반에 있었어요. 거의 한달을 여기서 머물렀다고 봐요
제18연대 전기풍 용사 : 나는 운주산에 살아나 영천으로해서 경주로 갔어. 북한군이 쥐새끼처럼 포복으로 엎드려 산 정상까지 오는 바람에 연대장부터 권총을 당기며 싸우다 좌측으로 후퇴하여 영천으로 가서 경주로 갔다 올라 왔어요.
당시는 비도 한번 내리면 게속 내리고 또 얼마나 더운지 옷을 입고 있기가 아무리 전쟁통이라해도 힘들었다고 한다
"왕 용사님 : 그런데 8월말 새벽에 밥을 짓고 있는데 누가 와서 불러요. 그래 보니까 총을 거꾸로 메고 비를 철철 맞으며 솥 앞에 서 있는거야. 그래서 같은 소속 병력인줄 알고 왜 왔느냐고 대수롭지않게 물었더니 아 글세"아저씨 밥좀 주세요" 그러잖아"
알고 보니 445고지에서 있다가 새벽에 연기나는 모습을 보고 내려온 북한군 학도의용군으로 서울의 대학에 다니다 잡혀서 참여했다는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아니 난리가 순간 났지. 북한군이 침투해 왔으니 말이야. 결국 아침 밥을 주고 정보과에서 연대로 보냈는데 나중은 모르겠어"
"개인호가 능선에 전부다"
죽음을 무릎쓰고,배가 고파서 그 비가 퍼붓는 가운데 야전 취사장으로 걸어와 밥을 달라고 하는 북한군 학도의용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 나는 그 취사반 위치를 확인후에 원당으로 해서 445고지에 올랐다. 보이는 것은 모두 개인호였다, 역시 전사대로 흔적이 많다고 확신하며 우린 유해발굴을 했지만 '04년도에 1구만을 발굴 했다.
"산불이 자주나서 수류탄도 터지고 남은게 없어요"
노당리 대밭골에서 한 지역 할아버지를 만났다. 전쟁 당시에 이곳에 살았다는 분이다.
"산에 아무것도 없어요. 다 불타버리고 경찰이 통제해서 동네 어른들이 모두 치웠는데 산짐승이 파먹고 문등병환자분들이 발굴해 가고 없어요. 여기 대밭에도 북한군이 죽어 있었는데 팔둑에 시계를 8개나 차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서 다 가져갔어요"
"왕 선배님 어떻게 군인이 됐어요, 당시에 나이가 어리고 키도 작으셨다면서요?" 점심을 먹고 난 후 육통리에 있는 추모비를 찾아 묵념을 올리고 나는 질문을 드렸다.
"난 황해도가 고향이야. 전쟁전에 제18연대가 우리 지역에 있었고 그래서 간부급들을 일부 알고 있었지. 연안 중학교에 다니다가 송도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6.25전쟁 전날 국군이 모병한다고 개성시내를 장갑차를 돌아다녓는데 다음날 아침에 전쟁이 난거야. 나는 고향인 청단을로 갈려고 기차를 타려는데 전쟁이야. 그런데 여기서 18연대 상사 한명이 내이름을 부르는거야. 날르 알고 있었던 아저시야. 그래서 함께 백석포 방향으로 빠지는데 빨갱이들이 사람을 막 사살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뗏목을 만들어 함께 강하도를 거쳐 김포로 갔어요. 여기서 18연대 1대대 3중대를 만나 시흥에서 수원, 다시 조치원으로 갔지"
"아니 지금 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도병도 아닌데 계속 부대를 따라 간거네요?"
"그렇게 됐어요. 원래 고향에서부터 18연대를 알다보니 그 간부들 따라 간거지 . 18연대에는 서북청년단원이 많았어. 그래서 나처럼 이북출신들이 적응하기가 쉬웠다고 봐야지.
그러다 진천에가서 무슨 언덕이 있는데 좌우측에 산이 있어요. 여기서 18연대가 전투를 하는데 당시에 나같은 학생들이 상당수 있어가지고 탄도 날라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다시 청주로 해서 예천으로 가서 칼빈총도 쏘아봤어요
전기풍 참전용사의 일대기 :
라. "대곡리 330고지, 이름은 고희경 대위"('08, 마을 주민 저 고지에서 수도사단 1개중대 다 죽었다) : 80여구 발굴
우리가 열심히탐사와 탐문을 하고 유해를 찾는다해도 한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않는 것을 찾아가는 과업이다. 이곳은 '00년부터 많은 시간을 투입하여 왠만한 고지는 다 올랐고 주변 사람도 만났다고 보는데 찾아보면 또 있다.
'07년도 가을에 나는 차를 기계 마현리로 몰았다.
바깥재내미에 가니 연세가 드신 분이 사과 과수원인데 그믈망을 치고 있다.
"어르신 좀 쉬면서 하세요. 우리가 도와 드릴께요"
"아니 이 산골까지 어떻게 올라오셨습니까, 뭘 찾으러 다니세요?"
"네 6.25전쟁때 전사하신 국군의 유해를 찾고 잇습니다." 집 안에서 할머니가 사과 몇개를 가지고 나오셨다.
"이거 드세요, 군인들 모습 오랜만에 보네. 전쟁통에 보고 처음이야'
"그러세요" 우린 집 마당에 서서 가져오신 사과를 먹으니 꿀사과다. 그런데 까치들이 달콤한 맛을 알고 쫑먹기 때문에 지금 그믈망을 치는 거란다.
얼마후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서쪽 능선에 엄청난 전투가 있었고 당시 소문에 수도사단 1개 중대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전사에는 오덕리의 353고지와 대곡리의 253고지와 2인비동 288고지에서 격전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린 일을 조금 도와 드리고 주시는 사과를 받아들고 차를 달려 대곡리로 들어가 계전리 방향으로 능선에 오르고 다시 율산링에서 546고지 방향으로 올라 서서 탐사를 했다.
"능선 고지마다 사방으로 개인호가 첩첩이 있다."
우리는 '08년도부터 발굴 작전에 돌입하였다. 주로 바깥재내미 위의 능선위주로 발굴하여 30여구를 발굴하고 '09년도에는 대곡리 253고지 윗쪽 고지군을 발굴하여 28구를 다시 발굴했다.
"인식표, 중위 계급장, 그리고 육사 9기 박클 : 그 이름 고희경 중위"
작은 소나무 한그루 뿌리에 몇명의 유해가 혼재되어 있다. 백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여기 인식표와 도장이 나옵니다"
나는 바로 무릉산 탐사중 그곳으로 달려갔다.
"일동 차렷, 경례!"
지금까지 발굴현장에서 인식표와 계급장 그리고 유해가 함께 나온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조회결과 유족이 없다. 아니 식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육사 9기생을 통하여 수소문 결과 당시에 결혼을 했고 나중에 가족은 일본으로 갔고 자녀는 없다고 한다. 북에서 내려와 남한에 친인척관계는 잘 모르고 결혼해서 당시에 삼각지에 집이 있었는데 전쟁 전에는 찾아가서 커피도 마셨다 한다. 그런데 유가족이 없으니 DNA 검사도 못한다. 우린 결국 동기생 보증으로 현충원에 안장해야 했다. '13년도에도 이곳 일대에서 27구의 유해를 다시 발굴했다.
마. 현내리 두봉산의 권소위" ('09.황진수, 17세떼 나무하러 갔는데 정상에 권소위 푯말" 1구 발굴 유품 11점, 치약 빗등)
안강. 기계 지역은 수도사단이 길안-청송간에서 양곡재에서 2개 연대가 퇴로가 차단되어 의성으로 이동하면서 돌파구가 크게 형성되어 적 제12사단 병력이 무혈입성하면서 안강-경주-부산, 포항-경주-부산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수도사단이 긴급히 포항지구전투사령부와 합동으로 남북에서 적을 포위 공격하여 적의 남진을 일시적 정지시키고 이어서 정상적인 방어작전으로 전환하여 15회의 곤제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공세이전한 곳이다.
현내리는 바로 기계에 있으며 그 북쪽에 238고지 두봉산이 있어 이 고지를 누가 확보하느냐에 따라 기계 전역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피아간에 서로 확보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던 곳이다.
비록 작은 고지이지만 올라가 보면 산 전체가 개인호가 굴토되어 있다. 나는 '00년부터 전국의 주요 전투지역은 섬부터 DMZ 안까지 웬만한 곳은 다 탐사하여 보았다.
그런데 이곳은 우리가 이미 '00년부터 수없이 발굴작전을 수행하면서 별다른 제보자를 만나지 않했는데 '09년도에 지역주민 황진수님을 우연히 기계 장터에서 만났다.
"어떻게 많이들 발굴하셨나요?" 장터는 바로 주도로를 끼고 펼쳐지는데 어느 어르신이 우릴 바라보며 말씀을 하신다.
"예, 계속 발굴 하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으세요?"
"저기 두봉산에 내가 17살에 나무하러 올라갔는데 푯말에 "권소위"라고 적혀있는 작은 무덤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나 모르겠네요"
"혹시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발굴결과 유해 1구와 탄피 , 플라스틱 빗, 치약 등 11점의 유품을 발굴 했지만 아직 "권소위"의 유가족 찾기는 진행형이다.
사. "도음산의 김소위와 황장군비화"
얼마전에 "사병 묘역으로 간 장군 : 채명신 중장(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많은 국민적 감동을 가져왔다. 나아 함께한 전우의 묘역에 묻게 해달라는 유언을 받아들여 파월장병 묘역에 안장 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진한 전우애가 또 있다. 바로 '50. 9월 안강. 기계전투 당시 도음산에서 전사한 제26연대 김소위와 인접부대 제1연대 황소위의 영원한 전우애다. 전쟁 당시에 전사한 김소위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황소위는 그 장소에 가매장하고 공방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반격작전에 북으로 진출하면서 잠시 잊혀지나 했던 전우애는 휴전 후에 장군(황규만 장군)이 되어 이곳을 찾아온 황소위가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인식표는 없고 명찰은 모두 자연의 품으로 가버렸다.
"잊혀진 이름, 김00소위"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김00소위인 것은 확실하기에 국군묘지에 안장토록 탄원서를 제출하여 안장을 했고 그의 이름을 찾기에 온 힘을 기울여 드디어 "김 수영"이란 사실을 확인했고 유가족도 찾았다.
"국립묘지 안장사에 최초로 같은 한장소에 나란히 묻히게 된 용사 : 고 김 수영 소위, 고 황 규 만 장군"
황장군님은 생전에 매년 이 묘소를 직접 관리하고 헌화하였다. 그리고 금년도에 황장군이 노환으로 작고 하셨다. 운명하시기전 국가에 소원서를 제출했다. 전시에 목숨을 함께한 전우가 나보다 먼저 가 있으니 그곳에 묻히게 해달라는 내용이였다.
나는 처음 이 유해발굴 작전을 계획하는 단계부터 황장군님의 많은 지도를 받았고 함께 안강-포항지구를 탐사도 했다. 그러나 산림이 우거져 세워놓았다는 김소위 묘비를 찾지는 못했다. ('08년도에 드디어 찾아냄)
383m의 도음산은 흥해 용곡리부터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리는 15km 이상되는 긴 능선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남쪽이 바로 유금리로 형산강에 이르는데 터널고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도사단 제1연대, 제7-3연대. 제26연대, 민부대 등이 북한군 제12사단, 제5사단 에하 부대들과 8월 말에서 9월 중순 반격시 까지 전투한 곳으로 능선 모두에 개인호가 준비 되어 있다.
"구덩이에서 집단으로 발굴된 33구"
이미 우리는 전사적 사실로 탐사를 하여 개인호의 실태는 분석하고 있었는데 '05년도에 지역주민 두분의 결정적 제보를 받아 발굴작전으로 33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손익수(76. '05) : 전쟁이 끝난 후에 달전리 지역 주민들이 부역으로 도음산 정상에서 10여개의 구덩이를 파서 유해를 묻었다"
"손익태(70. '05) : 전쟁이 끝나고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 묘 앞에 15구의 유해가 그대로 있어 다른 장소로 옮겨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발굴 당시에 나침반, 대검, 철모, 만년필, 전투화등 많은 유품도 함께 발굴 되었다.
또한 우리는 '08년도에 지역주민 박옥순(81세)으로부터 "산에 나물하러 갔다가 포탄 떨어진 자리에서 유해를 목격했다"는 제보에 의해 능선상에서 10구의 유해를 발굴 하는 등 도음산 일대에서 지금까지 100여구를 발굴 했다.
아. 달전리 갈대밭 북한군 야전병원에서 2구 발굴
탐문중에 포항공대 건립시 많은 유해와 유품들이 나왔는데 노적봉 근처에 재매장했다는 제보를 받고 학교측과 협조하여 우린 탐사를 했다. 그러나 흔적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달전 저수지 옆에 있는 공동묘지부근으로 옮겨졌다는 풍문도 들었다고 한다.
주변을 계속 탐사하는 가운데 당수마을에 가서 공동묘지에 얽힌 비화를 들고 싶었으나 아는 분이 없었고 김백수(75, '08) 어르신이 길 옆에 갈대밭이 있는데 이곳에 북한군 야전병원이 있었고 본인이 직접 묻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어른을 모시고 현장에 가보니 아직도 갈대밭은 존재하고 있고 옆이 축사분비물을 저장하는 장소였다.
우린 유금리 마을회관에서 '13년도에 지역 주민 간담회를 해봤다.
