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39-46 성화와 승리의 삶은 고독한 전쟁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 기도 전쟁에서 승리해야 삶에서도 승리한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할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는 응답을 받으셨다.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로부터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물론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마 16:21, 17:23, 20:19, 눅 9:22). 그렇다면 십자가를 질 시간이 오면 덤덤하거나 오히려 담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으로 계신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셨다. 아무리 운동선수가 열심히 운동을 해도 본 게임 직전에 극도로 긴장하듯이 예수님도 번민하고 고민하고 슬퍼하여 몇몇 제자들에게 속마음을 비치면서 기도 부탁까지 하셨다. 예수님은 왜 번민하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을까?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 내용을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첫 기도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42)였다. “주세요” 기도다. 그만큼 예수님도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예수님의 솔직한 심정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저주와 진노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고, 외로운 그 십자가를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이 지면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괴로우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욕구였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십자가 지지 않게 해 주세요.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욕구 충족 기도이다. 주세요기도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하나님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구 기도로 끝내지 않고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과 욕구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곧바로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로 결론이 났는가? 아니다, 예수님의 욕구와 아버지의 소원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영혼은 전쟁터가 되었다. 번민, 고민, 슬픔이 소용돌이쳤다. 지기 싫으면 포기하면 된다. 그러나 포기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비굴해진다. 불편한 마음을 없애고자 십자가를 지려 하면 번민과 슬픔이 일어난다. 미칠 노릇이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한계 앞에서 온갖 불평과 분노를 쏟아내면서 포기와 도망을 선택할 때가 많다. 제 십자가를 졌을 때 생기는 욕구 파괴와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서.
예수님은 잔을 옮겨 달라고 욕구를 표출할 때도 무작정 욕구만 표출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란 단서를 붙였고, 생각[욕구]을 바꿀 때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지기 싫은 욕구보다 하나님의 뜻에 무게 중심[순종에 방점]을 둔 것이다. 주 기도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와 일치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기 싫은 욕구를 꺾어야 하니 고통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할 정도였고(43),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은 욕구를 꺾기 위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했고(44),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땀을 흘리면서 기도해야 했다(44). 다른 복음서엔 이런 기도를 무려 3번이나 반복하셨다(마 26:39-44). 예수님의 기도는 욕구가 죽어야 끝나는 전쟁 기도였다. 예수님은 마시기 싫은 욕구를 드디어 기도 중에 죽였다. 욕구와의 전쟁을 기도 중에 승리로 끝냈다. 그러자 흔들리고 어두웠던 마음[번민/고민/슬픔]이 싹 사라졌고, 반석같이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욕구가 삶으로 연장되지 않았다.
현재 여러분이 처한 상황을 여러분의 욕구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 여러분의 욕구와 하나님의 말씀이 대치된다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바꾸려는 전쟁 기도를 하자. 내 욕구가 완전히 죽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자. 고전 9:25,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성화와 승리의 삶은 고독한 전쟁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도로 내 욕구와 전쟁하여 승리할 때, 삶의 현장에서 승리가 보장된다. 쉬고 싶고 대중하고 싶은 욕구를 꺾어가며 훈련한 선수에게 메달이 따른다. 대항, 거절, 복수, 미움, 우울, 비방과 같은 악들과 상대하여 기도로 싸워 이길 때, 실제적 삶에서 사랑이 가능하다. 기도 중에 욕구와의 전쟁에서 실패하면 삶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내 욕구와 악감정으로 산다.
고후 7:8-11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내 욕구와 소원대로 이루어달라고 힘쓰는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반대다.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기도했는데 그 요구대로 결과가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와 좌절에 빠지게 된다. 교회를 다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기도다. 회개하자.
예수님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만 전쟁 기도를 한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는 동안 감람산 기도와 같이 간절하고 애절한 눈물의 전쟁 기도를 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육체에 계실 때에는 육체로 사는 날 동안이라는 뜻이다. 감람산 기도는 그중 하나다. 여기서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사역 전반에 걸쳐 3년 동안 유대 종교 지도자로부터 받은 위협을 말한다(마 12:14,15, 눅 13:31, 요 5:18, 7:19, 8:40, 12:10). 예수님은 기도 때마다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찐”이었고, 전쟁이었다.
기도를 통해 욕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었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51).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을 보고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셨다. 어둠의 때임을 인정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셨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52,53) 충분한 힘이 있었지만 뒤집으려고 하지 않으셨다(마 26:53,54). 지기 싫은 욕구와 전쟁하여 이긴 결과이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조금도 요동함 없이 당당하셨다. 욕구를 죽이는 전쟁 기도에 승리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달리 예수님을 잡으려 온 자들에게 강력한 경계심으로 흥분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49) 질문과 동시에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다. 폭력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스승이 잡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았을 때, 제자들의 거친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상황이 되면 누구나 제자들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행동은 제자가 벤 귀를 치료해 주시면서 덤덤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예수님과 너무 대조된다. 왜 이들은 예수님과 결을 같이할 수 없었을까? 예수님이 잡히실 때 발생할 폭력과 격한 분노와 기도로 싸워야 할 시간에 잤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이 잡혀갈 때 폭력이 통하지 않자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마 26:56, 막 14:50). 그나마 한 제자는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하지만 잡히자마자 그 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다(막 14:51,52). 베드로도 양심이 있어 멀찍이 따라가 제사장의 집 뜰 가운데 피워놓은 불까지 가서 앉을 수 있었다(54,55). 그러나 그의 정체가 드러나자마자 자기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예수님을 전면으로 부인했다. 그것도 3번씩이나(56-60). 그 순간 닭이 울었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안쓰럽게 보셨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61)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함으로써 예수님과 이별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처럼 자기들을 죽일까 봐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요 20:19). 분노, 흥분, 폭력, 도망, 예수님 부인, 두려움은 기도하지 않고 잔 자들의 결말이다. 기도했어도 기도 중에 욕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이다.