1) 손규호(87) : 매봉지일대에 미군이 불폭탄 사격으로 풀 한포기 없었다. 개인호마다 북한군이 한명씩 죽었었다. 미군은 형산강 강가에 죽어 있는 것 보았다. 하지만 어느날부터는 보이지 않더라
2) 오기달(77): 비행기 폭격으로 많이 죽었고 집에 가축들도 다 죽었다. 설창산에 아군이 많이 죽었다.
3) 이광남(68) : 매봉지에서 어릴때 북한군 군관 복장도 가지고 옴. 안계저수지 댐 공사시 주변 일애에서 유해가 많이 나왔다.
4) 손윤익(75) : 마을 어른들이 부역으로 가서 유해를 묻었고 당시 주변 산에 교통호에는 많이 있었다.
이러한 제보내용을 근거로 우린 매봉지에서 '13년도에 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자. 포항 "개장"의 비극
포항지구는 93고지, 천마산, 포항여중 뒷산, 소치재 능선등 시내 전체가 전쟁터다.
그런 어느날 포항 일원을 탐사 및 탐문하다 어느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가사 한 분이 다가와서 본인이 묻혀있는 장소를 안고 있다고 해서 우린 따라 나섰다. 창포동 어느 과수원 안으로 들어서니 집 주인이 나왔다. 이곳으로 이사해 온지는 오래되지 않는다고 한다. 원 땅 주인은 별도로 있다.
택시기사님이 알려준 곳이 바로 이 집 입구 오른쪽 산밑으로 보니 옛날 개장이 크게 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이 일대에서 죽은 군인들을 집단으로 매장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을 수소문해서 발굴을 추진하려 했으나 난색을 표한다. 어쩐 이유인지는 몰라도 손대지 말라며 그곳이 전에는 돼지도 기르고 가축 농장같은 곳이라고 한다.
우린 할 수 없이 그 철망으로 둘러있는 바같부분에 약간 솟아오른 부분만 기초굴토를 해보고 종료했다. 묻혀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아 구분을 떠나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어서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면 굴토하여 그 한을 씻겨주는 것이 후손인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
차. 운주산 정상의 경계병과 북한군의 만남"(포복으로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침투, 북한군이 운주산 정상에 나타남)
내가 운명적으로 이 유해발굴업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명에 따라 다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지나 지금도 나는 이러한 질문에 명쾌히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않다. 다만 관심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도 전사를 읽고 관련 사실을 조회하고 있으니까.
운주산 정상은 이미 영천지구전투에서 언급하고 20여구의 유해가 발굴된 곳이다. 그런데 기계지역 전투에서 얻은 새로운 사실은 우리 제18연대(연대장 임충식 중령)가 북한군의 8월 후반기 공세에 밀리면서 이곳에서 영천=건천=경주로 이동해 재편성 했다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곳에 연대 지휘소가 있었는데 우측의 제17연대와 전투지대 공백이 발생하여 이곳으로 북한군이 포복으로 침투식 기동을 감행하여 지휘소를 기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연대 참모들은 권총을 뽑아들고 적에 응전하여 결국 적을 진전에서 격퇴하고 철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생전에 '10년도 이병형 에비역 중장의 증언)
당시에 제18연대에는 제1유격대대가 배속되는데 유격대대 구성원의 대부분이 서북청년단원들로서 편성되어 전투력과 정신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백골부대의 애칭이 바로 이곳 안강지구 전투에서 형산강을 건너 곤제봉을 탈환하고 반격으로 북진하게 되는 싯점에 주어졌다고 한다.
운주산 전투에서 경계병이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한명씩 한명씩 포복으로 이동해 오니 처음에는 같은 아군의 수색대원이 용기동 일대로 정찰을 나갔다 복귀하는 줄로 알았다. 복장도 이미 국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너 누구냐?"
"나 18연대"
"나무?"
"소나무?"
약간의 코믹한 소설처럼 쓰고 있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이보다 더 코믹한 비화가 많다고 용사님들에게 들었다. 부대가 같으니 후퇴하던 제8사단은 50년 8월 초 안동북방 웅천지구에서 바로 길옆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밤을 맞이 했는데 비는 퍼붓고 있고 심야에 또 한일행이 비를 맞으며 학교 정문으로 들어오는데 당시 경계병이 수화를 했다.
"누구냐, 7?"
"우리 10연대" 그리고 안내를 받아 교실에 들어가 베낭을 풀고 잠을 잔다.
새벽녁 소변을 보러 일어나니 적군과 아군이 엉켜서 자고 있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바로 서로 어두컴텀한 교실에서 머리를 만져보고 민머리면 대검으로 찌르고 서로 교실밖으로 벗어나 헤어졌다는 용사님들의 증언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실제 그 학교에 그 당시 용사님을 모시고 탐문도 했다.
이곳 운주산에서도 이렇게 해서 식별되고 총을 당기는데 경계병이 물러나지 않았다. 진지를 사수하고 육방전이 전개되는 사이 총소리에 놀란 지휘부 간부들이 바로 권총을 빼들고 진내로 들어온 북한군과 전투를 벌여 적군이 물러나게 되었다.
카. 비학산의 두 얼굴
1) 김용식-홍재근 일병(학도병 왕선구의 가장 친한 선임자였다)
왕선구 용사님은 학도병으로 제17연대 제3대대에 취사병 지원병으로 시작했다.
제18연대의 비학산 탈환이 계속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8월 말 수도사단은 제17연대에 탈환을 명령하게 된다.
제17연대는 다시 3대대에 임무를 부여하였고 제3대대장은 특공대를 모집한바 특공대로 자원하여 적 자동화기 진지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적 군관 등 15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등 적 제766부대를 와해시켜 버렸다.
그 이후 계속되는 적의 압력을 극복하고 반격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안강시가지 전투에서 백병전을 수행하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51년도에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2) 이종록 중위(육사 특 7기, 예비역 중령)와 비학산 유해 17구('01)
"어이 이중령, 나좀 비학산에 데려가 주소. 소대원들의 명복을 빌어야지~!"
'01년도 이른 봄에 예비역 중령이신 참전용사 이종록님이 현충원으로 나를 찾아오셨다. 이분은 전쟁 당시에 기갑연대 소대장이었다. 반격작전으로 진격시 비학산 탈환전에 참가하여 고지 점령작전시 소대원 대부분이 전원이 전사했다 한다. 살았어도 부상이나 전쟁 공포증으로 다시는 전선에 나서지 못하는 고통을 받게 되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하신다.
나는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안강으로 내려가 신광면 마현리 샛들로해서 비학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능선에는 대부분 개읺호가 즐비하게 구축되어 있어 그 당시에 전투상황을 짐작하게 하였다. 꼭대기에 올라서니 산불감시 초소가 우두커니 서 있다.
"여기서 다 죽었는데 목표를 탈환하고 잠시 휴식하는 사이에 바로 적의 역습이 진행되어 많은 피해를 입고 다시 철수하는데 전사한 전우를 어떻게 운반할 방법이 없어 정말 북한군에 훼손되면 안된다는 마음에 동료를 개인호에 걸쳐놓고 허리를 밟아서 호안으로 집어넣고 흙을 긁어 살짝 덥고 후퇴했어요. 아마 파면 그런 모습일거요!"
"머리 뒷부분에 와 있는 전투화와 발"
우리는 병력을 투입해 화대리 뒷산부터 비학산 정상까지 발굴 작전을 수행하고 17구를 발굴했다. 그런데 용사님이 말한대로 유해가 모두 포개져서 나오는데 머리 뒤통수에 전투화가 놓여 있는 모습이었다 용사님의 증언이 그대로 일치되었다.
우린 다시 용사님을 모시고 안강으로 갔고 다시 발굴현장에 올랐다.
"차렷, 경례!" 하염없이 용사님의 두눈에 눈물이 흘렸다.
파. "우리 형수님 보지않도록 유해를 저리 돌아서 모시고 가주시면 고맙계습니다"
안강 흥곡 마조리에서 미군 추정유해를 발굴했다. 마을 뒤 커다란 바위 밑에서 유해와 함께 구두칼, 치솔, 면도기 등이 발굴되었다. 동네에서 제보가 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미군 3명을 바위 밑에서 총살하였고 얼마간 그대로 방치되다 부역으로 동네분들이 묻었다는 내용이다.
"미군 추정 두번째 유해 3구 발굴"
우리는 '00년도에 다부동 숲데미산 우측 동굴에서 미군전투화와 머리부분만 없고 완벽하게 있는 유해를 8월에 발굴하여 미국 하와이로 보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안강 흥곡에서 또 미군추정 유해를 지역주민 제보로 발굴하였다.
"미군이 북한군이 물러난 후에 찾으러 다녔을텐데 어떻게 여긴 안왔나요?"
"오기야 왔지. 나도 보았어요. 그러나 그때는 무서웠고 말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었다고 봐요."
"아아 시계를 빼가고 달러를 가져가고 북한군에 밀고하고 뭐 이런 것 때문에 보복이 있었다고는 저도 들었어요"
"알고 계시네요. 그래서 서로가 쉬쉬하고 세월이 지났고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이니 장담은 못해요. 그후에 워낙 비가 와서 싯겨나갈 수도 있고... ." 나는 그곳에서 3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미군측에 인도했다.
"우리형수님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보이지않도록 저 뒤로 돌아서 나가 주십시요?"
우리는 발굴된 유해를 대형관에 옮겨서 차량이 대기중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글래서 운구병들이 들어와 관을 들어서 나가는데 동네에 한분이 달려오셨다.
알고보니 이분은 형이 당시에 전투에 가서 전사했는데 장가를 들었고 그 부인이 수절과부로 지금껏 시부모님을 모시고 동네에 살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세가 들어 이제 약간의 치매끼가 있는데 남편이 죽지않고 살아있다고 믿고 있고 군복만 보이면 나와서 멍하니 바라본다는 것이다.
우린 먼길이라도 돌아서야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도 못했다. 전쟁은 비극이었다.
하. 호명리(낙산 갑산리)에 사라진 전쟁 기념관과 유해"
호명리 갑산리에 제1연대 전쟁기념관이 있었다. 그런데 기념관 잔듸밭에 토종벌집 크기의 나무상자가 20여 개 묻혔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00년도에 지역주민이 제보하여 나무상자 속에서 몇점의 유해를 발굴하여 수습했다. 혼재되어 있어 분류 자체가 어려운 상태였다.
"'90년대 초에 강동 면소재지 송고개일대 야산에서 발굴한 유해"
누가 어떻게 왜 발굴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안강에 있는 포항 학도병참전용사 전우회 회장님이 조금 알고 있었다. 제50향토사단의 지시가 있어 이곳 경주대대에서 지역 민방위대원을 이용하여 보이는 유해를 거둬서 묻었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무지하게 시작하였지만 알고보니 뼈를 함부로 만지면 오염에다 DNA 감식조차 할 수 없는 정말 큰 문제에 도달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데 '90년도 초에야 무슨 변별력이 있었겠는가.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는그랬던 것이 우리의 수준이다.
그런데 이 기념관의 땅에 대한 소유권 재판에서 국방부가 지는 바람에 이 건물은 헐리고 말았다. 땅 소유주의 아버지 시절에 군에 기부한 것인데 행정서류룰 갖추지 않고 있다가 그 아들이 소유권을 주장하여 결국 모두 헐리고 말았다. 사실 그곳에 일부 유해가 잔존하고 있었는데 흔적조차 사라져버렸다.
하-1 : 갑산 마미산(158m)의 고 이장학 이등중사, 2번째의 신원확인 유해다
'00년도에 안강지구에서 발굴작전을 하는데 포항지구 학도병 참전전우회 회장이신 "이종달'님이 제보를 했다.
"갑산 마루에 상사 분이 한명 매장되어 있는데 이름이 이 장학이다"
"어떻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매장지에 나무로 푯말이 있었다."
안강국민학교에서 박격포를 쏘다 전사했고 당시에 군인들이 학교밖 시내 장의사에서 관을 들고와 수습해서 여러명이 메고 이곳에 올라 양지마른 곳에 묻고 푯말을 설치했는데 그때 이름이 명확히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제보였다.
우린 전사자 명부를 확인하여 대전에 동생분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연락을 하니 안강지구에서 전사한 것이 맞다고 한다. 본인도 함께 입대했는데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해서 형님보고 복귀하라하니 동생인 본인보고 돌아가서 부모님을 모셔라고 해 돌아왔는데 그만 전사했다고 한다.
우린 동생분을 모시고 현장에 가서 발굴을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완전한 모습으로 발굴 되는데 치아구조가 어쩜 형제지간이라지만 똑 같았다. 우린 이곳 일대 무릉산 등에서 2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현재까지는 총 100여구를 발굴했다.
하-2 : 그 이름 이명우 일병을 아시나요?
이곳 안강에 가면 신라시대 흥덕왕릉이 있다. 어떻게 경주가 아닌 이곳에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재리 소나무 숲속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아리비아 장수 몸을 가진 돌상이 서있어 고고학적으로 유명세를 받고 있는 곳이다.
"흥덕왕릉은 격전지였다"
그런데 이 소나무들이 몇백년은 되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총알자국이 선명하다. 그 안에 있는 비석들도 몸통에 온통 총알자국이 있다. 이곳에 포병이 들어와 방열을 했고 큰 비석은 대포를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어래산 밑으로 격전지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안내간판에 없다. 이런 내용을 기록하면 역사가 아닌 것인지 의문이 든다. 더욱이 바로 입구에서 몇m 걸어들어가면 당시에 전사자가 묻혔다는 봉분같은 흔적이 있었다. 그곳을 굴토결과 수류탄부터 미제 수푼, 탄창, M1완탄 등 20여 점의 유품이 발굴 되었다.
"대구 거주 오기용씨의 제보다"
내가 바로 그 왕릉에서 살았다. 지금도 왕릉 바로 좌측 울타리 밖에 보면 집 한채가 있는데 내가 살던 집이고 지금도 친척이 살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왕릉 앞에 죽은 시체가 여기저기 있었고 철모며 총도 많았다. 죽은 사람중에는 흑인도 있었다고 기억 된다. 그런데 북한군이 물러가고 알마 있어 미군은 들어와 다 찾아가는데 국군은 오지않았다.
지금 가보면 우리집 앞에 개울이 있는데 당시에 아버지가 계셔셔 묻었는데 분명 "이명우"라는 충남 공주출신이다, 그 당시에 상의 호주머니에 수첩이 있고 주소가 있어서 아버지가 그 집에 연락을 했고 답장도 왔다. 형편이 그러니 조금 있다가 발굴해 가겠다는 내용이고 그 후로 한두번 더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알고 있다. 처음에는 거적으로 덥었으나 한여름이라 자구 썩어가 아버지가 개울가에 묻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분이 대략 위치를 알고 있다. 하지만 끝가지 연락이 없었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우린 바로 '00년도에 바로 발굴작전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수류탄, 탄피등은 나왔으나 유해는 없다. 흙의 상태를 보니 마사토라 아마도 일찍 자연으로 산화되어 버린 모양이다.
"자식이 죽고 형, 동생, 오빠가 죽었는데 찾아올 비용이 없어 오지 못했다.
나라를 위해 사우다 전사했는데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지... .
찾아주지 않으니 그 당시는 그렇게 유족들이 전쟁터를 돌며 유해를 발구해 가기도 했다."
5. 소련군 군사고문관 라조바예프의 보고서
6. 참전용사 증언
제 3 절 영덕 - 포항 전 투
1. 전투 개요
영덕-포항 전투는 1950. 8. 1일부터 9. 14일까지 동해안의 영덕- 포항 일대에서 국군 제3사단이 증원부대와 함께 영덕과 포하을 점령한 후 부산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의 기도를 저지하고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적 제5사단은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2주일이 넘도록 영덕지구에서 지체함으로서 그들이 기도했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적 제2군단은 8월 공세의 주공을 대구로 지향하고 조공을로 적 제5사단은 동해안 축선에서 7월 말까지 포항을 점령한 후 경주-울산-부산으로 진격할 발판을 확보하려했다.
당시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이며 영일 비행장이 있어 미 제40전투비행대대가 지상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다.
국군 제3사단은 7월 중순부터 적 제5사단과 일진일퇴의 격전을ㄹ 전개해 영덕을 장악하고 있던 중, 8월 8일에 적의 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져 남쪽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때 제22연대장은 임의로 오십천교를 폭파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영덕-강구전투는 종료되었다.
제3사단은 제23연대로 오십천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제22연대를 남호동으로 철수시켰으나, 흥해 남쪽 냉천동에 적이 출현해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포항이 피탈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워커 중장은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영일비행장 방어임무를 부여하고 육본은 민부대를 출동시켰다. 8월 11일 아침 포항시내로 진입한 적은 학도의용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후방이 차단된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에서 교전을 반복하고, 흥해 북쪽에 적이 출현함으로써 협공의 위기에 처하자 8월 17일 06시에 해상으로 철수를 감행해 성공적으로 구룡포에 도착하였다. 또한 민부대는 형산강 남쪽고지 일대에 진출한 후 미군 전차소대의 지원아래 포항사가지로 진입하여 포항을 탈환하였다.
제26연대를 배속 받은 제3사단은 법천동- 양덕동을 연결하는 주저항선을 형성한 후 93고지에 대한 적의 계속되는 공격을 물리치고 포항을 재점령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제3사단은 적의 9월 공세시 적 제5사단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중앙의 주저항선이 와해되어 효자동-두호동 선으로 물ㄹ러났다가 다시 형산강 남쪽으로 이동해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나 다시 송정동-장동선으로 물러나 새 방어선을 편성한다. 이어 사단이 옥녀봉을 탈한하고 운제산의 적 후방을 차단하자 적은 진지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950년 8월 초 동해안을 따라 남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 남쪽 강구일대에서 국구 ㄴ제3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전지니 교착상태였다. 이는 미 공군의 근접지원과 함포사격으로 인해 주로 야간에 이동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8월 9일 강구를 점령한 적은 더이상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좌측 적 제12사단은 입암에 진출하였으며 그 선두부대가 흥해 서쪽 6km지점까지 진출하였으며 8월 11일 그 일부부대와 제766유격부대 일부병력이 포항시가지에 진입함에 따라 동부전선은 새로운 상화이 전개 된다.
적 제5사단은 병ㄹ력이 8,500명 수준이었고 장비와 뮈로는 전차 5대를 비롯해 122밀리 곡사포 12문, 76밀리 곡사포 26문, 45밀리 대전차포 24문, 120밀리 박격포 12문, 82밀리 박격포 54문 등이었다.
나. 국군 상황
1950년 8월초 동부지구는 적 제12사단이 안동 동남쪽 산악지대를 이용 기계 및 안강 일대로 침투하고, 유격부대인 적 제766부대는 영덕에서 안강일대로 서남진하고 있었다.
동해안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은 영덕 남쪽 10km지점의 장사도 일대로 후퇴하여 적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1일 적의 일부가 포항에 진입하자 제3사단은 후방이 차단되어 독석동에서 해상철수를 단행하ㅕ 구룡포에 상륙한 후 포항지구에 배치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제3사단과 협조하여 안강과 포항 일대로 침투한 적을 격퇴하려 하였다. 또한 민부대와 수도사단의 일부 병력을 포항지구로 출동시켜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합동으로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다.
제3사단의 병력은 12,600명 수준이고, 장비와 무기 수준은 포병은 없고 81밀리 박격포 80문, 60밀리 박격포 128문, 57밀리 대전처포 25문, 3.5인치 로켓포 47문 등이다.
주요지휘관은 사단장은 이준식 장군에서 8월 7일이후에는 김석원 장군이, 9월 1일 이후에는 이종찬 대령이 이고 제22연대장은 강태민 중령(8.18이후는 김응조 중령), 제23연대장은 김종원(8.12이후는 김종순 중령), 제26연대장은 이백우 중령(9.2이후는 이치업 대령)이며 배속 부대장은 제10연대장이 고근홍 중령이고 민부대장은 민기식 대령, 제1연대장은 한신 중령이었다.
다. 전투 경과
(1)영덕 탈환전과 독석동 철수작전
(가) 영덕 탈환전과 오십천교의 폭파
영덕 북방 영해에서 적 제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던 제23연대는 7월 16일 영덕 북방 4km지점의 활인산-237고지-매정동을 잇는 선상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하지만 적의 야간 기습에 혼란에 빠져 영덕을 상실하였다. 이후에 몇번의 공방정을 거쳐 원대복ㄷ귀한 제22연대의 역습으로 207-181고지를점령하였다.
그리고 제23연대는 7월 29일에 유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영덕탈환전에 나서 다음날 제22연대가 영덕을 재탈환하였다. 따라서 8월 5일까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반면에 안동을 점령한 적 제12사단은 청송-기계방향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적 제5사단은 8월 5일 야간부터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금호동 위 207-181고지선에서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강구 북쪽 150고지선에서 사태를 수습하였다.
8월 6일 제22연대로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반격작전을 감행하여 결국 다시 207-181고지선을 회복하였다.
한편 사단전술지휘소는 181고지를 공격하던 적의 일부가 박격포 사격을 가하자 당황해 지휘체계가 마비되엇다. 이로 인해 사단장이 이준식장군에서 김석원 장군으로, 독립 제1대대가 제23연대에 흡수되고 연대장이 교체되었다.
"또 무너진 오십천교, 한강, 안동대교이어 세번째 일방적 폭파(8월 9일 05시)"
8월 8일 저녁에 적 제5사단이 다시 강력한 공격으로 181-207고지선이 무너지면서 제22연대장이 8월 9일 05시 무렵 오십천교를 폭파하면서 도하를 하지못한 병력이 강물에 뛰어들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나머지는 강구에서 어선을 이용해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나)제3사단의 고립과 독석동 철수전
오십천 이남으로 철수한 제3사단은 흥해로 침투한 적으로부터 후방이 차단됨에 따라 8월 10일 후방으로의 공격을 계획하게 되는데 바로 미 제8군사령관 지시로 계획을 취소하고 해안경계에 임하게 된다.
강구를 점령한 적은 유엔 해군과 공군의 포격으로 고개를 들지못하고 해안에서 2~8km떨어진 야산지대를 따라 침투하였다.
사단의 부상자들은 장사동 해안에 정박한 LST로 이동해 부산으로 후송되었다.
8월 15일 새벽 흥해 북쪽에 적이 출현하자 사단은 해상철수를 실행하게 되는데 유엔 해군 함정과 공군기의 포격하에 8월 17일 07시에 독석동 해변을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철수작전을 완료 되었다.
(2) 포항 방어전
(가) 포항피탈과 학도병의 용전
북한군 제12사단의 증강된 1개 연대는 기계를 점령 후 흥해 남쪽의 냉천동 일대로 진출해 무방비 상태의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포항에는 제3사단의 후방사령부와 전투근무지원 부대, 해군 포항경비 사령부, 공군 포항지부대 1개 중대,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 9,000명이 있었지만 조직적인 전투임무를 수행할 지휘체계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 제8군사령부는 영일 비행장 방어 임무가 시급한 문제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급파하였다. 또한 포항 지구전투사령부는 민부대를 투입해 포항탈환을 준비한다.
한편 제25연대 제3대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떠나 8월 9일 09시경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전황이 긴박한 안강으로 2개 중대를 보내고 제9중대(대부분 학도병)를 소티재 105고지일대에 배치되어 있었고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결국 대량 손실을 입고 있었다.
한편 8월 10일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설치된 포항여자중학교에는 전날 의성지구로부터 도착해 있는 71명의 학도병이 있었다. 이 무렵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 병력은 소티재 제9중대 진지를 돌파 포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8월 11일 04시경 소티재에서는 적 제5사단 1개 연대와 제9중대의 교전이 시작되고 제3사단 후방지휘부는 학도병에게 방어임무를 부여하고 일부 병력으로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기 시작했다.
※ 포항여중에서 전투한 학도병을 만났다(신광면 상읍 법광사에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날이 밝으며 적이 포항여중 정문을 향해 진격 50m까지 도달하자 일제히 사격으로 200여명을 살상하지만 15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학도병 71명은 47명이 전사하고 적은 50~60명을 사살했다. 그리고 모두 실종 또는 부상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이 시간에 대부분 행정기관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고 군수품은 민간선박을 이용 후송되었다. 결국 형산강 제방을 이용 방어선을 편성하고 포항은 적의 손에 들어 갔다.
(나) 미군의 증원과 민부대의 포항탈환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기계피탈에 이어 포항까지 피탈되는 상황에 영일의 전투비행장이 위협을 받게 되자 매우 심각한 상황을로 인식하여 8월 10일 미 제8군 에비인 제2사단장에게 즉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영일 비행장을 방어할 것을 짓시한다. 이에 따라 부사단장인 브래들리 준장이 미 제2-9-3대대와 미 제15야전포병대대 제3포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 M-16 고사기관총 1개 소대, 공병 1개 소대를 배석받아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 하여 비행장 경계임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 제9-3-K중대와 포병의 일부 인원이 늦게 8월 11일 유금동 터널고지를 통과할 때 적 제766부대의 기습을 받고 70여 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워커 중장은 즉시 경주에 대기중인 전차 1개 소대와 국군 제17연대로 하여금 터널고지를 확보토록 하고 공군에의한 터널고지를 강타토록 하여 적 70여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13일 제40전투비행대대가 아무런 협의 없이 일본 스즈키 비행장으로 철수하기도 하면서 8월 20일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는 햋체되고 미 제9-3대대가 비행장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기계와 포항지궁에 침공한 적 제12사단과 제766부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 예하 제25연대, 제17연대, 그리고 해군육전대의 반격에 일시적 물러나 있다 안강 북쪽과 포항으로 재진출하였다.
이에 육본은 8월 15일 군단예비로 있던 민부대를 영천에서 포항으로 이동시켜 17일 금호강선에서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적은 8월 11일 포항에 진입한 적은 일시 철수하였고 이틀 후에 다시 1개 연대가 포항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포항 북쪽에 진출해 있던 적 제5사단 일부 병력이 8월 15일 포항에 도달하자 적 제12사단 예하 연대는 서측방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포항외곾까지 진출한 민부대 제2대대는 8월 17일 14명으로 편성된 전투 정찰대를 피난민으로 가장 시켜 주간에 침투하여 적정을 살핀결과 적이 유엔군의 함포사격으로 포항 외곾지대 야산을도 대피한 것을 확인하여 8월 18일 04시에 형산가을 건너 시내로 진입했다.
이 시기에 국군 제3사단이 구룡포로 철수를 완료하였고 적 제5사단은 거침없이 남하하여 포항을 점령하기 위해서 흥해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8월 19일에 육본은 민부대와 제3사단의 임무교대를 지시하여 제3사단은 제23연대가 민부대 배치선으로 진지를 인수하고 제22연대는 예비로 포항에 잔류하였으며 임무를 교대한 민부대는 신녕지구로 전진해 8월 20일 제5연대로 개편되었다.
(다) 제3사단의 반격과 주저항선의 형성
8월 17일 제3사단이 구룡포에 상륙함으로써 해상철수작전은 성공적읃로 완료되었다. 이날 사단은 독립 제2대대를 제22연대 제1대대에 편입시키고 신병을 보충받아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다음날 구룡포를 출발한 제23연대는 부산에서 도착한 신병 500명과 영등포학원 소속 장교 25명 및 시병 394명을 보충 받아 재편성하고 8월 20일에는 도음산에 배치된 제26연대를 배속받아 3개 연대의 사단이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8월 19일 민부대와 임무교대를 제23연대로 하고 우측에서는 제26연대가 게속하여 도음산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예비인 제22연대가 사단의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적 제5사단은 사단의 우측방 93고지를 확보하여 게속적인 침투공격을 감행해 제23연대는 주야로 주인이 바뀌는 전투를 벌려야 했고 중앙의 제22연대는 흥해가지 진출했으나 적의 압력으로 초곡동 149고지가 피탈되면서 적의 일부가 후방으로 침투하여 초곡동 후방능선으로 철수한다
좌익의 제26연대는 도음산 전방 2km까지 진출했으나 8월 24일 적의 계속되는 압력에 불리한 상황에 처하여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의 제1연대를 제26연대 좌측으로 진출시켜 전투 정면을 축소시켜준다.
한편 수일에 걸쳐 공격준비를 완료한 적은 8월 27일 새벽에 사단 전 정면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다라서 죄익인 제26연대 지역이 돌파되어 연대는 효자동일대로 철수하고 군단장은 제1연대로 하여금 돌파구를 저지하라 하고 제1연대와 제22연대 사이로 제1군단에 배속된 제8-1대대를 투입하였다.
계속적인 적의 압력에 군단은 제8-10연대를 8월 31일부로 배속 전환하여 효자동으로 진출시키고 전투력을 상실한 제26연대는 후방으로 이동시켜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 미 군사 고문관과 제3사단장의 갈등, 그리고 사단장 교체 "형산강을 넘어갈 수 없다. 넘어 오려면 강물이 핏물이 되어야 한다". "너는 안되면 바다건너 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
9월 1일 사단은 전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은 어려웠다. 이날 제3사단장의 교체가 이루어져 김석원 장군의 후임으로 이종찬 대령이 부임하였다.
(라) 제3사단의 철수와 형산강 방어선의 형성
9월 공세 당시 제5공굑집단의 조공으로 흥해지구에 전개한 적 제5사단은 포항과 영일 비행장을 목표로 기동하였다. 이들은 목표를 점령한 후 계속 남하하여 울산, 경주로 해서 부산을 점령하려 했다.
9월 2일 03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 적 제5사단에 맞서 국군 제3사단은 좌전방에 배치된 제10연대가 수도사단 제1연대와 연결을 유지하고 중앙에 제22연대, 우측에는 제23연대가 93고지와 환호동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적의 공격개시 1시간만에 전방이 무너지면서 제10연대와 제22연대의 접경인 128~163고지의 중간지대에 돌파구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9월 3일 제22연대는 소티재로 철수하게 되며 9월 4일 사단은 방어선을 자명동-111고지-96고지-소티재-두호동으로 재조정하였다.
하지만 좌측의 수도사단이 곤제봉-호명리 선으로 철수함으로써 좌측방에 3km에 달하는 간격이 발생하엿다. 결국 제3사단은 9월 5일 저녁에 형산강변으로 철수를 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마) 형산강 방어선의 붕괴와 홍계동 부근 전투
9월 6일 제3사단은 형산강을 연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1군단은 영천 피탈에 따른 병력 증원이 요구됨에 따라 제8-10연대를 원대복귀 시키도록 하는데 교대부대인 제22연가 도착하기전에 철수해 버려 형산-연일간 5km의 방어정면이 공백상태로 남게 되었다.
반면 적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적 제5사단은 증강된 1개 대대를 남하시키면서 제10연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형산강에 흐르는 핏물
하지만 국군 제3-22연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병력을 투입하다 적의 사격을 받고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옥녀봉(215)일대로 진출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적은 운제산(480)까지 도달해 있었고 옥녀봉과 197고지로 진출하여 우측방 제23연대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사단은 9월 8일 방어선을 송정동-장도우복동 간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제1군단은 경주의 위기가 현실화 됨에 따라 미 "처치 특수임무부대" 장을 만나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운제산을 공격하고 제1군단은 형산강 남쪽의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대책을 수립하고 9월 7일 영천 아화에 있던 제26연대를 제3사단 방어지역으로 차량으로 이동시켰다.
이 무렵 제1군단장은 운제산의 적이 남서쪽 2km지점의 503고지로 진출하자, 적의 목표가 경주라고 확신하고 천북면 동산동에 집결한 제18연대를 503고지 남서쪽의 438-392고지선으로 진출시켰다.
원대복귀를 지시받은 제26연대는 9월 9일 경주-감포-양포동을 경유 세계동으로 이동, 제8-3대대를 배속받아 131곶지 일대를 점령, 미 처치 특수임무부대의 공격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미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미 제24사단 부사단장 데이비슨 준장에게 운제산 탈환 임무를 부여하고 미 제19연대(1), 미 제9연대 3대대 및 제9연대 전차중대 등으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 9월 11일 공격을 개시하여 운제산을 탈환하여 제26연대에 인계한다.
한편 9월 8일 제1군단은 미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이 지연되자 197고지와 옥녀봉을 탈홚해 적의 퇴로를 차단토록 제3사단에 명령하였다.
제18연대장은 9월 9일 이른 새벽에 수색대를 침투시켜 적의 방어진지를 확인한바 적이 보급과 증원 병력의 차질로 진출이 중단되었음을 판단하고 9월 11일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에 맞춰 옥녀봉을 공격하여 적을 고립시켰다.
9월 12일 제18연대는 마침내 형산을 탈환하여 형산강변의 방어진지 일부를 회복하였다. 그러자 적이 낙산지역의 제1연대와 제18연대 사이로 철수하는 것이 확인되어 지원 포병과 보병의 공격으로 무려 2,000여 명이 사살되고 56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편 적은 운제산과 형산 및 곤제봉을 빼앗긴 9월 12~13일에 이르러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23연대는 연일을 공격하여 적의 감제하에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9월 14일 05시에 연일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제3사단은 9월 6일 방어선이 돌파된 이후 8일만에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전부 회복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영덕-포항전투 결과 북한군 제5사다는 영덕지구에서 국군 제3사단의 저항에 직면에 2주일이란 시간을 솝비했다. 사실 북한군은 7월 하순까지 포항을 점령하여 안강-경주축선을 이용하여 부산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해군 및 공군으로부터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은 제3사단에 이해 좌절되었다.
하지만 국군도 인수부대가 오기도 전에 인계부대가 빠져벌여 적이 그 공백을 이용하여 침투, 형산강 방어선이 무너지는 등 문제점을 노출하였고 9월 14일 형산강 도하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실패하여 9월 19일에 다시 도하작전을 하는 등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전투다.
적은 9월 22일 전면적인 철수가 시작되었고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도주하는데 급급했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학도병의 진실
협조되지 않은 오십천교의 폭파로 제3사단은 많은 피해를 감수하고 축차적인 철수를 해야했다. 그러다 기계가 피탈되고 적의 일부 병력이 포항시내로 진입하여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서 장사동에서 해상 철수작전이 성공하여 다시 구룡포에서 재편성을 하여 포항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 싯점에 8월 11일 포항시내 포항여자중학교에서 북한군과 학도병이 전투를 벌여 71명중 47명이 전사하고 24명의 인원은 부상이나 실종 등 위대한 전투가 있었다고 기록된다.
그럼 이 학도병 용사님들은 어디서 왔을까?
전사에는 구산동에서 의성으로 철수한 수도사단의 지휘부에서 이곳 후방지휘소가 마련된 포항여중으로 왔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상황으로 과연 의성에서 포항으로, 수도사단장에서 제3사단장으로 가는 김석원 장군을 따라 갔다는 것은 이해가 힘들었다. 그래서 참전용사님들은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결과 이미 진천에서부터 따라다닌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당시에 김석원 장군은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어서 이분 밑에 가면 대우받고 살 수 있다는 나름의 희망들이 학생사회에 퍼져 있어서 그를 따르는 학생 수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포항에 지휘부가 있다하니 여기저기 학생들이 수소문해서 개별로 찾아가는 학생들도 있고 실제 의성에서 수도사단을 떠나 제3사단으로 간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혹시 그 당시에 전우중에 어머니께 편지를 써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나요?"
난 쉽게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당시에 집단으로 가매장되었다가 화장되었다는 것만 들었다.
※ 화개장터 위 탑리 전투('50. 7. 26?)
호남지역 전투에서 이영규 소령 부대(제5사단 제15연대 소속)를 따라 다니던 전남 여수.순천의 학도병 200여명이 남원으로 북상했다 다시 구례를 거쳐 하동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하동 화개장터, 탑리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참전용사 정효명님이 증언을했다. 그러나 우리 전사기록이나 소련군 군사고문관 보고서에도 이런 사실은 명확하지 않다.
학도의용군자료집('1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행)에 보면 생존한 몇분의 증언록이 수록 되어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보다 훨씬 앞서서 여기 대담하신 분들은 모두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백영기 예비역 장군만 만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고령이다보니 말씀의 시기가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울학도포병동지회 강성모님의 증언록은 책으로 나와 있고(제18포병대대 역사관에 보관돼 있었음) 나는 이걸 읽고 화천 북방 지금의 제15사단 책임구역인 삼천봉 전방 735고지의 발굴장소를 결정하게 되고 무려 300여 명의 전사자를 발굴해 냈다.
정효명 용사님도 벌써 '06년도부터 만나 증언을 들었고 함께 탐리지역을 탐사도 하고 '07년도에 10구를 발굴도 했다. 그러나 증언처럼 최초의 학도병 전투지라는 것은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 전사기록에 불명확하고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기록에도 없으며 지역주민들의 기억이 우리가 전투를 했다는 것 보다는 행군중에 아침식사를 준비하다 적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설이 많았다. 탑리 지역에서는 나이드신 분은 거의 다 만나 보았다.
최초는 육군 정훈국이 수원에서부터 모집했고 실제 진천 잣고개(봉화산)전투시 학도병이 김석원 장군을 찾아가 참전을 했다는 것은 용사님들의 증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물론 춘천지구 전투시에도 교복입은 학도병이 참여한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린 학도병인지 학도의용군인지 용어의 혼란스러움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아니면 단순 용어의 겉치레이니 나는 그걸 알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무의미했다. 이미 그 당시에 전쟁 나기 전에 학교에는 학도대가 있어서 예전의 학도호국단과 같은 교련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왜 학도라는 말이 시작되었는지 알게 되엇다.
일부는 의용군은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해 있으면서 낙동강 전선이 불리해지자 점령지역 청소년을 붙잡아 가는 구실로 조국해방을 위한 의로운 참여라는 미사여구를 붙인 것이고, 남한은 대다수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학도병이라 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실제 당시에 사용된 명칭은 다양해서 학련 구국대(이철승이 위원장), 학도호국치안대(도 경찰국장이 발행), 비상학도대(대령 이선근), 학도의용대(대령 이선근), 학도유격대 등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명명 되기도 했다. 그러니 무엇이 정답인지는 사실 내가 답하기는 어렵고 모두가 책가방을 놓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가 잘은 모르지만 명령에 딸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는 명분은 동일하다.
다만 북한군의 선전선동에 그들의 강제와 요구로 참여한 학생신분의 학도의용군의 평가는 역사가 증명하리라 본다.
물론 그 당시에 남한도 강제로 징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학생신분이 아니라 군에 갈 정령이 되었기에 의무로서 가야하는데 일부 병역기피 사례가 빈번해지다보니 좀 키가 크고 덩치가 있으면 피난민 대열이나 피난민이 모여있는 곳에서 강제로 타에 태워 현역으로 입대시킨 사실이 분명 있었다.
나는 포항여중 참전 전우회 일원을 살아계신 분은 모두 만나 보았다. 그 이름이야 다 델 수는 없지만 김만규, 유명욱씨등 나는 포항이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혹은 제18연대, 백골부대 전우회 등에서 만나뵙고 포항여중 전투의 무용담을 들었고 몇분은 우리와 같이 포항여중을 찾아가 탐사와 그 뒷산부터 일대의 구릉성 능선을 전수 탐사했다.
※ 포항여중에서 전투한 학도병(김만규님)을 만났다(신광면 상읍 법광사에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옆에서 다른 전우중에 목사님의 옛날를 조금 말해준 분이 있다. 대구 분이고 포항에서 목회를 하다 지금은 군포인지 조그만 교회에 계시다는 이야기도 했다. 난 동작동 현충원 무명용사탑 앞에서 그 일행을 만나 초모행사에 참여하고 점심도 도시락으로 같이 했다.
"참전용사님, 어떻게 살아나셨어요?"
"그걸 말로 표현이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운명은 주어진 것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아니다 하기에도 그렇고 어쨋든 살아났어요"
"혹시 질문에 잘못이 있다면 용서하시고 제가 궁금한 것은 그당시에 사실 국군은 한 일이 없이 학도병들로만 정규전을 한거잖아요. 그런데 살아서 다시 돌아오셨다는 것은 기적이거나 신의 과호가 있었다고 봐야 하기에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는 질문입니다. 절대로 다른 뜻이 없으니 이해바랍니다."
"내가 붙들려 간 곳이 법광사란 절이야. 절에 끌려 가니 나 말고도 군인도 몇 있고 경찰도 있고 한 3~40명은 되어 보여요. 그런데 계속하여 함포가 떨어지지 비행기가 폭격하지 그러니까 우릴 경비하는 북한군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쏘리고 그 놈들이 더 웃겨. 살려고 숨는 것이."
"아 바다에 있는 함정에서 함포를 여기저기 사격했나 봅니다."
"그럼 바다는 유엔군이 장악하여 이놈들이 꼼짝못하고 있었지. 그래서 비행기가 떠서 정찰을 하고 나면 곧 포격이 시작되니 우리들 포로들도 예외는 없어요. 그래서 사실 그 아군 포격에도 많이 죽었다고 봐야돼요."
"그래서 북한군들이 숨는 틈을 이용하여 탈출한거군요?"
"그게 아니고 사실은 거기 있는 간호사가 도와 주었지"
"예? 간호사가 도와주다니요?"
"부상당한 포로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간호사가 서울에서 내려온 여자의용군인데 이화여대 다니다 북한군에 입대하여 이곳에 온 모양이야. 그러니 조금의 애환이 있었겠지. 팔이 부러진 환자, 다리가 부러진 환자, 턱이 내려앉은 환자 등 무소한데 손가락에 파편상인 나한데 관심을 갖고 고향이나 기족등을 물어보고 하더라고. 난 그때 17살이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된건지 갑작스레 모두 북한군이 사라졌어. 나는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 간호담당 분이 손짓을 하는거야. 저리 가라고... ."
"그래서 탈출하여 밤낮으로 걸어서 다시 포항에 갔어요"
※백인엽 사단장의 이중성(?), 그리고 박태준 중위의 고마움~~!"
"걷다보니 몇명의 동지가 모여 산속을 위주로 걸어서 어느날인가 포항에 갔는데 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없고 백인엽이 사단장이라고 해. 그래서 우릴 대변할 사람이 없어 우린 헌병대에 북한군 공작원으로 붙들려 갔어요"
"하기야 뭘로 증명할 증명서가 없으니 난감하셨겠네요"
"그래요, 우리가 포항여중에서 전투한 학도병들이라고 해도 들어즈지도 않아. 한번은 헌병초소 앞에 우리들이 여럿 앉아 있는데 사단장 차가 지나가는거야.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고 경례를 안했어. 그랬더니 차를 세우고 지키는 헌병을 오라더니 "저놈들 누구야?"하고 물으니 헌병이 학도병들인데 하니 더 물어보지도 않고 "귀찮은 놈들 빨리 처리하라고 해"하고는 씽 가버렸잖아
"와 그래서 이제는죽었구나 하셨겠네요"
"그렇지요. 아니 나라위해 책가방 내던지고 총을 잡고 싸웠더니 프락치로 몰아 처형하라는 것이니 기가 막히는데 뭐 다른 방도가 없어요. 우릴 대변하 사람이 없으니"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어요?"
"아니 뭐 이런 말 있잖아요, 쥐구망에도 볕들날 있다고. 누가 지프를 타고 왔는데 당시 우릴 통제했던 남소위란 분이 온거야. 그래서 우린 신원부증이 되어 살아나 맥없이 걸어가는데 무슨 조그만 트럭같은 것이 와요. 나중에 알았는데 당시에 수송차량을 책임지고 있는 장교라는데 바로 박태준 중위였어. 이 장교가 우리 꼴을 불쌍하게 여겨 밥도 갔다주고 어디서 구했는지 군복도 갔다주어 입게 되었어요. 무려 한 달 만에 옷을 갈아 입었다니까" 이 분들 이야기는 백인엽장군은 안좋게 보였다. "김석원 장군을 따라왔다고 하면 "저놈들 없애라는 식"이었다 한다.
나. 미 군사 고문관과 제3사단장의 갈등, 그리고 사단장 교체 "형산강을 넘어갈 수 없다. 넘어 오려면 강물이 핏물이 되어야 한다". "너는 안되면 바다건너 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
나는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를 다니면서 김석원 장군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에 나의 국가관도 형성 되었다고 본다. "젊은이는 육체가 건강하면 군대를 가서 나라를 위해 위국헌신 해야한다"는 것이 김장군의 평소 지론이었다.
나는 백인엽장군도 그분이 인천 선인재단 이사장 시절에 지금의 인천공대 전신인 인천전문대에서 토목공학과를 반년 수강하면서 장군님을 자주 만났었다. 겉치레 없고 정말 성실하시며 강직한 분이라고 기억된다. 별별 루머도 수없이 들었지만 적어도 포항 여중 학도병님을 만나기 전에는 장군님을 좋아했었다.
전사책에는 마치 당시 제3사단자인 김석원 장군이 지병이 악화되어 이종찬 대령으로 바뀐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은 대부분 다 아는 사실로 미군 군사고문관과의 마찰이 원인이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장군은 미군의 형산강 이남으로의 철수를 하라는 통보에 반대를 하셨다. 지금 이 상황에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데 굳이 형산강 남안으로 방어선을 형성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제8군측은 철수를 강요했고 여기에 장군께서 전속부관이 갔고 있던 일본도를 들어 미군 군사고문관의 머리부분에 대고 " 당신들은 싸우다 안되면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라고 하며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러자 놀란 고문관이 도망쳐 제8군으로 복귀해서 워커에게 "나 한국측 제너널 김 있으면 임무할 수 없어요"라고 고함으로써 이 사실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보되었고 사실 보직을 해임ㅎ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워낙 명망이 높았기에 바로 내보내지않고 슬며시 특명단(지금의 합참 준비태세 점검단과 같은 성격)에 발령하여 전장에서 발을 빼게하여 미군의 비위를 맞추어 줬다고 봐야 한다. 그 후에 장군은 '56년도에 소장으로 예편하지만 별 둘을 달아본 적이 없다.
"학생들 앞에서 깨어진 장군 철모"
사실 김석원 장군은 당시 그 유명했던 김활란 여사, 임영신 여사 등과 교분이 있었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내막은 내가 밝히기는 그렇다. 하지만 전방에서 북어 명태 사건으로 채병덕 총장과 동반 시퇴하고 있다 전쟁시 철수중에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보임된 것이 임영신 여사의 천거가 있었다고 한다. 껄끄러운 상대인 김장군은 토임후에 학교에 있으면서 어느날 아침 조회시간에 대통령의 특사로 정일권 장군이 별이 달린 철모를 가지고 왔는데 "나는 이런걸 받으러 군인이 되지않았소"하며 바로 시멘트 연단 위에 내던져 투구는 깨져버렸고 머쓱게 정장군은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에 장군은 5.16혁명전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의원에 당산도 된다. 자유당과는 원수처럼 살았다.
일부 비평가들이 무능과 무대포를 말하지만 당시 군대는 군대도 아니였다. 채병덕 시대의 군대는 북에다 무기를 주고 명태와 물물교환하던 썩어 문들어진 군대문화속에 빠져 있었다. 전쟁 전날 육군회관 개관식에 참여하여 술에 골아 떠러진 채로 전쟁을 맞이했던 군대다. 당시 미군 군사고문관들은 우리를 돕기보다는 우리를 얕잡아보고 자기들에게 굽신거리는 군인을 원했고 김장군은 반대로 그들을 업신여겼던 것이 차이다.
진천지구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임시정부의 대전에서 부산으로의 탈출(?)은 어려웠을 것이다. 영덕지구 전투도 이미 수도사단에서 제3사단장으로 갈 때는 북한군이 영덕 일원을 탈취하고 있던 시기고 그래도 무너진 진열을 가다듬고 장사동에서 장병과 장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무사하게 구룡포로 해상철수케 하고 다시 포항으로 진출한 진정한 군인이었다고 본다. 그 당시에 그의 나이는 무려 60세였다.
다. "형산강에 흐르는 핏물" [대대장과 전령, 그리고 중대장(형산강을 헤엄으로 건너다니며 명령 전달]
나는 지난 20여년의 유해발굴 작전을 진두지휘하면서 정말 많은 참전용사님과 지역주민, 유가족 분들을 만났다. 하지만 내가 그분들의 어떤 혜택을 드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였다. 다만 그분들의 전쟁이야기를 듣고 또는 지역의 전쟁실태를 알압고 유가족의 한을 들어주는 역활이었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내가 내 시간을 갔고 여유를 갔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주말에도 거의 전투지역 산에 가거나 아니면 참전용사님을 만나야 했다.
그러던 중에 어느날 참전용사 한 분이 주말인데 현충원에 오셨다가 나를 만났다. 제3사단 백골부대 소속이란다. 즉 제18연대 제3대대라고 하였다. 본인이 대대장 전령이었다며 형산강 제방둑을 한번 가보았으면 했다. 그래서 나는 함께 고속버스편으로 포항을 가기로 하고 동행을 했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관용차로 갔다가 혹시라도 도중에 어떤일(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항상 조심해야 함)이 벌어지면 솔직히 난감한 문제이기에 아예 주말을 이용하여 함께 가보기로 한 것이다.
"바로 이 부근인데 흔적도 없네!"
"아니 여긴 개활지라 몸을 숨길곳도 없는데 어떻게 싸우셨나요?"
"그러니까 미치는 거지. 당시는 강둑이 길게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 밑이 논바닥인데 그 각진 곳에 호를 파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아군이 도하하게 되면 얼굴을 내밀고 위로 사격을 하는거야"
"비행기나 포병사격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왜 없어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퍼붓는거야. 그런데도 저놈들이 위에 있다보니 움크리고 있다가 쏘아대니 피해가 말 할 수 없어요. 강물에 뛰어든 인원들이 저 편으로 당도하는 인원이 없어"
"그럼 다시 돌아오는 겁니까?"
"다 죽는거야. 수영을 잘하여 잠수하더라도 몇분이잖아. 얼마나 죽는지 정말 저 강물이 벌겋게 되었어요!"
용사님은 눈물을 흘리신다. 아니 강물이 핏물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 비가 퍼부어 강물이 범람하는데 핏물이 논으로 흘러들었다고 한신다. 얼마나 전사했을까?
※대대 전령으로 형산강에 뛰어들다
유금리 터널을 지나 갑산리 방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여기도 용사님이사운 곳이 아니다. 다시 연일읍 방향으로 들어거 중단리 제방둑으로 갔다. 여기도 아니다. 이미 하천 정비사업으로 그 당시의 모습은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용사님이 전쟁당시의 현자을 찾으려 한 것은 바로 용사님이 전령으로 중대장에게 대대장의 명령을 전하려 직접 물속으로 뛰어들어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전령을 한다고 하니 요즘 당번이 아니라 전화를 할 수 없으니 종이에 쓴 명령지나 전달사항을 가지고 직접 가는 거라 무척이나 중요한 직책인 것이다.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는데 한쪽 중대는 여하히 강을 건너 강너머 둑에 엎드려있는데 한쪽 중대는 올라서지 못하고 밀려나 앞에 있는 적들이 다시 한쪽으로 집중하는 상황에서 피해를 막기위해 후퇴하여 돌아오라는 멧세지를 전달하는 임무였다.
쌍방이 포병과 박격포, 아군은 비행기 폭격까지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치 앞도 바라보기 힘든 그런 상태에서 용사님이 둑을 올라 강물로 뛰어드는 순간 이미 적이 감지하여 기관총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물 바닥에 엎드려 기다려야 하는데 해녀도 아니고 길어야 2분을 남기지 못한다. 얼마나 쏘아대는지 강물이 흙탕물로 뿌연한데 고개를 살며시 들어보니 무슨 여름날 오후늦게 해질무렵 강물에 뛰어오는 고기떼처럼 총알이 뜅기어 그렇게 차 오른다.
※ 강물 속은 뻘이 아니고 모두 시신이었다
천우신조인지 총을 맞지않고 물속을 기다시피하여 명령지를 전달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이건 콩볶는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난리다. 머리속에는 살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다시 물속을 긴다. 그런데 뭐가 큰 것이 손에 걸리어 보니 군인이다. 아군인지 적군이지 분간할 방법도 없고 그런 생각도 하지못했다. 그러고 보니 온통 죽은 군인들이 바닥에 깔려 있다. 도대체 얼마나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데 그만 한방이 손등을 지났다. 퍽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계속하여 남으로 물을 헤치며 나아가 둑으로 올굴을 내밀며 굴렀다. 논바닥에 떨어져 손을 보니 피투성이다 위생병이 포복으로 다가와 지혈을 하고 임무는 완수하였다. 다행히 지혈는 되고 바로 후송되어 3개월을 보내고 후방으로 배치되어 살아서 제대하였단다.
"형산강은 정말 제3사단이 다시 도하하여 올라설 때는 피로 강을 물들이고 포항시내로 진입했다. 김석원 장군의 말이 적중한 것이다."
낙동강선 방어작전(해군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동해안을 공격한 적은 6월 25일 6시에 동해안 옥계, 임원, 삼척에 일부 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후 한국해군 및 유엔해군의 해안봉쇄작저능로 해상에서 적의 위협을 차단할 수 있었고, 반면에 아군은 적의 후방을 해상으로부터 압박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해군과 유엔해군은 한반도 주변해안의 수로 특성에 따라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다수의 섬들이 산재하며 저수심이 많은 서해안에는 한국해군이, 그 외지역은 영국과 캐나다 해군이 배치되고, 수심이 깊고 대형함정이 접근하여 함포사격을 할 수 있는 동해안은 미군해군이 배치 되었다.
남.서해안에서는 기간중에 적병 약 200명, 선박 50여척을 격침하는 성과를 거두웟고, 동해안에서는 8인치 함포를 보유한 중순양함이 도착하여 강력한 봉쇄작전으로 해안선에 배치되어 있는 적 병력, 철도, 차량 및 보급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이 통영을 점령하고 거제도로 침입하려는 긴박한 상황에서 한국전 최초로 통영 원문고개를 차단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실시전에 영흥도와 덕적도를 점령하여 전력적 거점을 사전 확보하였고, 부산지역ㅇㄹ 방호하기 위해서 유엔군의 4척의 항모가 배치되어 지상군 작전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을 수행하였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국군 제3사단의 해상철수를 지원하여 8월 17일 새벽 병력 5,800명, 민간인등 기타 1,200명을 안전하게 구룡포로 철수시켜다.
제 2 절 한국해군 작전
1. 서해안 작전
(가) 서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
안면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YMS 502정은 8월 3일 안면도헝에서 군수품을 적재중인 적 기범선 7척을 침몰시키고 509정은 8월 6일 인천근해에서 적발동선 60톤급과 범선 5척을 격침시켰다.
또한 8월 7일에도 JMS 301, YMS 502.503정은 100톤급 ㅓㄱ발동선 1척과 적 화물선 2척, 범선 13척을 격침시켰다
PC 701함은 8월 10일덕적도에 집결중인 적을 함포사격으로 70여 명을 사살하고 704함은 8월 11일 안마도에 상륙작전을로 적 11명을 사살하고 섬내부 치안을 확보하였다.
안면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JMS301정은 8월 12일 적 보급선단 4척을 치몰시키고 적 70명도 사살하엿다. PC702함은 군량미를 적재한 적선을 치물시키고 13일에는 PC 704함이 안마도에서 12명을 사살하였다.
(나) 덕적도. 영흥도 상륙작전
1) 덕적도 상륙작전('50. 8 . 18~ 8. 19)
덕적도에는 의용군 약 100명과 유격대원 4~50명이 있었고 적 병력은 1개 소대 약 30명이 주두하고 있었다. 또한 좌익청년으로 조직된 자위대가 해상 감시소를 운용하고 인민위원회, 여성동맹, 치안대 등의 기관이 덕적도 적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상륙부대를 탑재한 JMS 301, 309정이 8월 18일 진리 전방을 목표로 전진하고 상륙을 지원하는 함정ㅇ들은 덕적도 남방 서포리 비조봉을 목표로 , 북쪽에서는 구포를 목표로 공격하고 캐나다와 영국 함정들이 아군을 지원사격하였다.
국수봉으로 도주한 적은 완강히 저항하다 발동선을 이용하여 복리로부터 탈출을 기도하다 전원 일망타진되었다. 전과는 사살 26명, 포로 7명을 획득하였다.
8월 20일 이작도에서 활동중인 적을 발견하고 다시 상륙하여 적 24명의 인민의용군을 생포하고 산정에서 대항하는 적 70명을 사살하고 21일 이작도를 완전 점령한 후에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넘겼다.
2) 영흥도 상륙작전('50. 8. 20~ 8. 21)
적은 정규병력 약 30명과 좌익계열 청년을 동원하여 주로 내리와 어성리 일대에 근거지를 삼고 있었다.
아군 함정의 지원하에 8월 20일 06시에 상륙부대는 내리지역 만으로 상륙하였다. 적이 내리 남방고지에서 저항하다 어성리와 내리 항만 입구에서 모두 격멸되었다. 사살 6명, 포로 33명, M1소총 19정 등이고 아군 피해는 전사 4명, 경상 7명이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의해 첩보활동을 위해 함명수 소령등 17명이 첩보대를 구성하고 KLO대장인 최규봉 대령 일행과 영흥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여기서 수집된 정보는 미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되었으며 극동군사령부로 부터 9월 15일 인천 팔미도에 등대를 밝히고 성조기를 게양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9월 14일, 첩보대가 철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북한군 1개 대대가 기습해 왔다. 미군 첩보대는 영흥도를 탈출했고 한국 첩보대는 6명이 남아 영흥도 의용대원 30여 명이 적과 결전을 벌였고 일부인원은 탈출하고 일부인원은 전원 전사했다. 이들중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3등병조가 미군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 남해안 작전
(가) 남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
남해안에서는 8월 3일 진동, 통영, 삼천포의 봉쇄작전에 참가중인 JMS 307정, YMS 512정이 미 공군기의 오인 사격으로 경찰관 10명, 경찰관 가족 10면 사망 및 경찰 부상자가 20명이 되었다.
완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YMS 503정이 8월 13일 적병을 탑재한 대형범선을 격침시키고 다음날 YMS 514정은 대형 발동선을 함포사격으로 격침시켯다. 그리고 8월 15일 YMS 503정이 해남도 남단에서 군수품을 적재한 적 소형선박 15척을 전무 침몰시켰다. YMS 503정은 8월 20일과 21일에도 30톤 내지 100톤에 이르는 적 발동선 3척중 1척은 나포하고 1척은 격침시키고 1척은 파손 시킨다.
YMS 512정은 8월 25일 진도 동방에서 100톤급 발동선과 70톤급 선박을 격침하고 탑승한 적 병력을 전멸시켰다.
가장 큰 성과는YMS 514정이 고흥반도 남방 해상에서 3차에 걸쳐 3척의 선박을 격침시키고 8척을 파손하였다. 그 후 며칠 동안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8월 31일 PC 702함이 진도근해에서 대형 발동선 2척을 격침시키고 수척에 손상을 가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나) 진해 통제부방위대 작전
통제부 방위대는 김석범 대령의 지휘하에 선박 중대와 3개 대대로 편성하였으며 제1댇대 제1중대가 원문고개에 대한 해병대의 상륙작전에 참가하고 8월 27일에 중대장이하 30명이 리도에 상륙항여 적 1개 중대와 교전하여 적 전부를 섬멸 시키거나 패주시켰다
제3대대 예하 창원파견대는 창원 북면 구룡산 부근에 잠입한 적 편의대 4명을 사살하였고 창원 이남에는 침투한 적 게릴라를 제2대대가 소탕하였다.
3. 해병대 작전
가. 통영상륙작전
아군은 8월 중순까지 진동리로부터 낙동강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고 북한은 이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함을 알고 공격방향을 전환하여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는 고성 이남의 통영지역으로 남하하여, 8월 17일 01시에 야포 등 각종 중화기의 지원하에 350명이 통영에 침입하고 그 후속부대 300명도 도착하여 통영반도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8월 16일 새벽에 약 370명이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출하여 17시경 원문고개에 도착하여 100명의 아군 경찰과 해군파견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한산도로 철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 16일 17시에 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통영방면으로부터 거제도에 침입하는 적을 저지 섬멸하라는 명령이 김성은 해병 대령에게 하달 되었다.
그러나 이미 적이 650여 명이 통영에 들어온 상태로 김성은 대령은 통영에 상륙하여 원문고개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여 통용부근에 있는 모든 함정을 지휘하여 통영을 공격토록 승인되었다.
김성은 부대는 아군이 통영항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기만하여 포격을 실시하며 해병대 주력을 견내량 수로 입구로 이동시켜 야음을 이용하여 상륙을 완료 하였다.
북한군은 아군이 통영정면으로 상륙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야간에 매일봉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남망산 및 해안선으로 이동시켰다.
통영 탈환 명령은 8월 18일 05시에 하달 되었다. 1개 중대는 원문고개에 진지를 구축하고 고성에서 남하는 적과 통영에서 탈출하는 적을 섬멸하게 된다.
※ 통영 앞바다에 수장된 원혼들의 메아리
적이 뒤늦게 병력을 매일봉(망일봉?)으로 진출시키려 했으나 아군이 먼저 진출하여 적은 대대장까지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원문고개의 제2중대는 고성방면으로부터 남하하는 적과 교전하며 우군 비행기까지 참여하여 적을 강타하여 통영상륙작전과 원문고개 방어전에서 아군은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그리고 많은 포와 화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웠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47명이었다.
통영상륙작전은 미군이나 한국육군 등 아무데도 배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해군과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으로 수행한 상륙작전이었다.
나. 원문고개 방어전
※ 망일봉 / 원문고개에 죽은자는 어디로?
고성쪽에서 적의 포탄이 8월 19일 15시경부터 3시간동안 580여 발이 작렬하였다. 이에 공군과 해군에서 적의 포진지를 향해 불을 뿜어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포사격이 중단되면서 1,000명의 적 병력이 제2중대와 제7중대 진지 정면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몇번의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결국 해병대가 승리하게 된다.
적은 62명의 시체를 남기고 북쪽 죽림리 방향으로 후퇴하고 국군은 적 중대장과 병사 3명을 포로로 잡았다
※ 적군끼리 싸우는 수월리 전쟁터
통영을 탈환한 다음에 이 지역의 청년방위대원 33명이 참석하기를 자원해 참가하게 되는데 청방대는 8월 27일 원문고개 서북쪽 수월리 일대 봉화봉과 매봉산 주변의 적을 격멸하는데 참가하였다.
또한 8월 30일 적이 원문고개 해병대를 공격하려고 제석봉과 죽림리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미항기 6대가 대지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주었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통영 앞바다에 수장된 원혼들의 메아리
우린 통영지역 해병대 참전전우회 초청으로 통영을 찾았다. 국군의 최초 단독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전사를 통해 원문고개의 전투사실을 인지하고 통영에 도착해 해병 전우회 사무실을 찾았다.
멋진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총무분이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망일봉지역 뿐만 아니라 원문고개, 죽림리 제석봉,수월리 등을 다 찾아 다녔다.
점심시간대에 도착하여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우리를 보고 지역주민이 질문을 했다.
"바다에 죽은 사람도 찾는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해병 사무장이 말을 받았다.
"어떻게 이분들을 아시나요?"
"그럼요, TV에 나오는거 다 보았지요. 거 어디요 경북지방에서 많이 하고 저기 창녕에서도 발굴하던데요"
내가 나섰다.
"감사합니다. 우리들 활동을 지켜봐주셔서. 그런데 짊ㄴ하신 사항은 답벼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시 바다에 숨진 분들이 군인인지 아니면 민간인지 아시는지요?"
"아 군인만 발굴하는가요?"
"네, 저희는 군인이나 경찰, 학도병등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한 분을 찾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아저씨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군인이나 경찰이 총을 쏴서 죽은 사람은 발굴합니까?"
"그것은 진실과 화해위원회(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를 거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옆에 있던 다른 분이 받아서 이야기를 했다
"저 분이 아버지와 형님이 사실 전쟁통에 경찰과 군인에게 잡혀서 여기 통영 앞바다에서 죽었어요. 이유없이 잡아서 가더이 밧줄로 연처럼 엮어서 트럭에 실려 여기로 와서 군인이 올라가 군화발로 몇사람을 차서 밀어내면 나머지는 줄줄이 딸려서 바다물속으로 들어가면 그만인, 참 억울하게 죽은 분들이 이 지역에 수없이 많아요"
"참 죄송합니다. 우리도 조사하러 다니면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아마 그 당시에 무슨 보도연맹인지 부역자인지 그런 호칭이 붙어다녔던 것 같은데 우린 그런 것은 잘 모르고 일단 군인이 우선입니다."
해병 사무장이 나섰다.
"이 분들은 그게 아니니까 나중에 별도로 다시 알아 봅시다."
이 지역일대에서 조금만 뭐하면 잡아서 이곳 바다물 속에 밀어넣었다는 피눈물나는 이야기였다. 얼마가 죽었는지는 몰라도 족히 3~400은 된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북한군이 점령했을 때는 프락치들이 날뛰어 지역 유력인사와 군인 경찰 가족들, 그리고 잘산다고 하는 사람들을 잡아어 인민재판이라며 홀딱 벗겨놓고 매질을 하고 돌로쳐서 죽이더니 바로 공산군이 나가더니 군인과 경찰이 들어와 동ㅈ자를 색출한다며 다짜고짜 잡아다 묶어서 바다물 속으로 밀어넣어 버렸다는 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 망일봉 / 원문고개에 죽은자는 어디로?
※별로 전투흔적이 없다
전사책에는 적의 규모가 연대급이고 해병대도 대대병력 이상이 참여한 전투며 비록 아군은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많이 사살됐다. 그런데 망일봉이나 원문고개에 올라서니 개인호가 그리 많이 있지가 않았다.
망일봉 밑의 밭주인이 밭을 갈고 있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더니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고 하며 적군인지 지역 빨갱이인지 본인 밭에 죽은 자가 3~4명이었다고 한다. 지금 밭이 그당시 그대로라고 했다. 그러면서 죽어있던 위치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원문고개 밑에는 해병대 수훈탑과 기념관이 잘 만들어져 있다. 고개는 바로 찰량이 넘는 정상이고 평지와 같다. 산에는 변산에 있는 호랑가시나무가 식목되어 있는데 큰 나무가 별로 없어서 탐사에도 무리가 없었다.
"거기서 별로 전투가 없었어요. 적들이 저기 채석봉주변에 있었지 여긴 별로인데" 지나가는 어느 아저씨가 말을 던진다.
우린 죽림리와 용호리에 들어가 탐문을 해보았다. 지역주민 이야기는 공산군이 왔다가 바로 나갔는데 아주 어린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몇일 있는데 배가 고프다고 집에 들어와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밥을 주기도 했다한다.
우린 원문고개 일대와 채석봉 남쪽 하단부분을 바룰작전을 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다. 적군끼리 싸우는 수월리 전쟁터
전사에 수월리 봉화봉과 매봉산지역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국군이 승리를 거둔 곳이다. 원문고개 유해발굴을 현장 통제하면서 수월리, 오륜리를 드나들며 국군의 유해 혹은 북한군 유해의 흔적을 찾을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음성 동락리, 화령장 동관리, 안강 곤제봉(형제봉) 전투
도 그렇다, 죽은 자가 없다
통영지역 전사는 일방작으로 우리 해병대가 이긴 곳이다. 그런데 국군은 제외하더라도 북한군이 없다. 이런 곳은 충북 음성의 동락전투도 그렇다. 전사에는 북한군이 몇천명은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는데 실제는 별로 없다.
이런 원인을 찾으려 사실 나는 많은 노력을 해봤다. 화령장 동관리도 많이도 찾아가 봤다. 하지만 단 1구의 유해를 찾는데 그쳤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그렇다고 시신을 북으로 옮겨갔다는 증언도 별로 듣지 못했다. 지역에서 화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어디로 갔을까?
"북한군 여자들의 일사분란한 행동에 빠지다(문경 마성 성주봉 밑)"
죽은자를 옮기는 현장을 본 곳은 문경 마성면의 장효각이 있는 모곡리에서 할머니로부터 들은 것이 처음이다. 북한군 여군들이 부상병과 죽은자들을 차로 옮기는 것을 직접 본 새댁이었다. 시집을 와서 배가 불렀으니 누구한테 피해를 안당하고 피난도 못하고 집에서 살았다. 성주산으로부터 능곡산-하내리로 북한군이 해질무렵이면 이동을 개시하고 여군들은 차를 타고 나타나 부상병은 어깨동무를 해서 데려가고 죽은 사람은 들것으로 나르는데 남자들 저리가라였다고 한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
"지역 주민들이 부역으로 모두 땅을 파고 묻었다(동관리, 음성 동락전투)"
두 지역은 거의 한달이상 발굴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나는 충북지역 증평에서 동원사단 포병연대장을 하면서 이 지역들은 흔한 말로 심심하면 달려가 지역주민의 제보를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논바닥에 죽어있는 적군(동관리)
동관리지역은 갈령에서 내려서면 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인이 지역유지다. 올랫동안 살아온 집인데 자주 들려 정보를 얻고자 했다. 가장 유익한 정보는 청계사로 오르는 송내지역과 점촌 달래 지역에서 가장 많이 북한군이 이안천에서 씻고 휴식을 취하다 아군의 기습사격으로 죽어갔고 주로 논바닥에 널려 있던 것을 일부는 북한군이 수습해 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걸 수복후에 지역주민들이 경찰 통제로 주변에 묻는데 가장 많이 묻힌 곳이 바로 청계사에 오르는 삼거리지역 길과 이안천 사이에 묻히고 논과 논사이 골에 밀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강이 범람하여 씻겨 내려가고 길이 확장되어 가면서 유실되고 논은 경지정리하며 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묻혔는지는 모르지만 이해는 쉽지않았다. 대부분 북한군은 수습해 갔는지 아니면 세월 속에 다 자연으로 돌아갔는지 지금도 의문점은 남아있다. 산악전투는 그래도 개인호에 남아 있는데 왜 저지대 전투에서 그것도 주로 기습작전으로 대승을 거뒀다는 곳일수록 그런건지... .
☞저 길을 내면서 엄청 나왔다는데 그걸 추적해서 찾아요?(동락리)
이곳은 '50. 7월 5일부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를 괴멸시켜 전장병 1계급 특진이 주어진 춘천에 이어 두번째로 국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다. 도한 이곳은 제1사단이 치른 무극리전투도 인근에 있다.
[오웅진 신부의 조언]
나는 이곳에서 포병연대장을 하며 생극-무극-감우재-음성, 생극-신니-음성, 충주에 이르는 접근로별 주요고지는 다 올라가 탐사를 해봤다. 그러다 어느날 오웅진 신부님을 만나 뵙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있음이 행복하다는 것을 배웠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행복이다"라는 글귀가 새긴 도자기도 받았다.
하지만 신부님이 나를 보자고 하신 것은 전사자 문제였다.
"저 지금 길을 만들고 있는데 거기 몇 백명이 묻혀있다는데 국군이다 적군이다를 떠나서 다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 잘 발굴하여 처리해 주면 좋겠습니다."
생극에서 신니를 거쳐 충주에 이르는 3번도로와 평택-충주간 고속도로가 신니 북쪽으로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다. 하지만 전사에 그렇게 큰 대승을 거둔 곳인데 이곳 용산리부터 용원리, 모남리 , 감우재 어디고 죽은 자의 흔적이 별로였다. 나는 감우재 재 남서쪽 동음리와 용산리 등에서 겨우 2구의 유해를 찾았는데 진작 신부님이 말한 곳은 식별이 불가했다. 도로가 개설 도는 확장되면서 모두 유실되고 만 것인데 무려 몇 백명의 시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을까!
공사를 담당한 건설업자를 만나고 당시의 포크레인 기사등을 만났지만 모른다는 일관된 답변만 들었다.
☞곤제봉에 전사한 국군은 어디에?(사실 다부동도 328고지 보다는 369고지일대에 더 전투흔적이 많았다)
곤제봉은 제17연대 등이 무려 15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벌인 곳이다. 곤제봉과 무릉산 등 이곳일대에서 '00년부터 70여구를 발굴했지만 가장 전투가 치열했다는 곤제봉은 유해 찾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북쪽에 있는 188고지나 마미산에서 30여구를 발굴했다. 도대체 그 당시에 수습을 잘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전투지역이 비록 인접이지만 전사기록에 차이가 있는 건지 의문을 갖게 한다.
지역주민의 일부가 말하길 문등병환자분들의 출입이 많았고 군과 경찰이 지역주민을 통제하여 일정한 장소에 거둬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그럼 당시에 자가봉송으로 유가족 품에 안긴 유해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전사자 유해의 진실?
모든 기록중에 일치되는 부분이 없는 것이 전사자 및 실종자 숫자다. 물론 전쟁 당시에 제대로 기록이 남아 있을리 없고 '51년 2월의 횡성지구에서의 대 참변이나 그해 5월의 현리지역에서의 대 참변을 당했던 우리 군대이기에 그 정황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99년부터 이 숫자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그 진실을 파헤치려 했지만 결국 이 순간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군이 보유한 병적기록과 전사망 기록인데 이마저도 제대로 관리나 보관 또는 기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믿을 수 있는 기록이나 숫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 당시에는 각 사단 별로 징집병을 받아들이거나 지역에서 강제 징용하여 군번을 부여하고 전쟁터에 보내졌기 때문에 그 것이 수작업으로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기까지는 불특성 전선상황에서 어려웠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참전자는 4개의 군번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제17연대에서 다시 수도사단, 다시 제3사단 등으로 옮기다보니 그렇고 일부는 전장을 벗어나 있다 당시 입대 또는 징집되는 경우가 많았음) 전역할 때가 되어서야 군번을 부여받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러면 월급등 보급품들은 어떻게 받았느냐의 질문에 월급이 나오는 것조차 모른다고 하시는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많았다.) 현역에서 학도병으로 다시 8240부대원으로 신분을 바꿔가며 전투에 참여한 분들도 있다.
1996년도에 발행한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전쟁피해통계집에 의하면 국군은 전.사망이 137,899명, 실종이 19,392명이고 경찰은 전.사망이 3,131명, 실종이 7,084명이다. 청년단은 전.사망이 628명, 실종이 222명으로 되어있다.
전쟁 당시에 그나마 유해로 남아서 보관중이던 유해는 부산 금정사와 범어사에 안치중인 31,057위였다. 이 유해들은 정부가 새로운 중앙봉안소를 대구 달성공원에 있던 시립박물관을 개조해 휴전이후에 이곳으로 옮기고 '53.10. 16일에 육.해.공군 합동 위령제가 봉행 되었다. 정부차원의 위령제는'52. 4. 6일 범어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봉행 되었다.
'54. 3. 1일부터 지금의 현충원이 당시는 국군묘지로 공사를 개시해 '57년도에 완성되는데 유해는 '56. 4. 13일부터 대통령령으로 군인 및 군무원의 영현을 안장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6.25전쟁 당시 전사한 인원은 모두 160,000명에 이르고 현재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29,325위다. 그러면 대략 130,000여 위가 위패로 모셔져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범어사와 금정사에 안치중이던 31,057 위는 무슨 말이며, 더욱이 국군묘지를 완성하고선 각 지역에 병사구사령부(지금의 병무청 역활)에 보관중이던 14,992구의 영현이 봉송되어 온다. 그런데 그 유해중에 37%인 5,614구의 유해가 반한처리되었다. 이유는 국군묘지에 안장할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육군 병참사 1집 238페이지)
이런 셈법에 의해서 현충원에 안장되어야할 유해는 대략 3,1057에 각 지역에서 올라온 14,992위 이중 5614위를 뺀 9,278위를 합하면 40,335위다. 여기에 실제 자가봉송된 유해중 유가족의 요청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를 고려한다면 훨씬 많아져야 하는데 지금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29,000위가 안장되어 있으니 나머지 분들은 모두 화장하여 무명용사로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차후에 자가봉송된 유해를 고려해야 하는데 사실 이분야는 어떻게 보면 전무다. 이유는 국군묘지가 완성되고 나서 자가봉송된 유해도 받아들였는데 제대로 홍보가 될 수 없는 그 당시 상황이었기에 현황집게는 불가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 탐문하면서 자가봉송되어 지역에 묻혀있는 사례를 종종 보았고 유가족의 요청으로 발굴하여 현충원으로 이장하는 것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결국은 찾지못한 유해의 숫자는 육군본부 부관감실에 보관중인 전사자 명부 또는 매화장 보고서에 표기된 것을 확인해야 자가봉송 여부를 알 수 있는 실정이다. 현재 미수집된 매화장 명부는 사실 90,00여명 것이 있으나 실제 확인 가능한 것은 6,057명 것 밖에는 안된다. 결국 전사망카드를 상세히 분석해 보아야 하는데 이걸 전산작업하면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였으나 한문에 대한 잘못된 읽기와 표기로 엄청난 오류가 발생되어 있다. 그래도 이렇게 작업하여 만들어낸 위패카드가 바로 134,000여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현재까지는 찾지 못한 유해의 공식적인 기록에 입각한 자료이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으로 실제 전사자 인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그 기록의 보고인 전사자 명부가 오류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정리하면 많은 유해가 사실 신원확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가운데 이미 안치되어 왔고 그 중에 8400여위는 결국 화장처리 되어 통합하여 대형 항아리에 합동으로 모셔져서 현충원 중앙탑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지역 병사구사령부로 반환된 유해의 처리결과는 확인이 제한된다.
※ 더 늦기전에 자가봉송된 유해를 파악하여 현충원으로 모셔야 한다.
전사자에 관련된 여러가지 증빙자료를 분석하여 본 결과 자가봉송은 대력 24,000위가 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중에 몇분이 다시 현충원으로 안장되었는지는 확인을 못해봤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모형제가 다 운명하고 사촌이상으로 촌수가 벌어지는 가운데 누가 제대로 관리를 안해(안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못한다는 표현이 맞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걸 알고 있는 뜻있는 지역 분들이 실태를 제보하여 우리가 발굴하여 (양평 조양리 1구 : 그 동생 분이 아주 못살아, 파주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왜 손대느냐고 하더니 현충원 납골당에 왓서 얼마나 오열하고... .) 모신 적도 있다.
※ " 너 죽을래 아니면 잘 모실래~!"
현재 사천 비행장 부근 사천역 뒤에 가면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도 50여 위의 유명 용사님이 모셔져 있다. 자가봉송 되어 온 것을 지역에서 일정장소를 택하여 모셔놓은 현충시설이다.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자가봉송된 유해를 동네에서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원인은 엉터리로 화장해서 해당 전사자가 아닌데도 그저 검게 변한 잿가루만 담아서 가져온다는 류머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는 받을 유가족이 없다거나 일부는 잘못 들고온 경우가 있다보니 동네에서 받질않고 몽둥이로 가져온 봉송병들을 내쫒았다. 이러면 그 봉송병들은 동네 입구 야산에 놓고 가버리게 되면서 그 숫자가 많아지게 되었단다.
그런데 휴전이 되면서 한 참전용사가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동구밖에 그런 것이 보여 화가 치밀었다.
"아니 이00들이 누구 덕에 먹고 살고 감투쓰고 있는데 용사님을 요따위로 대저반단 말야?"
바로 군청에 쫒아가서 군수의 책상을 군화발로 차서 무셔버리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만 해도 대검차고 심지어는 수류탄까지 가슴에 매달고 다니는 군인들이 꽤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상이군인들은 죽기살기로 지역사회에 반항아적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묘지를 쓸 수 있도록 군유지를 내놓으면 조용히 물러가겠소"
이렇게 해서 사천역 바로 뒤에 접근성이 양호한 곳을 임시묘지로 정하여 주변에 있던 유해를 모두 한곳에 안장하게 된 것이 오늘날 사천시 현충시설이 된 것이다. 전국에 이렇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상당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 수월리도 위의 의문점과 비슷한 곳이다.
"현역이 아닌 지역에서 강제 동원한 의용군들이 아닐지... ."
수월리와 오륜리 사이에 매봉산(309m), 봉화산(326m)이 횡으로 펼쳐진다. 수월리포구 밑에는 필도와 이끼섬이 있다. 이곳에서 왜 북한군이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시간을 소비했는지 사실 의아한 판단이 든다. 북한군은 국군과 융엔군의 해상권 장악에 무척이나 조바심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응에 고심한 것 같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원문고대와 제석봉에서 물러난 북한군은 바로 진주방향으로 물러나지않고 수월리에 들어가 산으로 올랐을까. 정규군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했을 것이다. 수월리는 더이상 바다가 아니면 탈출할 방법이 없다. 아마 고성방향에 미군이 진주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 상황이 전달되어 취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는 있다.
어쨌든 적은 산으로 올랐고 국군 해군과 해병은 몰아 붙여 소탕작전에 나가고 적은 괴멸이 된다. 그런데 동네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밤내 전투를 하는데 양 고지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사실 그때는 국군은 없었다. 그렇다면 적군끼리 총싸움을 한 것이다. 이 내용은 전사책에도 나와 있다.
"여기에도 적군도 없고 아군도 없었다"
그런데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 가보니 시신에 관련된 제보가 없다. 여기서는 북한군도 시신을 북으로 옮기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진데 어디에 있을까. 산은 많은 폭격으로 자연림은 없고 거의 잡목으로 채워져 있다. 불타버린 산, 그렇다면 시신도 모두 불에 타버리고 흔적조차 사라진 것일까. 정말 전투가 있었는지 아니면 공비토벌 작전이 소소하게 벌어졌는데 이게 전사에 크게 전공으로 올라섰는지 약간은 의아한 판단을 가지고 산양으로 갔다
라. 통영 봉평동의 11인 참전용사 묘지
산양을 가기위해 다시 통영으로 들러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올라본다. 통영항에 준비된 배다. 이곳에서 충무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해저터널로 갔다. 그런데 터널 입구에 나이드신 분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넙죽 절하고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의외의 제보를 받았다. 봉평동에 전사자 묘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봉평동 동하무소에 가서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동사무소 직원을 대동하고 현장으로 갔다. 동사무소에서 걸어서 바로였다. 가서보니 야산 밑에 연립주택이 있고 가정집들이 있는데 바로 산언저리에 조그맣게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언제 조성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고 듣기로는 원래 3분인가 있었는데 어느날 이렇게 11분이 되어 지역 참전전우회에서 관리를 해 왔습닏."
"여기 모두 주소와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유가족이 있습니까?"
"그렇게 봐야 하는데 근래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오시분 분이 처음에는 일곱가족이 참여하더니 올해는 4가족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럼 주소는 다 있습니까?"
"있긴 다 있는데 연락이 되는 집은 5~7가족이고 나머지 분들은 연락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후에 나는 팀원인 해병대 조성우원사(전역)와 7분의 가족으로부터 현충원에 이장하는 동의서를 받았는데 나머지 집안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기다리기로 하고 이장업무를 일시 중단했다. 지금은 어이 되었는지... ."
마. 미수동 4인의 유해는 누가 현충원에 옮길 것인가?
봉평동에 조사를 하는 동안에 지역주민 한분이 오셔셔 이 광경을 지켜보더니 미수동 미수아파트 뒤에도 4며의 무덤이 있다고 제보를 했다. 그래서 다시 그곳에 올랐다.
"현충원 묘비보다 잘 단장된 용사님의 묘지"
미수동사무소 바로 옆에 아파트가 있고 그 옆의 고추밭을 경계로 올라서면 야산 중턱에 묘지가 있다. 봉분을 크게 만들고 묘비도 아주 크게 세워서 장군묘역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이름도 있고 계급도 있는데 여기에 묘지가 조성되고 관리되는지 주변에 알아보았다. 관리인은 최초부터 한사람이 주도해서 해 오고 있고 어쩌다 유족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묘지 괸리인을 아파트에서 찾아 뵙고 사연을 들었더니 그분도 잘은 모르고 본인이 군대갔다 오니 이곳에 조그맣게 되어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 중에 뜻이 맞는 사람 몇이서 부담하여 이렇게 조송하였고 유족은 4위중 다는 모르고 3명은 1년에 한번은 만나는데 근래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전형적인 자가 봉송 유해다"
봉평동도 그렇고 여기도 전형적인 자가봉송 유해다. 일부는 유가족이 직접 확인하여 받아서 일정한 곳에 매장하는 경우도 있고 일부는 수령인이 불특정하여 마을 입구 어느 야산에 놓고 가버린 것을 뜻있는 분들이 수습하여 일정한 곳에 매장한 경우가 많았다. 김해 공원묘지의 71인의 무명용사 묘지도 그런 것이다.
나는어르신께 감사를 드리고 명함을 드렸다. 임의로 개장을 할 수 없기에 유족이 혹시 오시면 연락이 되게 해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하지만 아직 연락은 없다('18)
바. 산양 연화리의 찬바람(자가봉송 유해를 관리하지 않는 저능인 장애자 동생)
이곳 통영의 산양읍 지역은 동쪽보다 서쪽이 도로망이 좋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전쟁당시에 지역 프락치가 자생하였던 곳이란다. 사람이 많으니 자연스레 전쟁통에 군에 간 사람도 많고 혹은 여타의 방법으로 가지않은 사람도 많았다 한다.
산양읍에서 연하리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윗마을 쯤에 갔을 때에 개인택시 운전사가 우릴 보자고 한다. 점심 시간이 막 지나는 싯점인데 손짓으로 불러서 가보았더니 기막힌 이야기를 하신다.
"저기 앞에 집이 참전용사 집인데 동생 놈이 묘를 관리하지 않아 없어질 지경이요"
"묘지가 이곳에 있습니까?"
"우리 밭이 저긴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전쟁 때에 나무상자에 넣어서 보내온 것을 묻은 묘지가 있었요."
"그러니까 자가봉송된 유해를 이곳에 묻었는데 동생분이 전혀 손을 안대고 있으니 우리보고 현충원으로 옮겨달라는거지요?"
"그렇습니다. 저 동생이라는 놈이 성질이 고약해요. 저 부모님들도 화병으로 다 죽었어요"
부모님도 다 죽고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데 형이 전쟁나가 죽어서 그 보상금으로 먹고 사는데 자기형 무덤을 방치해서 곧 없어질 상태라는 것이다. 우린 운전사분의 안내로 현장에 가보았다. 정말 흔적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얼른 봐서는 아무것도 안보이는 곳인데 여기에 전사자 화장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초라한 정도가 아닐라 이건 그저 맨땅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우린 동생분을 만나 보기로 하고 집에 찾아갔다.
"혹시 관리하기가 어려우시면 저희들이 현충원에 안장해 드릴까요?"
"당신들이 뭔데 남의 집 사정에 달려들어. 열받으니까 빨리 꺼져!"
이미 우리는 운전사분으로부터 이분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기에 더이상 말하지않았다. 괜히 칼부림이라도 한다면 좋은 일 한다고 하다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알겠다고 인사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추운 겨울날, 분명 그 용사님은 벌거벗은 산길에 홀로 남겨지고 산새도 울지않을 것이다. 형님의 전사자 지원금으로 살고 있는 동생분의 쾌유를 빌 뿐이다. 그래야 정신이 정상이 되면 아마도 옮겨달라 청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 풍화리의 찬이슬(지역주민 간단회. '12)
이곳은 해저터널 입구에서 만난 어르신중에 한분이 필도와 이끼섬(태도)에 전쟁통에 죽은자가 많다는 제보에 따라 지역주민 간단회를 하러 찾아갔다.
중부 마을회관에 1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미 우리는 해경과 협조하여 섬을 탐사할 배도 마련되었다.
김관익(76) : 산양읍 터미널 앞 창고에서 보도연맹이 학살되었다.
필도에서는 어디에서 실고 오는지는 모르지만 바지선에 사람을 밧줄로 묶어서 이곳에 와서는 총으로 배언저리에 있는 사람을 쏴서 바다로 떨어지게 하면 나머지 인원들은 쪼로니 딸려서 바다속으로 들어가 죽어버렸다.
이들 중에 한두명이 동네 앞 바닷가에 떠내려와 건져서 묻어주었는데 그걸 발굴하여 그 유족을 찾아주면 좋겠다.
최현옥(67) : 태도는 우리 해란마을에서 관리하는데 전쟁 후에 땔감이 없어 태도에 배타고 들어가 나무를 해왔는데 유해를 목격하지 못했다. 한동안 벌거숭이 산이엇는데 원한다면 내가 안내해 주겠다.
서한포(77) : 태도에서 군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군청뒤에 산에서는 죽었다고 알고 있다.
최복근(77) : 태도에 군인들이 죽어서 매장되어 있다고 어른들께 들었다. 지형이 변함이 없어 있다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도근처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린 행양경찰의 순시선을 타고 이끼섬에 올랐다. 최현옥씨가 앞장서서 여기저기를 안내했다. 우린 약 2시간의 탐사를 진행했는데 특별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몇군데 특이하다 싶어서 탐지기를 가동해보았으나 비닐이 묻혀 있었다.
필도에도 가보았다. 이곳은 다 무인도다. 함께하고 있는 최현옥님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때는 누가 누구를 밀고하고 하룻밤 사이에 몇명이 빨갱이한테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턴가 아니면 낮에 들어오는 군경에게 붙들려 가서 병신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당시는 오히려 군에 가는 것이 목숨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 한다. 하지만 본인은 나이가 어려 남아 있었고 동네 형들이 대부분 군에 갔다고 한다.
자. 마도섬의 비밀
마도섬은 삼천포항 동쪽에 있는 섬이다. 우리는 통영지역 탐사 및 탐문을 하면서 이곳에 대한 것도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이유는 유해를 찾지 못한 숫자가 98위다. 위패카드에 명시된 지명의 숫자다.
해경과 협조하여 삼천포항에서 순시선을 타고 마도로 향했다. 바다물결을 가르는 쾌속정의 짜릿한 승선감을 느끼며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있다. 이유는 이 조그만 섬에 어떻게 98위나 되는 유해가 있다니 기대가 많았다. 섬지역에 이렇게 많은 숫자는 대단한 것이다. 더욱이 바다에 대한 재해권을 우리가 장악했는데 어떻게 이런 전투가 있을 수 있을까... .
바다를 가르는 도중에 처음으로 죽방모습도 보았다. 그많은 갈매기들이 둘러앉아 먹이를 쫒는 모습이 안쓰럽다. 드디어 마도에 도착하여 이장을 찾았다. 사전 연락이 되어 있어 마을 회관('12. 12.11)으로 가니 무려 18명의 마을분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사뭇 긴장된 모습으로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리고 제보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박용준(81) : 마도에는 군인들이 들어오지 안했다. 마을의 치안대끼리 다툼이 있었으나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잉라 죽이는 일은 없었다. 섬 남쪽에서 문어잡이를 하던 민간인 1명이 비행기 기총사격으로 죽었을 뿐이다.
이학진(72) : 마을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곤양 중항리 질매섬(일명 장도라 부른다고 함)에 보도연맹이 엄청 죽었다는 풍문은 들었음
이우섭(65) : 마도에 전사자가 있었다면 아마 삼천포에서 마도로 오는 도중에 늑도나 신도, 두옹도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성성만(75) : 나는 통영이 고향이라 해병대 원문고개 전투는 직접 목격했다. 당시에 체격이 커서 13살인가 하는데 해병대 아저씨들을 따라 다녔고 해병대 진지에서 기관총도 소았다. 탄피 모르고 밥을 날라 주었는데 전투는 지금 전적비 위쪽(재방산)에서 주로 했다. 해병대 중위가 전사했는데 바로 유해는 군인들이 운구해 갔다.
많은 동네분들이 이곳에는 전투도 없었고 죽은 사람은 기총소사에 문어잡다 1명만 죽었다는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고 나는 탐사에 나섰다. 마무리 위패카드가 오기가 많더라도 거짓은 아니고 뭔가 분명 있을거란 판단에서다. 바로 마을은 낮은 야산을 두고 남서로 동서로 갈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여기 빨갱이 놈이 있었고 경찰도 한동안 못왔어요."
야산에 올라가 보니 군데군데 파인 흔적이 분명 포탄이 떨어진 모양이다. 통상 이런 섬마을엔 팽나무나 마을에 큰나무가 있는 법인데 큰나무도 없다. 모두 폭격으로 불에 타버린 것이다. 야산을 넘어 남서쪽으로 낼려서니 바닷가에 자연산 굴을 따고 있다. 할머니 두분과 아주머니 몇분이다. 다가서서 인사를 하고 몇 개를 얻어 먹어봤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더니 멸치를 잡아서 건조시키는 집이 나타났다. 마침 아저씨가 있어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동네에 실제 토백이는 본인이며 얼마전 돌아가신 본인 아버지가 6.25 당시에 직접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네, 군인이 많이 죽었습니까?"
"저놈들이 배에다 실고 들어와 저기 박도에 끌고 내려 산 꼭대기에서 미리 땅을 파놓고 밀어넣은 다음 총을 쏴 수십명이 죽었다고 아버지께서 말했어요"
"혹시 군인이나 경찰이 확실합니가?"
"그건 내가 지겁 목격을 한 것은 아니니 뭐라 확답은 못하는데 분명한 것은 지역 프락치들이 끌고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혹시 올라가 보신적은 없습니까?"
"언젠가 궁금해서 올라갔는데 호구덩이를 크게 판 흔적이 그대로 있는데 사람뼈는 보지못했어요. 묻혀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에 본인은 장남이라 할아버지가 배에 태워 바로 맞은편 각산산성으로 숨겨놓고 가끔 밥을 일정한 장소에 갖다놓으면 내려와 들고 가서 토굴같은 곳에 기거하며 살았단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순시선이 임무가 있기에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한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때는 함께 동행을 약속받고 떠나왔는데 결국은 내가 약속을 못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